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Mutiny on the Bounty1789년에 일어난 선상반란 사건.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선상 반란사(?)에서 드물게 사실상 성공[1]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한데다 동기의 특이함, 그 전개의 드라마틱함, 최후의 비극성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여러 문학작품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2. 사건 경위
2.1. 바운티 호에 관해
바운티 호는 원래 1784년 ‘베티아’라는 이름의 화물선으로 건조되었으며 1787년 영국 해군이 매입하여 바운티(H.M.A.V. Bounty)로 개명하였다. 돛대는 3개, 길이 28m, 폭은 7.6m, 적재량은 230톤이었다. 무장으로는 4파운드 대포 4문, 0.5파운드 대포 10문, 그리고 머스킷 같은 개인 화기를 장비했다. 해군 함정으로는 가장 작은 축에 속하였기 때문에 해군 규정상 장교는 함장 1명만 배치되었다. 규모가 큰 군함에는 보통 상륙작전과 선내 규율 유지, 반란 진압의 목적으로 해병대가 배치되었으나 바운티 호는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 바운티 호는 왕립 학회(Royal Society)로부터 타히티로 가서 빵나무를 받아 서인도제도로 수송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빵나무는 값이 싸고 잘 자라서 그 열매가 노예들에게 먹일 음식으로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약 1000그루의 빵나무를 실어 물을 주고 기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승조원들이 운신할 공간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해 승조원들이 과밀화됨으로써 나중에 오랜 항해 기간 동안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이 되었다.1787년 8월 16일 유명한 제임스 쿡 선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해에 수석 항해사로 동행한 해군 위관급 장교인 윌리엄 블라이(William Bligh, 1754~1817)가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블라이는 플리머스 태생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해군 집안이었다.
바운티 호의 탑승자는 총 46명으로서 44명은 승조원, 2명은 민간인이었다. 블라이 휘하에는 여러 간부 승조원들이 있었는데 그 중 최선임자는 해군성에 의해서 임명된 준사관 존 프라이어(1753~1817)였다. 바운티 호의 선원들의 대부분은 블라이가 직접 뽑거나 추천받은 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페코버, 조셉 콜먼은 쿡 선장 밑에서 블라이와 함께 HMS 리졸루션(Resolution) 호에 동승했던 자들이었다. 다른 승조원들도 블라이와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23세의 플레처 크리스천(1764~1793?)은 젠트리 계급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저명한 판사 겸 동인도회사대학의 법학 교수였던 그의 형 에드워드 크리스천을 비롯해 그의 집안 출신들은 법률가들이 많았으나 그는 스스로 해군을 택했다. 크리스천은 블라이와 함께 서인도제도로 두 번 함께 항해한 적이 있었으며 블라이로부터 항해술을 배웠다. 크리스천은 보수도 받지 않고 바운티 호에 승선했다. 바운티 호의 승조원들은 대부분 30살 미만이었고 블라이는 33세였다. 탑승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장교 | 사병 | 사병 | |||||
이름 | 직위 | 이름 | 직위 | 이름 | 직위 | ||
윌리엄 블라이 | 함장 | 피터 링클레터 | 조타부사관 | 마이클 번 | 일등수병[2]/ 군악병[3] | ||
존 프라이어 | 준사관, 항해장 | 존 노튼 | 조타부사관 | 토머스 엘리슨 | 일등수병 | ||
윌리엄 콜 | 준사관, 갑판장 | 조지 심슨 | 조타병 | 윌리엄 맥코이 | 일등수병 | ||
윌리엄 페코버 | 준사관, 포술장 | 제임스 모리슨 | 갑판병 | 아이삭 마틴 | 일등수병 | ||
윌리엄 퍼셀 | 준사관, 목공장 | 존 밀스 | 장포병 | 존 밀워드 | 일등수병 | ||
토머스 허건 | 군의관 | 찰스 노먼 | 목공병 | 매튜 퀸틀 | 일등수병 | ||
플레처 크리스찬[4] | 항해사 | 토머스 맥킨토시 | 목공병 | 리처드 스키너 | 일등수병 | ||
윌리엄 엘핀스톤 | 항해사 | 로렌스 리보그 | 장범병 | 존 윌리엄스 | 일등수병 | ||
토머스 레드워드 | 의무병 | 찰스 처칠 | 전투원 | 존 애덤스 | 일등수병 | ||
존 홀릿 | 견습사관 | 조셉 콜먼 | 병기병 | 존 섬너 | 일등수병 | ||
토마스 헤이워드 | 견습사관 | 존 새뮤얼 | 행정병 | 매튜 톰슨 | 일등수병 | ||
피터 헤이우드 | 사관후보생 | 존 스미스 | 함장 당번병 | 제임스 발렌타인 | 일등수병 | ||
조지 스튜어트 | 사관후보생 | 헨리 힐브런트 | 음료병 | ||||
로버트 팅클러 | 사관후보생 | 토머스 홀 | 조리부사관 | ||||
에드워드 '네드' 영 | 사관후보생 | 로버트 램 | 정육병 | ||||
데이비드 넬슨 | 식물학자(민간인) | 윌리엄 머스프랫 | 조리병 | ||||
윌리엄 브라운 | 정원사(민간인) | 토머스 버킷 | 일등수병 |
해군성은 블라이에게 또다른 임무를 주었는데 그것은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항로가 아직 미개척된 상태이므로 조사를 겸해서 케이프 혼으로 가서 타히티를 들러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세계일주를 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여의치 않을 경우 함장 재량으로 남아프리카 희망봉으로 먼저 가는 항로를 택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2.2. 항해
1787년 11월 28일 바운티는 영국에서 출발했다. 블라이는 선내 여러 규정, 특히 식사 배급과 청소에 있어 지독하리만큼 엄격하게 감독했다. 항해 초기에는 함장 블라이와 항해사 크리스천의 사이가 좋았다. 1788년 3월 2일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임시 장교(acting lieutenant)[5]로 임명했다. 서열 2위인 존 프라이어는 장교가 아니라 준사관이었으므로 순식간에 크리스천보다 서열이 낮아져 버렸다. 프라이어는 이에 대해 겉으로는 불만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블라이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6] 그로부터 1주일 후 프라이어의 건의로 최초의 체벌이 일어났는데 그 대상은 매튜 퀸틀 일등수병이었다. 죄목은 불손한 태도와 반항적인 행동으로 12대의 채찍질을 받았다. 1788년 4월 2일 바운티 호는 케이프 혼에 접근했지만 기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블라이는 항해일지에 "내가 여지껏 겪은 폭풍우 중 최악이다. 우박과 진눈깨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고 썼다. 배는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북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4월 17일 결국 블라이는 케이프 혼 항로를 포기하고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항로를 선언했다.1788년 5월 24일 바운티는 희망봉 동쪽의 폴스 만(False Bay)에 정박하여 5주 동안 수리와 보급을 하였다. 체류하는 동안 블라이는 크리스천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혹자는 이게 나중에 관계 악화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7월 1일, 바운티 호는 호주 남부의 태즈메이니아를 목적지로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여전히 날씨는 추웠고 시계가 나빠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블라이는 노련한 함장이었기 때문에 8월 19일 태즈메이니아의 어드벤처 만(Adventure Bay)에 성공적으로 정박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휴식도 하고 물과 나무를 보급했는데 블라이는 여기서 슬슬 본래의 까칠한 성격에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나무를 베는 방법이 마음이 안 든다며 목공장 퍼셀을 질책하다가 당장 배로 돌아가라며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게다가 퍼셀에게 배급을 끊어서 굶겨 버렸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젠트리(gentry)가 상대를 대할 때 상대가 평민 계급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지만 같은 신사 계급끼리는 아무리 상관-부하 관계라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었다. 이를테면 함장이 15살의 사관후보생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Mr.를 붙여서 불러야 했으며 완곡히 부탁하는 형식의 어법을 써야 했다. "Mr.스미스! 부탁 하나 하지. 사관실에 가서 Mr.헤이우드에게 갑판으로 올라오기를 정중히 요청한다고 전해주겠나?"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평선원도 아닌 신사계급의 간부를 남들이 보는 앞에서 질책하고 밥까지 굶겨 버리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목공장 등 준사관은 보통 말단 수병에서 진급해 올라온 대개 낮은 신분 출신이지만 장교 대우를 받는 신분인 만큼 임관하게 되면 신사 계층의 일원으로 대접받는 게 보통이었다.
10월 9일에는 프라이어가 블라이가 바운티 호의 회계 장부에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 한 자신은 장부를 작성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군의관 허건(Huggan) 박사는 알콜 중독자였는데 제임스 발렌타인 일등수병의 천식을 치료하던 중 혈액 감염으로 사망하게 만드는 의료사고를 냈다. 그러고는 블라이에게는 발렌타인이 괴혈병으로 사망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블라이는 식단에 따라 괴혈병이 발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모두에게 똑같은 식단이 제공되는데 발렌타인만 괴혈병으로 죽었다는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허건은 즉시 술을 모두 압수당했다. 타히티에 도착이 다가오자 블라이는 허건에게 명령해 승조원들의 성병 검사를 실시했으나 모두 음성이었다.
1788년 10월 26일 바운티 호는 드디어 타히티에 정박했다. 항해 거리는 50,163km였다.
2.3. 타히티
타히티 원주민들은 바운티 호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영화 클립 타히티인들은 쿡 선장의 방문 이래 대대로 유럽인들에게 친절히 대해 왔다. 그들은 흰 피부를 가진 유럽인들을 신격화했고 특히 쿡 선장 같은 고위직은 불멸의 존재로 여겼다.타히티 왕국은 여러 부족이 있었고 포마레 1세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타이나(Tynah) 추장은 15년 전 쿡 선장과 같이 타히티를 방문했던 블라이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블라이는 타이나에게 거울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신기한 물건들을 조지 3세 국왕 폐하의 선물이라며 주었다. 타이나가 답례로 무엇을 주면 좋겠냐고 물으며 바나나, 야자, 빵나무 등 뭐든지 주겠다고 하자 블라이는 " 빵나무 그거 좋겠네요. 빵나무만 주시면 됩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타이나는 어이가 털린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크게 웃었고 주변의 원주민들도 따라 웃었다. "널린 게 빵나무니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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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나 족장과 주변의 원주민들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는 일화는 문화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타히티를 비롯한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은 부족사회 특유의 증여-답례 문화를 아주 중요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증여-답례 문화 아래에서 우호적인 개인이나 집단간에 주고받는 선물과 답례는 서로의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다져나가는 매개이고 폴리네시아 부족들의 경우 이를 지속적으로 행하여 관계를 유지하는 전통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7]
이 관점에서 보면 타이나 족장이 블라이 선장에게 "답례로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어본 것도 사실은 예의에 어긋난 일인데 이러한 증여와 답례는 서로 알아서 상응하는 가치의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지 받는 이가 "나는 이걸 받고 싶다" 고 직접 말하는 것은 큰 실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상대가 무례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을 하는 것도 당연히 큰 실례다. 다만 이는 블라이 일행이 워낙 먼 곳에서 온 손님이니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실례를 감수하고 솔직히 물어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블라이의 대답에 웃어 버린 것은 먼 땅에서 온 신기한 선물의 답례로 너무 흔한 물건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증여-답례의 문화에서 답례는 선물의 가치에 상응해야 하는데 자신들이 요구받은 답례의 가치가 너무 작아 보여 당황한 것이다. 손익계산으로 따진다면 답례할 수 없는 큰 대가를 요구받은 것보다 이익이긴 하지만 자신들에게 익숙한 증여와 답례의 상례가 깨진 것에 당황하여 어이없어했다고 보면 된다.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빵나무 묘목이 담길 화분의 흙을 만드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1788년 12월 10일 군의관 허건이 사망했다. 바운티 호는 타히티에 5개월 동안 머물 예정이었는데 선원들에게는 선상 생활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이었다. 원주민들은 성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어서 선원들은 원주민 여성들과 매일 파트너를 바꿔 가면서 난잡한 관계를 가졌고 크리스천을 포함해 18명이 성병에 걸렸다. 크리스천은 마우아투아(Mauatua)라는 원주민 여성과 사귀었는데 자신의 옛 애인의 이름을 따 '이사벨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블라이는 원주민 여성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부하들에게는 교제를 허락했는데 처음에는 일만 잘하면 그 정도야 눈 감아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부하들의 나태함이 도를 넘어서자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 날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평생 이런 부하놈들은 처음이다." 그 분노의 타겟은 크리스천을 향해가고 있었다. 크리스천이 이사벨라에 빠지고 업무를 소홀히 하는 등 나태함을 보이자 블라이는 다른 부하들과 타히티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질책했다. 영화 클립
승조원들은 일하면서 삽, 곡괭이, 로프 등 장비를 잃어버렸는데 이것은 해군 규정 위반이었다. 블라이는 채찍질을 명령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고 1789년 1월 5일 견디다 못한 처칠, 밀워드, 머스퍼랫 세 명의 수병이 소형 보트와 화기와 탄약을 가지고 탈영했다. 블라이는 이 탈영을 간부인 크리스천과 헤이우드가 막아야 함에도 도리어 돕거나 묵인했다고 강하게 의심했다. 처칠, 밀워드, 머스퍼랫은 3주 후에 잡혔고 바운티 호 함상에서 엄청난 채찍질을 당했다.
1789년 2월에 빵나무가 다 자라 1,000개의 묘목이 선실을 가득 채웠다. 타히티에서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껏 함장과 승조원들 간의 갈등, 타히티에서의 꿈 같은 시간, 앞으로의 절망적인 함상 생활 등을 고려하면 다가올 파국은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1789년 4월 5일 바운티 호는 타이나 추장과 원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타히티를 출항했다.
2.4. 출항
블라이의 편집증적인 지휘와 분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 분노의 표적은 주로 플레처 크리스천을 향했다. 블라이는 자신의 분노가 부하들에게 점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모르고 화를 낸 직후 또 정상적인 대화를 재개하려고 하는 태도를 반복했다.1789년 4월 22일, 바운티 호는 통가 제도의 노무카에 당도했다. 거기서 엔데버 해협을 지나기 전 마지막으로 목재, 물 같은 보급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블라이는 예전에 쿡 선장과 함께 노무카에 온 적이 있어서 그곳의 원주민들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보급품을 구해오는 책임자로 임명하고 원주민들이 위험하니 정박한 보트에 소총과 같은 무기를 가진 보초들을 세워두도록 지시했지만 크리스천은 그 지시를 어겼고 원주민들이 보트를 공격하려 하자 보급품 채취를 그만두고 서둘러 복귀해 버렸다. 블라이는 크리스천에게 "이 빌어먹을 겁쟁이 같은 놈!"이라며 크게 분노하였다. 크리스천 일행이 보트를 비운 사이 원주민들이 보트에 있는 여러 도구들을 훔쳐 달아나 블라이는 원주민 족장을 잡아서 문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4월 27일, 크리스천은 그동안의 블라이의 갈굼에 지쳐 넋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크리스천이 일을 하다가 목이 말라 블라이가 개인용으로 따로 떼어 둔 코코넛을 훔쳐 마셨는데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체 승조원의 럼 배급을 중단하고 식량 배급을 절반으로 줄여 버렸다. 크리스천은 이제 탈영을 생각하며 근처 섬으로 가기 위한 보트를 만들기 위해 목공장 퍼셀에게 나무를 달라고 했다. 크리스천의 이상 행동을 눈치챈 사관후보생 조지 스튜어트와 에드우드 영이 크리스천에게 "배를 탈취하면 대부분의 승조원들이 당신 편에 설 것이다."라며 그를 부추겼다. 특히 스튜어트는 "승조원들은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었다."고 크리스천에게 말했다.
결국 출발한 지 20여일만인 1789년 4월 28일 크리스천의 주도 하에 반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게 됐지만 한때 친구였던 블라이를 크리스천이 죽이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승조원 중에는 함장과 사이가 안 좋은 존 프라이어도 있었다. 반란은 제일 신임하는 부하가 일으키고, 정작 제일 싫어하던 부하가 자기 편을 든 아이러니함이었다. 크리스천과 반란자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승조원들 중 블라이를 포함한 18명을 구명정 1척에 실어 망망대해로 떠나보냈는데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일부는 구명정이 좁아 탈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바운티에 남아야 했고 이들은 이후 블라이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여 처벌받지 않았다. 크리스천과 반란자들은 바운티 호를 몰고 타히티로 돌아갔다.
블라이 함장 등 18명을 태운 보트에 야유를 퍼붓는 반란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반란자들은 이들을 추방하며 그간 자신들의 거주구를 잡아먹던 지긋지긋한 빵나무 묘목들을 전부 바다에 던져 버렸다.
2.5. 반란 이후
블라이 함장과 그의 부하들은 40여일간 태평양을 무려 3,800마일(6,000km)을 방황한 끝에 1789년 6월 14일 티모르의 네덜란드령 항구인 쿠팡(Kupang)에 도착했다. 그 동안에 여러 사람이 아사했으며 식료품을 구하러 상륙했던 토푸아에서 원주민의 습격을 받아 조타부사관 피터 링크레터가 사망했다. 쿠팡에 도착한 즉시 함장은 네덜란드 관청에 반란에 대해 보고했고 이 소식은 영국 본국에 전해졌다. 생존자들은 거의 아사 직전이었기 때문에 약 2개월간 네덜란드 측의 도움으로 쿠팡에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렸는데 여기서 몸이 너무 쇠약해져있던 식물학자 데이비드 넬슨(David Nelson) 박사가 죽었다. 생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8월 20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도 바타비아로 떠났으며 10월 16일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몸이 쇠약해져 있었던 4명이 추가로 사망한다. 1790년 3월 14일 블라이 함장은 영국에 도착했다. 1년여동안 군사재판을 받은 끝에 블라이 함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영국은 해양 국가로서 국가의 근간이 해상 무역과 제해권에 있기 때문에 해적 행위, 선상 반란에 대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때문에 반란자들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잡아냈으며 영국 해군성은 이 반란에도 예외없이 에드워드 에드워즈(Edward Edwards) 함장이 지휘하는 프리깃 H.M.S. 판도라(Pandora) 함을 파견해 반란자 색출에 나섰다. 반란자들의 말로는 뻔했다. 당시 지구상에서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곳에 들어가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발각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일부가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반란 이야기가 유명해졌다.
반란을 전후한 이동 경로다. 붉은 선은 처음 바운티 호가 빵나무를 채취하기 위해 타히티로 향하고 이후 반란이 일어날 때 까지의 항로다. 초록색 선은 보트로 쫒겨난 블라이 함장 일행이 쿠팡까지 표류한 항로고 노란색 선은 반란 이후 크리스천이 이끈 반란 선원들의 항로다.
반란자들은 일단 타히티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무리는 타히티에 정착했고 다른 무리는 영국 해군이 찾을 수 없도록 핏케언 제도의 무인도인 핏케언 섬[8]에 도착하여 바운티 호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고[9] 그 곳에 정착했다. 반란자들 외에 구명정의 공간 문제로 타지 못한 반란 미가담자들도 일단 타히티에 남았다. 핏케언에 정착한 자들은 백인 남자 9명, 원주민 남자 6명, 원주민 여자 11명, 여자 아이 1명으로 총 27명이었다. 1791년 3월 21일, 판도라 함이 타히티에 도착했고 승조원들과 영국 해병대가 한 달여간에 걸쳐 섬을 토끼몰이하듯 포위하여 중심으로 수색해 들어간 결과 14명의 반란자들을 잡아들였다.
판도라 함은 나머지 반란자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몰랐기 때문에 사모아, 통가 등 남서 태평양의 섬들을 무작정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핏케언 제도는 해도(Chart)에 아직 안 나타나 있었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 결국 나머지 반란자 색출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가기 위해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1791년 8월 30일 아침 암초가 많기로 유명한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서 암초에 난파되고 말았다. 여기서 31명의 승조원과 4명의 죄수가 익사하고 에드워즈 함장 등 89명의 승조원과 10명의 죄수는 살아남는다. 이들은 4대의 구명 보트에 나눠타고 2년 전에 블라이 함장이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항해했던 길을 그대로 재연하여 쿠팡에 도착하게 된다.
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쿠팡에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배를, 희망봉부터 영국까지는 군함 HMS 고르곤(Gorgon) 함을 타고 귀향했다. 에드워즈 함장은 이후에도 계속 해군에 남아 해군 대장( Admiral)까지 진급했다.
최종적으로 영국에 도착한 10명의 죄수는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4명은 무죄, 6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교수형을 당한 건 3명뿐이었다. 사관후보생 피터 헤이우드는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유력가문[10]의 자제였기 때문에 좋은 변호사를 사고 빽을 썼다. 재판부[11]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고 판도라 함이 도착했을 때 즉시 투항했기 때문에 이런 '여러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국왕 조지 3세에게 사면을 건의했다. 그는 결국 사면받고 정규 장교로 임관까지 했으며 함장까지 올랐다. 그러나 선상반란 사건에 연루된 것을 해군 수뇌부가 탐탁찮게 여겼는지 끝내 제독에 오르지 못하고 44세에 퇴역했는데, 실제로 당시 언론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이 많았다. 갑판병 제임스 모리슨도 정상이 참작되어 사면받았다. 윌리엄 머스퍼랫 일등수병도 결국 사면되었다. 1792년 10월 28일 사형 판결을 받은 버킷, 엘리슨, 밀워드 총 3명의 수병이 군함 HMS 브런즈윅(Brunswick) 함의 돛대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다.
핏케언 제도에 정착한 반란자들은 같이 간 원주민 남자들을 노예로 부려먹었기 때문에 1793년에 이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죽인 끝에 성인 남자 대부분은 사망했으며 1808년 미국 포경선 토파즈 호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성인 남자는 존 애덤스 일등수병 1명만 남아 있었고 성인 여자 8명과 어린이 19명만 있었다. 이 소식은 1810년에 영국에 전해졌는데 이때는 나폴레옹 전쟁 탓에 정신 없었기 때문에 군함을 보내 잡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1814년에 영국 군함 두 척이 다시 핏케언에 상륙, 조사하여 보고서를 올렸는데 해군성은 반란자들이 애덤스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으므로 그냥 놔두기로 하고 애덤스는 사면했다. 반란 주도자 크리스천은 애덤스의 증언에 따르면 1793년 폭동 때 살해당했다.
1916년, 핏케언 섬을 방문한 영국 해군 함정에서 촬영된 핏케언 섬 정착자들의 후손들. 이 때 섬의 인구는 약 150여명으로 추정된다. 다시 100년이 지난 2010년대에는 6배인 1천 명이 됐다. 하지만 정작 지금도 핏케언 섬에 사는 인원들은 그 중에서도 소수다.
이후 이 반란이 누구의 책임인가가 여러 번 회자되었는데 재판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블라이 함장은 군사재판에서 무죄로 인정받았고 태평양에 한 번 더 갔다 와서 기어이 빵나무를 카리브 해 제도에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공적으로 나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뉴 사우스웨일스 주 총독의 자리에 오르지만 또 반란에 연루되어 불명예 사임했다. 이 반란을 '럼 반란'(Rum Rebellion)이라고 부르는데 사건 자체가 럼주와 관련이 깊었기 때문이다. 당시 뉴 사우스웨일스 북부와 퀸즐랜드 주 지역에서 사탕수수 재배와 럼 제조업이 꽤 번성했는데 이를 노린 럼 밀수가 기승을 부리자 이를 단속하기 위해 블라이가 총독에 임명되었지만 블라이는 그 고집스러운 원칙주의를 또 발휘해서 강경책으로 일관하였고 현지 출신 병사들에게 큰 불만을 사서 결국 럼의 공정한 배분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블라이의 후임으로 총독 자리에 오른 래클런 매쿼리(Lachlan Macquarie)는 정책을 바꿔서 체포된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그 중 일부를 현지 관리로 임명하는 등의 유화책을 폈고 이는 효과가 있어서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렇게 2번씩이나 굵직한 반란사건들을 유발한 블라이에 대하여 영국 언론은 비겁자, 폭군이라고 매도하면서 시사 만화로 신나게 깠고 상부에서도 이 인간을 계속 등용했다간 또 반란을 유발시켜 골치아프게 만들 거라고 판단, 결국 노골적인 푸대접 속에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한직만 전전하다가 1817년 고향의 가족들 앞에서 향년 63세로 사망했다. 블라이 본인은 반란 사건 때도 억울하다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고 징징거렸고 죽을 때까지 내가 뭔 잘못이냐고 그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2.6. 원인
당시 민간 선박의 승조원들은 대부분 1회성 계약직이었고 군함도 대동소이하였다. 오히려 군함에 타게 되는 수병들이 더 막장인 경우가 잦았다. 전투 중 죽을 것을 두려워해 기피했기 때문이다. 민간 상선이든, 군함이든 새 선원을 충당하기 위해 만취해 곯아떨어진 사람을 태워 놓고 깨기 전에 출항한다든지 밤거리에서 두들겨 팬 다음 억지로 끌고가 태우는 방법이 드물지 않았다. 물론 다른 배가 다 출항해 버려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는 때도 있었다. 조선군만 수병을 기피했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관심있는 사람들은 해양학회지나 관련 논문을 찾아보자. 간단히 언급하면 상선에 탔던 사람이 항해를 끝내고 나면 해적선에 타고 그 다음엔 해군함에 탔다가 다음엔 상선에 타는 식이었다.신대륙 발견 이후 여러 세월이 흐른 이 시기에도 사실상 선원은 인생 막장 직업군 가운데 하나였다. 오랜 항해의 고됨부터 툭하면 일어나는 사고까지 있었으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선원은 별로 없었고, 배를 타겠다는 꿈을 가지는 사람 역시 드물었다. 정말 막장에 막장까지 가서 배에 타거나, 강제로 타게 된 선원들의 질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원은 항로를 보고 항해계약을 할지 안 할지 결정했다. 당시 배의 성능이 성능인지라 선원으로서 어느 정도 생활하다 보면 대부분 거기서 거기만 다니게 되기 때문에 어느 항로로 가는지 알면 난도가 예상된다. 그런데도 이런 사태(대부분의 선원이 초행)가 일어난 이유는 앞의 주에서 언급했던 승선 절차 때문이었다. 정식 절차는 해변에서 계약자와 구직자가 출항 날짜와 항해 기간, 항로와 항해 목적, 임금이 명시된 계약서에 사인한 뒤 승선하는 것이었다. 계약 내용상의 항해 기간을 벗어나거나 명기된 것 이외의 목적으로 항해하거나 항로를 벗어날 경우 계약을 파기하고 중간에 내리거나 이럴 경우의 추가 임금까지 계약서에 명기하기도 했으나 선원 대부분이 문맹이었고 어떻게든 배에 태우고 먼 바다까지 나온 뒤에 작성하(게끔 강요하)거나 그것조차 없이 구두로 계약(사실상 통보)을 끝내기도 했다. 게다가 초기에는 계약서조차 없었다. 더 심하면 아예 외국 선적의 상선이나 사략선을 붙잡은 뒤 선원들을 강제로 자신들의 선박에 태우기까지 했다. 한 예로 영국 해군은 독립한 미국 국적의 상선 선원들을 이런 식으로 납치해 수병으로 부려서 미영전쟁이 발발한 원인 중 하나를 만들었다.
영국 해군의 선상 반란에는 의외로 유구한 역사가 있다. 스핏헤드, 노어 군항에서 수병에서 장교들까지 가담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처우가 개선되기도 했다.[12]
20세기에도 인버고든 항에서 수병들이 봉급 삭감을 반대하는 파업인 인버고든 항명을 일으킨 적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과도한 전비 부담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행정부가 봉급을 삭감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의 파업이란 게 반란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바운티 호의 사건은 반란이 맞지만 스핏헤드, 노어, 인버고든 등의 사례는 반란이 아닌 파업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봉급 문제로 자기가 맡은 일을 안 했을 뿐 장교에게 해를 가하거나 정부를 향해 총부리를 돌린 것도 아니었으니. 다만 노어는 절대로 들어 줄 수 없는 정치에 관련된 요구를 내민 데다 나중엔 적국으로의 도주까지 시도했기 때문에 단순 가담자들은 처벌하지 않아도 주도한 자들은 모두 사형이나 유형(오스트레일리아 유배행) 등의 엄벌을 받았다. 프리깃 HMS 허마이어니 함의 반란도 있는데 이것은 함장이 워낙 수병들을 잔혹하게 다뤄 결국 수병들이 함장과 일부 장교들을 살해하고 남은 장교들과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승조원들은 보트에 태워 버린 후 외국으로 도주한 사례로 영국 해군은 몇 년간 이들을 추적해 수십 명을 체포해 사형시키거나 유형을 보냈다.
3. 영화화
자세한 내용은 바운티호의 반란(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4. 반란자의 후손들
핏케언 제도에는 이들의 후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유명해져 외부의 동경을 한껏 받고 있지만 섬 사람들은 작은 사회 특유의 기질로 외부 사람들의 상륙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허락도 잘 하지 않았는데 섬의 소박한 생활을 방해받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외부인의 상륙을 막은 결정적인 원인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시도였음이 결국 밝혀졌다. 한편 섬의 인구증가 문제가 대두되자 상당수가 1856년에 노퍽 섬(Norfolk Island)으로 이주했다. 2010년대에 바운티 호의 반란자들의 후손은 1천 명 가까이 되지만 지금은 노퍽 섬,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와 뉴질랜드에 95%가 살고 있고 핏케언 제도에는 50명 정도만 남아있다. 영어 위키백과 참조5. 이야깃거리
- 결국 자메이카로 들여온 빵나무는 그 곳에서 고향에서처럼 잘 자랐지만 문제가 있었다. 노예들이 그 빵나무 열매를 역겨워해서 먹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쌩고생이 모두 헛짓거리였다는 이야기다.
- 주니어 학습만화 앗! 시리즈의 7권인 '식물이 시끌시끌'에서 이 선박에 같이 탄 식물학자 데이비드 넬슨[13]의 시점에서 기록한 편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 《 심슨 가족》의 시즌 17 에피소드 18의 이야기 중 하나가 바운티호의 반란에서 소재를 따왔다. 시모어 스키너가 블라이 선장으로 나오고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은 바트 심슨을 필두로 한 스프링필드 초등학교 학생들로 나온다. 타히티 왕이 호머 심슨과 마지 심슨으로 나오는 건 덤. 평소 선원들을 갈구던 스키너 선장에게 불만을 품었던 선원들이 반란에 성공한 것까진 좋았는데 '다시 타히티로 가자, 선장의 흔적은 전부 없애 버리겠다'면서 타륜을 뽑아 버리는 바람에 결국 이들은 타히티는커녕 표류하다 남극까지 가 버렸고 해당 에피소드의 다른 꼭지에 유령선이 되어 버린 그들의 모습이 나온다.
- 미국 CBS 경쟁 리얼리티 서바이버(TV시리즈)/시즌13 쿡 아일랜드의 에피소드 9편을 보면 "가장 유명한 선상 폭동(Mutiny) 사건은 무엇인가?"라는 퀴즈가 나온다. 미국에서는 당연한 상식인지 다들 쉽게 맞춘다.
- 1962년작 영화의 촬영을 위해 MGM이 1960년에 건조한 실물 선박이 있다. 다른 영화에서 사용된 선박은 대개 타 범선을 살짝 개조한 것이지만 MGM은 62년작을 위해 역사적인 HMS 바운티 호를 모티브로 완전히 새로 건조했고 그래서 배의 이름도 바운티 호다. 다만 영국 해군을 위해 건조한 것은 아니므로 명칭에 HMS는 붙지 않는다. 편의를 위해 실물 선박보다 사이즈를 조금 키우고 디젤 엔진과 배터리, 청수 탱크 등의 현대 편의 시설도 약간 넣었다. 그러나 실제로 작동하는 엄연한 범선이기도 하다. 촬영 현장인 섬까지 스스로 직접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 그냥 실 작동 범선으로 만들었다고.
- 원래 촬영 마지막에 불태우는 장면에서 실제로 태우기로 했으나 말론 브란도가 크게 반대해서 보존하기로 했고 이후 소유권이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각종 범선 영화에서 촬영용으로 자주 써먹었다.[14]
테드 터너가 MGM을 인수할 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배를 필요로 하는 재단에 기부한 후 최종적으론 바운티 호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재단으로 넘어간다. 촬영용으로 쓰지 않을 때는 해양 모험과 옛 범선을 모티브로 관광객을 모으는 용도로 쓰였다. 그러나 연식도 오래되고 재단 재정도 좋지 않고 배 스스로 돈을 모을 집객력도 떨어져 서서히 관리가 어려워져 갔으며 재단에서 일하는 아마추어들의 손에 의해 부실하게 수리되어 점점 상태가 나빠졌다. 21세기 들어서는 여러군데 썩은 곳이 발견되고 빌지 펌프가 고장나거나 새는 곳이 발견되지만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는 등 악화를 겪었다. 심한 케이스로 썩은 부위를 대충 페인트로 덮고 넘어간 것도 있다. 이런 배는 옛 범선을 다룰 줄 아는 전문 인력이 관리해야 하는데 예산이 없어 재단 내에서 대충 아마추어 요트 수리하듯 땜질한 모양. 결국 2012년 허리케인 샌디 때 바다로 나갔다가 침몰하며 50여년의 함생을 마쳤다. 이 사고로 승무원 중 2명(선장 포함)이 사망. 배 상태가 안 좋았던 것도 있고 선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아마추어였으며 선장도 배의 내구성을 너무 과신했거나 먼 바다로 나가 샌디를 피하겠다는 안일한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바운티가 런던에서 건조할 수 있는 대형 범선으로 구현되었다.
- 일본 만화 학원묵시록 HIGHSCHOOL OF THE DEAD의 주인공인 코무로 타카시의 과거 회상에서 이 사건이 언급된다. 타카기 소이치로의 비호를 받으며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가지며 일행들이 나태해지기 시작하자, 여름 방학을 앞두고 늘어진 학생들을 두고 역사교사가 바운티함 사건을 언급하며 한 번 나태해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취지로 간단히 훈계한 것을 떠올리며 긴장감을 놓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내용이다. 작가의 성향을 고려하면 딱히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 장면이다.
6. 사건에 대한 다른 의견
남겨진 기록들과 해군 공식 문서들을 종합해 판단한 학자들 중 일부는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즉, 블라이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잘못은 전적으로 크리스천 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서도 블라이가 엄격함과 동시에 채찍질을 많이 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사실 당시 기준으로 채찍질은 그렇게 중한 엄벌은 아니었다고 한다. 너무 가혹한 형벌은 몇 년 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최대급 형벌은 돛대에 매달아 하루이틀 정도 굶기는 수준이었다는 듯. 즉 블라이가 채찍질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이는 건 그보다 심한 죄를 지었어도 채찍질 정도로 감형을 해 준 것 때문이고 실제 블라이 본인은 선원들이 병에 걸리거나 하면 상대적으로 넓고 편한 자신의 함장실을 내 줄 정도로 유연함도 많이 보였다는 듯. 즉, 폭군이 아니라 그냥 규율에 엄격한 신사였을 뿐이었다.문제는 위 항목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타히티에서의 생활이 너무 행복했던 나머지 일부 선원들이 완전히 푹 빠져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특히 크리스천이 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15] 그런 상황에서 신사적인 성격이지만 규율에는 엄격했던 블라이가 귀환 항해 중에 이들을 질타하자 약간의 정신이상과 신경쇠약 증세가 있었던 크리스천이 갑자기 폭발해 반란을 일으켰고 타히티 생활을 잊지 못하던 일부 선원들이 반란에 동참했던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40여명의 선원 중 블라이와 함께 추방된 선원이 18명인데 그럼에도 함께 추방되지 못해 배에 남았던 선원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은 반란 참가 인원이 선원 중 절반도 안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나 영화 등에선 정의로운 성격으로 그려지며 반란의 주동자였던 크리스천이 반란 후에는 훨씬 많은 인원들이 함께하지 않고 따로 떨어졌으며[16] 타히티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다가 폭동이 일어나 살해[17]당했다는 것과 복귀 후 무죄 판정을 받은 블라이가 두번째 항해에서는 무사히 임무를 성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위 항목들에서 언급된 대로 "폭군 블라이와 그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크리스천"이란 구도가 제대로 성립될 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간에는 폭군 블라이와 그에 대항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존 프라이어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사실 이 항목에는 존 프라이어는 블라이와는 사이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끝까지 함장 편을 들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반란파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함장 편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HMS 판도라가 파견되었을 때 이 배를 발견하자마자 체포선임을 눈치채고 먼저 달려가서 "나는 끝까지 함장에 충성을 다했지만 쫓겨나는 보트에 자리가 없어서 못 탄 일원이다"라며 일단 체포 자체는 면했고 귀국해서는 블라이가 돌아오면[18] 자신의 행적이 탄로날 것이기 때문에 집안의 힘[19]을 이용해 블라이를 헐뜯는 언론플레이에 들어갔고 역시 유력가 집안이었던 크리스천의 가문이 이에 합세해 블라이를 악당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선상반란 사건이었다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일이었지만 프라이어와 크리스천 가문에서 퍼트린 거짓말을 통해 "싸이코적인 압제자이자 폭군인 함장과 그에 맞서 정의로운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이란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일반인들의 흥미를 자극해 진실로 받아들여졌고 블라이가 복귀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수준까지 갔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이 구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설은 블라이측 선원들의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걸러들을 부분도 있겠으나 어찌됐든 영국 해군의 조사팀과 법정에 제시된 공식 문건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부분이고 이 때문에 아직도 영국 학자들 사이에선 기존의 폭군 블라이 설이 맞느냐 틀리냐로 꽤 논란이 있는 중이라고 한다.
7. 관련 문서
[1]
일부의 반란자들이 무인도였던 핏케언 제도에 들어가서 영국 해군의 추적을 피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2]
Able Seaman
[3]
당시 범선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수병을 두고 그 연주에 맞춰 간부의 감독 하에 운동 명목으로 강제로 춤을 추게 하는 것이 막 도입되고 있었는데 이를 블라이가 바운티 호에도 도입했다. 1984년작 영화에서는 춤을 추다가 처칠(리암 니슨 분)이 "빌어먹을 항해에 빌어먹을 춤이로군..."이라고 중얼거리자 프라이어(다이엘 데이 루이스 분)가 그걸 듣고 "크리스천! 영! 퀸틀에게 재갈을 물려."라고 한다. 퀸틀이 "내가 안 그랬어요!" 라고 대꾸하자 처칠이 자신이 그랬다고 자수했지만 프라이어는 퀸틀의 불손한 태도를 문제 삼아 둘 다에게 재갈을 물리라고 한다.
동영상
[4]
클라크 게이블,
말런 브랜도,
멜 깁슨 등등의 아카데미 수상자들이 이 인물을 연기했다.
[5]
당시 영국 해군의 위관급 장교는 "lieutenant"(부관)라는
계급 단 하나뿐이었고 함내에서 임관 일자가 빠른 순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식이었다. 보통 최선임 위관급 장교인 1st Lieutenant가
부장에 가까운 직책이다.
[6]
1984년작 영화에서는 블라이가 모든 승조원들이 보는 앞에서 프라이어를 질책하고 해임하자 프라이어가 크게 반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기록과 다른 영화적 각색으로 보인다.
동영상
[7]
물론 선물을 받고 그에 적절한 답례를 하지 못하면 사회적인 위신이 심각하게 실추되고 그렇다고 선물 받기를 거절하면 상대와의 우호관계를 거절한 것이니 적이 되는 것이다.
[8]
핏케언 섬은 1767년 영국 군함 HMS 스왈로우(Swallow) 함의 15세의 사관후보생 로버트 핏케언(Robert Pitcairn)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9]
어차피 핏케언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필요도 없고 만약 근처를
지나가던 배가 무인도 바로 앞에 둥둥 떠있는 바운티 호를 본다면 자신들의 생존에 큰 위협이 될테니 자침시킨 것이다.
[10]
헤이우드의 가문은
맨 섬의 지역 유지들 중 하나였다.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충성파로 분류됐으나 현재까지도 헤이우드는 반쯤은 반란자 취급된다.
[11]
여담으로 군법 재판이라 재판부는 해군 수뇌부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에는
새뮤얼 후드도 있었다.
[12]
스핏헤드의 봉기는 사실 봉기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파업에 더 가까웠다. 주로 요구 조건이 처우 개선(봉급 인상, 식단 개선 등)이라 해군 수뇌부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얼마 안 가 협상이 타결되고 주모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거기다 봉기기간 중에도 자체적으로 규율을 지키고 장교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으며 만약
프랑스 해군이 나타나면 즉각 봉기를 철회하고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했다. 반면 노어의 봉기는 의회 해산이나 프랑스와의 강화(당시는
프랑스 혁명 기간이었다.) 등을 주장하다가 스핏헤드의 봉기 결과(처우 개선)에 어느 정도 만족한 수병들이 떨어져 나감에 따라 봉기 지도부는 항구 봉쇄를 시도하다 호응하는 함정들이 없자 프랑스로 도주까지 시도했다가 결국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13]
이 사람은 쿠팡 섬에서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14]
스펀지밥 극장판이나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서도 등장한다. 덧붙여 해적물 패러디 포르노 필름 하나에서도 써먹었다.
[15]
몇몇 증언에 따르면 출항 즈음부터 홀로 멍하니 갚판을 거닐며 알 수 없는 소릴 중얼거리는 등 이상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16]
핏케언 섬에 들어간 백인 남성은 총 9명으로, 20여명의 반란팀 중 크리스천을 따라간 건 8명 뿐이라는 뜻이다.
[17]
영국 해군 조사팀의 보고서에는 "술에 취해 자고있는 사이에 끌려갔던 타히티 여성들이 살해했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18]
빵나무를 얻기위해 재출발해 영국에 없었을 때였다.
[19]
프라이어의 집안도 꽤 부유한 유력 가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