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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노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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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가해자
소년 A
(당시 18세, 징역 20년)
소년 B
(당시 17세, 징역 10년)
소년 C
(당시 15~16세, 징역 5년)
소년 D
(당시 16~17세, 징역 5년)
소년 E
(당시 17세)
소년 F
(당시 15세)
피해자
후루타 준코
(당시 17세)
관련 기관·장소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 도쿄도 아다치구 · 도쿄도 고토구 · 일본 경찰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미야노 히로시
Miyano Hiroshi
파일:미야노 히로시.jpg
본명 미야노 히로시 (宮野裕史) (개명 전)
요코야마 히로시 (横山裕史) (개명 후)
출생 1970년 4월 30일 ([age(1970-04-30)]세)
도쿄도 카츠시카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아야세 초등학교 (졸업)
히가시아야세 중학교 (졸업)
타카나와다이 고등학교[1] (중퇴)
소속 극청회 (두목)
가족 부모님(1942년생)[2], 여동생(1977년생)
1. 개요2. 성장 과정
2.1. 초등학교 입학 전2.2. 초등학교2.3. 중학교2.4. 고등학교2.5. 고교 중퇴 이후
3. 출소 후
3.1. 기타

1. 개요

일본의 범죄자. 극청회의 두목이자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주범.

히로시는 비행 청소년 무리에서 항상 주도적, 적극적인 역할을 하며 자신의 우위성을 과시했다. 그는 힘이 세고 싸움을 잘했던 데다가, 성격까지 매우 강압적[3]이었기 때문에 같은 비행 청소년들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이 사건이 발각되기 전까지 성폭행[4], 폭행, 납치, 절도, 살인미수 등의 강력 범죄 셀 수 없이 저지르고 다녔는데, 그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은 100명이 넘는다.[5] 당시 대한민국에서도 이 정도 수준의 죄질은 '가정파괴범'으로 지칭하여 살인에 버금가는 흉악범죄라고 판단해 사형을 선고 및 집행했었다.

신체적인 특징으로는 왼손잡이였으며, 정신감정 결과 뇌에서 경도의 지주막 낭종이 발견되었다. 이 지주막 낭종으로 인해 정신 쪽의 발달이 늦어지게 되었으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후에는 자기 스스로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특수한 심리 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 성장 과정

2.1. 초등학교 입학 전

1970년 4월 30일, 증권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피아노 연주 강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군인이자 야쿠자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고모부 또한 야쿠자의 간부였다.

아버지가 증권회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이 좋은 부유한 가정이었으나 아버지가 외도를 하며 집을 거의 오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혼자 육아를 하였고, 일을 하러 갈 때는 어린 히로시를 동네에 맡기고 밤늦게 찾으러 왔다고 한다. 집에 아버지도 없었고,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도 적었기 때문에 히로시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어머니는 히로시의 교육에 열중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영어 학원에 보내고 밤늦게 공부를 시키는 등 히로시의 장래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식의 교육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히로시를 구두 벨라로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하였고 이러한 어머니의 큰 기대는 히로시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어머니의 과도한 교육열은 결국 공부보다 중요한 인격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들어 버렸고, 이 시절 히로시는 부모님의 돈을 훔쳐 과자 가게에 가는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2.2. 초등학교

1977년, 히로시는 아다치 구립 아야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7살 터울의 여동생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부모님은 여동생을 더욱 이뻐하였고 히로시에게는 소홀해지게 된다.

1981년, 초등학교 5학년이 된 히로시는 헤어스타일을 펀치 파마로 바꾸었다.[6] 그리고 이때부터 교내에서 폭행, 절도, 기물 손괴 등의 비행을 저지르며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7]

그동안은 어머니에게 맞고 자랐지만, 성장을 하며 힘이 세진 히로시는 어머니를 상대로 폭언[8]과 폭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 가정폭력은 점점 더 심각해지더니 나중에는 어머니의 온몸에 타박상을 입히고, 갈비뼈 골절시켜 중태에 빠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심각한 가정폭력으로 인해 히로시의 아버지가 학교에 상담을 하러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82년, 6학년이 된 히로시는 불량한 친구를 보며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여 정신을 차려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초등학교의 졸업 문집에는 자신의 미래 꿈을 ' 소년원장'으로 적었다고 한다.

2.3. 중학교

1983년 4월, 아다치 구립 히가시아야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에 갓 입학할 당시, 히로시는 160cm[9]의 큰 키와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10]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의 추천으로 유도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도쿄의 유도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 도내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경량급 유도선수 유망주가 된다.

2015년 기준, 일본의 중1 남학생 평균 키는 152.6cm이다.
https://paro2day.blog.fc2.com/blog-entry-9.html
현재에 비해 영양상태도 좋지 않고, 평균 키도 더 작았던 1983년에 중학교 1학년 키가 160cm 이면 장신에 속한다.[11] 아마 해당 범행을 저질렀을 당시에는 키를 비롯한 전반적인 체격이 훨씬 더 커진 상태였을 것으로 예상된다.[12]

중학교 동창들은 "소년 시절부터 몸을 쓰는 일뿐 아니라 이름을 날리는 쪽으론 이골이 날 정도로 강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카츠시카구의 남자들 가운데 무력 최강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이렇게 유도에 집중하며, 중학교 3년간은 그의 다짐대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졸업하였다.

2.4. 고등학교

1986년 4월, 히로시는 학교장의 추천으로 도카이 대학 부속 타카나와다이 고등학교에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1학년 때 도쿄 전체에서 2~3학년을 모두 제치고 우승했지만[13][14] 상위 체급의 유도부 선배들은 그런 미야노 히로시에게 질투심을 느껴 심한 집단괴롭힘을 가했는데, 이것이 히로시를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만들어버렸다.

그 집단괴롭힘의 주요 내용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85kg의 바벨을 1분 동안 머리 위로 40회 들어 올리도록 하기
* 살충제 스프레이 캔에 라이터를 대고 화염방사기처럼 흩뿌리기
* 조임 기술로 실신시키기
* 들어서 던져버리기

이처럼 도를 넘는 집단괴롭힘으로 인해 유도부 선배들은 히로시의 부모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

1986년 6월[15], 히로시는 집단 괴롭힘에 대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 집 안의 물건을 모두 때려 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하고, 다른 학교의 복도에 오토바이를 타고 쳐들어가 학생들과 교사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지고 구타하는 등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가 구타를 할 때는 교사 6명이 몰려와도 떼어놓지 못해 경찰까지 출동하고 나서야 겨우 떼어 놓았다고 하는데 정말 경악스러운 건 경찰의 한심한 대응이었다. 소년원에 보내져야 할 짓을 하고도 소년원 송치 및 보호관찰 정도로 끝났다. 물론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도를 계속하긴 했지만 선배와의 시합에서 일부러 져주는 행동을 하는 등 예전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히로시는 좌절한다.

1986년 9월, 지속되는 괴롭힘을 견뎌오던 히로시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유도부를 탈퇴했다.

2.5. 고교 중퇴 이후

1987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직전 중퇴하고 친가 근처의 타일공장(유한회사 나카무라 타일)에 취직하였다.

고등학교 때 당한 집단 괴롭힘으로 인해 진지하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지쳐버린 히로시는 이 무렵,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인 오구라 유즈루, 와타나베 야스시와 함께 다니며 상해, 건조물 침입, 절도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마음을 고쳐먹은 것인지 다시 타일 공장에서 성실히 일하기 시작한다. 사실 미야노 히로시는 고등학교 때부터 와타나베 야스시의 친누나와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성인이 되어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200만 엔[16]을 저금하고 있었다고 한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1988년 5월, 나가노현 내의 자동차 학원에서 합숙생활을 하여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1988년 7월,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 새 차(350만 엔)를 구매하였다.

1988년 8월, 맞지 않는 적성과 낮은 임금에 싫증이 난 히로시는 타일공을 그만두었고, 중학교 동창을 통해 알게 된 폭력단 관계자에게 "하루에 3만 엔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히로시는 그의 일에 초대되어 가짜 브랜드 상품 강매, 꽃 강매, 폭력단 사무소 당번 등의 일을 하였고, 이 무렵부터 시너를 불기 시작했다.

1988년 10월, 신지의 친구인 F는 오토바이를 도난당하게 된다. 히로시는 이를 되찾아주며[17] 신지를 비롯한 비행 청소년들과 급속도로 친해졌고, 그를 동경하는 불량배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히로시는 그들을 모아 "극청회"[18]라는 폭력단을 결성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히로시는 갱생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강도, 강간, 상해, 절도, 폭행 등의 강력 범죄를 수도 없이 저지르고 다니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그가 이렇게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되어버린 것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주변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거를 겪었다고 다 그렇게 크는 것도 아닌데다 그것을 후루타 준코 같은 피해자들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그를 동정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3. 출소 후

본래 2009년에 출소할 예정이었으나 교도소에 있을 때는 별 사고를 안 쳐서인지 2006년, 가석방되었고[19] 이걸 풀어줘?[20] 이후 7년에 걸쳐 사이타마현 카와구치시의 용역 업체 미야우치 해체 공업소(宮内解体工業所)에서 일했다. 거주지는 카와구치시 하스누마 298번지 사카에하이츠 201호(埼玉県川口市蓮沼298 栄ハイツ201)였다.

출소 후에 요코야마(横山)로 을 바꾸었는데 출소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는 형식을 사용했다.[21]

2013년, 보이스피싱 사기 혐의[22]로 체포됐지만 묵비권으로 일관한 탓에 1월 31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이는 전과로 남지 않았다.

같은 형무소 수감자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뻘인 자신에게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왔고 항상 밝고 평안했다고 하며, 극악무도한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보통 강력 범죄를 저지른 수감자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그런 것 없이 복역 기간 동안 잘 지냈다고 한다.[23][24]

또 출소 후 이름을 바꾼 뒤에도 킥복싱 체육관을 다니거나 친한 후배와 유흥을 즐기는 등 잔인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반성이나 죄책감 없이 일상생활을 했다.

출소 후 그와 친해진 사람들 모두 히로시가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이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며[25] 그가 이 사건의 주범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명이 그에게 같이 술을 마시자며 불러내어 "당신이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주범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니죠?"라며 떠 보자 그 이야기를 들은 히로시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며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사기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외제차를 타고 고가의 시계를 차며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청소년 시절에는 강간, 폭행, 상해, 강도가 주특기였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사기를 쳐서 무위도식하며 상당히 호의호식하고 희희낙락하면서 살던 것으로 추측된다.

2017년, 한 기자가 그의 여동생에게 사진을 받아 '실화 너클'이라는 잡지에 게재하였다. #[26]

3.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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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카이 대학 부속 사립 고등학교. [2] 부모 모두 1942년생이다. 부친은 사건 후에 트럭 운전사로 일했으며, 모친은 이불을 비롯한 침구류 장사를 하였다. [3] 평소에는 자상한 성격이었다가, 한번 화가 나면 아주 무섭게 돌변했다고 한다. 그것도 증언한 사람들이 그의 동료였기 때문에 자상한 것일 뿐이라 볼 수 있다. [4] 미인 여성들을 납치하여 윤간 혹은 강간을 한 뒤, 돈이나 귀중품을 갈취했으며 과도, 회칼 등을 들고 협박하며 저항, 신고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진짜로 신고한 피해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5] 본인 주장으로는 자신이 성폭행한 여성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최소 90명 이상이라고 하는데 진짜일 가능성도 있지만 막장 중의 막장인 범죄자인 만큼 허세일 가능성도 있다. [6]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일본 불량배들이 즐겨 하던 헤어스타일. [7] 교원으로부터 학교에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8] 한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집에서 "이 바보 새끼야!"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9] 현재 한국의 중1 남학생 평균 키가 160cm이다. [10] 히로시가 작은 키에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많이 알려졌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11] 현재의 한국으로 치면 갓 입학한 중학교 1학년의 키가 170cm가량 되는 것. [12] 중학교 1학년 이후의 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13] 도쿄 전체를 통틀어서 동체급에선 최강이었다는 의미. [14] 또한 미야노 히로시의 사진을 보면 귀가 뭉개진 상태(만두귀)가 아닌데, 그만큼 교착상태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히로시가 유도에 큰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유도 실력을 가진 국가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15] 타카나와다이 고등학교 교장은 "히로시가 4, 5월 까지는 잘 출석했지만 6월 경부터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16] 한화 약 2000만 원. [17] 도난범을 폭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 야쿠자의 폭력단 중 하나인 극동회의 청년부 조직이다. [19] 어머니는 사건 이후 신흥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20] 실제로 일본은 가석방률이 50%가 넘을 정도로 가석방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21] 일본에서는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성씨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해당 집안의 명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22] 파칭코 필승법이 있다며 사기를 쳤다고 한다. [23] 반면 일당들 중 가장 힘이 약했던 와타나베 야스시는 형무소에서 폭행을 당해 눈과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고 한다. [24] 유도부 출신에 싸움을 잘하고 힘이 셌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조폭이거나 상류층이라 인맥이 많거나 운동선수 출신의 근육질 거한이라면, 아무리 죄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아동 성폭행범이라고 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또한 강력 범죄를 저지른 수감자 중 무기징역이나 사형수들은 괴롭힘을 잘 당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심기를 건드렸다가 역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 [25] 당연히 바로 믿었을 리는 없고 실망감과 배신감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26] 40대 후반의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상당한 근육질인 것으로 보아 현재까지도 꾸준히 운동하는듯하다. [27] 개중 한 건은 범행 과정에 총기가 난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