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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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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92222><colcolor=#fff> 배종대
裵鍾大 | Bae Jongdae
파일:배종대 대학교수.jpg
출생 1952년 7월 10일 ([age(1953-07-10)]세)
서울특별시
본관 경주 배씨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현직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안암법학회 명예회장
한국비교형사법학회 고문
한국형사정책학회 고문
한국형사법학회 고문
도서 1992년 형법총론
학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 /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법학 / 석사[1])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대학원 ( 법학 / 박사)
경력 2005.05~2006.03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회 위원

1. 개요2. 소개3. 생애4. 학문업적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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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이자 법학자. 또한 총64권의 도서를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2. 소개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학사 학위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독으로 유학을 가서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85년부터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교수로 봉직해왔다. 주전공은 형법, 형사소송법, 법 이론이다.

3. 생애

1952년 7월 10일에 출생하였다. 1970년에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하여 심재우 교수[2]의 지도를 받아 1979년 8월,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서독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거기에서 하쎄머 교수의 지도로 박사논문 "형법에서의 비례의 원칙(Der Grundsatz der Verhaeltnismaessigkeit im Massregelrecht des StGB)"을 썼다.[3] 1984년 7월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1985년 3월부로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기간에는 생명과 생계를 걸고 정권에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87년 6월 19일 고려대 동료 교수 17명과 함께 ‘민의는 확인됐다’라는 펼침막을 들고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농성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이로써 민주화운동 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 후로도 사회 진보적 이슈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당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들의 강의는 대부분 고루하고 현학적인 내용이었으며 권위적인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배종대 교수의 강의는 전혀 달랐다. 교재를 줄줄 읽는 식이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는 식으로 수업을 이끌어갔으며, 당시의 시국과 학생들의 앞날을 염려하는 이야기도 많이 하였다. 지나치게 이론적인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고, 실제로 문제되는 사례들을 위주로 강의하였으며, 유머 감각과 위트가 대단하여 수업시간 내내 학생들의 웃음이 터져나오게 하였다. 그 외에 학생들의 고민사항이 무엇인지 수시로 의견을 나누었으며, 힘든 청춘을 이겨낼 수 있도록 따뜻하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도 많이 하였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1990년대까지 배종대 교수의 인기는 고려대학교 내에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강의만 잘 한 게 아니라, 교내 보직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1994년 12월부터 1996년 9월까지는 고대신문 주간을 맡았고, 1996년 7월부터 1998년 6월까지 고려대학교 기획처장을 역임했다. 2002년 7월부터 2004년 6월까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장을 맡았고, 2005년 4월부터 2006년 3월까지는 고려대학교 교수의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교내에서뿐만 아니라 학계에서의 활약도 대단하였다. 다수의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고, 2005년에는 한국 형사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2006년에는 한국 형사법학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017년 8월 부로 정년퇴임을 맞이하여, 현재는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이다.

4. 학문업적

법학의 현학성[4]에 대한 문제의식이 매우 강렬하였다. 1988년 고시계에 '법이론 연구'라는 글을 투고하였을 때부터 줄곧 한자어보다 쉬운 우리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권위와 수준이 떨어진다는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이에 구애되지 않고 여러 지면을 통해 법학의 고고함, 현학성, 지나친 한자 사용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며 자기 소신을 밀어붙였다. 결국 그의 소신이 많은 학생들에게서 환영을 받자, 거의 모든 법학 분야의 논문과 교과서에서 한자표기는 자취를 감추었고, 한글표기가 법학계 전체에 걸친 대세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5]

그 외에 지나친 도그마틱 위주의 형법학교육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교과서 범죄가 형법 교과서 내용의 대부분을 채운다는 점, 형법 교과서나 논문의 문장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 지나치게 독일과 일본의 형법이론을 추종한다는 점,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형법이론의 정립을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계속해서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우리나라의 법학 현실의 문제점을 너무나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많은 소장 학자들과 학생들에게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992년에는 기존 형법학을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까지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직접 형법총론 교과서를 저술하고 발간하기까지 하였다. 그 교과서는 여러 모로 수많은 형법학자들과 학생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 그 이유는 교과서 서문은 물론이고 본문의 첫장부터 그 문장 하나하나가 완전히 '깬다'는 데 있었다. 한 권의 법학교과서가 아니라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문장이 쉽고 재미있고 간결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흡인력이 있어 책장이 잘 넘어갔고, 형식도 워낙 새로워서 기존 교과서의 모든 틀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형법 교과서는 기존의 다수설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다수설을 샅샅이 비판하였지만, 그러면서도 그 비판에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교과서 전체적으로 구름 잡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나 '구라' 섞인 부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철저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오직 논리적인 도구만을 사용하여 자기 학설을 개진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쉽고 재미있고 간결한 문장에 지나치게 힘을 쏟을 경우 학문적 수준이 떨어질 염려도 있었지만, 교과서의 이론적 완결성 역시 흠 잡을 데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배종대 교수의 형법학에 열광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형법 전공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6]

5. 여담



[1] 석사 학위 논문: 目的的 行爲論의 過失犯 體係에 關한 批判的 考察 (1976) [2] 고려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법철학과 형법을 강의했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장과 법학연구원장, 한국형사법학회장을 역임했다. 2019년 9월 28일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3] 매우 잘 쓴 논문으로 심사위원들로부터 최우수의 점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후 수많은 독일 형법학 논문에서 인용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독일 유학파 법학 교수들은 독일에서의 박사 학위 논문 점수가 최하점으로서, 간신히 박사 학위만 받고 귀국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4] 玄學(현학): 학식이 있음을 자랑하다. [5] 나아가 2021년부터는 변호사시험용 법전도 전면 한글표기가 이루어졌다. [6] 물론 이는 배종대 교수만의 공은 아니며, 당시 김일수 교수가 개신교 계통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크리스천 법학도들에게 영향을 준 것 역시 원인이 되었다. 1994년에 고대 교수로 임용된 이상돈 교수가 갖고 있던 개인적 인기도 배종대 교수를 능가할 정도였다. [7] 아마도 배종대 교수는 출제오류로 소송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법학교수들이 곤욕을 치르는 게 못마땅하여 짜증이 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출제를 잘못한 교수들의 자업자득일 뿐이며, 이를 교수들의 학문세계에 대한 무시로 봐서는 안 된다 할 것이다. 배종대 교수가 뭔가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부분이고, 이 정도면 현실감각이나 학생들과의 소통의지를 거의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배종대 교수의 괴팍한 주장과는 달리, 이러한 출제오류의 문제는 학문적 논쟁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