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피소드 | ||
1412년 ~ 1420년 | 1화 ~ 12화 | 펠로폰네소스 원정 |
1420년 ~ 1421년 | 13화 ~ 45화 | 아테네-이피로스 정복 전쟁 |
1421년 | 46화 ~ 59화 | 정변기 |
1422년 ~ 1423년 | 60화 ~ 124화 | 제1차 대오스만 전쟁 |
1423년 ~ 1428년 | 125화 ~ 176화 | 1차 전간기 |
1428년 ~ 1432년 | 177화 ~ 225화 | 세르비아 십자군 |
1432년 | 226화 ~ 247화 | 제2차 대오스만 전쟁 |
1432년 ~ 1435년 | 248화 ~ 277화 | 2차 전간기 |
1435년 ~ 1436년 | 278화 ~311화 | 나폴리 전쟁 |
1436년 ~ 1438년 | 311화 ~ 356화 | 제3차 대오스만 전쟁 |
1438년 ~ 1445년 | 357화 ~ 377화 | 재건기 |
1446년 ~ 1448년 | 378화 ~ 407화 | 맘루크 전쟁 |
- | 408화 ~ 410화 | 그 후 |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2차 대오스만 전쟁 이후 오스만과 모레아 양국의 다시 이루어진 전간기(휴전 기간) 동안의 행보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두 번째 휴전이 체결된 1432년 8월부터 새 교황인 에우제니오 4세가 즉위하는 1435년 4월까지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2. 황제 가족들(?)과의 재회
전쟁이 끝나고 아직까지 승리를 체감하지 못한 수많은 도시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가다 보니, 종전한 지 1달이나 돼서야 미스트라에 복귀하게 된다. 이번에도 미스트라 시민들이 귀환을 환영하는 개선식을 열면서 원정군을 환영했으며, 그 앞에 마중나온 소피아와 만나게 되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부부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어색하면서도 미묘하게 불편한 반응을 보였고[1], 이바니아와 아이가 있을 저택으로 가려는 찰나, 요안니나까지 가담해 아침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이후 요안니나와 함께 요람에 잠든 아이를 보며, 여러 이야기와 함께 수많은 복잡한 생각을 했고, 이 아이가 사생아이긴 하지만 소중한 자식이기에 그녀의 이름을 헬레네라고 어머니인 황태후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게 된다. 그 후 옛날 이바니아에게 했던 약속[4]을 지키기 위해 막무가내로 헬레네를 세례시키려 했고, 이에 늘 당돌했던 이바니아도 세례식을 주관하게 된 니케포로스 주교도 우려했지만 "내 이름은 황제로써 군림하는 게 아니라 이 아이가 떳떳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해줄 방패가 될 것이다."라며 그대로 강행하게 된다. 이에 대부분의 미스트라 시민들은 늘 무뚝뚝하시던 분이 갑자기 저런건지 의아하면서 나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교회와 수도원 측은 금욕적인 페하께서 저런 짓을 하다니...라며 이해하지 못하는 반대 반응을 나타냈다.[5]
3. 최종 결전을 향한 양국의 행정-정치 개편
이번 전쟁을 통해 오스만은 세르비아와 왈라키아라는 두개의반면 모레아는 대승전으로 영토 수복은 물론이며, 차후 전쟁에서 오스만과 전면으로 맞서도 꿀리지 않는 국력을 갖추게 되는데, 이런 상황임에도 아직까지 철회되지 않은 드라가시스 황제에 대한 파문,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줄타기 외교[7], 그리고 황제의 계승 문제가 모레아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걸림돌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문제를 각자의 방법으로 해결하고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양국은 새로운 조치를 취하게 된다.
3.1. 오스만
무라트와 할릴 파샤는 테살로니카 문제로 모레아와 틀어지게 된 베네치아와 접촉하여 우호 관계 회복 및 동맹 수립을 노리면서, 마케도니아 상실 후 추방당한 티마르 시파히를 카프쿨루 시파히로 재편성하여 시파히 부대의 손실을 보충하게 된다. 또한 세르비아의 정세 불안도 생각하여 국경 지대에 출동 대기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모레아가 확보한 테살로니카와 세레스[8] 인근 지역을 압박하기 위해 국경 요새도 새로 신축하여 마케도니아의 모레아 군이 섣불리 북진하지 못하도록 한다.한편 이들은 이번 십자군 전쟁 때 헝가리 군이 운용한 전투수레와 헨드캐논에도 주목하게 되는데, 전투수레는 군마만 제거하면 기동성의 상실로 오히려 애물단지 신세가 되어 버린다고 하여 넘어갔지만, 핸드캐논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오게 되는데, 계속 역설계하다 보니 단점도 있긴 하지만 이를 상쇄할 정도로 엄청난 화력을 내뿜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무라트는 이를 토대로 전투수레와 모레아의 장창 밀집대형 같은 전술을 그대로 무너뜨릴 목적으로 화포의 소형화 연구 및 핸드 캐논 양산에 착수하는 지시를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때마침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 제국의 침공과 술탄 아쉬라프 바르스바이의 병세로 보호국인 카라만 공국 등과 함께 소극적이 된 정세를 이용하여, 아나톨리아 토호 출신 관료들을 내치고 오스만에 살고 있던 테오도로스[9]를 중심으로 데브시르메 제도로 올라온 앙겔로스 가문, 콤니노스 방계 가문[10]을 비롯한 구 제국 출신 전향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전면에 내세우는 상당히 위험한 개편을 진행하게 된다.
허나 그 누구도 생각치 못한 위험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장남 아흐메트 왕자의 운명으로, 무라트는 전쟁 후 아흐메트 왕자를 일부러 멀리하고 둘째 아들인 알라앗딘 왕자를 더 편애하고 있던 상황을 후견인이었던 이스하크 파샤는 많이 안타까워하면서 친구였던 무라트를 원망하고 있으며, 이렇게 왕위 계승 문제로 커진다면 당연히 무라트가 안정된 계승을 위하여 아흐메트 왕자를 처단하게 될 것이기에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이스하크는 아흐메트 왕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다짐함으로써 위에 언급된 위기 시나리오와 차원이 다른 내전 플레그가 세워지게 된다.
3.2. 모레아
어느 정도 승전 분위기가 가라앉자, 모레아도 결전을 위해 대대적인 구조개편을 시작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그동안 독립국으로 서있던 이피루스 전제국을 모레아와 합병함과 동시에 이피루스 지방과 테살로니카 일대에 주둔 중인 이피루스 군을 모레아 군에 편입시켜 군대를 하나로 통합하게 된다. 또한 그 동안 황제가 임시로 관할하던 알바니아 왕국의 전권을 제르지에게 수여함으로 그동안 허수아비 군주였던 제르지를 온전한 알바니아의 국왕으로 세우게 된다.[11]그리고 황제 본인의 후계 문제도 나름 중대한 사항이기도 했기에 토마스를 정규 기병대장과 제국의 부제로 임명함과 동시에 자신의 후계를 헬레네를 비롯한 자기의 자녀들이 아니라 토마스의 후손으로 정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들은 주변 참모진은 일제히 경악했고, 당사자인 토마스도 역시 경악했지만 이내 그 결정의 배경도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원죄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씁쓸해하며 모두가 우려하는 새로운 계승 내전이 터지는 걸 막기 위해 부제로써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대단한 개편이 끝나자, 이전 개혁이 이루어진지 수년이 지나기도 했고 새로 확보한 영토의 상황들도 알아보기 위해 할리드, 소피아[12]와 함께 대대적인 순방을 떠나게 되고, 부제 토마스는 미스트라에 남아 프란치스코와 함께 남부 그리스를 대신 경영하며, 구호기사단과 조약 이행에 대한 교섭을 하게 된다.
4. 모레아 대순방
늘 있었던 미스트라를 떠나 가장 먼저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에 도배된 20여개의 요새들과 레온타리온 민회를 찾아간 황제의 일행은 유지비용과 경비세 등에 대해 현지 관료와 민회 의원들에게 보고를 듣게 되는데, 절세를 대신할 방안으로 이미 유명무실화된 원로원을 완전히 철폐할 것인지 질문 겸 요청을 하였고, 이에 황제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많이 착잡해했지만 어차피 귀족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다 제국을 배신하고 오스만의 졸개가 되었으니 없애는 게 맞다고 확답을 내리게 되었으며,[13] 이를 통해 세금 문제 때문에 오락가락하던 레온타리온을 비롯한 남부 그리스에 있던 민회들의 확실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러는 동안 황제의 일행은 한동안 레온타리온에 머물면서 근교 교회에 직접 찾아가 지방 성직자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이런 만남을 통해 그동안 서먹하던 관계였던 성직자들을 위로하면서 자신의 뜻을 전했으며, 또한 일방적인 교회 철폐 정책은 지금 시기엔 많이 위험하다고 판단, 미래를 위해 오스만이 만들었던 밀레트 제도와 비슷한 제도을 고안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그날 밤, 레온타리온에서 개인적인 불상사[14][15] 도 있긴 했지만, 순방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테살리아 지방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번에는 테살리아에서 살고 있던 그리스인 무슬림들이 직접 찾아와 항의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황제는 그들의 대표로 찾아온 이맘을 만나 면담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이전 개혁에서 실시한 종교세와 무르타티 병역 문제, 그리고 모스크를 일제히 교회로 강제 전환하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지만, 이에 황제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조치들은 최대한의 관용을 배풀어주면서 시행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였고, 모스크 문제에 관해서는 최전방 도시인 테살로니카와 세레스에 모스크 신규 건축 허가+건축 비용 지원을 할테니 그곳으로 이주하는 걸 적극 지원하겠다며 당근을 주게 되면서, 무슬림들에게도 신뢰를 얻게 된다.
그러고 나서 계속 북으로 올라가 동로마, 세르비아, 불가리아 3국에게 있어 중요한 대주교좌인 오흐리드에 도착한 황제의 일행은 그곳에서 유대인 첩보수장인 키릴로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정체가 사실 오흐리드의 대주교인 아나스타시오스라는 것에 많이 놀랐고, 그러면서 그와 유대인들의 확실한 믿음와 충성을 받았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으나, 한편으론 소피아의 영향력도 있고, 그의 이중 지위가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경계하며 키릴로스를 조금 추궁하게 된다. 이에 키릴로스는 그런 황제의 걱정에 대해 지금은 오로지 첩보 수장으로써로만 활동하며, 오스만이 격퇴되면 황제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겠다며 안심시켰고, 또한 왈라키아에 클레임을 가졌으면서 좋은 인재가 될 미르체아 1세의 아들 블라드와의 접선을 도와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 지방에 입성하여 세레스와 테살로니카를 찾게 되는데, 그 도시들을 제외한 마을들과 소도시들은 모레아의 수복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동요했고, 이런 여론을 보며 황제는 다시 되돌리려면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천년을 위해 더더욱 힘써야겠다며 굳게 다짐하게 된다. 또한 테살로니카에서 머물며
한편 미스트라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두 형제의 행보도 알려지게 되는데, 우선 미스트라의 토마스는
5. 테살로니카 회의
테살로니카에서 정착한 뒤, 순방에서 약속한 것들을 개편안에 포함시키고, 마케도니아 전역에서 터지던 종교 반란과 반 제국 반란을 직접 진압하며, 소피아와 함께 정사를 다루는 한편 헝가리의 황제 지기스문트 황제의 이른 죽음, 군제 개혁을 이룬 오스만 군대의 위험, 그리고 콘클라베를 통해 갑툭튀한 아라곤 왕국의 동유럽 정세 개입 등 국외 정세를 보고 고민하던 황제는 수년 이내에 아라곤을 견제하면서 대 오스만 연맹을 구축해야겠다는 결의를 세우게 된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1434년 10월이 되고, 그 사이에 블라드와 만나 의견교환[18]도 나눈 황제는 제국의 미래를 토의하기 위해 토마스와 프란치스코를 중심으로 한 미스트라 관료들을 테살로니카로 호출했고, 알바니아에선 제르지 국왕을 보좌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노 수사[19]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선 요안네스의 비서관인 스프란체스가 파견오게 된다. 이렇게 들어온 수백 여명의 수행원들은 하나같이 번화된 테살로니카 도심에 다들 감탄하였고, 특히 알바니아에서 온 수행원들은 이런 안정이 소수 민족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타문화를 받아들인 황제의 정책 덕분이라며 극찬하면서, 그동안 황제가 어떤 식으로 다스려 왔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모두가 궁정에 도착하자 황제는 서론을 바로 생략하고 토론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번 토론의 주제인 동서 교회 대통합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친 끝에 아라곤을 시작으로 앞으로 종교 문제로 침공할 서방 국가가 생겨 양면 전선이 생겨선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그렇기에 과거의 영광과는 작별해야 하며 천년 너머의 제국을 위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유지해야 해야한다는 걸 강조하게 된다. 한편 정치적 교회 통합은 여러 의미에서 역풍이 될 수도 있다며 스프란체스가 물어보자, 황제는 자기가 생각하는 교회통합은 기존의 교회통합과 완전히 다른 방식[20]으로 이루어낼 거라며 하면서, 만일 신임 교황[21]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아라곤의 침략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교황청은 그날로 제국 뿐만 아니라 오스만이 더 큰 불이라고 생각하는 헝가리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의 비호까지 잃을 수도 있다는 사태까지 갈 수 있으니, 100%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하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벌어질 것이며, 심하면 내전까지 갈 수도 있는 불가피한 혼란들, 그리고 오스만의 개입에 대해서도 또 다른 계책을 내놓는데, 우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베네치아의 주재상인에게 요안니스 황제 명의로 교회통합에 대한 이야기를 흘려보내어 베네치아와 오스만의 사이를 균열시키고, 이렇게 떨어져 나간 베네치아가 역으로 아라곤 추기경단을 견제하면서 교회통합을 지원하도록 유도하게 한다. 이 계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6. 교회 통합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반응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베네치아는 제국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24]에 대해 원로원을 소집하여 격론을 벌였는데, 그 드라가시스 황제가 제국을 혼란에 빠뜨릴 미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수상했기에 함정 느낌이 많이 들었지만 교회 통합의 주도권을 베네치아에게 준다는한편 2차 대 오스만 전쟁 이후 힘의 공백이 발생한 동지중해 권역으로 진출하려는 아라곤 왕국의 국왕 알리폰소(알폰소) 5세는 1435년 5월, 공위 상태였던 나폴리 왕국에 상륙하여 현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동군연합을 성공하게 된다.[25] 이와 동시에 알리폰소는 교황청의 추기경단들을 모조리 장악하는데도 성공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신임 교황까지 어떻게든 설득하여 그리스 일대에 대한 아라곤의 권리, 즉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원대한 전략도 준비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제국과 베네치아의 교회 통합 요청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만약 교황께서 이를 받아들이면 교황청의 모든 관심이 아라곤이 아닌 동방으로 쏠릴 게 뻔하기에 추기경단을 통해 제국의 진정성을 하나하나 캐내면서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도록 한다.
이런 이해관계가 미친듯이 엮여있던 교황청은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던 교황 마르티노 5세가 결국 사망하고, 그 빈 교황 자리에 가브리엘레 추기경이 발탁되어 에우제니오 4세가 되는데, 앞서 말한 추기경단은 신임 교황과 만나자마자 아라곤의 알리폰소가 기독교의 방패로써 가장 적합한 군주라고 칭송하며 그의 동방 원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큰소리를 높이게 된다. 한편 에우제니오 4세는 알리폰소가 흑심을 감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다 추기경 시절 드라가시스 황제과 같이 다니며 생긴 호감이 있었기에 이전보다 실권이 많이 없긴 하지만[26] 그 정도라도 드라가시스 황제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기 위해 아라곤 측과의 접촉 자체를 피하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에게 크게 털린 헝가리 왕국에선, 결국 지기스문트 황제가 죽고 후임 황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가 황위에 올랐는데, 그 역시도 오스만을 경계하면서 오스만의 확실한 적수로 평가받던 모레아의 드라가시스 황제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로마로 순방을 간다는 소식을 궁정대신으로 있던 후녀디에게 듣자마자, 안 그래도 교회 통합이 좌초될 거 같은 암울한 상황 속에 내린 단비같은 소식인지라, 당연히 크게 기뻐하였고, 곧 열리게 될 공의회에서 아직까지 파문 상태인 드라가시스 황제를 최대한 변호하면서, 황제의 필요성을 최대한 역설할 목적으로 후녀디를 로마로 직접 파견보내게 된다.
7. 제국의 반발
한편 제국 내에서도 여러 사건들이 발생되는데, 먼저 드라가시스 황제가 처음 계획한 대로 모레아의 독립 대주교 설치 요구에 대한 소식이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전해지자, 그동안 잠잠하던 콘스탄티노플과 미스트라(모레아)의 지역갈등이 재점화되어 공의회가 열릴 개최지가 이피루스 지방에 있던 파트라스로 선정될 때까지 계속 싸우게 된다.그렇게 살짝 잠잠해지나 하던 차에 이번엔 요안니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교회통합을 목적으로 베네치아에게 중개를 요청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이 소식을 나중에 알게 된 모레아 시민들은 엄청나게 반발하며 대규모 시위까지 열게 된다. 이에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던 베네치아도 당황했고, 원래부터 부정적이었던 추기경단들은 황제가 추진하려는 교회 통합도 십자군을 유도해 병사 한명을 더 벌려는 제국의 얕은 잔꾀라며 불신하게 된다. 이렇게 교회 통합도 좌초되고 제국의 정세만 불안정해질지도 모르던 차에 그 진정성 논란을 풀기 위해 부제 토마스의 반대[27]를 물리치고 드라가시스 황제가 직접 로마로 가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 결단도 한참 분노하던 모레아 시민들과 성직자들에게 폭탄이 던지는 격이 되어, 반 가톨릭 시위와 오래전에 동화된 라틴인과, 새로운 시민 계층으로 자리잡은 무슬림에 대한 혐오 범죄를 시작으로 성직자와 무슬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 드라가시스 세력이 형성되어 내전 위험이 조금씩 커지게 된다.
한편 오스만의 에디르네에서도 이 혼란을 처음부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면서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할릴 파샤는 계속 관망하다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에서 2천의 병력으로 잠시 무력시위도 해본 끝에 제국의 지역갈등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갈등의 배후로 드라가시스 황제가 있으며, 그의 목적이 교회 통합임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허나 2차 전쟁에서 패배하여 제국에 대한 모든 외교적 수단이 막힌 지금으로썬 할 수 있는 방법이 로마로 가는 주교단 습격과 같은 무력 수단밖에 없었고, 이에 한동안 고심하던 어느 날, 모레아에서 드라가시스 황제가 로마로 직접 가겠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이번 황제의 로마 순방 결정이 제국의 마지막 도박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오스만이 한 발 더 나아갈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깨달은 무라트와 할릴 파샤는 황제에 대한 암살을 준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 작전을 수행할 콤네노이 파샤를 필두로 그리스계 예니체리[28]로 이루어진 결사대를 쪼개서 남부 마케도니아의 무슬림 공동체 사이로 잠입시켜 황제가 순방 전 세레스에 잠시 들렀을 때, 소요 사태와 함께 암살을 준비하게 되나, 그 타겟이 되어야 할 황제가 소드마스터 급 검술을 발휘하면서 자객들을 물리치며[29], 마지막에 남은 콤네노이 파샤까지 황제가 직접 제압 후 처형하면서, 결국 오스만의 암살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로 인해 오스만의 마지막 카드였던 황제 습격이 끝장나면서, 오스만은 이제 수세에 몰리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고, 제국 내부로는 이번 암살 미수 사건을 통해 본의 아니게 정교회 내부 갈등[30]의 봉합, 모레안 르네상스 정신의 등장[31]를, 사건 직후 황제의 "세레스 선언"[32]을 통해 모레아 시민들을 긍정적인 여론으로 돌리는데 성공함으로써 한동안 제국 내에 불어오던 혼란이 일시에 끝나게 된다.
[1]
황제도 다른 여자들이 있고 거기다 사생아까지 있었으니 이혼하고도 남았을 불편한 관계였음에도 소피아는 자신의 험담 같은 조언에 대해 많이 수용하고 검토하는 태도에 반했는지, 이 앞의 일들을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반대로 황제는 이전 전쟁에서 소피아의 첩보망이 상당했다는 걸 체감했기에 여전히 꺼리긴 했지만.
[2]
요안니나는 아직까지도 황제를 좋아했기에 손을 잡아보려고 시도했지만, 소피아가 바로 제지하면서 친한 관계더라도 선은 넘지 말라며, 은근히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즐겼고, 요안니나는 당연히 분통을 터트린다.
[3]
"당신이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15년, 20년이나 되었네요.", "당신도 못하는 게 있어 다행이군요." 같은 것들이었다.
[4]
아이가 태어나면 세례를 시켜주겠다는 것.
[5]
한편 무라트도 이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는 원래 구국의 의지로 인해 감추어져 있던 황제의 본성이 나온거라고 "일단 남자이긴 했구나."라고 살짝 웃음을 보이게 된다.
[6]
262화에서 제국 이민국이 내부 상황을 알려주게 되는데, 인구도 많았고 술탄의 직할령이었던 마케도니아가 날라가면서, 비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던 데브시르레 제도와
예니체리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앞으로 10년 이내에 이번 전쟁과 똑같은 영토 상실이 생긴다면 아예 예니체리가 붕괴될 수 있다고 한다.
[7]
베네치아는 오스만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지만 그래도 모레아 전역에 있던 베네치아 조차지와 무역권이 아직까지 살아있던 터라, 좋든 싫든 엮일 수 밖에 없으며, 제노바 또한 마찬가지인데다, 본토의 안전과 직결된 아라곤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기는 3중으로 줄타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8]
선제 마누일 2세가 테살로니카의 친왕이었던 시절, 오스만군을 상대로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인 승리를 거둔 상징적인 도시.
[9]
원래 교황청에서 대관식을 받았어야 하지만 타이밍이 절묘하게 마르티노 5세가 혼절하면서 연기가 되어버렸고, 이에 무라트와 할릴 파샤는 대관식은 나중에 한다고 치더라도 테오도로스를 미리 오스만의 관료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 북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의 행정권을 테오도로스에게 하사하였고, 그와 동시에 테오도로스를 팔레올로기 파샤라고 부르게 된다.
[10]
콤니노스 직계 가문은
트레비존드 제국을 다스리고 있다.
[11]
그와 동시에 제르지의 생각을 떠볼 생각으로 원한다면 알바니아를 아예 독립된 국가로 해방시켜 동등한 국가관계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제의했는데, 제르지는 지금 상황에서 어설프게 독립하는 것보다 황제가 이끄는 제국 내에서 국가를 보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일거에 거절한다.
[12]
원래 소피아는 놔두고 가려고 했지만, 이번엔 소피아도 단념할 생각이 없는지, 지금 황제의 위치와 현 정세를 거론해가며 하나하나 밀어붙이게 된다. 그로 인해 결국 황제는 두 손을 들었고 그렇게 같이 순방길에 동행하게 된다. 그런 모습을 바라던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하게 되는데... "잡혀살겠네. 평생."
[13]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출신 관료들은 로마의 전통인 원로원을 저버려선 안된다고 반발했으나, 지금 상황에선 원로원의 존재 자체가 필요없다며 반감을 드러낸다.
[14]
떠나기 전날 밤, 지역 유지 중 하나가 헬레네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황제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딸을 황제의 침실로 보낸 일이 발생하게 된다. 다행히 소피아가 방문 앞에서 잡아내어 그 이상은 가진 않았지만, 건수 하나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직후 황제는 소피아에게 이리저리 추궁당했다가 결국 한 방을 쓰게 되었고, 그동안 일부러 존대로 말하던 걸 평대로 부르게 된다.
[15]
그래도 약간 경계하자며 태후는 될수 없다 말했으나, 소피아는 그럼 황후만 하면 되지 않겠냐며 이젠 자기에게 충실해야 할 때라면서 황제의 정신 탈출을 원천 봉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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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와 이바니아가 황제와 함께 각각 정치, 군사적인 자리에서 활약하는 게 많이 부러웠는지, 황제에게 정기 서신을 보내는 토마스에게 자기 의견을 거쳐서 보내라고 잔소리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형의 여자관계를 이제야 안 토마스는 형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관계를 만들었는지 놀랐고, 프란치스코는 그 와중에 저 멀리
케세이에서 영웅은 삼처사첩이라는 드립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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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가시스 황제와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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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에서 2차 독립 반란이 터진다면 그 반란군을 지휘해 달라는 황제의 요구와 왈라키아의 공위, 최종전 이후 왈라키아의 주권에 대한 블라드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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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공식적으로 불리고 있는 지온 카스트리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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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공의회와 다르게 황제와 교황이 동등한 위치에 서서 논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임 교황에게 선대가 이루지 못한 오스만 십자군의 성공을 안겨주고
동방정교회 5대 교구들 중
로마가 가장 으뜸이라고 제국 측이 인정하는 대신에,
발칸반도의 대주교구들과
키예프,
모스크바 교구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계속 관리하겠다는 조건을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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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는 황제를 비롯한 모레아 측 관료들은 친제국인사인 가브리엘레 추기경이 신임 교황으로 올라섰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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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모레아 독립 대주교좌 설치 명분으로
파트라스에서 자체 공의회를 잠시 여는 척했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간 주교단이 오스만이나 베네치아 함대에게 습격당하면 바로 2차 주교단으로 재편성하여 교황청으로 보낸다. 이를 위해 파트라스를 요새화하여 안전 지대로 만듬과 동시에 신생 해군의 안전도 보장되는 곳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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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아우구스티노 수사에게 알바니아 군이 바로 세르비아를 공격할 준비를 해달라고 따로 부탁하게 되는데, 제르지 휘하의 알바니아 군이 벌써 정예화가 되었는지 아직 확답은 안했지만 세르비아를 상대로 어느 정도 이길 수 있을 거 같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황제는 이를 통해 세르비아 전선에서 어느 정도 승기를 잡으면 주라지에게 어느 정도 운신할 수 있게 회유하는 계략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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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아의 독립 대주교 설치 요청과 제국 중앙 정부의 갑작스런 교회 통합 중재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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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 아라곤은 1442년이 돼서야 동군연합에 성공하게 되는데, 원래 아라곤의 진출을 최대한 저지하던 제노바-밀라노-교황령 연합이 작중 상황에서는 혼란의 북이탈리아 정세 속에서 드라가시스 황제의 의도치 않은 선택으로 인해 밀라노가 교황령과 적대관계가 되어버리는 나비효과가 발생되었고 결국 아라곤은 7년치 국력을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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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상황에서 세르비아 십자군이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북이탈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도 축소당하고, 위신도 매우 떨어진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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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방길 와중에 오스만 별동대에게 습격을 받거나 암살을 당할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 오스만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무리한 원정을 감행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미친 짓"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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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네노이 파샤도 그렇고 결사단원 총원이 데브시르메 제도로 등용된 사람이면서 미래의 인재로 성장할 잠재력이 강했지만, 최근 모레아를 상대로 오스만의 연이은 패배가 투르크계를 중심으로 이 제도에 대해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고, 그런 여론을 막는 차원으로 무라트는 어쩔 수 없이 인재들을 사지로 투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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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들이 그렇게 약한 것도 아닌게 당시 황제를 호위하고 있었던 소수의 중장갑으로 무장한 위병 전원을 손쉽게 죽여내는 대단한 검술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런 어려운 상대를 황제는 가장 먼저 달려든 자객 2명을 처단하고, 그 다음에 달려든 자객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단순히 손목을 잡고 악력으로 팔을 그대로 뽑아버리는 묘사가 나온다. "뽑아버린다"는 것이 탈골을 의미한다고만 쳐도 실전에서 그토록 손쉽게 상대를 제압하는 걸 보면 황제의 무력이 초일류의 반열에 오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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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에 모레아의 대주교 독립을 주장하던 성직자 상당수가 연루되어 숙청당했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모레아의 니케포로스 주교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 큰 갈등이 매꾸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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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모레아 성직자 숙청이
플레톤의 거취 문제에서 시작된 건데, 세레스 사건과 비슷한 시점에 많이 고무받은 플레톤이 아카데미 밖에서 대중들에게 탈 교회, 인본주의를 거리낌 없이 외치기 시작했고, 그를 토마스와 프란치스코가 지지하고 지켜주었기에, 플레톤의 체포를 주장한 성직자들은 잠시 황제를 비난하며 토마스에게 대신 황제가 되어달라는 발언을 했다가 그대로 체포되어 숙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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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카 회의에서 나온 결론(교회 통합)을 세레스 시민들에게 처음 천명함과 동시에 앞으로 제국은 절대 굽히지 않고 자랑스럽게 맞서겠다고 연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