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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사에서 중국의 지배기에 대한 문서. 기원전 111년에서 기원후 938년까지 이어진 시대로,[1][2] 베트남인들은 북속기(北屬期)라고도 칭한다.2. 특징
약 1000여 년에 걸친 중국의 통치기 동안 베트남은 중국과 투쟁하면서 동시에 중국의 강력한 영향하에 베트남이 동남아시아 문명권에서 동북아시아의 한자문화권으로 편입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베트남사의 근본을 형성하기도 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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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한나라의 지배시대(한구군, 漢九郡)( 기원전 111년 ~ 기원후 220년)
남월은 전한의 제5대 황제인 문제 시기에는 화평을 맺었지만 제7대 황제인 무제가 즉위한 뒤 한나라가 천하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하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시조인 무제 조타가 살아있었을 적에는 한나라의 군대를 막아내어 한동안은 화친관계가 지속되었으나 제4대 군주인 애왕 조흥(趙興, Triệu Hưng, 찌에우흥)과 토착민 출신 재상이었던 여가(呂嘉, Lã Gia, 라지아) 사이에서 대립이 불거져 쿠데타가 일어나 제5대 군주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趙建德, Triệu Kiến Đức, 찌에우끼엔득)이 추대되자 이에 한무제는 노박덕을 위시한 원정군을 파견하여, 기원전 111년 남월을 멸망시켰다. 그 소식을 들은 남월 남부의 쟈오 찌(Giao Chỉ, 交趾, 교지)와 끄우 쩐(Cửu Chân, 九眞, 구진)의 대표도 저항하지 않고 한나라에 항복하여 9개 군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약 1,000년에 이르는 중국에 의한 베트남 지배의 시작이었다.[3]한나라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자국 변방의 안정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중시되었다. 이 지역은 화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남방 물자의 산지인 동시에 동남아시아, 인도,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물자의 집산지였기 때문에 막대한 이권이 존재했다. 이후 한나라는 기본적으로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했는데, 워낙에 머나먼 지역이어서 수시로 탐관오리들이 등장하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결국 탐관오리로 인한 반란과 괜찮은 관리 및 이 지역 출신들의 통치로 인한 선정이 반복되었다.
이때 후한의 개국공신이자 복파장군이었던 마원이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트남의 통치를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바꾸었다.[4] 마원은 또 행정제도를 조정함으로써 중국의 지배통치력을 높이고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이 조치로 기존의 락장이나 락후의 통치력은 약화되었고, 중국인 이주민의 힘이 늘어났다. 또한 이때부터 비엣족이 본격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비엣족이 가지고 있었던 구비서사시의 전통이 끊어졌다.[5]
137년 베트남 중부의 원주민인 우련(區憐)이 중국령 베트남을 공격했다. 우련은 베트남인이 아닌 참족으로 보인다. 남부 원주민의 공격은 계속되어 192년 중국령 베트남의 최남부인 녓남(Nhật Nam, 日南, 일남)군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 국가가 베트남의 숙적이었던 참파의 전신인 임읍(林邑)이었다. 참족은 말레이- 폴리네시아 인종에 인도 힌두교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베트남인의 동 썬 문화와는 다른 싸 후인 문화의 민족이었다. 임읍 남쪽 캄보디아에서는 부남(扶南) 왕조가 번성했다.
후한시대에 결국은 베트남의 직접통치가 흐지부지되었다. 베트남의 중앙이자 교주자사부의 최남단에 위치한 녓남군(일남군)은 기후가 아주 열악했는데, 여기는 덥기도 더운 열대기후인데다가[6], 온갖 풍토병이 창궐했던 곳이었다. 당시 후한에서 수도인 낙양으로부터도 가장 먼 곳이 일남이었는데 일남군은 낙양으로부터 13,400리나 이격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대의 사족들이나 관리들은 유배를 당할 경우 유배지에 따라 자신들의 행보를 예상했는데 일남으로 유배당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실제로도 일남으로 유배가 확정되면 고향에서 장례식을 먼저 치르고 일남으로 출발했다.[7] 교주자사였던 사섭조차 직접통치를 하지 않은 곳이 일남군이었다. 그래도 일남군에는 현이 5개나 되었고 인구가 100,000명 정도되었다.
3.2. 위진남북조시대(220년 ~ 589년)와 수나라 시대(589년 ~ 602년)
수나라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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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 교전국 | |
<colbgcolor=#2B0B30>
진멸망전 ,588 ~ 589, |
남진 | ||
베트남 원정 ,589 ~ 602, |
전 리 왕조 | ||
1차 고구려 원정 ,598, |
고구려 | ||
토욕혼 정벌 ,608 ~ 609, |
토욕혼 | ||
2차 고구려 원정 ,612, |
고구려 | ||
3차 고구려 원정 ,613, |
고구려 | ||
4차 고구려 원정 ,614, |
고구려 | }}}}}}}}} |
후한말 삼국시대에는 이중지배 상태가 되었는데 사섭[8]이 교주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 사섭을 동오의 손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섭은 손권의 부하였으나 베트남에서는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삼국시대에는 교지의 실질적인 독립 세력이었던 사섭이 등장하여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다시 사섭이 죽고 동오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조국달과 조구 남매의 대규모 반란이 터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280년 오나라가 사마씨의 서진에게 멸망했을 때 곽마가 잠시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나갔으나, 이후 중국을 통일한 서진을 잠깐 거치며 장강 이남으로 내려온 한족들이 세운 육조시대 내내 남조의 지배를 받았다. 북위 등 북조 왕조들의 지배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기록이 없다.
중국의 혼란기 사이에는 잠시 찌에우비엣브엉(Triệu Việt Vương, 趙越王)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 리 왕조(Nhà Tiền Lý, 전 이조, 544년 ~ 602년)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수나라는 남방의 정복과 튀르크족( 돌궐)과의 효과적인 관계 구축에 성공함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확장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2명의 수나라 황제( 수문제, 수양제) 모두 주변국들과 이민족을 정벌함으로서, 옛 한 제국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다. 602년 수문제는 오늘날 하노이 근방 지역을 가리키는 교주(交州)를 손쉽게 탈환했다.
605년 봄이 오자 수나라군은 베트남 남쪽으로 더욱 깊숙히 밀고 들어갔는데, 오늘날 다낭 인근을 수도로 삼고 해안가를 따라 자리잡았던 참파 왕국을 침공했다.[9][10]
유방(劉方)이 이끌던 수나라군이 도리강(闍梨江)을 건너자, 코끼리를 동원하여 참파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첫 공세를 격퇴한 후, 유방은 여러 개의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위를 풀로 덮은 뒤 거짓 후퇴를 통해 코끼리병을 함정으로 유인했다. 또한 수나라군은 쇠뇌를 동원하여 코끼리를 쏘게 했고, 이에 놀란 코끼리들은 몸을 돌려 참파군을 거꾸로 짓밟아버렸다. 유방은 참파의 수도를 정복하고 약탈했지만, 중국으로 돌아오는 귀로길에 수나라군은 풍토병에 시달리며 막대한 손실을 냈고 유방 또한 병에 걸려 사망했다.[11] 이후 베트남 땅에는 당나라에 의해 안남도호부가 세워졌다.
3.3. 당나라의 기미지배 시대(602년 ~ 880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수말당초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태수 구화가 곧 투항하면서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리 뜨띠엔(Lý Tự Tiên, 李嗣先, 이사선), 딘 끼엔(Đinh Kiến, 丁建, 정건), 풍흥(Phùng Hưng, 馮興, 풍흥) 등 원주민들의 반란을 꾸준히 겪어야 했다.당나라는 훗날 대리국으로 성장하는 현재의 운남성 지역의 국가인 남조(南詔)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선기지였던 이 지역에 정해군(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절도사에 임명하면서 완전한 통합정책에 나섰다. 고병은 '고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정을 펼치기는 했지만 도교를 중심으로 한 통합정책은 좀 늦은 감이 있어서 결국 실패했고, 880년 황소의 난을 계기로 안남도호부를 철폐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3.4. 정해군절도사 시대(880년 ~ 938년)와 독립
이후 906년 쿡 트아주(Khúc Thừa Dụ, 曲承裕, 곡승유)가 절도사를 자처하면서 쿡씨 절도사 시대가 개막했다. 907년 중국도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드는재차 남한의 간접통치가 펼쳐졌으나, 응오꾸옌이 바익당 강(Sông Bạch Đằng, 白藤江, 백등강) 전투에서 남한군을 물리치고 응오 왕조를 창건함에 따라 마침내 중국의 1000년 통치가 완전히 종식되고, 베트남은 독립국가가 되었다.
4. 같이보기
[1]
간접적으로는 중국계
한족이 왕족이었던
남월까지 합산하기도 한다.
[2]
중화제국 및 중국
왕조의 통치뿐만이 아니라 해당 시기
비엣족 원주민들의 왕조사 역시 포함되며 베트남 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원주민들의 왕조를 강조하고 있다.
[3]
이 9군은 나중에
교주(交州, 베트남식으로는 Giao Châu)로 편성되었는데, 교주의 중심지는 남월의 중심지였던 남해군(南海郡)이 아닌 쟈오 찌(Giao Chỉ, 交趾, 교지)군이 되었다. 남해군이 아닌 쟈오 찌군이 중심지가 된 이유는 당시 쟈오 찌군이 남방과 베트남 북부에서 생산되는 물자의 집산지였고, 쟈오 찌군과 당시 중요 항구였던 합포군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광시좡족자치구 베이하이시 허푸 현 북동부)과의 거리가 남해군과 합포현의 거리보다 가까워 합포현을 통제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출처는 유인선의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4]
마원은 그 유명한 《
삼국지연의》의
마등,
마초 부자의
조상이었다.
[5]
Đinh, Gia Khánh. Văn hóa dân gian Việt Nam với sự phát triẻ̂n của xã hội Việt Nam. Chính trị quó̂c gia, 1995
[6]
위키백과 동하의 기후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30도 이상의 폭염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고, 한창 더울 때는 40도 정도는 예사 수준인 곳이었다. 물론 이 시절이 지금과는 완전히 같지 않았을 것이다. 사족으로, 동하는 옛날의 일남군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7]
실제로
공손찬은 유기라는 인물이 일남으로 유배될 때 따라갔는데 이때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북망산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공손찬은 일남으로 가던 도중 사면령이 내려져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8]
베트남식 독음은 '시 니엡(Sĩ Nhiếp)'이다.
[9]
상술했듯 중국인은 임읍(林邑)이라 불렀다.
[10]
허나 정작 이 특별한 원정은 한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외려 남방에 전설적인 부(富)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현혹된 수문제의 개인적인 욕심에 가까웠다.
[11]
사실 이러한 결말은 거진 예상된 바에 가까웠다.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 기후가 다양한 지역 전부에서 기동하던 군대들은 항상 역병에 취약했다. 특히나 온화한 지역에 살던 병사들은 남방의 열대에 극도로 허약함을 보였고, 전혀 익숙지 않던 수많은
세균 및
미생물들에 노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