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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5:45

미야모토 무사시/허구성 논란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미야모토 무사시

1. 개요2.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3. 평생 감장 한 개도 받지 못했다4. 다른 유명 검호와의 대전을 한 적이 없음5.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 기록이 매우 의심스러움6. 사사키 코지로 관련7. 무사시 측 사료들의 신뢰성이 전무 8. 현대의 무사시 실드 측의 사료 왜곡과 날조 9. 유명한 제자가 한 명도 없음10. 결론11. 미야모토 무사시 허구성의 연혁

1. 개요

미야모토 무사시의 불분명한 행적과 석연치 않은 주변 상황 때문에 소설 등으로 인해 지나치게 신격화된 검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2.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러한 의구심에 대한 근거는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데, 우선 무사시는 이미지에 걸맞은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다. 일설로는, 50대가 되었을 때 호소카와 집안의 구마모토번에서 석고로 따졌을 경우 50석 정도의 부지미(扶持米 / 봉록) 등을 받는 객장(손님)[1]이 된 게 전부라고 한다.[2]

특히 저건 신빙성이 없는 수준의 사료(미야모토 무사시 측의 사료)인 니텐기의 말을 완벽하게 신용하고 석고로 변환했을 때 50석이라는 의미로, 한국에서는 300석을 받았다고 오역하면서 오노 타다아키는 600석이었으니까 별 차이 안 나네! 하고 묘사하는 일부의 사람도 있으나 이건 번역할 때 고쿠로서의 石과 세키로서의 石의 차이를 잘 몰라서 번역 오류를 범한 것. 일단 니텐기의 원문은 후치(扶持)18석+고료쿠마이(구휼미) 300석으로 둘 다 세키인 반면. 야규 무네노리 오노 타다아키 등의 1만 2천 500석 등의 석은 고쿠로서의 석이다. 즉 타다아키 등이 받은 600석은 일 년간 성인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 600명 분을 생산하는 토지+토지에 속한 농민+토지에 속한 기타 잉여 생산물의 봉토 (봉건 시대에 부하에게 내려준 영지) 개념이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받은건 그냥 쌀만 318석(石:세키) 개념이다. 세키와 고쿠 모두 동일하게 50석이라고 치면, 당연히 고쿠로서의 50석이 훨씬 많은 양이다.

그런데 이걸 구태여 석고로 전환해서 50석 정도라고 원문과 다르게 전환하여 부르는 이유는, 일단 저렇게 318석 받았다니까 석고로 318석이구나 하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또 현대에서 우리가 모든 센고쿠 시대 사무라이들은 다 석고로서 영지를 따지지 저렇게 석(섬)으로 받은 사람은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비교를 위해서 변경한 것이다.[3] 즉 다른 사람들은 다들 연봉 몇 천 얘기하는데 미야모토 무사시는 시급 몇 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안 되는 수준이니, 이해를 돕기 위해 전환해 줘서 50석 정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소결을 내자면 일단 318석 받았다는건 번역 오류고 석고로는 50석 정도이다.

또한 50석 정도라고 해도 사실 엄청나게 좋게 쳐준 거라고 할 수 있는 게, 석고는 땅에서 수확하는 쌀은 물론 그 땅에 살고 있는 농민과 기타 생산물까지 전부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600석 석고라면 일단 600석은 확보가 된거고 그 이상의 수입이 있는 영지도 많다는 것. 우에스기 겐신의 에치고 같은 게 대표적인 예이며, 무사시처럼 검호인 야규 토시요시같은 경우 가토 기요마사에게서 받은 영지 500석은 실질적으로 3000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영지와 쌀로 급료를 받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로 - 봉건제도의 개념상 당연한 거지만- 영지는 세습된다. 즉 미야모토 무사시가 받은 50석 규모 쌀이야 그냥 팔거나 먹으면 땡이지만 50석의 영지는 계속해서 세습돼서 자손 대대로 늘려나갈 수도 있다.

심지어 석고로 50석쯤 받았다고 좋게 쳐줘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은 것도 아니다. 다른 유명한 검호들의 경우, 야규 무네노리는 1만 2500석을 받았고, 사이토 카츠히데는 천황으로부터 종 5위하 판관직[4]을 받았다. 쇼군에게서 직접 이름 한자를 수여받은 마츠모토 마사노부나 갈아탈 말만 3마리에 수행원 80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행차를 마치 다이묘처럼 하고 다녔다는 츠카하라 보쿠텐,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직접 천하 제일이라는 칭호와 함께 천황에게는 이세노카미(伊勢守)까지 받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등 엄청난 대우를 받은 검객이 결코 드물지 않다.

혹자는 이를 특별한 사례라며 야규 가문이 처음에는 200석[5], 같은 쇼군가의 사범 오노 타다아키는 800석[6]에서 끝이었고 시현류의 토고 시게카타(東郷重位)도 400석을 받았다며 반론을 펴기도 한다. 다만 오노 타다아키의 경우 도쿠가와 가문이 좀 짠돌이 기질이 있어 녹봉을 후하게 주지 않은 탓도 있고, 성격이 깐깐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터라 기피 대상으로 악명 높았다. 쇼군이 검술에 관해 입스타를 시전하자 면전에서 '다다미에서 수영하는 꼴'이라고 돌직구를 날린 인물이었고, 한 도장이 요란하게 실전 드립을 치며 선전을 해대자 몸소 쳐들어가서 때려눕힌 일로 징계까지 먹었다. 심지어 군령 위반, 목도로 상대방의 머리통을 찍은 일, 오사카의 진에서 동맹군의 무장을 팔병신으로 만든 일로 폐문 처분만 총 3번을 당했던 걸물이다.[7]. 쇼군가의 사범이 800석 밖에 못 받은 게 정상이 아니라, 밉상인데도 실력이 워낙 출중하니 800석이라도 줘 가면서 붙잡았다는 편이 옳다. 한편 무사시와 동시대 인물인 도요토미의 검술 사범인 스스키타 하야토는 3천석이었다.

다른걸 다 떠나서 호소카와 가문 안에서만 봐도, 일단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봉록을 줬던 호소카와 타다토시부터의 검술사범부터가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도전해서, 무사시가 쫄아 도망가게 만든 니카이도류의 난폭자 마츠야마 몬도였고, 호소카와 가문으로부터 1,000석의 석고를 받았었다. # (다만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이후 야규 무네노리의 제자가 되어 야규 신음류에 입문한다.) 무사시를 유일하게 써 준 가문만 봐도, 검술 사범에게 낮은 대우를 해준 것도 아니고, 무사시를 검술 사범으로 쓴 것도 아니며, 무사시를 전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다는 소리다.

이렇듯이 일단 대 다이묘의 검술 사범이라면 녹봉 1천석은 기본으로 깔아두던 상황에서, 무사시는 본인의 수많은 변명 등을 감안하더라도 녹봉이 단 50석 정도 뿐이다. 검술 사범이 아니라 아시가루 대장 정도의 대우라고 쳐도 절대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며, 그것도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몰라줘서 셀프로 구상서(자기 소개장)를 내고 들어가서 나이 50대에나 받은 이 녹봉에 본인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납득했다는 것.

그 정도로 유명한 검객이었다면 당대의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모셨을 것이다. 무사시의 현재 명성은 일본의 다른 유명 검호들을 찍어 누를 정도인데 막상 당시 받은 봉록은 아시가루 지휘관 수준이었으며, 심지어 이것도 객장 취급이지 정식 벼슬도 아니었다.[8]

물론 이에 대해 무사시가 예의가 없어서 등용이 안 됐다 혹은 무사시의 행적이 좀 밝혀지기 이전에는 평민 출신이라 벼슬을 못 살았음 등등의 실드도 존재한다. 그러나 무사시는 오륜서등의 저작들만 봐도 당대 검호 중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갖췄던 인물이고, 글도 잘 썼던 데다가, 상위 신분인 승려들 등과의 교류도 있었고,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이던 이오리를 양자로 들인 걸로 보아 무사 출신이 99% 확실하다. 무엇보다 오노 타다아키는 생전 폐문 처분만 3번을 당했는데 매번 불사조처럼 복귀했고, 교양은 있지만 예의는 없음의 대명사인 가부키모노 마에다 케이지조차 여러 곳에서 사관 제의를 받고 벼슬을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9]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남는 사실은 무사시가 50석짜리 녹봉 수준의 인물이란 것 뿐인데, 이에 대하여 결정적인 증거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님 말고식의 변명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벼슬과 녹봉 액수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녹봉을 얼마나 받았냐 하는 정확한 액수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정 녹봉 이상을 받고 무사 대우를 받았느냐 아님 못 받았느냐의 상징적인 문제다.[10] 3천 석의 검호였던 스스키타 하야토가 800석의 오노 타다아키보다 4배를 더 받았으니 4배로 셌다는건 절대 아니지만, 무사 대우조차 못 받은 잡검호들에 비하자면 이 둘은 확실하게 당대의 명성이나 실력면에서 차원이 다른 검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소결을 내자면 녹봉에 일종의 커트라인이 있었다고도 볼 수있고, 적어도 이름을 날린 무사면 500석에서 1000석 정도는 깔고 들어가는걸 알 수 있다.

또한 당대 검호들이 진검 승부를 벌이는 이유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사실 진검 승부라는건 죽거나/혹은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이기거나의 둘 중 하나뿐이다. 전쟁에 비해서 방어 무구도 부실한데다 상대도 어지간히 실력이 있기에 진검승부를 받아들였을 테니, 과거의 콜로세움에서 싸우던 검투사들만큼이나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싸우는 것이다. 당대의 검호들이 이런 진검대결을 하는 이유는 검호들이 목숨이 9개고 사람 베는 것을 즐기는 정신병자라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번 승리할 경우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11] 즉 당대 검호들의 대결은 신분 높고 부유한 무사들만이 즐길 수 있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의 목숨이 걸린, 현대의 UFC 이상의 엄청난 엔터테인먼트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 진검승부를 5번만 이겨도 해당 고쿠/번의 최고 검호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고, 반대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검호라도 일단 충분한 부와 명예를 얻었다면 진검 승부를 할 일이 생겨도 자신의 수제자를 대신 내보내거나, 자신의 아들을 보내거나, 혹은 승부를 회피하는 일까지 있었다. 예컨대 야규 무네노리는 야규 도장에 쳐들어온 오노 타다아키를 상대로 자신의 수제자를 먼저 내보냈다가 수제자가 패배하고, 이어 자신의 아들인 야규 미츠요시, 즉 야규 주베에에게 오노 타다아키와 승부할 것을 명령했으나 야규 주베에가 오노 타다아키를 상대로 실력 부족을 인정했다는 일화가 있는 바람에 현대에도 야규는 정치가 가문이지 사실은 오노 타다아키와 일도류가 당대 최강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정도.[12]

그렇기 때문에 평생 60번의 진검승부를 해서 모두 이겼다면서 대우는 50대에 간신히 봉록 50석이라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전쟁이 일상화된 센고쿠 시대를 지나 에도 막부의 개조로서 본격적인 검술의 중흥기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부터 오와리 번의 도쿠가와 미쓰모토, 사가의 나베시마 모토시게에서 쓰가루 중흥의 한슈 쓰가루 노부마나까지, 수많은 검호 다이묘(혹은 한슈)들이 판을 치던 대 검술 중흥의 시대에 상식적으로도 무술로 다른 검호들을 모두 압도하는 이러한 괴물같은 활약을 보였다면 당연히 수많은 대전료와 함께 무사들로부터 '제발 저를 가르쳐주시고, 저희 가문의 검술 사범이 되어주세요.' 하는 러브콜들을 받아야만 하고 이름난 제자만 해도 최소 몇 명은 되어야 한다. `한 가문의 검술 사범으로 종속되는 게 싫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당대의 검술 사범들은 유랑이 기본 일상이다 보니, 붙어서 계속 가르치는 검술 사범도 있지만 그냥 붙어서 딱 한 주 가르치고 그대로 떠나는 경우도 많았기에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설령 이러한 러브콜들을 모두 거절했다고 쳐도 진검 승부 60회라면 최소한 무사들의 가문 기록에 `오늘 이름난 검호인 무사시의 승부를 보러 갔는데 대단했다.' 같은 행적의 기록들이 직, 간접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후대의 니텐이치류 사범들에 의해 쓰여진 기록들을 제외하고 당대의 인물들이 남긴 기록이 아예 없다시피하여 무사시의 대부분의 행적이 그냥 미스테리다.

결국 60회의 진검승부 모두가 양민학살이었거나, 혹은 무사시 본인과 진검승부 상대방 60명들 전부가 부와 명예에는 관심 없는 특이한 사람들이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승부를 벌였거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지라 그 진검 승부들이 과연 진짜 벌어지기는 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무사시의 진검승부 횟수 60회는 2위인 이토 잇토사이의 2배[13], 다른 일반적인 검호들에 비하면 독보적일 정도로 높은 횟수인데 그에 대한 근거라고는 자신의 저서라고 전해지는 오륜서밖에 없고, 상대한 유명 검객도 하나도 없으니 더더욱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등 일부 미야모토 무사시 미화물에서는 무사시를 무슨 구도자로 묘사하며 무사시가 출세에 관심이 없어서 이런 제의를 반려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무사시의 심정을 소설가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도 문제이고, 무엇보다 50대에 이르러 자기 소개서를 들고 호소카와 집안에 찾아가 벼슬을 청한 역사적 사실만 봐도 간단히 반박되는 사실이다.[14]

3. 평생 감장 한 개도 받지 못했다

특히 1932년 현재까지도 출판 중인 일본의 문학 잡지인 문예춘추에서 벌어진 나오키 산주고[15]와 키쿠치 간(菊池寬)[16]의 무사시에 관한 토론에서, 나오키 산주고는 무사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가 천하제일이었다면 벼슬을 살지 않았다는게 말이 안 되고, 벼슬을 바라지 않았다고 하면 오사카 성 전투를 포함한 전쟁에 6번씩이나 참전한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었다. 낭인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활약을 보여서 벼슬자리를 얻기 위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오키는 무사시가 50대에 이르러 호소카와 가문에 벼슬을 살 때 제출했던 구상서(자기 소개서)도 비판하고 있는데, 일단 일본 제일의 검객이라더니 정작 호소카와 가문에서 알아주지 않아서 구상서를 내고서 간신히 벼슬을 청하고 있다는 게 첫 번째며, 구상서를 낼 때 그냥 자기 입으로 6번의 전장에 나가 4번을 맨 앞에서 달렸다고 말만 할 뿐이지 감장[17]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두 번째다. 즉 일본 최강의 검호라는 자가 6번의 전투에 참가해서 전장에 나가서 4번을 맨 앞에서 달렸다고 하지만 그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낭인 부대는 어차피 죽든 살든 상관없고, 가문 소속 무장들보다 더 돋보이는 활약을 해야 되기 때문에 앞에 나서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감장을 못 받았다는 것은 그 경쟁에서도 뒤쳐졌다는 것이다. 결국 당대 최고의 검호라는 자가 자기소개서를 내고서 호소카와 가문에서 석고로 따질 경우 50석 정도만을 받는 취급에 그쳤고, 이에 자타가 만족했다는 것이다.

4. 다른 유명 검호와의 대전을 한 적이 없음

또한 관서 지방에만 틀어박혀서 당시 검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관동의 유명한 검객들과는 검을 겨루지 않았다는 부분도 큰 흠이며, 무엇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술을 좋아하고 진흥하여 당대의 무예가들이 몰려들었던 에도에는 방문하지 않은 게 치명적이다. 특히 관동 제일의 검호이자 막부의 검술 사범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전국구 네임드 검객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대표로 한 야규 신카게류 계열의 검호와도 겨루지 않았고, 야규 신카게류와 함께 당대 양강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막부의 검술 사범이었던 오노 타다아키를 대표로 한 일도류와도 한 번도 겨루지 않았다. 사실 관동 이외 지역의 유명 검객들과도 검을 겨룬 적이 없다. 규슈의 카게류 계열 타이사 류의 마루메 나가요시라든가, 야규 무네아키, 시현류의 토고 시게카타, 중조류의 토다 시게마사, 심지어 호소카와 가문에서 객장으로 살 때는 마츠야마 몬도를 상대로 승부를 피해 도망치기 까지 했다. 1915년 일본검도사를 저술한 야마다 지로키치 역시, '당대 에도에는 최고의 유파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무사시는 이를 피해 방문하지 않았으니 대단히 이상하다며, 대략 수업을 위해 각 지역을 배회하는 자가 그 땅의 제일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 것은, 이치상 자신을 안다고 하는 계량이 부족한 것이다. 니텐이치류가 어느 정도까지로 한계가 있는 것이라면 천하의 병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라며 비판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본 문서의 상기 '1. 관작에 오르지 못했다'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애초에 당대 유명 검호 절대 다수는 일대 일 실전시합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면 모든 걸 잃고, 이겨도 본전이기 때문이다. 즉 유명검호와의 시합이 부족한 걸 근거로 들어 무사시 당대최강설을 반론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지만, 같은 근거로 유명검호에 비해 무사시의 실력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높이 치켜세우는 유명검호를 폄하하고 무사시를 치켜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사시 일대기의 잦은 거품을 쳐내더라도 적어도 그가 요시오카, 간류와 사투를 벌였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무사시를 제외하고 유명 검호임에도 무분별하게 목숨을 건 실전을 치른 것은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오노 타다아키밖에 없다.

여담으로 진검승부는 아니지만 호조인 인에이의 제자이자 다카다류 창술의 시조인 다카다 마타베((高田又兵衛)[18]와 시합을 벌인 적은 있다. 마타베의 주군인 고쿠라 번주 오가사와라 타다자네[19]의 명령으로 벌인 시합인데 당시 무사시는 목도를, 마타베는 대나무로 만든 쥬몬지야리(십문자 창)로 시합을 벌였다. 시합 내용 및 결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애당초 둘 다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설,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다는 설, 무사시가 마타베의 공격을 2번이나 막아냈지만 결국 3번째 공격에 사타구니가 찔려 패배를 인정했는데 이에 마타베는 무사시가 자신의 주군인 타다자네 앞이라 자신에게 승리를 양보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 무사시가 마타베의 공격을 3번 모두 막아내자 마타베가 창을 내던진 후, 창이 칼보다 더 길기 때문에 자신이 더 유리했는데도, 3번을 공격해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므로 자신의 패배라고 말했다는 설 등이 있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은 시합 전부터 이미 아는 사이였고, 시합 후에는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5.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 기록이 매우 의심스러움

그나마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긴 유명한 검호래봐야 요시오카 일문뿐인데 문제는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에서 무사시가 승리했다는 근거들도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다.

일단 미야모토 측 기록, 즉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가 남긴 코쿠라 비문에는 무사시가 당주인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죽이고, 제자들을 모두 죽여서 요시오카 가문을 멸문시켰다.라고 되어있고, 후대의 소설 및 영화, 베가본드같은 창작물에서는 이 설을 취하고 있으나 스루가공방전, 혼초부게이쇼덴[20]이라는 신빙성이 높은 사료들에 의하면 요시오카 가문과 병법소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도 영업 중이었으며, 무려 1614년까지도 영업하다가 1614년 궁중에서 일반에 개방된 사루가쿠를 보다가 경호원들과 언쟁이 붙어서[21]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요시오카 가문은 무술 도장을 닫을 것! 이라는 처벌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요시오카 세이주로와 그 동생이 도요토미 편을 들어서 개인적으로 오사카 성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난 후에는 제자 중 염색에 뛰어난 자가 있어 일문이 염색업으로 전직,직종을 전환하여 염색업으로 교토에서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 되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요시오카의 후손들이 염색 장인으로서 일본 각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22]

즉 일단 요시오카 일문이 멸문되었다는 기록은 아예 미야모토 이오리의 날조라는 것이다.

탄지 미네히라 등의 기록, 즉 미야모토 무사시를 개조로 하는 니텐이치류 사범들의 기록들, 즉 무사시 전기 및 무공전 등에 의하면 미야모토 무사시가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죽였다, 혹은 중상을 입혀 승리하였다고 하는데 요시오카 세이주로도, 그 동생도 죽지도 않았다. 오사카 성 공방전에 참전했다는 말도 있고, 이후에는 염색업으로 전직하여 요시오카 세이주로의 별칭인 켄보(憲法)조메(染:염료)라는 흑갈색의 염료를 발명한다.[23] 즉 요시오카 당주들이 죽고 가문이 망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반면에 요시오카전(吉岡傳)에서는 이와 반대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도망쳐서 결투에 나오지도 않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중립 서술인 고로다화와 혼초부게이쇼덴의 기록에 따르면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승부는 무승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아마 대등한 시합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심지어 미야모토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문에서 손님으로 머물 때 "대체 누가 이겼냐?"는 질문에 무사시가 「 자기가 이겼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당대에도 해당 승부에 대해 "무사시가 이긴 건지, 아니면 진 건지"에 대해 확실하게 공표된 게 없어서 승패에 논란이 있었다는 의미다. 지금이야 관련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어쩔 수 없다지만, 상식적으로 당대에는 승부가 명백히 났다면 당연히 널리 알려졌을 테고, 그럼 그걸 무사시에게 다시 물어 확인하려 할 이유가 없었을 게 당연하다. 그리고 사실 무사시의 오륜서에도 요시오카 가문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이 없다! 그저 오륜서에 의하면 21살에 교토로 올라와 천하의 헤이호카 (兵法家:병법가)와 싸워 이겼다는 말만 있고, 교토에 천하의 헤이호카라는 걸 보니까 요시오카 일문을 뜻하는 거구나. 하고 대충 끼워맞춘 게 현재의 해석이다.

즉 당대에도 이미 승패에 관한 논란이 많아서 사람들이 무사시에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고, 심지어 무사시 본인조차도 자신의 저서에서조차도 교토의 요시오카 가문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을 당당하게 확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 정도로 당당하지 못한 걸 보면 무사시가 승리자라기보다는 패배자가 정신승리를 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어쨌든 현재에도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건 분명하나, 어찌되었든 각종 창작물에서 마치 사실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미야모토 무사시 혼자서 요시오카의 당주들을 죽이고, 수제자 몇 명을 쓰러트린 후, 복수하러 온 제자들까지 혼자서 학살한 후 요시오카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또한 설령 미야모토 무사시가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상대로 완승을 했고, 그 덕분에 요시오카 세이주로가 죽지는 않았지만 중상을 입었으며, 그래서 염색업으로 전직한 것이라고 무사시에게 최대한 우호적인 해석을 한다고 쳐도, 과연 그 요시오카 가문이 소설이나 창작물에서 이야기 하듯이 전국구급의 잘나가던 가문이냐는 것이 두 번째 문제다. 일단 교토 요시오카 가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요시오카 세이주로의 증조 할아버지, 요시오카의 1대 당주인 요시오카 나오모토로 당시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섬겨서 벼슬을 살고 그 덕분에 교토를 근거지로 삼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 말기의 쇼군인 만큼 상당히 적은 권력을 가진 쇼군이긴 하였고, 또한 당대에는 츠카하라 보쿠텐, 아이스 히사타다, 마츠모토 마사노부 등의 초일류 검호들의 이름이 왜구를 통해 명나라까지 퍼지던 시대긴 하였으나, 어쨌든 검호로서 정식으로 쇼군 밑에서 봉록을 받고 벼슬을 살았으며 그 덕택에 가문을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요시오카 나오모토는 앞서 말했듯이 검증된 일류에 가까운 전국구급 검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2대 당주 요시오카 나오미츠는 벼슬을 살지 못하여 교토에 검술 도장을 차려 사람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고, 나오모토의 손자인 3대 당주 요시오카 나오츠나와 요시오카 세이주로 역시 마찬가지. 만약 이들이 쇼군가의 검술 사범을 겸하고 있었다면 증조부인 요시오카 나오모토나 진짜 당대 쇼군가의 검술 사범이었던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텐, 야규 무네노리, 오노 타다아키처럼 벼슬을 살았을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만 봐도 그냥 평범한 수준의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치 쇼군가의 공식 검술 사범 급인 것처럼 창작물에서 그려지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던 미야모토 이오리의 무사시 사후 9년 후에 건축된 송덕비인 코쿠라비문 때문. 이 비문에서 미야모토 이오리가 쓰기를, 미야모토 무사시의 아버지는 신멘 무니[24]인데 요시오카는 대대로 쇼군가의 검술 사범을 맡은 가문으로 일본 제일의 무술가[25]라고 불렸는데, 누가 일본 최고인지 알고 싶었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무려 신멘 무니를 몸소 초빙하여 당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공식 검술 사범이던[26] 요시오카 나오츠나와 승부를 시켜 3번의 시합에서 신멘 무니가 2승을 거두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신멘 무니에게 천하 무쌍이라는 칭호를 내렸다.[27] 부친들의 이러한 일도 있어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요시오카 세이주로는 싸울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하여 요시오카 일문이 멸문된 것이라며, 요약하자면 요시오카는 천하 제일이었는데 내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그 천하제일을 대를 이어 멸문시켰으니까 진짜 천하제일임 이라는 무협지 뺨치는 내용을 날조했기에 요시오카 가문이 각종 창작물에서 아시카가 가문의 공식 검술 사범이자 전국구급인 듯이 그려지는 것. 그나마 일본제일이라던 코쿠라비문에 비하면, 이후 창작물에서는 사실성을 위해 오히려 좀 과장을 줄인 셈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요시오카 일문은 그리 대단한 검호들이 아니었고, 멸문되었다는 무사시 측의 기록은 완전히 거짓으로 요시오카 가문은 무사시와의 승부 이후에 오히려 업종을 바꿔 융성하였으며, 승부 역시 누가 이겼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1932년의 나오키 산주고도 무사시에 관하여 요시오카 측과의 승부에 관하여 확실한 기록이 없고, 유명한 검호들과 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 무사시의 언동에는 검의 강함보다 머리가 좋은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비판하고 있다.

6. 사사키 코지로 관련

무사시 필생의 라이벌로 각인된 사사키 코지로는 정작 무사시의 저서 오륜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의 코쿠라비문에서 '간류'로 등장하는 것이 처음이며, '사사키 코지로'라는 성명이 등장하는 것은 무사시 사후 130년 후에 쓰인 이천기가 처음이다. 또한 실제의 사사키 코지로는 토다 세이겐이나 카네마키 지사이 등 스승들의 나이로 대략 추정하였을 때 무사시와 대결 당시 나이가 적지 않은 검호로 보이나, 이렇게 된다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벼슬을 살지 못한 잡검호가 되기에 무공전과 이천기 등 에서는 사사키 코지로가 무사시와의 대결 당시 18살이었던 천재 소년 검객으로 그려지며, 요시카와 에이지 작 미야모토 무사시 소설에서는 심지어 '너무 실력이 뛰어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각 가문들의 스카웃의 표적이 되어 이미 벼슬을 살기 직전이었고, 무사시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면 호소카와 가문에서 벼슬을 살게되는 것이었는데 무사시가 코지로에게 승리해서 그를 바탕으로 나중에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인정해줘서 봉록을 받음'이라고 사실을 마음껏 왜곡하여 등장시킨다.

다만 비교적 최근에 발견됐으며 제3자의 입장으로 비교적 신뢰성이 있는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측 기록인 누마타가기에선 간류를 고쿠라 검술사범이라 서술하고 있기에, 그가 (고쿠라의 검술 사범으로 종사하는 것에 있어 자타가 인정할 정도의) 상당한 실력을 가졌음은 분명해 보인다.

후대에 무사시를 띄워줄 요량으로 등장시킨게 아닐까 하는 의혹도 있으나, 일단 '간류'에 대해서는 상술하듯 관련 사료가 남아 있어 실존 인물로 여기는 게 학계의 중론이며 문제는 사사키, 간류, 츠다 코지로 등 기록상 여러 개로 나뉘는 이름 중 무엇이 진짜인가 하는 것이다.

7. 무사시 측 사료들의 신뢰성이 전무

본래 이름은 후지와라 하루노부(藤原玄信) 또는 히라타 무사시(新免武蔵)라는 얘기가 있으며, 바뀐 이름에서 성은 미야모토 혹은 신멘(新免)으로 아명은 벤노스케(辨助), 이름은 武藏-'무사시'와 '타케조'로 읽을 수 있다. 이 이름을 읽는 것은 요시카와 에이지 소설의 영향력으로 무사시로 굳어진 듯하다. 또한 이름이 마사나(政名)라는 주장도 있다. 호는 이천(二天) 또는 이천도락(二天道樂).

양자 이오리가 세운 비문, 즉 코쿠라 비문에 따르면 신멘 무니가 아버지였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오리가 도마라 신사에 봉납한 표찰의 기록에 따라 덴쇼년간 사망한 신멘을 무니라고 보지만 실은 이 사람, 멀쩡히 살아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가계도에서는 신멘 무니노스케의 양자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무니를 양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혹은 도리류(当理流)의 무예가인 미야모토 무니노스케 후지하라 가즈마라는 설도 있다. 같은 작품에서 출생장소가 모순되는 등, 간단한 신상명세조차 이 모양이니, 실제 행적을 추적하려면 카오스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또한 현재 전해지는 오륜서 역시 원본이 소실된 상태로 다수의 사본만이 존재하는 실정이며, 이마저도 내용에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오륜서에는 버젓이 하리마(播磨 현재의 효고현) 출생이라 적었는데, 에도막부 후기의 지리서인 토사쿠시(東作誌)에서는 비젠(備前 현재의 오카야마현)국 미미사카(美作)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그린 미야모토 마을은 바로 후자를 채택한 것이다.[28]

이렇게 무사시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전해지는 이미지는 후대에 재창조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요시카와 에이지의 명작 소설인 《미야모토 무사시》에서의 이미지가 큰 영향을 끼쳤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무사시는 일본의 정식 역사서에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으며 무사시의 행적에 관해 기록된 것은 전부 무사시의 제자들에 의해서 후대에 창조된 것이다. 즉 요시오카를 멸문시켰다는 기록은 무사시의 양자였던 미야모토 이오리가 1654년에 남긴 코쿠라비문에 기록되어 있고, 무사시가 동군에 참전했으며 요시오카 일파에 승리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은 니텐이치류, 즉 무사시를 개조로 하는 유파의 사범인 탄지 미네히라가 1727년에 쓴 무사시 전기에 쓰여 있으며, 무사시에 관한 사료인 무공전은 니텐이치류 사범인 토요타 마사나가가 1755년에 썼고, 니텐기(二天記, 이천기)는 심지어 1776년에 무공전을 사료로서 토요타 마사나가의 아들 혹은 손자인 토요타 카게히데가 만든 기록이다. 무공전까지는 그나마 사료로서의 가치가 조금은 인정되나. 심지어 이천기는 날조의 정도가 워낙 심하며, 무공전에 등장하지도 않는 무소 곤노스케와의 일화 등 소설책을 원출처로 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심지어 변형하여 집어넣는 등 무사시 미화를 위해 거짓된 자료가 넘치는 터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전부 거짓말로 치부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래도 간접적으로 참고하는 정도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있다. 라는 주장이 양립할 정도. 출처

즉 무사시에 관한 근거 자료라고는 자신이 쓴 책+최대 사후 130년 후에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 각종 민간 전승과 신격화가 결합된 사료들 뿐이다. 덕분에 동 시대의 다른 사료와 비교 검증할 경우 다른 사료와 불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29] 아예 의도적으로 무사시를 추켜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많다.

8. 현대의 무사시 실드 측의 사료 왜곡과 날조

또한 나오키는 무사시에 대해 옹호하는 측에서 무사시에 대한 불리한 기록들은 숨긴다며 63회의 진검승부를 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호소카와 가문의 검술 사범이자 성격이 더러운 걸로 유명하던 니카이도 류의 마쓰야마 몬도를 두려워해 그 지역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있고, 오와리 번의 한 검술 사범에게는 병법 35개조[30]따위를 쓰고 후회하지 않겠나? 라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미야모토 무사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기록에는 전쟁에 참가했다가 성에서 던진 짱돌을 맞고 부상당해서 누워있다는 인간적인 면모의 기록도 존재하는데, 미야모토 무사시를 검성으로 부르며 귀신의 검술이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기록들은 절대 인용하지 않는다.[31][32]

심지어 코쿠라 비문과 탄지 미네히라의 전기, 무공전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내용을 날조하는 경우도 잦다. 예컨대 미야모토 무사시가 당대 천하 제일이었던 야규 무네노리에게 승부를 신청해 야규 무네노리가 승부를 회피했다든가, 혹은 원래는 무사시가 쇼군가의 검술 사범이 되기로 했었는데 무네노리가 방해했다든가[33], 보장원류 창술은 이미 호조인 인에이 때부터 이미 승려들의 싸움을 금지하고 주지에게는 수신 명목으로만 창술을 계승시켰으며 인가장을 받은 제자들은 정작 일본의 중심이던 에도에서 도장을 차렸었는데도 불구하고 보장원 주지였던 호조인 인슌에게 승리했다든가, 비판이 커지자 이제는 사실 그건 아니고 인슌의 스승에게 이겼으며 그 스승은 호조인 인에이의 수제자였다고 한다던가[34], 최초 출처가 가이쇼모노가타리라는 소설책을 근거로 하여 무소 곤노스케에게 이겼다든가[35], 닌자인 시시도 아무개[36]와 싸웠느니, 도적인 츠키카제 고헤이랑 싸웠느니 하는 뜬금없고 정말 비상식적인 이야기들[37] 유랑하던 야규 토시요시 효고노스케를 만나 판정승을 거두었다든가, 이토 잇토사이에게 비겼다든가, 심지어 생몰 연대조차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츠카하라 보쿠덴을 만나 싸워 무승부를 거뒀다 등등... 막말로 지금 당장 구글에서 무사시를 검색해봐도 무사시에 관한 고사혹은 일대기라면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애초에 미야모토 무사시에 관해서 남겨진 역사 기록들조차도 그 저자들이 무사시 관련자고, 일기 등 다른 사료와 교차 검증시 동일한 부분들이 적으며 이천기는 아예 전부 날조 기록 취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매우 불투명한데, 이러한 역사 기록조차 아예 전무한 일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얘기하고, 이러한 창작된 기록들이 일본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큰 문제다.

9. 유명한 제자가 한 명도 없음

다른 증거들은 부족하더라도 훌륭한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나왔다면 무사시의 강함에 신빙성을 더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노 타다아키를 제자로 둔 이토 잇토사이도 대부분의 행적은 미스테리지만 그 오노 타다아키를 제자로 둘 정도면 얼마나 셌겠어? 하는 생각으로 현대에도 가장 강한 검호들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심지어 유명한 제자조차 단 한 명도 없다. 나오키 산주고 역시 유명한 제자가 없었다며 이를 비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무사시 실더들의 반박으로는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라 사람이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무사시의 제자들의 공적이라면 탄지 미네히라의 무사시 전기, 무공전, 이천기 등 자기 유파의 개조인 무사시에 관한 신격화가 담긴 기록들을 엄청나게 써내어 후대의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소설 저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것 정도. 특히나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천기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이나 검증 없이 인용하여 현대의 검성, 아니 검신 미야모토 무사시 열풍을 불러왔고, 이는 역사적인 사실 측면에서는 큰 문제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다만 본인의 실력과 가르치는 능력은 다른 문제란 것도 생각해볼 일. 스스로 오륜서에 적은 의문처럼 기술이 뛰어났다기보다는 타고난 강자였을 수도 있다. 현대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지도자로서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본인은 숨쉬듯 자연히 되던 것이 제자들은 안되는 것을 이해 못 하고, 또 설명을 해주질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실패하는 쪽이 다수다. 애초 타고난 반사신경, 신체적 특징(완력이나 체구, 왼손잡이 등) 등으로 강했던 선수라면 이를 갖추지 못한 제자들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나쁜 버릇을 물려주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 팔이 짧은 선수에게 토마스 헌즈의 복싱을 가르쳐봐야 소용이 없으며, 타고난 발목 힘과 유연성이 탁월하지 않으면 데이비드 베컴의 크로스나 프리킥은 따라할 수 없고, 아무리 기술이 좋은 선수라도 마이클 조던 같은 강골이 아니라면 그처럼 공중경합에서 안정적인 자세로 슛을 던질 수 없다.

10. 결론

결론적으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진짜 당대 최강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검호였던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 야규 무네노리, 오노 타다아키, 이토 잇토사이, 야규 무네요시, 야규 토시요시, 아이스 히사타다, 이이자사 이에나오 등은 벼슬을 삶+당대 천하 제일로 불림+당대의 사료에 활약들이 기록되어 있음+당대의 신분 높은 유명 인사를 제자로 둠+검술 실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강한 제자들을 둠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반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3자에 의해 쓰인 실전에 대한 몇 사료뿐 나머지는 전무하다. 또한 위의 검호들을 비판할 경우 어거지로 비판하더라도 끽해야 한두 개 정도가 나올 뿐이지만, 무사시는 비판점으로만 논문이 나올 정도이며 실제로 미야모토 무사시의 진실과 거짓에 관하여 40여개가 넘는 항목으로 분석한 책도 존재할 정도다.

나오키 산주고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극찬하는 사람들은, 다른 검호들의 활약과 비교 검증을 거치지 않고, 미야모토 무사시 관련 자료만을 참조했을 뿐이다." "비판의 여지가 없는 천하 제일의 검호는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뿐이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요시오카와 간류와의 싸움만큼은 실존했었던 결투라고 보는 게 주류 의견이며, 무사시는 목숨을 건 싸움에서 적어도 한번의 무승부와 한번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생각되는 만큼 2류 내지 3류 검사로 보기에도 어렵다. 애초에 당대 에도의 유명한 검객들 중에서도 이만큼의 실전 시합 기록이 있는 것은 모두가 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던 오노 타다아키뿐이다. 희귀한 케이스인 그를 제외하고 검술 사범이라는 막중한 지위에 앉아있었던 타 유명 검호들은 한번의 승부로 모든 걸 날릴 수 있는 시합이란 행위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즉 실전 경험이란 측면에 있어서는 무사시가 일단은 동시대 어지간한 검호들보다도 우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서 전일본 검도 연맹은 '무인으로서의 용력'이 아닌 '병법가로서의 역량'에 초점을 두고, 미야모토 무사시를 평가했다. '병법가전서와 오륜서는 검도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한 근세 이대 병법사상서이다.'라 하여, 그 저자인 야규 무네노리와 미야모토 무사시를 전일본 검도 연맹의 검도전당 별관에 특별히 나란히 상을 배열하여 그 업적을 인정한 것.

결론적으로 무사시는 검술 실력과 여러 임기응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았을 때 당대의 이름난 (삼류 검객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병법가라고는 할 수 있으나, 흔히 알려진 것처럼 동시대 유명 검호들을 모두 초월한 당대의 독보적인 검호라고 확신하기엔 큰 무리가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나친 과대평가와 그에 대한 반발로 인한 과소평가가 모두 공존하는 인물이라 하겠다.

11. 미야모토 무사시 허구성의 연혁

그렇다면 과연 어느 시대부터 무패의 검성 미야모토 무사시 열풍이 시작된 것인가!도 살펴볼만한 문제인데 대체적으로 이 시발점으로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꼽고 있지만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단 에도 시대. 일부 미야모토 무사시 추종자들은 에도 시대에는 전쟁이 사라져서 무술이 필요가 없어져서 검술이 대우를 못받았다라는 굉장히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나온 주장을 하는데 일견 그럴싸하게 들린다. 전쟁에서 검객이 명성을 떨치고 관직에 오르는 일이 막혔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전쟁이 사라지면서 검객으로서, 관직에 임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검술 뿐이었다. 센고쿠 시대는 워낙 전쟁이 많이 벌어진 시대다 보니 꼭 무예에 능통하지 않더라도, 머리가 비상하거나, 교양이 넘치거나, 시대의 흐름을 잘 타거나, 운이 미칠듯이 좋으면 무사로서 대출세도 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나 다나카 요시마사 같은 평민도, 사이토 도산, 고니시 유키나가같은 상인 출신도 무사로 대다이묘가 될 수 있는 시대였으나, 에도 시대에는 전쟁이 아예 사라지면서 전공을 세울 길이 막혀버린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조선이나 명나라처럼 과거제를 시행하여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있던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무사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검술이었다. 실제로도 나카니시 일도류 3대 종가 나카니시 츠구마사(中西子政)의 제자였던 마타시치로는 조개를 파는 미천한 상인이었었는데 나카니시 츠구마사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수련한 끝에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무사가 되고 성을 아사리(바지락)라고 지어 아사리 마타시치로가 된다. 이게 무려 에도 시대 말기의 일이다.

이렇듯이 에도 시대에 무술의 위상이 높다 보니 수많은 유파가 융성하고 난립하였는데,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일본 전체에 200개 미만의 유파가 존재했다는 조사 기록이 있고 에도시대 말기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검술 유파의 숫자만 718개, 다른 분야에도 유술 179개, 창술 148개, 궁술 52개 유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이렇게 수많은 유파가 난립하면서 각각의 유파들이 자기 PR과 유파의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에도 시대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인물들을 각각 자신의 유파의 개조나 시조라며 소개하거나 또는 날조하기 시작하였다. 예를들어 텐도류같은 경우 '우리 텐도류는 사이토 카츠히데라는 전설적인 검호가 만들었는데, 그의 스승은 그 유명한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이다', 혹은 '우리 유파는 그 유명한 야규 쥬베가 방랑 중에 우리 유파의 창시자의 재능을 보고 감격하여 신카게류를 전수해주어 수제자로 삼아서 만들어진 검술이다, 그러므로 위로 가자면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아이스 히사타다가 우리 유파의 시조다' 등등. 물론 사실인 경우도 일부 있을테고, 거짓도 많았겠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이렇게 자기 유파의 시조로 많이 쓰이던 인물들이 이이자사 이에나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 이토 잇토사이, 행적 자체가 불분명한 장점을 가진 야규 주베에, 심지어 스스로 제자를 자칭한 인물들의 기록까지 확실히 존재하는 야규 무네노리 등이었다.

즉 이들이 진짜로 당대의 레전드라고 불린 인물들이며,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경우 애당초 행적도 상당히 불명확한 만큼 유파의 스승으로 뻥치기 좋은 조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무사시가 당시에도 레전드 검객이었다면' 무사시를 유파의 스승으로 놓는 검술 유파가 부지기수로 있었어야 정상일 텐데, 실제로는 구마모토번만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약소 유파인 진짜 니텐이치와 엔메이류 정도의 한둘뿐만이 무사시를 유파의 스승으로 놓고 있다는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에도 시대에 일류 검호로 여겨지진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에도 시대 후기 만들어진 츠카하라 보쿠덴과 상대했다는 일화에 의하면 츠카하라 보쿠덴이 무사시의 일격을 밥 먹다가 젓가락으로 막는 식으로 차원이 다른 검호로 묘사되기도 하고.. 또 사실 일도류와 야규 신카게류의 시대에 진짜 레전드도, 일도류나 신카게류도 아니면 조명을 받기 힘들기도 하고..

반면에 혼초부게이쇼덴에 무사시의 일화, 즉 간류지마의 결투가 기록되어 있으며 간류지마의 결투가 가부키로도 공연됐던 것, 카이쇼노모노가타리라는 소설책에 무사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존재하는걸 보면 완전히 삼류 검호로 취급된 건 또 아닌 것 같고, 시골에서 어느 정도 실력은 있었고 간류지마의 결투로 나름 유명한 이류 검호 정도로의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에도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술사에 큰 변혁이 시작된다. 메이지 정부에서 폐도령을 내려버린것. 여기서 검술이 끝나는가 했는데 폐도령및 징병제 기타 정책에 빡친 사족들이 들고 일어난다. 이게 바로 사츠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반란이다. 이 세이난 전쟁에서 사츠마 측의 시현류를 보고서 메이지 정부 측에서도 검술의 가치를 느끼고서 경시청에서 검술 과목을 만들고 경시청류를 만들게 된다. 이후에 검술은 격검 흥행으로 어찌저찌 명맥이 이어지다가 1895년 대일본 무덕회가 생기게 되고, 여기에 유도, 검도, 궁도들이 들어가게 된다. 이에 참가한 것이 직심영류, 북진일도류, 신도무념류등 몇몇 유파였고, 당시에는 다카노 사사부로와 나이토 타카하루등 쇼와의 검성으로 불리는 일도류 계열의 선생들이 검도계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현대의 검도의 형, 기술, 수련법은 일도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쨌든 이렇게 검도가 만들어진다. 검도는 후에 중등교육 과목에 들어가게 되는 등 국가적 지원을 받게된 반면에 기존 고류 검술들은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으로 쇠락하고 만다. 이렇게 검술의 대세가 고류검술에서 검도로 바뀌면서 시대의 변화로 생긴 가장 큰 변화가 도장에서 구전+대면하여 소수의 인원을 교육시키는 도장 검술에서, 다수 대중에게 전파하는 검도 교육으로 바뀌게 된다.[38] 이렇게 많은 수를 가르치다 보니 소수를 구전+대면하여 가르치는 것보다 잘 정립된 교본 중심의 대중 지도자가 가르치는 식으로 검도 교육의 체계가 옮겨가면서, 예전에는 소수의 제자를 눈 앞에서 보고 틀린 점이 있으면 짚어주고, 훈련이 부족한 거 같으면 훈련을 더 시키고, 심법이 이상한 거 같으면 마음가짐을 가르칠 수 있었고, 또한 비전서에 너무 자세히 오의를 서술했다가 다른 유파가 우리 유파의 오의나 훈련법 등을 훔쳐가는 것도 큰일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도장 검술에서의 비전이나 교육은 대체로 구전 중심이고 비전서 같은 건 대체로 우리 유파의 검술에 능한 사람만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은밀하고 잘 알 수 없는 형식으로 묘사했지만, 현대의 검도는 다수의 제자를 가르쳐야 하고, 심법같은 것도 다수 대중을 가정하여 설득력이 있게 써야 하며, 훈련 방식도 교본만 보고도 따라 할 수 있도록 상세한 방식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설득력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권위자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시기 검도인들로부터 자주 인용되던 검술에 관련된 작품들이 크게 3개 타쿠앙 소호의 부동지신묘록,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 그리고 무사시의 오륜서이다.[39] 그러니 이들이 현대 검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이 3작품들 중 당대의 검도가들이 인용하기 쉬운 작품과 어려운 작품들이 당연히 존재했는데, 우선 부동지신묘록은 애초에 승려인 타쿠앙 소호가 만든 작품이다 보니 대체로 불교적이고, 검도 이야기보다는 심법이 중심이 되고 그걸 병법=검술로서 설명하는 형식이라 인용이 쉽지가 않은 편이고,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는 사실 권력의 최상위권에 올라간 배부른 검호가 이제 정신적으로도 한번 고민해볼까! 하는 느낌이다. 내용도 불교를 이용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훈화나, 도교를 이용하여 유교를 비판[40]하면서 자신의 활인검+살인검+무도토리 등의 개념을 최종적으로 서술하는 형식이라 역시 인용의 어려움이 좀 있는 편이다. 또한 아무래도 북진일도류 중심의 현대 검도에서 대립각을 세운 신카게류의 인물이라는 것+에도 야규류 종가는 에도시대 말에 이미 망해서, 이제는 라이벌인 오와리 야규에서 야규류를 계승하여 동경야규회로 계승된 것도 큰 단점이었다.

반면에 오륜서는 사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제발 저 좀 취직시켜주세요, 저 취직 시켜주시면 이렇게 꼼꼼하게 가르쳐드립니다. 하는 식으로 자기 PR을 위해 만들어낸 서적이고, 그러다보니 한 25%만이 심법이고 나머지 75% 이상은 검도의 형이나 기술, 수련에 관한 묘사들이다. 구문 몇 개를 예를 들면 칼을 들었을 때는 눈을 크고 넓게 뜨며 상대의 칼에 시선을 두지 마라, 손가락은 처지지 말게 쥐고서 사람을 벨 때도 두려움으로 움츠려들지 마라. 등등 직접적으로 검술에 관해 묘사한 부분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인용하기에 정말 가장 편하고 훌륭한 검술 서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사실 위에서 서술했지만 대개 이름 높은 검호의 도장은 도장에서 구전 + 대면하여 가르치는 방식이고, 그런 검호중에서 글재주가 좋은 사람이 드물어서 오륜서처럼 말이 아닌 글자로 출판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경우가 많았으나, 무사시는 당대 검호 중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걸 체계적이고 편하게 요약해서 책으로 남길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실력없는 입만 산 하수였다면 그 정도의 책을 써내기 힘들었을테니 무사시는 다른 검호에는 못 미치더라도 어느정도 실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시기 활동하던 사람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쇼와의 검성"으로 불리는 5인방, 즉 타카노 사사부로(10단), 사이무라 고로(10단), 모치다 모리치(10단), 나카야마 하쿠도, 나이토 다카하루 같은 현대 검도의 창시자 격인 인물들의 경우에도 전부 다 수많은 대회들의 우승 경험도 우승 경험이지만, 교본 등의 텍스트로서 자신의 검도론을 설파했던 사람들이고, 현대에도 이 인물들이 쓴 경시청 관련 기록이나 검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이 자신의 저서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보면 대체로 오륜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습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쭉 적은 다음에 "무사시가 오륜서에서 말하길 '천(千)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萬일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 이 단련이 있고서야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부단하게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 것이다." - 나이토 다카하루. 이런식으로 오륜서를 계속해서 인용한 것이다.

검성으로 불리는 당대 최강의 5인방, 심지어 현대 검도를 창시한 공로로 현대 전일본 검도 연맹에 현창까지 된 이 인물들이 모두 다 무사시를 인용하고 있으니, 당연히 "무사시가 대체 누구야!", "진짜 레전드인가보다!" 이런 식의 무사시 열풍이 몰아쳤고, 심지어 니텐기와 오륜서를 보니까 60번을 이겼느니, 요시오카를 멸망시켰느니 라고 하니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며 검도사에 관한 책들은 이제서야 막 나오기 시작하는 정도의 태동기에 사료 교차 검증은 하기가 쉽지도 않았다. 또 대체로 무부에 가까운 검도인들이기도 하니 결국 검도계에서는 대체로 반박없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검성' 무사시 열풍이 몰아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역시 전 일본 검도연맹 현창자인 지키신카게류의 야마다 지로키치(山田次朗吉)같은 경우 자신의 저서에서 "무사시가 최강이라면 에도에서 싸웠을텐데 그런 적이 없으니 최강이라기에는 의심스럽다." 라고 조심스럽게, 나오키 산주고 같은 경우는 "무사시가 최강은 무슨!" 하고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자만 검도계에서는 현대 최강의 인물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계속 인용하고 있고, 니텐기 보니까 최강이라고 나오니 최강의 검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무사시 열풍의 시발점은 이 시기부터인 것이다.

그렇게 검도계에서 무사시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쪽 vs 무사시는 별 것 아니라는 사람들의 의견 대립이 계속되다 1931년, 요미우리 신문에서 주최한 좌담회에서 무사시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여기서 미야모토 무사시를 옹호하는 쪽이 기쿠치 간과 요시카와 에이지였으며, 무사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이 나오키 산주고였는데, 여기서 요시카와 에이지는 나오키 산주고의 맹공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첫 번째 모노가타리 이하 문단 참고.[41]

한편 요시카와 에이지는 좌담회가 열린 지 4년 후인 1935년 아사히 신문에서 한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였다. 덕분에 일각에서는 이것이 나오키 산주고의 논파에 대한 요시카와 에이지의 답변이다라든가, 혹은 "이 좌담회가 없었다면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설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도 나오고 있을 정도며, 소설 구상과 자료 체크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했을 때 단 4년 후에 소설이 쓰였다는 건 시기적으로만 봐도 분명 엄청난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요시카와 에이지의 검성 무사시가 소설로 구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검성 무사시가 대중적으로도 널리 퍼지며 각종 대하 드라마 등의 소재가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42]

다만 현재는 각계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사료의 교차 검증 등이 이어지며 1962년에는 시바 료타로가 '진설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책을 통해 무사시가 최강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입신 출세를 원하던 검객이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NHK에서 무사시 검증을 위해서 현대 교토에서 염색집을 하고 있는 요시오카 가문을 찾아가서 요시오카 가문이 멸족된 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는 등 무사시에 대한 과도한 신격화는 많이 없어진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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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술 사범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지만, 검술 사범 역시 아니었다. 호소카와 집안의 검술 사범은 야규 무네노리였고, 야규 무네노리가 없을 때 배울 검술 사범 역이었던 게 검술 사범으로 호소카와 가문에서 1천석을 받았으며, 성격이 더러워서 가신들과 불화를 일삼고, 무사시에게 진검 승부 신청해서 무사시를 도망치게 만든 니카이도류의 마츠야마 몬도다. 무사시 측 사료인 이천기의 묘사 자체부터가 객장이다. [2] 알려진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봉록이어서 일본인들도 싸움질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일본인들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아이다 유지, <일본인의 의식구조>) [3] 즉 사무라이들은 신장의 야망 게임에 이름이 나올 정도만 되어도 죄다 석고로 받았다. [4]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받았던 벼슬 [5] 야규 무네노리참조. 하타모토로 등용되어 200석이며, 야규 무네요시에게 따로 수여된 영지 500석도 있다. 또한 1601년 오노 타다아키가 사고를 쳐서 폐문당한 후 히데타다의 병법 사범으로 임명되는데 그 때는 1천석을 추가로 가증 받았다. [6] 이에야스 때 600석+도쿠가와 이에미츠 때 1000석 이하 배신들 200석 일괄 가증으로 타다아키 당시에도 800석까지 승진 [7] 자세한 타다아키의 기행들은 오노 타다아키 참조 [8] 한 드라마에서는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출신이었던 이력 탓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니텐이치류의 사범인 탄지 미네히라의 기록으로는 동군 출신으로 쿠로다 칸베 밑에서 오토모 가문과 싸웠다는게 거의 확정적이다. 특히 아버지인 신멘 무니가 세키가하라 전에 쿠로다 가문에 사관했다는 기록과 본인도 오토모가와의 싸움에서 분전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9] 그것도 저쪽은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을 비롯하여 당대 일본을 이끌어가던 다이묘들 다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상한 짓거리를 해댔다. [10] 쉽게 말하면 대충 어느 정도 이상을 받았느냐 못 받았냐가 곧 당대에 무사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여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준이다. 적어도 현대인이 사료만 보고 판단하기에 무사시는 그런 기준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 무사란 소리. [11] 보상의 구체적인 예 하나를 들자면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의 수제자였던 사이토 카츠히데는 천황 앞에서 진검승부를 펼쳐서 승리한 후 판관직을 수여받았는데 이 판관직은 최소 종 5위의 관직으로 그 우에스기 겐신이 많은 뇌물을 바쳐서 받았던 종 5위 탄정소필이라는 관직과 동격 혹은 상위이다. 오다 노부나가도 교토 입성 전까지 관직을 못 받아서 카즈사노스케와 오와리노카미를 자칭했었다. 검술 시합 한 번으로 이 정도 수준의 관직도 받을 수 있었던 것에서 당시 유명한 검호들의 대우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그 시합에서 받을 대전료에다 혹시 유명인의 검술 사범이 된다면 그 사람으로부터도 다른 댓가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정확히 얼마를 받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어쨌든 검술 실력 하나만 있으면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입신양명을 할 수 있었던 시대라는 이야기다. [12] 다만 이 사건은 야규 가의 기록에는 전해지지 않으며 일도류 측의 기록에만 전해져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애초에 쇼군 검술사범을 맡고 있으며, 전시에는 비서실장에 준하는 야규 무네노리가 이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다면, 본인 가문은 둘째치고 도쿠가와나 주변 가문들의 일지나 행장 등 기록에 남아있지 않을 수가 없다. [13] 사실 33회의 이토 잇토사이 역시도 자세한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미스테리한 인물+오노 타다아키와 일도류가 에도 시대의 양강 유파가 되면서 제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의 허구성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는 인물이다. 한편 진짜 기록이 검증됐으며 다수의 진검 승부를 벌였다고 전해지는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의 진검 승부는 기록된 걸로 19회. [14]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에서는 무사시의 관직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마타하치의 어머니 오스기가 독기를 품고 무사시의 악담을 하고 다녀 그 이유로 채용을 반려했다는 식의 전개를 보인다. 물론 역사적 근거가 없으니 어디까지나 '소설 내에서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도구일 뿐이다. [15] 일본의 소설가, 대중 문학가, 영화감독. 대중 문학에 관한 책들을 쓰는 등 일본 대중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권위자로, 병으로 요절 후에는 그를 기려 나오키상이라는 상이 제정되어 현재도 아쿠타가와상과 함께 권위 있는 상으로 이름이 높다. [16] 역시 일본 문단의 권위자, 문예춘추의 설립자 [17] 感状. 전공증명서. 이름있는 자의 목을 베거나, 제일 앞서서 돌격하거나, 퇴각시 후미를 맡을 때 주어진다. 오늘날 직장 생활에 비유하면 경력증명서이며, 군대에 비유하면 훈장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18] 창의 마타베라는 이명을 가진 검호로 이 당시 고쿠라번에서 400석을 받고 있었다. [19]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의 주군이기도 했다. [20] 본조무예소전(本朝武芸小伝). 에도 시대 중기에 각 무예, 무술가들에 대해서 정리한 책이다. 정리도 잘 되어 있고 신빙성도 높아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은 편. [21] 요시오카 세이주로 본인이 참살당했다 or 문제를 일으킨 건 요시오카의 일족 중 한 사람이다 등의 이설 있음 [22] 본가는 심지어 아직도 교토에서 영업 중이다 [23] 현재 태합입지전이나 신장의 야망게임에서 등장하는 창작물에 등장하는 공가들의 흑갈색의 옷이 켄보조메로 염색한 것이며, 당대 공가들에게 유행하여 다들 이 켄보조메를 사용한 흑갈색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24] 존재하는 인물인지, 진짜 무사시의 친 아버지인지 양 아버지인지도 정확히 알수 없다. [25] 벼슬을 산 것도 요시오카 나오모토 한 명뿐이며, 불린 적도 없다. [26] 검술시합 한번으로 종 5위하를 받던 시대에, 요시오카 나오츠나에게는 벼슬이 없는 걸로 봐서 역시 사실이 아니다 [27] 다른 역사 기록이 전무하다. 양자가 어전 시합을 벌였다는 사실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천하 무쌍이라는 칭호를 내린 적도 없다. 반면에 진짜로 천하제일의 칭호를 받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천하제일의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들이 현존한다. [28]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인기를 끌게 되면서 오카야마현은 자기네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지라며 관광 홍보를 하게 되었다. [29] 예컨대 위의 간류지마의 결투라던가, 요시오카와의 승부에도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는것만 봐도 [30] 오륜서의 전작 [31] 물론 아무리 대단한 검호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전쟁통에서 성에서 던진 짱돌에 맞지 말라는 법은 없고 맞으면 당연히 부상을 당해서 드러눕게 된다. 전쟁터를 돌파해서 적장의 목을 따고 돌아온 관우도 화살에 맞아서 수술까지 했다. [32] 짱돌이라고 써서 우습게 보일 수도 있는데 전국시대 중반까지는 종종 전투 사상자의 과반수가 투석에 의해 발생했을 정도로 투석병은 무시못할 중요 병종이었다. [33] 이건 사실 이천기의 기록이긴 하다. [34] 오조인 도에이에게 이겼다는 건 이천기, 인슌은 요시카와 에이지 [35] 역시 이천기 [36] 니텐기, 실제로 니텐기에는 시시도 바이켄이 아니라 아무개라고 쓰여 있다. 아무래도 닌자니까 신원 미상으로 만들어야 닌자같지 않을까. 라는 토요타 카게히데의 고민이 보인다. [37] 역시 둘 다 이천기가 최초 출처 [38] 이런 이유는 대일본무덕회의 성립 자체가 국민에게 무도 보급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검도의본은 중등학교의 교육용으로 만들어졌다. [39] 이 세 작품은 모두 현대 일본인들을 만들어낸 교양+사상서 100선에 당연히 모두 뽑혀 있으며 심지어 병법 가전서와 오륜서로 현대 검도에 막대한 사상적 영향을 끼친 공로로 야규 무네노리와 미야모토 무사시는 각각 전 일본 검도연맹에서 특별 현창까지 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시대 이전의 검호는 북진일도류의 치바 슈사쿠를 포함하여 무네노리+무사시 3명 뿐이다. [40] 복잡한 비판은 아니고 단순하게 개념 한두 개를 비판하는 형식. 병법가전서가 사상적으로 대단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일본 기준으로 당대 일본의 작품치고 대단한 작품이라는 거니. [41] 참고로 나오키 산주고는 병으로 이 좌담회가 열린 지 3년 후 사망했다. [42] 2014년에는 테레비 아사히 개국 55주년 기념으로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2부작 드라마 미야모토 무사시가 방영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