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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23:55:47

하남대전

하남대전
河南大戰
Great War of Henan
시기 기원전 300년
장소 위나라 하남일대
와 조선령 순우(오늘날의 허난성일대, 산둥성 웨이팡시 안추시)
원인 조선이 동맹국인 진나라에 가해지는 합횡의 압력해소를 위하여 전면전 결심
교전국 조선朝鮮 초楚
위魏
한韓
송宋
위衛[1]

제齊[2]
지휘관 대사마대장군 곽전
정남장군 염파

순우성주 진개
잡호장군 극신
초 주국 경취
위 서하군수 경리
위 장군 몽오
위 대부 망묘
한 장군 신차
송군 지휘관 위염

제 상방 전문
병력 하남방면
- 선발대: 5만
- 본대 12만

순우방면
- 순우 주둔군 1만 8천
- 순우 지원군 1만 3천

총합 20만 1천
하남방면
- 초군 5만
- 위군 본대 7만 1천
- 위 조가주둔군 2만 4천
- 위 숙서구 수비군 7천
- 한군 3만 8천
- 송군 3만 5천

순우방면
- 제군 3만 2천

총합 25만 7천
피해[3] 조선군 약 5만 6천 합횡군 약 4만 1천

제군 약 1만
결과 조선군 대패
영향 조선 중모 할양 및 태산장성 철거
진나라 조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합횡에 합류

1. 개요2. 배경
2.1. 합횡측의 사정2.2. 조선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조가 전투 (전)3.2. 숙서구 도하전3.3. 조가 전투 (후)3.4. 합횡군 수원에 집결완료3.5. 대전에 앞선 양 지휘관의 연설3.6. 수원 대전3.7. 조선 패잔병의 평양학살3.8. 박쥐의 말로와 합횡군 해산3.9. 순우 전투3.10. 극신 전공을 탐하다3.11. 유수 전투
4. 결말
4.1. 조선의 첫 참패
5. 전후처리
5.1. 조선 책임추궁과 논공행상5.2. 제의 전후처리5.3. 진의 합횡합류5.4. 조선과 합횡의 평화협상5.5. 한과 송의 보상
6. 영향
6.1. 조선 긴축재정의 시작6.2. 초 강동재건 집중6.3. 제나라 밀수를 조장하다6.4. 합횡의 영향력 싸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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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300년 조선이 대조선합횡군과 하남일대에서 맞붙은 전쟁이다. 조선이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군 무패전설은 종료를 고하고 합횡 측은 일시적으로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조선의 남은 역량에 대한 합횡 측의 과소평가는 이후 위-초 사이에 합횡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5년 뒤인 기원전 295년 2차 중원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2. 배경

2.1. 합횡측의 사정

기원전 304년 합횡군(위, 송, 한)은 진나라 관문 함곡관을 공격하였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진나라 내부는 한마저 합횡으로 돌아서고 연달은 전쟁[4]으로 지쳐있는 상황에서 끝까지 조선과 의리를 지켜야하는지 회의적인 시선들이 늘어났다. 또한 야심차게 역공을 시도한 서하전투에서도 패배해 진초전쟁으로 고갈되가던 여력이 한계에 가까워졌다. 이를 간파한 합횡측은 진나라를 회유하는 한편 진에 가해지는 압박을 두고보고 있을리 없는 조선이 분명 대군을 보낼것이라 예상하고[5] 조선군을 합횡군이 유리한 지점으로 유인하여 일전을 벌여 승리할 계획을 수립하였고, 합횡소속의 국가들은 모두 언제든지 병력을 동원할 수있도록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2.2. 조선의 사정

합횡군이 함곡관을 공격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정내부에서 2가지 의견이 나왔다. 하나는 진나라를 버리고 재정이 회복할 때까지 수세로 전환하자는 의견과 즉시 유일한 동맹국 진나라를 끝까지 지켜야한다는 의견이었다. 조선왕 기설은 후자를 선택하였고 그이유로 첫째는, 그것이 동맹으로서의 도리이며. 둘째는, 조선 홀로 육국을 상대하는 것이 더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며. 셋째는 월경지 음진과 무성의 안전을 들었다. 이에 조선조정은 진을 구하기 위하여 17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위나라령 하남을 공격할것을 결의하고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었다.
그리고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상승무패의 조선군 전설과 산동대전 이후로 얻은 압도적인 국력,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드높아진 자존심도 큰 역할을 했다.

3. 전투의 전개

3.1. 조가 전투 (전)

원정 가능 병력의 대부분인 17만을 소집한 조선은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이 중 선발대 5만을 따로 떼어 정남장군 염파에게 맡겨 조가와 숙서구 제압을 명하였다. 그리고 남은 12만은 대사마대장군 곽전의 지휘하에 진격하기로 하였다. 염파의 5만은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여 조가를 포위하고 공격에 들어갔지만, 이미 조선의 공격을 예측한 위군이 대비한 상황에서 공성은 지지부진하였다. 자칫 계획에 차질이 있을 것을 염려한 염파는 먼저 급현과 숙서구 상황을 알아보기위해 정찰병을 보냈다. 이윽고 정찰병이 급현이 텅비었고 숙서구 남안에 수천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한다. 염파는 텅빈 급현에 항복하라는 사자를 보내고 선발대는 둘로 나누어 일군을 자신이 이끌고 숙서구 제압을 남은 일군은 조가를 포위하여 뒤에서 따라올 본대와 합류하도록 하였다.

한편 조선군이 조가를 급습하자 위국 전역에 경계령이 내려지고 급히 합횡구성국에 전령들을 보내었다. 동시에 정도에 주둔하고있던 망묘의 2만 1천 위군[6]은 수원으로 이동하여 복수 북안으로 넘어갈 병력을 이동시킬 준비에 들어갔다. 합횡 대전략은 하수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 합횡군을 하남에 집결시켜 결전을 벌인다였다. 때문에 대군이 모여들 하남에 대한 교통정리가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3.2. 숙서구 도하전

병력을 둘로나누어 숙서구로 급행한 염파는 맞은편에 수비중인 위군 7천을 발견한였다. 이 위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젊은 장수 몽오였다. 염파는 아직 위군의 방비 태세가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고 한가지 꾀를 내었다. 소수의 병력을 상류로 보내어 도하후 위군의 측면을 급습하여 나머지 군이 그사이 도하하여 공격하는 것이었다. 염파의 계책은 맞아떨어지고 위군은 양방향에서 가해지는 공격과 조선기병의 추격으로 와해되었다. 몽오는 군이 무너지자 급히 도주하여 정도에 있는 망묘와 합류하였다.
그렇게 염파는 무사히 숙서구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3.3. 조가 전투 (후)

조선군이 둘로 나누어 지자 조가를 수비하고있던 위군이 성밖으로 나와 야전을 벌였다. 갑작스러운 위군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조선군은 초전에 큰피해를 보았지만 이내 정신차리고 반격하였고 양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저멀리서 조선군 본대가 도착하자 위군은 더는 방도가 없다고 여겼고 또한 이미 목적이던 시간끌기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항복하였다. 곽전은 염파가 남기고간 2만에게 점령한 조가의 수비를 맡기고 그대로 남하하였다.

조선군이 조가와 숙서구를 점령하자 위군 총사령관 경리는 망묘에게 계릉으로 이동하여 조선군의 도하를 견제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경리의 명령보다도 조선군의 행동이 빨라서 망묘가 경리의 명령을 수령했을 때 이미 상당수의 조선군이 하수를 도하한 이후였다. 망묘는 일단 수원에 대기하면서 정도의 위장에게 도하준비를 요청한다.

3.4. 합횡군 수원에 집결완료

한편 조선군의 후속부대의 합류가 늦어져 하수도하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고, 그사이 합횡군은 모두 수원에 집결하여 조선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본 염파가 이미 적이 대비하고 있으니 여기서 싸우면 불리하다고 진언하지만 곽전은 군사적으로는 염파의 말이 옮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조선이 합횡에 열세라는 것은 자인하는 꼴이었기에 어쩔수없다면서 전투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조선군 14만과 합횡군 17만이 서로 바라보며 일전을 준비하였다.

3.5. 대전에 앞선 양 지휘관의 연설

전투에 앞서 합횡군의 경취가 전군의 사기를 위하여 연설하였다.
경취 : 나라를 위해서도 좋아.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건 살아있을 동안뿐' 라는 이유라도 상관없고.
이유는 딱히 상관없어. 여기까지 오면, 앞에는 이기느냐 지느냐 두 선택지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하나는 약속하도록 하지. 나와 대초의 군사들은 가장 앞장서서 싸운다. 그리고, 결과가 날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니, 앞에 서는 게 무서운 겁쟁이가 있다면 지금 나서라. 지금이라면 물러설 수 있다.

초나라군 : 초가 전군을 이끄는 만큼, 그 위험 역시 가장 앞서 부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까?
모두 납득하고 있는 사항인데다, 우리 중에 그런 겁쟁이는 없습니다.

경취 : 좋아! 취는 그 대답에 만족했다! 그럼...大楚精神(대초정신)!

초나라군 : 永不言退(영불언퇴)!

이를 지켜본 곽전도 질수없다듯 아래와 같이 말했다.
곽전 : 아- 주목. 다들 알겠지만, 저 앞에 있는 것들은 전부 금덩어리들이나 다름없다.
아니, 금덩어리보다 조금 낫나? 아니면 조금 못한가? 요즘 금 시세를 알아야 제대로 말을 하던가 하지.

조선군 : 와하하하~!!

곽전 : 뭐, 어쨌건 잘 알다시피 저 앞에 진치고 있는 군사 하나하나가 전부 작위이고, 토지다.
대충 저쪽이 우리보다 많은 것 같으니 운 좋은 녀석들은 이 전장에서 벼락출세할 수도 있겠네.
그리고, 여기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고 해도 남은 가족들의 생계는 조정에서 보장해 준다.
창과 몸을 앞으로 내미는 데 거리낄 이유는 전혀 없다는 이야기지.
그러므로......不苟幸生(불구행생).

조선군 : 視死如歸(시사여귀)!

그렇게 수원대전이 막을 열었다.

3.6. 수원 대전

양측의 일장연설이 끝난 후 두무리의 인마들이 수원에서 맞부딪쳤다. 초전을 가져간것은 조선군이었다. 자랑의 기병들을 앞세워 돌격을 가하니 선봉으로 나서있는 초군에 큰 피해를 주었다. 경취는 생전 처음으로 맞아본 조선군의 기병에 놀라했지만 진나라내전에서 소활의 전사 이후 조선군 기병에 대비하였기에 그 이상의 피해는 막을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군의 진영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초전의 기세를 이어가려던 찰나 곽전에게 끔찍한 비보가 도착했다. 바로 종속국에 가까운 동맹이었던 위(衛)가 배신하고 합횡측에 합류하였으며[7][8] 정도에 주둔하고 있던 위군 2만이 계릉으로 향하여 조선의 후방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곳은 조선군에게 사지나 다름없었다. 서둘러 후퇴하지 않으면 이곳 하남에서 모두 괴멸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기병들이 깊숙히 돌격하여 발을빼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선군의 흔들림을 놓칠 경취도 아니었다. 경취의 초군은 사정없이 조선군을 공격하였고 조선군은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복수로 도망쳤다.[9]

그렇게 수원에서의 싸움은 합횡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3.7. 조선 패잔병의 평양학살

수원에서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흩어진 조선 패잔병 일부가 평원으로 흘러들어갔다. 평원 주민들은 그들을 가엽게 여겨 위군의 잔당사냥으로 부터 숨겨주었지만, 이 살아남은 조선군들은 처음에는 감사하였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엉뚱한 생각을 하게되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분명 탈영에 대한 죄를 물을 것이고 설령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 하더라도 고향에서 수급하나 가져오지 못했고, 죽었으면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데 살아서 돌아 왔다며 차디찬 시선을 받을 것이 눈에 선했다.[10][11]
결국 패잔병들은 자신들을 숨겨준 평양주민들을 습격하고 그 목을 베어 전공으로 내세우기로 하였고, 대규모 학살극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훗날 있을 2차 중원대전에서 평양이 조선군의 공격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원인이 되었다.

3.8. 박쥐의 말로와 합횡군 해산

수원에서 대승을 거둔 합횡군은 기세등등하게 복양으로 향하였다. 합횡에 합류한 위(衛)군은 성문을 열고 이들을 환영하였지만, 성문이 열리자 합횡군이 한 행동은 그대로 쳐들어가 복양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복양을 접수한 이유는 차후 조선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복양과 궤진이 위에 필수적인 요소였고, 무엇보다도 쉽게 배신하는 위(衛)를 더는 믿을수없기 때문이었다.[12] 그렇게 위(衛)는 멸망하고 그자리에는 위나라의 복양현이 대신하였다.

그리고 합횡군은 여기서 해산하였다. 이번 전쟁의 목적 자체가 조선군을 요격하여 크게 이긴다였기에 목적이 달성한 지금 더이상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13][14]

3.9. 순우 전투

한편 제나라는 수원에서 합횡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조선에 복수할 기회라고 여겨 군사를 소집하였다. 군사 3만 2천에 지휘관으로 상방인 맹상군 전문이 맡았다. 제나라의 군사들이 순우로 향하자 순우성주 진개는 급히 원군을 요청하는 파발을 보내고 자신은 병사들을 소집하여 수성준비에 들어갔다. 이윽고 맹상군이 있는 제군이 순우를 포위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초전은 제군이 매섭게 공격하였지만, 진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반격을 가하였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하는 제군에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맹상군이 발석거까지 동원하여 성벽을 공격해보았지만 순우는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저 멀리서 순우를 지원하기 오는 지원군의 깃발이 보였다. 성안에 조선군의 사기는 올라가고 제군은 앞뒤로 포위당할 위험에 처해졌다.
결국 맹상군은 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전투가 종료되었다고 생각할즘...

3.10. 극신 전공을 탐하다

지원군으로 달려오는 조선군을 지휘하고있는 인물은 태산에 주둔중이던 극신이었다. 헌데 극신은 제군이 자신들을 보고 순순히 물러나자 전공에 욕심이 났고 자신을 환영하는 진개를 무시하고 그대로 군사를 몰아 후퇴하는 제군을 추격해들어갔다. 한편 진개는 이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하고 결국 그 자신도 극신을 지워하기위해 주둔군중 1만 1천을 이끌고 극신과 합류하였다.[15][16]

3.11. 유수 전투

한편 맹상군은 후퇴하던 도중 자신을 쫓아오는 조선군을 보고 유수에서 반격하기로 하고 진영을 갖추었다. 그리고 조선군이 유수에 도달했을 때 이미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대비가 모두 끝난 제군을 상대해야 하였다. 극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이 지휘하는 군사를 몰아 돌격을 가하였다. 초전의 기세는 조선군이 가져왔지만 맹상군 역시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양군은 4푼씩의 피해를 주고 받았다. 한편 진개는 맹상군이 극신의 돌격에 시선이 집중되는 사이 일부 병력을 제군의 후방으로 돌린 이후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들어갔다. 맹상군은 어느새 자신의 군사가 반포위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전군에 퇴각을 명하였고 맹상군의 퇴각명령에 제군은 유수를 도하하여 퇴각하였다. 이와중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어떻게든 후퇴에는 성공하였다.

극신은 이러한 제군을 유수까지 넘어서 추격하려 하였지만, 더는 못보겠다듯 진개가 달려와 극신의 머리를 후려쳐서 말렸다. 진개의 주먹질에 극신이 대노하며 항의하자 진개는 유수 건너편을 보라고 말했다. 유수 건너편에는 맹상군의 후퇴를 지원하기위해 전단이 일군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었고, 그것을 본 극신 또한 더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사람은 순우로 돌아가 중앙 지원군을 이끌고 온 고나를 맞이하였다.

그렇게 순우쪽의 싸움은 조선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말

4.1. 조선의 첫 참패

그러나 하남대전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조선 역사상 첫 패전이었고 죽거나 실종, 또는 크게 다친 이가 5만이 넘는 대패였다. 무패신화를 자랑하던 조선군의 위신에 금이 갔고 조선군의 힘에 억눌려있던 구 제나라 점령지들이 소요가 일어날 기미를 보였으며 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단군[17]과 북방의 기미부주 중 구원-운중[18][19] 위험신호가 보여졌다. 새로이 합류한 막남기미부주의 재편성도 요동 근처의 부족이 친조선파여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되어 있었기에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결정적으로 겨우겨우 회복세에 들어가던 조선재정에 결정타를 날렸다.

5. 전후처리

5.1. 조선 책임추궁과 논공행상

그렇게 전후 책임추궁이 벌어졌고, 하남대전에서 패전한 곽전과 염파에게 일계급 강등이랑 징계를 내렸다. 곽전은 대사마대장군에서 위장군으로 내려오고 그 후임은 어사대부 하기[20]가 맡게 되었다.[21] 염파 역시 중외대부급인 정남장군에서 대부급인 잡호장군으로 강등되었고 두사람은 이 징계를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패전으로 곽전은 패배자라는 멍에를 뒤집어썼고, 너나할 것 없이 곽전을 비방해서 분사하는 원인이 되었다.[22]

한편 순우와 유수에서 승리한 진개에게 상으로 순우성주에서 임치군수로 승차하였다. 그러나 극신은 임무를 망각한 월권돌진을 진개가 고나에 고발하였고, 이것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문책성 인사로 중앙에 소환당하고 춘관 상대부를 맡게되었다.[23][24]

5.2. 제의 전후처리

제나라는 패전의 여파로 전지가 직접 진행하고 있던 삼진변법이 좌절되었다. 그동안 제왕 전지가 부리던 어용학자들 까지 포함하여 온 제나라의 학자들이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중에서 제일 심하게 반발하고 있는 학파가 묵가와 맹자가 이끄는 유가 내성파였다. 전지가 중신들에게 대책을 묻자 상경 저자가 나서서 이전에 조선의 유가측에서 맹자의 조선방문을 요청한적이 있다고 말하며 맹자를 조선으로 보내고 맹자가 법가의 나라인 조선에서 망신을 당하면 맹자의 위신이 크게 손상될것이라고 진언하였다. 전지는 이를 받아들여서 조선측에 맹자를 보내는 것으로 협상을 맻었다.[25]

5.3. 진의 합횡합류

하남에서 조선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왕 영탕에게 위의 사신이 와서 다시금 합횡 합류를 재촉하였다. 물론 그 조건으로 진국이 영유하고 있는 남정과 인질을 초에게 넘기고 초에 머물고있는 영직을 대량조에 임명해야 했다. 대신 조선의 월경지 음진과 무성 그리고 지난 관중공략에서 점령된 빈양을 돌려주기로 하였다.[26] 결국 영탕은 이 조건을 수락하였고 조선과의 동맹 파기 및 합횡 합류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조선과의 관계과 완벽히 절단되면 조선의 보장으로 안전이 보장된 북방이 다시 흔들릴수도 있었기에 조선측에도 사신을 보내어 음진과 무성의 관료들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조선에 가있는 인질 영통의 귀환과 북방의 안전보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기설은 귀환하는 영통의 지위를 보장해준다면 받아들이겠다 하였고[27][28] 진나라는 이를 수락하였다.
덕분에 조선은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진과의 연결을 살릴 수 있었고 이것은 2차 중원대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5.4. 조선과 합횡의 평화협상

위는 조선과의 협상조건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미 점령한 복양과 궤진은 문제없었고 도시 하나 또는 2개까지는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여 위에게 중요한 도시들을 열거하니 3지역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먼저 장평 중원대전때 조선에게 빼앗긴 땅으로 하동 방비의 보강, 동서 연결의 강화, 그리고 북변 방비를 위한 자원 집중까지 노릴수 있는 곳이었다. 두번째는 중모 조선의 대군 운용은 결국 하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중모가 보유하고 있으면 공격시간을 더욱 지연시키는 것이 가능하고 위가 북상할 때 교두보로서 쓸수있는 요지였다. 마지막으로 늠구 제와의 연계가 쉬워지교, 제수 상류를 완전히 활용할 수 있기에 역시 중요한 지역이었다. 결국 논의끝에 중모와 장평 그리고 블러프용으로 태산방어선 철거를 요구하기로 하고 소진이 직접 사신으로 맥경으로 향하였다.

기설은 소진의 협상안을 살펴보고 처음에는 소진의 의도대로 블러프용인 태산방어선 철거에 난색을 표하였지만 조선상 비의가 이는 제의 이익인 이야기고 위와 관련이 없으니 함정이라고 조언하여 기설은 태산장성 철거와 중모를 내어주겠다고 답변하였다. 소진은 자신이 예상한 반응과는 다른 답변을 내놓자 당황하였고, 예전과는 다르게 그 특유의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결국 중모와 태산장성철거[29]로 협상은 마무리되었다.[30]

5.5. 한과 송의 보상

조선과의 협상이 마무리되고 합횡측은 구성국의 보상건에 대해서 협의를 시작했다. 우선 한은 그영역을 보전하고 위의 맹진에서 나오는 이익 일부를 주기로 하였다.[31] 송은 구성국중 초와 위 다음으로 전공을 세웠기에 하상을 송에 돌려주고 패전한 제를 송이 도와주는 대가로 제가 영유하고 있는 하비도 송에게 돌려주었다.[32]

6. 영향

6.1. 조선 긴축재정의 시작

패전의 여파로 조선의 재정문제가 심각해지자 조선상 비의는 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현재 완공된 맥성운하 구역의 보수 유지를 제외하고, 모든 특수행동을 철회 및 정남장군부를 해체하고, 한단 방어선은 방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야말로 돈나갈 행위 모두를 올스탑하고 온전히 복구에만 집중하기로 한것이다. 문제는 이정도의 긴축이라면 국가재정은 물론이요 왕실재정에도 영향이 간다는 것이었다. 신료들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것인가를 논하면서 서로 미루는 모양을 보이자 비의가 다시금 나섰다. 자신과 승상 문소, 기설의 스승인 곽외에 원로인 전 조선상 고정까지 동원하여 연명상소를 올린것이다. 이에 기설은 처음에는 왕인 자신을 협박한다고 느껴져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이들에게 벌을 줄수는 없었기에 투덜대면서도 비의의 상소를 받아들였다.[33]
그리고 기설이 상소를 받아들인날 원로대신 고정이 노환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기설은 고정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시호와 군호를 내리고 그녀의 가문이 궁해지지 않도록 돌봐줄것을 명하였다.

6.2. 초 강동재건 집중

초는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아직도 강동재건이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좋게도 나쁘게도 현상유지를 택하였다.[34] 그리고 이번 전쟁에 대공을 세운 경취의 지위를 상주국으로 올리고 파의 구인을 영지로 내렸으며 군호로 무안군을 하사하였다. 또한 이 전쟁에서 조선이 크게 패배했기에 안심하고 관중을 제외한 화북의 일에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방심하기 시작했다.

6.3. 제나라 밀수를 조장하다

조선에 패배하여 땅도 못 늘리고 기여도 없어서 하비를 송나라에 넘겨준 제나라는 초나라의 교역물량이 늘어나자, 상업을 대대적으로 권장하고 상품생산 거점들을 복구하였으며, 상인들에게 물리는 세금도 줄여주었다. 덕분에 제와 국경을 맞대고있는 국가들의 국경에서는 제나라 상인들의 밀수가 횡행하게되었다.[35][36]

6.4. 합횡의 영향력 싸움 시작

조선이 크게 패배하고 진까지 합횡에 참여시킨 합횡은 슬슬 영향력 싸움에 돌입했다.
특히 복양과 중모를 차지해 국력이 신장된 위나라는 조선의 위협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넘겨주었던 종약장 자리를 가져오고 싶어했고, 은근히 초나라가 대장처럼 행동하는 것을 고까워했다.
또한 영직을 진으로 복귀시켜 영향력을 크게 넓힌 초나 관중을 몇번이나 노려오던 위나 관중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관중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하려는 뜻이 강했고, 이 덕에 진나라는 전쟁 채배 후 굴복해서 들어왔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운 책임을 물고 외교적으로 나름 중요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여전히 조선의 위협에 노출된 상태이던 제를 제외하고, 하비를 되찾고 제나라에 종속된 부분이 컸던 것에서 해방된 송이나 삼천을 빼았기고 위나라에 종속된 한 등의 나라도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 이합진산을 시작했다.

조선은 산동대전 이후로 엄청나게 팽창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고, 중모 이외에는 별다른 영토 손실이 없었던데다 증세를 하거나 자국 영토가 전쟁터가 된 적도 없었다. 덕분에 조선이 곡부전투 이후로 크게 여력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긴축재정을 실시하면서 빠르게 대전 이전의 여력을 되찾은데 비해서, 산동대전, 5년에 걸친 진초전쟁, 합횡 결성 후 4년간 끊임없이 여력을 크게 소모하고, 자국의 영토를 전쟁터로 만들어서 싸워온 진과 합횡의 구성국들은 그만큼 빠르게 여력을 되찾지 못했다.

특히 가장 오래 전란에 휘말린 진나라와,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두번이나 동원하면서 진을 공격했지만 얻은 것이 없어 하동이 피폐해지고 수십만 대군이 맞붙은 전장이 돼서 하남에 극도로 피해를 입은 위나라가 피폐해졌다. 이렇게 대부분의 영토와 여력을 보존했고 진직도가 남아서 진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던 조선과, 여력이 고갈된 상태로 내분을 일으키던 합횡의 여러 국가들, 그리고 조선 국력에 대한 저평가는 여러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위나라가 주도권을 쥐고 관중을 경락하기 위해서 진나라에 공세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이 진과 한의 요청으로 20만 대군을 이용해 남하를 개시해 2차 중원대전의 계기가 되었다.




[1] 위의 망묘의 설득으로 조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합횡측에 합류 [2] 조선군이 하남에서 패하자 군사를 일으키자 순우를 공략하기 위하여 참전 [3]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 [4] 관중공략전, 함곡관공방전 [5] 진나라는 현재 조선에 남아있는 유일한 동맹국으로 진나라를 버리면 조선은 중원내부에서 완전히 고립된다. [6] 위군이 동원한 7만 1천중 망묘가 2만 1천을 이끌고 정도에 나머지 5만은 대량에 주둔중이다. [7] 망묘가 지금 조선군이 하남으로 더 영토를 넓힌다면 복양을 중시할 이유가 크게 줄어든다. 아니, 어쩌면 위(衛)나라를 없애고 복양현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라고 설득하자 거기에 넘어갔다. [8] 정도의 망묘가 직접 위(衛)의 국군을 설득하였고 친조선 필두였던 사마주가 죽고 없었기에 위의 국군은 이 설득에 넘어가버렸다. [9] 메타적으로는 리롤을 사용해서 한 번 패배를 없던 일로 만들었고, 하수를 넘어와 싸웠기에 조선의 크리필승 보정이 사라져 있던 상태에서 크리가 나온 결과였다. [10] 여유가 부족한 지방에서는 전쟁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이 고향사람들 앞에서 반드시 적군의 목을 베고 베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며 맹세를 하는등 전쟁에서 수급을 배고 팔자 필 것을 원했다. [11] 조선의 중심지에서 멀어지는 지방에서 그런경향이 강하다. 대도시나 내사지는 여유가 있어서 이렇게까지는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조정에서 백성들이 전쟁을 꺼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분위기인것은 확실하다 [12] 위는 소국이 살기위해서는 명분으로 무수히 많은 배신을 행하였다. 처음에는 위를 다음에는 제를 그리고 이번에 조선을 배신하였다. 합횡측의 주요국인 위의 입장에서는 믿을수없는 존재였다. [13] 무엇보다 합횡군 전체를 합하면 20만에 달했고. 그 20만의 보급을 담당하는 위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14] 경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조선령에 타격을 주고 싶었지만 대다수의 합횡국들이 더이상의 진격을 원치않아서 접어둘수밖에 없었다. [15] 극신은 진개의 이행동에 진개도 전공에 탐이난것이라 여겨 방해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고 한다. 극신의 이러한 태도에 진개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기가 어려웠다. [16] 이때문에 메타적으로 같은 나라의 군대인데 혼성군 페널티가 적용되었다(...) [17] 메타적으로 복속도가 크게 내려갔다. [18] 구원-운중은 이번 대전에서 기병을 차출하였고 그 피해도 컸기에 납공면제를 요청하였지만, 기설이 딱잘라 거절하여 생긴 소요다. 다행히 이 소요는 대공 조옹이 무마시켜주었다. [19] 물론 조옹은 구원-운중의 확실한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리한것이다. [20] 이전에 대사마(하관상경)직을 역임했으며 산동대전 참전경력이 있었기에 맡겼다. [21] 어사대부 자리는 대사마(하관상경) 조하가 맡게되었다. 이는 대공 조옹이 북방민족을 다독이는 대가성 진급이었고, 메타적으로는 상경급 중에는 조하가 아니면 군주 비서기관인 어사부에 속하는 소부로 임명한다는, 편법에 가까운 방식으로 상경급에 오른 양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22] 의형제이자 친우인 크라우는 딸인 가현 앞에서 이에 분개하였고, 곽전의 친녀인 곽원은 이 사건으로 출사에 다소의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23] 처음에는 고나의 이러한 말에 하기가 곽전이 추천한 인재이니 한번 봐주자라고 했지만, 기설이 이를 알고 과에 합당한 벌을 내리라고 명령하였다. [24] 극신은 이 인사가 진개의 고변으로 인한것임을 알고 진개를 원망하였다. [25] 이 때 맹자는 직하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고 있었고, 당연히 현역 시절보다는 말빨이 떨어져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후 드러나는 모습으로 보아어장주의 성인 얕보지 말라는 말처럼 맹자는 전혀 실력이 녹슬지 않았었다. [26] 사실 이 성들은 위가 가져갈 예정이었지만 위가 진에서 초나라와의 영향력 싸움을 대비해 인심을 쓴 것이었다. [27] 초에서 친초파의 영직을 대량조로 임명한다고 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비교적 친조선(?)측인 영통을 내세운것이다. [28] 사실 영통은 친조선파라기 보다는 친진성향이었고 초나라에도 큰유감은 없었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영직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 초나라였기에 대응차원에서 친조선파가 되었다. [29] 초소는 남겨두기로 했다. [30] 중간에 기설이 태산장성을 완전히 허무는 것에 반대하며 협상을 요구할 때도 소진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31] 여기서 초와 위의 알력다툼이 있었는데 원래 위는 영역보전만을 주장하였지만 초는 위 견제를 위하여 이익도 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맹진 이익 들어간것이다. [32] 대신 제나라와는 교역물량을 늘려주기로 하였다. [33] 그날 밤 기설의 방으로 미동 한두명이 들어가 다음날 건어물이 되어서 왕궁을 기어갔다는 후문이 돌았다(...) [34] 또 이번에도 군사를 일으킨 탓에 강동재건 진전이 매우 느려졌다. [35] 위와 송은 제나라가 밀수를 조장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밀수거래덕을 보는 것도 있었기에 눈감아주었다. [36] 그러나 조선은 이 밀수상인이 금수품 소금까지 거래하자 대대적으로 검거 소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