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23:53:01

상구대전

상구 대전
商丘大戰
Great War of Shangqiu
시기 기원전 292년
장소 제나라 상구(오늘날의 허난성, 상추시 인근)
원인 합횡측에서 연종의 붕괴를 목적으로 조선군 타격을 위하여 유인공작을 펼침,
조선측에서 위제화친을 결렬시키고 합횡 진영으로부터 위의 안전을 보장을 위해 제나라령 상구 침공
교전국 조선朝鮮
위魏
초楚
제齊
송宋
지휘관 조선 위장군 가현
조선 좌장군 조사

위 장군 몽오
초 무안군 경취
제 신양군 전교사
송 대부 당앙†
병력 조선군 8만7천
위군 4천

총합 9만1천
초군 4만4천
제군 2만3천
송군 2만4천

총합 9만 1천
피해[1] 조선군 약 1만8천[2] 초군 약 1만5천
제군 약 8천
송군 약 8천4백

총합 약 3만 2천
결과 합횡군 패배, 조선군 상구점령
영향 조선의 위신 상승 및 합횡 가맹국(송,제)의 이반조짐
1. 개요2. 배경
2.1. 합횡의 사정2.2. 조선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합횡의 대응과 상구수비군의 청야전술3.2. 상구전투
4. 영향
4.1. 조선 승전과 연종의 이후를 생각하다4.2. 위나라 친조파의 성장과 명장(?) 몽오4.3. 초나라 대연종전략 수립4.4.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4.5. 흔들리는 송4.6. 편을 확고히 정한 진, 그리고 소요

[clearfix]

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292년 조선이 위와 더불어 제나라령 상구에서 합횡군과 맞붙은 전쟁이다. 2차 중원대전으로 명실상부한 중원제일국된 조선과 그 조선을 수장으로 하는 연종체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합횡측은 외교적으로 연종가맹국들 사이를 흔들어보지만, 조선의 대응과 초와 제의 전략충돌로 인하여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초나라에서는 하남대전때와 같이 조선군을 자신들이 유리한지역으로 유인하여 요격할 계획을 세우게된다. 조선 역시 합횡의 외교적 공세를 차단하기 위하여 우선 위나라의 안전을 명분으로 제나라령 상구를 공격하기로 결의한다.

2. 배경

2.1. 합횡의 사정

2차 중원대전 이후 제나라는 경취의 조언대로 조선의 동진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군이 점령중인 태산을 탈환하기 위해 신양군 전교사에게 9천의 정예병력을 맡겨 보냈으나 태산에 주둔중이었던 진개의 진남군에게 가로막혀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초는 배신자 한나라를 응징한다는 명분아래 경취에게 3만7천의 군사를 주어 한나라의 거양과 상채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에 조선은 2차 중원대전의 여파로 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군사적 보복대신 법가의 수장 올가를 사신으로 보내어 초와 협상에 들어갔다.[3] 이 협상에서 초는 상채의 반환 대가로 한나라의 사죄와 제나라의 태산 공방전을 우발적 충돌로 취급할것을 요구하였고 조선측이 이를 받아들여 협상은 타결되었다.

문제는 이협상으로 인하여 초가 제나라에 제안하였던 태산점령을 통한 조선의 견제 전략 역시 막혔다는 점이다.[4] 이에 제나라는 군사적인 공세 대신 연종 가맹국들과의 화친을 통하여 내부분란을 조장하여 조선의 시선을 동쪽에서 거두고자 하였다.[5][6] 그러나 이런 제의 전략에 의해서 반대로 초가 당황하였는데 초의 전략은 조선의 시선을 하남과 제에 묶어두는 사이 진나라를 연종에서 탈퇴 또는 경략하여 조선과 자웅을 겨루는것이었다.
결국 그리던 전략이 어그러지게 되자 초왕 웅횡은 다시금 조선의 시선을 제로 돌리기 위하여 유세객을 동원하여 조선 조정에 제의 위험성을 설파하여 조선이 제나라에 군사적 보복을 가하도록 유도하고[7], 이를 합횡군이 요격하여 다시금 정세의 주도권을 거머쥘 책략을 꾸미게된다.

2.2. 조선의 사정

초나라와의 협상 성공 이후 조선조정은 내부정리 이후의 전략을 논하게 되었다. 이자리에서 천관아경 가현은 초나라 견제를, 승상 옥로는 제나라 견제, 어사대부 조하는 연종 구성국의 위무를 각기 주장하였다. 기설은 당장 조선의 재정상황이 넉넉치 않으니 무리한 지출을 지양해야한다 여기어 연종위무를 택하고, 우선적으로 위의 안정화를 위하여 법가와 묵가의 인재를 파견하였다. 또 위왕 위래의 아들 위포와 자신의 7촌 조카의 정략결혼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제나라의 연종분열책의 일환인 위제화친과 진제화친, 거기에 진나라가 외교적으로 조선과 초 사이를 두고 줄타기를 한 행동으로 조선왕 기설은 이를 그냥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여겼다.
마침 초나라가 보낸 유세객들의 제나라 위험성 설파로 기설은 힘으로 난국을 타개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위제화친을 철거시킬 목적으로 화친 철회시 위나라에게 위협적인 제나라령 상구를 점령[8][9]하기 위하여, 천관아경 가현과 한단군수 조사를 각기 위장군과 좌장군에 임명하여 8만7천의 대군을 일으켰다.[10]

3. 전투의 전개

3.1. 합횡의 대응과 상구수비군의 청야전술

조선군 8만7천이 움직이자 상구측은 이 군사이동을 감지하고 즉시, 본국을 포함한 합횡 3국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조선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준비하고있던 3국은 각각 초나라 4만4천, 송나라 2만4천, 제나라 2만3천 총합 9만1천의 군사를 일으켜 상구로 향하였다. 또한 상구 수비군은 인근주변 마을주민들을 소개하고 조선군의 물자로 사용될만한 모든것을 파괴시키는 청야전술을 이행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위나라 하남의 피폐로 인한 보급문제를 염려하여 모든 물자를 조선 본국에서 가져오도록 계획하였고, 본래 문관인 가현이 수송작전을 지휘하여 어마어마한량의 보급물자를[11] 보내니 조사는 아무런 문제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3.2. 상구전투

상구에 도착한 조선군을 맞이한것은 대부 당앙이 지휘하는 2만4천의 송나라 군이었다. 아직 초와 제의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은것을 확인한 조사는 각개격파를 노리고 송나라군에게 맹공을 가하였다. 이런 조선군의 맹공에 송군은 지리멸렬하였고, 초군과 제군이 상구에 도착하였을때, 송나라군은 전멸하여 흩어지고 지휘관 당앙은 조사에게 목이 달아났다.[12]

초나라 지휘관 경취는 자신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송나라군이 괴멸했다는 소식에 '후생(後生)은 가외(可畏)'라 중얼거리며 조사의 실력에 감탄하면서, 즉시 진형을 갖추고 전투에 들어갔다. 양군의 기세는 팽팽했으며, 누가 이기고 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전장에 무승부란 없으니 최후까지 서있는 측은 조선군이었다. 서전에서 송나라를 괴멸시켜 기세가 올라있었고, 숫적으로도 유리했으며[13], 장기전에 대비한 보급작전[14]이 이 싸움의 승패를 갈랐다.

전투에서 합횡군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경취는 크게 웃으면서 승자인 조사에게 '이 경모가, 패배를 인정하오' 라는 전언으로 조사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상구에서 군을 물렸다. 조선군은 물러나는 합횡군에게 추격을 가해야 했지만, 계속되는 연전으로 크게 지쳐있어 합횡군이 물러나는 순간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 그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조사는 휴식을 취한 후 군을 재정비하여 상구성을 포위하였고, 사자를 보내서 항복을 요구하였다. 상구성주는 조사의 항복제안을 받아들여 개성하니, 상구는 조선군이 점령하고 전투는 종결되었다.

4. 영향

4.1. 조선 승전과 연종의 이후를 생각하다

조선 조정은 상구의 승전소식에 크게 고무되었다. 기설은 승전한 가현과 조사를 크게 상찬하면서[15][16], 각기 승상[17]과 위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논공행상이 종료된 후 기설과 상방 하기가 독대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하기는 상구의 승전으로 합횡측이 유화적으로 나올경우 사실상 열국이 모두 연종의 질서를 인정하는 셈이니 조선이 주도하는 질서가 공인된 천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비쳤으며 기설은 하기의 말을 유념하겠다고 답하며 본격적으로 천하 경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4.2. 위나라 친조파의 성장과 명장(?) 몽오

상구전투의 승전으로 위나라내 친조파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이 친조파는 이전 2차 중원대전의 피해가 크지 않은 하내를 기반으로 삼고있었기에 조선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고, 만일 위가 다시 조선과 전쟁을 벌일시 제1목표는 바로 하내가 될것이 자명하기에 그 누구보다 친조선적인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몽오는 단숨에 위나라 제일의 명장으로 칭송받게 되는데, 그 사유가 몽오 스스로 상구전투 때 자신의 공적을 크게 부풀려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18] 처음에는 사람들이 고작 4천으로 수만 대군이 움직이는 전장에서 활약이 가능했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동맹국 장수 가현과 조사가 몽오의 공적을 인정[19]하고 마침 몽오가 속한 파벌의 장인 망묘가 이를 기회삼아 크게 몽오를 추켜세우니, 주변에서도 몽오를 명장으로 칭송하였다.[20]

4.3. 초나라 대연종전략 수립

초나라는 상구의 패전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무패의 전설을 자랑하던 경취가 처음으로 정면승부에 패전했다는 소식에 초왕을 비롯한 중신들은 하나같이 믿을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내 초왕의 동생 춘신군 황헐이 진정시키고 나서야 초나라 조정은 대책회의에 들어갈수 있었다.

우선 패전한 경취의 책임소재가 의제로 올라왔지만, 경취의 보고를 통해서 위가 동원한 병력이 적다는 사실을 통하여 한동안 중원방면에 큰일은 없을것이라는 점과 조선군의 기병대책에 유효한 방책[21]을 제시하자 초왕은 경취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22][23]

그리고 이후 상구패전으로 흔들릴 합횡 유지를 위하여 당면의 목적을 제북에 맞추었고 옛 제나라령 임치를 탈환하여 조선을 견제하고 제의 이탈을 막는다듯 전략을 수립하였다.[24]

그리고 여태껏 거의 무패를 자랑해온[25] 경취의 패배로 내정/외교의 소씨, 군사의 경씨라는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씨 내부의 신세대가 군사 업무등을 담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굴원과 굴개의 죽음 이후 존재감이 옅어진 굴씨도 새롭게 약진했다. 또한 소,경,굴의 삼대 세가 외에도 다른 귀족들도 경씨의 기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군공을 세우면 출세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기 시작했고, 이는 삼대세가에 밀려온 왕족 출신의 한중군수인 장신이 혼란한 진나라를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4.4.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

제나라는 위와의 화친이 결렬되고 경취의 패전으로 간을 보던 진나라가 확고하게 조선쪽으로 돌아서게 되어 조선이 다시금 교동방면으로 바라보게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제왕 전지는 합횡에서 이탈하고 연종에 가입하는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내비쳤다. 이에 신양군 전교사가 초와 송에게 원군을 얻어 임치방면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비쳤지만, 맹상군 전문은 상구의 패전 직후의 상황에서 초와 송이 군사를 보내줄지 여부부터 불확실하고, 조선의 동원한계가 어느정도인지 알수없다며 회의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결국 회의에서 전지는 조선에게 숙이는 방향으로 정세를 지켜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전교사가 반발하면서[26] 자신이 직접 초나라로가 병력을 빌려오겠다면서 초나라로 보내줄것을 요청하였고 전지는 이를 수락하였다.[27]

4.5. 흔들리는 송

송나라는 합횡에 이탈하고 조선에 합류하자는 전불예와 합횡의 이탈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위염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전불예는 송이 그동안 합횡에 있으면서 겪은 인명피해와 그 결과로 얻게 된 지리적 취약성을 생각하면 더 이상 합횡에 있을 효용이 없지만, 송이 연종에 붙을 경우 잔여 합횡진영을 물리적으로 단절시킴으로서 조선이 더욱 쉽게 제나라를 취할수 있기에 조선은 송을 억지로라도 유지시키기 위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설파하면서 연종지지를 선언하였다.
반면 위염은 연종은 특정한 공통적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합횡에 비하면 매우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송에 가까운 지역인 위와 한의 하남령이 계속된 전쟁으로 상당히 피폐해져서 초가 송을 공격시 연종이 제때 와 주지 못할수도 있고, 역으로 송이 이들을 지원해야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진나라가 아직 확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송에게 좋지 않다고 진언하였다.
송왕 연홍옥은 두사람의 의견 모두 일리있다고 여기며, 한동안 정세를 지켜보기로 하며 판단을 보류하였다.

4.6. 편을 확고히 정한 진, 그리고 소요

진나라는 연종에서 속해있었지만 상구대전이 벌어지기 이전부터 조선과 초 양쪽을 간보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 장약이 더 이상의 중립적 위치는 자칫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제 편을 정하고 대량조 영직의 취급을 확실히 할것을 간하였다.
장약의 간언에 영탕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였지만, 우물쭈물거리며 끝끝내 눈물을 보였다. 이에 영직은 언니 영탕이 자신에게 후계 자리를 물려줄 마음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스스로 대량조에서 물러나 일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28][29] 이렇게 연종으로 확실히 편을 정한 진조정은 조선에 영직을 인질로 보내겠다 사신을 보낸다. 이후 상구대전이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리자 영탕은 진 내부 친초파들을 정리할 것을 결심하고 동부에 백기를 서부에 사마착을 파견한다.
내사지는 빠르게 정리가 되었고, 동부에서는 서장 환이 군공을 세울 목적으로 반란에 참가했다가 반란군을 팔아먹으려는 배신을 시도하다 실패한 소소한(?) 소요 끝에 제압되었지만, 영탕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양도한 대산관 인근, 즉 관중 서부의 소요는 그렇지 않았다.
대산관이 없는 관중의 일선 방어선인 진창과 미현은 친초파가 득세한 지역이었고, 영직이 조선으로 가고 영탕이 진압을 위해 군사를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자 친초파와 반초파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초파들의 구원 요청을 받은 한중군수 장신이 항연과 함께 미-진창을 공격하면서 관중을 둘러싼 다툼이 초나라 조정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격발되었다.

[1]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 [2] 위군은 후방으로 돌려져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3] 협상이 잘될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재정이 복구될때까지의 시간벌기용이었다. [4] 맹상군은 이런 초의 태도를 크게 비판하였다. [5] 이 전략이 어느정도 먹혀들었던 것이 연종가맹국과 합횡가맹국간의 화친에 조선왕 기설이 매우 기분나빠하며 철회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발에 기설이 농담이었다며 어물쩡 넘어갔다. [6] 기설의 화친의 철회하려 하였다는 소식은 열국에 퍼졌고 각국에 경각심을 주게되었다. [7] 조선의 재정상 제나라 본토 공격이 아닌 월경지 상구를 노릴것이라 예측하였다. [8] 점령 후 위나라에게 양도 [9] 이를 구실로 위에게 역시 전쟁 참여하라 요청하였고, 위는 장군 몽오와 4천의 군사를 동원하여 참전하였다. [10] 이 병력은 해당지역의 목적으로 거진 최소치로 동원한데다 사실상의 주장인 조사의 통솔력으로 무판정으로 100의 숙련도를 기록하였다. 이는 중원대전 당시 하기-악의의 10만 이래 두 번째이다(...) [11] 이러한 터무니 없는 규모의 보급에 송군을 이끌고온 당앙이 무슨 병사 한 명당 수레 하나 만큼 딸려보냈느냐며 질려하였다. [12] 그러나 이때 조사는 자신이 적장 당앙을 죽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전투가 모두 종료되었을 때야 알 수 있었다. [13] 양측 총합 9만1천으로 동일했지만, 조선측은 동맹군 위군을 후방보급임무에 전담시켜서 사실상 8만7천 대 9만1천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송나라가 서전에 괴멸당하여, 경취가 지휘하였을때는 역으로 조선군보다 적은 숫자로 싸워야 했다. [14] 메타적으로 전투는 7차전까지 진행하였는데 보통 5차전까지가 전투 수행의 한계였다. 그러나 가현의 보급수행 능력으로 조선군은 6차전에서 노패널티로 싸웠고 7차전에서는 양군 모두 보급패널티를 지고 싸웠다. [15] 이때 기설이 절제된 반응을 보이자 대신들이 의아해하였다. [16] 나중에 신하들을 대전에서 모두 물리고 혼자서 큰소리로 웃으며 즐겼다는 후문이(...) [17] 이전 승상인 옥로는 승상의 직위에 있을 자신이 없다며 스스로 대총재로 물러났다. [18] 가현이 보급작전 계획은 잘 세웠지만 이 계획이 외부충돌요소를 배제하고 세운 것이라, 만일 도적이나 합횡군이 보급로에 타격을 가했으면 조선군은 보급문제에 허덕였을 것이다. 몽오가 이 보급작전에 대해 듣고서 혹평할 정도였다. [19] 물론 몽오가 보급에 신경써준 공적을 인정한 것이다. [20] 계속되는 주변의 칭찬으로 몽오 스스로도 자신이 조선의 조사, 초의 경취, 진의 사마착과 동급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21] 수레와 노궁 조합으로 조선군의 기병돌격을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있다는 보고 하였으나 정작 상구전투에서는 훈련부족으로 큰효과는 보지 못하였다. [22] 대신 상집규작을 회수하였다. [23] 경취는 이전 초성왕 시절 웅괴의 의견에 정면 반박한죄로 상집규작을 회수당했었다. 이후 하남대전에서의 승전으로 다시 돌려받았지만, 상구의 패전으로 다시 빼앗긴것에 자신은 상집규작과 연이 없다면 쓴웃음을 지었다. [24] 이 전략에서 중원의 위가 가만히 있고 제와 초가 손을 잡은 상태에서 송은 할수있는것이 없다는 이유로 송나라는 무시당했다. [25] 거의인 이유는 한나라를 구원하러 온 위장과 싸울 때 교환비로는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위장의 블러프에 속아서 전략적 목표를 함락시키는데 실패한 전적 때문이다. [26] 전교사는 제나라 제일의 반조선파다. [27] 내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28] 영탕은 영직의 말에 당황하였지만, 끝끝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29] 이런 영탕의 모습에 참치들은 눈물로 영직의 마음을 얻더니 또다시 눈물로 그녀를 보냈다며 귀큰놈이라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