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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3:06:40

삼중(승려)

1942년 9월 25일 ~ 2024년 9월 20일 (향년 81세)

1. 개요2. 상세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 승려. 속명은 박진홍이다. 속명 성씨와 법명을 합쳐 박삼중으로 가장 많이 불린다.

2. 상세

1942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에서 태어나 1950년대 후반 해인사에 출가했다. 이후 불국사 등 여러 절을 거쳐 1961년 전남 구례 화엄사 주지, 1967년 경북 달성군 용연사 주지를 역임했다. 이후 부산에서 자비사 주지를 오랫동안 맡았으며 1967년부터 2007년까지 약 40여년간을 교도소 교화 활동에 힘썼다. 특히 사형수들을 구제하고 교화하는데 천주교 서울대교구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조성애 쟌 마르코 수녀, 개신교의 문장식 목사와 앞장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2020년 11월 12일 방송분에서 인터뷰 대상으로 출연, 여태까지 만난 사형수 중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고금석의 죽음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회고하면서[1] 그가 남긴 염주를 지금도 오른손에 차고 다닌다고 밝혔다.

2024년 9월 20일 세수 81세, 법랍 66세로 입적했다.

3. 여담



[1] 물론 "고금석은 죄를 지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죗값으로 사형됐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2] 1970년대에 사형 판결을 받았던 사형수로,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생판 모르는 여자의 집을 애인의 집으로 착각해 들어가 잠을 자다가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놀라 저항하던 그녀를 죽여 사형 판결을 받았었다. [3] 그녀는 아들이 사형수가 되자 70대의 늙은 몸으로 교도소 담장 밑에 움막 수준의 집을 짓고 꼬박 3년을 거기서 살았고,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자식이 있는 교도소 담벽을 향해 기도한 후, 교도소 아래에 위치한 화장사 암자에서 주지와 함께 부처님께 108배로 기도했다. 게다가 매일 아침마다 빗자루로 지저분한 거리를 쓸거나 초상집을 찾아가 염습하기, 동네 오물 청소 등 아들의 죄를 씻기 위해 어떤 궂은 일도 마다 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도 그녀를 사형수의 어머니라고 멸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녀를 위로하고 어떤 험담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4] 아직 사형수이던 시절,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온갖 고생을 스스로 하는 것을 알고 죄책감에 자기가 죽어야 어머니가 편히 살 수 있다며 자살까지 시도했었는데, 이에 삼중 스님이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아들이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할 지경이니 그만 고향으로 내려가 편히 살라.'고 말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을 먼저 저승으로 보낸 어미가 어찌 하늘이 무서워서 계속 살겠는가. 내 아들이 죽으면 나도 아들이 죽은 이곳에서 따라 죽을 테니 스님께서 날 불쌍히 여기시거든 이 죄 많은 늙은이의 시신을 부처님의 법으로 화장해 그 뼛가루를 밥풀과 꿀에 묻혀 까치밥으로 먹여달라. 짐승에게라도 이 죄 많은 늙은이의 몸을 먹여 살인의 죄업을 조금이라도 덜게 해달라!'고 되려 울부짖을 정도였다. 이에 감동한 삼중 스님이 법무부장관에게 '지금 양동수를 죽이면 두 사람을 죽이는 꼴이니 최소한 노모가 돌아가신 후로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탄원했고, 이 일화가 언론과 라디오 방송에까지 나와 전국에서 탄원이 빗발치자 감형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안타깝게도 양동수의 어머니는 17년 동안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다가 가석방 결정 3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신기하게도 양동수는 교도소장에게서 석방건의서가 법무부장관에게 상신되었다는 결정을 듣기 바로 전날 밤, 어머니가 '동수야, 니 서류가 다 됐다. 나는 이제 갈란다. 잘 있그래이.'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가는 꿈을 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