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스로 백제신검 제47대 전수자라고 주장했던 대한민국의 무술인 강영오(1950 ~ 2019)가 구사하던 무예. 본래 이름은 "백제무술"로 시작했다.2. 설명
강영오의 주장에 따르면, 1963년 태백산에서 스승인 '삼랑도인'[1]을 만나 10년 동안 무술을 연마했다고 주장했다. 강영오는 여러번 도장을 운영하고 폐업하기를 반복하다 사망 전까지 경기도 양평에 있는 폐교를 빌려 '백제무술연구원'으로 운영해 홀로 살았다고 한다.일본식 단급제도는 없으며 자체 승단 체계로는 가장 낮은 태랑(太郞)부터 시작해 월랑(月郞), 사비랑(泗沘郞), 차사(借士), 역사(力士)를 거쳐 가장 높은 무사(武士)까지 총 6개의 칭호가 존재한다. 강영오는 스스로 높은 등급인 무사[2]라고 불렀다.
강영오에 따르면 그가 배울 당시 백제무술이라 배웠고 그 안에 신술, 봉술, 검술, 암기술, 진법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검술을 중심으로 가르치며 처음에는 '태을신검술'로 지도하다 후에 '백제신검술', 최종적으로 '백제검술'로 칭하였다. 검술 안에 백제검술, 태을신검술등의 이름의 검술이 존재하고 각각의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검만 사용하는 무술은 아니고 봉이나 말굽이창, 무형도, 쌍협도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며 표창술, 독침술 ,면벽술, 목침술, 의표술, 투궁술과 신술(身術)이라는 맨손기술 같은 다양한 무술을 가르치며 심지어 축지법[3]도 가르친다. 18기나 합기도처럼 종합무술에 가깝다.
특이점이라면 도행 12검을 제외하면 대부분 조선시대 민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도구들을 무기로 쓴다는 점이 있다. 투궁술은 활, 무형검은 작두, 말굽이창은 낫, 표창술은 젓가락 등 평소에 무기인 걸 숨기고[4] 수련하기 좋은 도구들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의외로 진짜 망국 부흥세력의 무술다운 일면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도구들이 조선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서 굳이 조선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5] 작두나 낫, 젓가락 등은 일방적인 예시일뿐이고, 백제신검 전수자들의 언급 중에는 무형검 유래를 강영오로부터 직접 듣고, 강영오가 직접 제작한 무형검을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원래 모양과 강영오가 공개적으로 사용한 형태 두 가지가 있었고 현재도 보관중이라고 한다.
백제신검에서 표창술은 구하기 쉬운 대못으로 연습하였기에 젓가락 형태의 일자표창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강영오가 전한 표창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며, 일부 전수자들에게는 백제신검 스타일의 표창 모양과 실물이 전해졌다고 한다.
3. 평판
창시자 흑치상지를 시작으로 백제가 멸망했을 때부터 전해져 왔다고 강영오 본인이 주장하지만 역사적 증거는 매우 불충분하다. 실제 백제 무술인지에 대한 의문은 제쳐 놓고 보면 무술 자체는 독창적이며 매우 훌륭한 편에 속하나 강영오의 평판이 워낙 좋지 않아[6] 제자가 그리 많이 남지는 않은듯 하다. 강영오의 스승인 삼랑도인을 태백산에서 만나본 사람이 생존해 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최소한 강영오 본인이 아닌 강영오의 스승이라는 사람의 윗 대에서 창작된 무술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또한 명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백제신검이 유난히 택견인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는 건 도장에서 옛날부터 일관적으로 한복만을 입고 수련했던 탓도 있다.[7] 실제로 삼국시대 팔이하는 대다수의 창작무술들이 전통이랍시고 무슨 일본식 도복 입고 카타나 휘두르거나 중국식 창술 보여주던 걸 생각하면 적어도 한복 입고 환두대도나 국궁, 겸창 같은 전통무기를 사용하는 백제신검이 그나마 전통무술일 가능성이 높지 않냐는 논리이다.
영상을 통해 접한 사람과 실제로 배워본 사람 간의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무술인데, 영상으로만 본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강영오의 창작무술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실제 대면으로 접한 무술인들은 한 목소리로 진짜 전통무술이 맞는 것 같다고 주장한다. 이는 강영오가 영상 매체에선 자신의 비기를 조금씩 숨겨가며 시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강영오는 일부 전통무술단체와 달리 실전팔이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 2012년 세상에 이런일이에 출연한 영상을 봐도 강한 척은 커녕 허당스런 코믹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대신 자신의 무술이 흑치상지 때부터 내려오는 무술이라고 일관적으로 강조할 뿐이다. 도장 장사 이전에 자신의 무술에 대한 고집스런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지긴 했다.
택견 예능 보유자 정경화와 강영오가 '택견수벽검'이란 명칭으로 택견과 검술을 합치는 작업을 진행했으나, 정경화와 갈라진 후 이름을 다시 '백제신검'으로 지정했다. 강영오가 택견과 가까이 지낸 데에는 신한승과의 각별한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택견 외에도 일부 무술단체와 통합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무산되었다고 한다. 강영오는 생존 당시 택견 동작 중 백제무술 영향으로 차용된 동작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또한 증명되지 않는 강영오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사실 삼국시대 드립을 치는 비주류 무술들이 대부분 그렇듯, 현대창작무술이라는 관점이 대부분이나 백제신검은 단순한 사기꾼의 창작무술이라 보기만은 어려운 점 또한 많다는 문제가 있다. 백제신검이 강영오 개인의 창작무술이라면, 강영오는 시대를 앞서간 희대의 천재 재야 무예사학자란 얘기가 된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뜬금없는 부분들에서 역사적 고증을 잘해놨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당 무술이 백제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무술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나름의 전통을 가지는 제대로 된 무술이라고 주장하는 시각도 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부터 수없이 많은 백제부흥운동이 계속 활발하게 일어났었는데, 그 세력 중 하나가 창작한 무술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백제 땅에 살던 사람들이 개나소나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단 걸 감안하면, 그들의 수많은 창작무술들 중 하나가 현재까지 전해져 왔다 쳐도 딱히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백제신검이 진짜 백제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는 전제 하에서나 가능한 주장일 뿐이며 이에 따른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에 사실상 의미가 없긴 하다.
4. 계승 근황
강영오가 칠순이 되던 2019년 7월 2일에 그의 칠순잔치에서 48대 계승자를 정했다고 한다. 다음 계승자는 '정해흥'이란 무술인으로 택견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해흥 이전에도 계승자라 하며 지인들에게 소개해 준 제자가 몇 명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식 계승이 흐지부지됐다고 한다.2024년 11월 18일, 정해흥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백제무술협회(백제검술)"이란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정해흥의 시연 영상을 업로드했다. #
4.1. 강영오 사후
48대 계승자를 지정한 그해 11월 28일, 강영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결련택견협회의 회장 도기현에 따르면, 강영오의 친동생과의 통화로 사망사실을 접했고, 밤에 술을 먹고 귀가하다 계단에서 넘어져 쓰러진 것으로 파악되며 하루가 지나서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고 한다. 도기현은 제자인 황인무와 시신이 안치된 양평의 병원을 찾았고, 형편이 좋지않아 장례식장은 따로 잡지 않았다고 한다. # 시신 확인 후 바로 화장한 것으로 추측된다.이후 오재성 대한차력무술연맹 회장[8]이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48대 계승자의 진위여부를 의심하는 영상을 올렸다. # 오재성의 주장에 따르면 백제검술 계승자 지정은 여러명 있었고, 이중 기초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이 있는지에 대한 것과 강영오가 살아생전 자신에게 잘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오재성은 강영오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 정해흥의 제자는 댓글로 계승식에서 증서와 함께 화랑검술의 김상학, 해동검도의 손정식이 참고인으로 하여 계승식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에 오재성은 이 참고인들을 모른다고 주장했다.[9]
5. 기술 체계
5.1. 도행12검
동영상한 손만을 사용하는 외수검법이고 괴상하게도 다른 손으로는 칼집을 잡고 하는 형인데, 강영오가 사짜가 아니란 전제 하에 실전에서 미쳤다고 저렇게 싸웠을 리는 없고, 실제론 칼을 들고 싸울 때 한 손만 써야 할 일이 많다 보니 그걸 가정한 훈련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자세히 보면 칼집을 쥔 손으론 몸통을 감싸거나 가리는 동작을 하는데, 이는 해당 무술의 방어동작과 닮아있다.[10]
현실적으로, 검술이라는 것은 상대의 참격 혹은 찌르기를 막고 반격하는 것은 아주 기본이니 그러한 상황을 대비한 훈련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당 영상 및 하단의 영상은 모두 제자리에서 검을 휘두르는 등 실전적인 모습보다는 멋진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가짜 무술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서 실전 무술에서 예장용 무술로 변화한 것인지는 의문.
그러나 해당 영상과 밑에 있는 영상들은 백제검술에서 정해진 대로 훈련하는 투로이며 증언에 따르면 1대 다수의 자유대련도 선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백제신검은 특이하게, 2명이 맞추는 투로 또한 있다. 또한 실제 제자에 따르면 칼을 돌리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11]
5.2. 쌍협도
동영상역날검 이도류
5.3. 말굽이 창
동영상장병기. 낫 모양의 날이 달려 있어서 조선 수군이 쓰던 무기인 장병겸과 닮았다는 주장이 있다.
5.4. 무형검
동영상대도.
5.5. 투궁술
동영상
각궁을 사용하며 지중해식 사법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는 지적이 있는데,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약지랑 새끼손가락 사이에 시위가 없다. 지중해식 사법으로는 손가락이 저렇게 되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억지로 따라해 보려 해도 검지, 중지로만 당겨야 하며 심지어 (손등이 완전 측면이 아니라 살짝 사선을 봐서) 검지에만 하중이 실리기 때문에 쓰리핑거로 당겨서 얻는 메리트가 전혀 없다. 오히려 자세히 보면 만주식 몽골리안사법에 가까워 보인다. 정확히는 검지에 엄지를 거는 만주식과는 달리 엄지를 중지에 걸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런 오해가 생긴 건 깍지손 손가락이 언더쓰리가 아니라 어설프게 지중해식처럼 검지가 화살 위에 있는 것 때문으로 보이는데, 추측컨데 슬라빅사법과 비슷하게 화살을 누르기 위해 저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투궁술의 사법이 백제식 사법인지, 아니면 강영오 무사가 개인적으로 창작한 사법인지는 현재로썬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도 사실 신빙성이 꽤 높아 보이는 사법이긴 한데, 수렵도에 그려진 고구려식 사법을 보면 깍지손의 손등이 측면을 보는 만주식 사법과 비슷하게 쏘고 있기 때문. 백제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백제식 사법도 고구려식 사법과 비슷했을 거란 킹리적 갓심이 가능하다. 또한 고구려식 사법은 검지로만 엄지를 감싸쥐는 만주식 사법과 달리 네 손가락으로 모두 엄지를 감싸쥐었는데, 이건 위에서 강무사가 시연하는 궁체와 몹시 흡사하다.
5.6. 표창술
동영상다트. 쿠보탄이나 침형 수리검과 비슷하게 생긴 다트 랑 비슷한데 반대쪽인 촉 부분을 잡은 상태에서 반바퀴 또는 한바퀴 회전하도곡 던지는 등 전체적으로 오버핸드 나이프스로잉과 비슷하다. 한개부터 다섯개까지 한번에 쥐고 던지기도 한다.
6. 기타
사단법인 백제무술협회 다음 카페
[1]
백제검술 계보에 따르면 본명이 '노현선'이라고 한다.
# 1971년 노환으로 사망했는데 강영오는 당시 삼랑도인 밑에 있던 제자 4명 중 막내였다고 한다. 강영오 외 제자 3인은 모두 사망했다.
[2]
주변 사람들도 그를 무사라고 불렀다.
[3]
물론 여기서 말하는 축지법이란 보법을 체계화하여 고차원의 걸음걸이를 익히는 것으로 영화속의 허황된 축지법이 절대 아니다.
[4]
조선시대에도 개인이 소지하는 것이 허용되던 무기인 활은 제외.
[5]
사실 이건 일본무술도 마찬가지다. 중세 일본의 (군사용이 아닌 단순 가전무술용) 무기인
톤파는
멧돌 손잡이,
쌍절곤은
재갈,
쿠나이는
흙손에서 유래했다. 이들 역시 저것들이 평시에 무기라는 것을 들켜선 안 됐기 때문이다.
[6]
실제로 배운 사람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돈을 지나치게 밝혔다고 한다. 이는 강영오의 경제 사정이 넉넉치 않아 그런 듯 보인다.
[7]
사실 전통팔이하는 여러 창작무술들은 의외로 은근히 한복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 본인들이 전통무술(?)이라고 주장하는
대한검도회는 복장만큼은
하카마를 그대로 고집하며 검도장 다니는 아이들이 택견 수련하는 아이들의 한복을 보고 똥 싼 바지라고 놀린다며 이를 개탄하던
도기현의 칼럼도 있다.
[8]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로 유명한 배우
박남현의 스승.
[9]
사실 이는 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강영오와 관련된 언론 보도에서의 인터뷰를 읽어 보면 강영오 본인부터 눈에 띄게 후계자 지명을 조급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듯한데, 실제로 죽기 바로 전 년도에 후계자를 지명했다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든 본인 무술의 명맥을 이어줄 사람이 나오길 원했던 것 같다. 물론 강영오 본인부터 도장을 열었다 폐쇄하길 반복하면서 제대로 된 사승체계를 구축하지 못한 감은 없잖아 있긴 하다.
합기도로 치면
최용술과 비슷한 상황이라 볼 수 있는 셈.
[10]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고 실제 외수검을 사용하는 정도술에서도 칼집을 들고 검법을 하기 때문에 백제신검이 괴상하다고 할수 없다.
[11]
방어용으로 추측된다. 중국무술의 영향을 받았다면 쳐내거나 흘리는 기술일 수도 있지만, 제자의 말에 따르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