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서 출판된 판본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본 |
제목 | 무진기행(霧津紀行) |
작가 | 김승옥 |
장르 | 단편소설 |
발표 | 1964년「 사상계」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clearfix]
1. 개요
1964년 소설가 김승옥이 무려 23세 때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김승옥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며 한국 문학계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무능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인물인 주인공 "윤희중" 이 무진에 머무른 2박 3일 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 등장인물
- 윤희중: 화자이자 주인공, 33세이다. 무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마도) 대학을 가기 위해 상경하여 서울에서 생활한다. 대학 재학 중 6.25 전쟁이 터져 천 리를 걸어서 귀향한 것을 시작으로, 때때로 서울에서 실패를 겪으면서 무진으로 귀향한다. 소설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그가 가장 최근에 귀향한 것은 4년 전, 그가 29세였을 무렵 경리를 보고 있던 제약회사가 큰 회사와 합병되어 일자리와 애인인 '희'를 잃는 실패를 겪었을 때였다. 그러다 회생제약이라는 기업의 따님과 결혼을 하여 회생제약의 전무이사에 임명되기로 되어 있다. '조'의 대사를 빌리자면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말 그대로 벼락출세한 셈이다.
-
'박: 윤희중의 중학교 후배. 현재는 모교에서 국어 교사를 맡고 있다. 중학교 시절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었던 모양이다. 음악교사인 하인숙을 짝사랑하며 꾸준히 연애편지를 보내고 있으나...
'조'와 함께 있던 인물들이 하인숙에게 유행가를 강요하자 분을 참지 못하는 등 여러모로 주인공의 순수한 (청년기) 시절을 반영한 듯한 인물이다.
- '조' : 윤희중의 중학교 동기. 고등고시를 패스하고 무진의 세무서장으로 있다. '박'의 말에 의하면 해방 이후의 무진중학 출신 중에서 '형님(윤희중)과 '조'가 제일 출세했다고. 예전부터 윤희중에게 알게모르게 열등감을 느껴오고 있었다. 서장실에 앉아있는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윤희중을 전보로 불러내어 거드름을 피우거나 하지만, 윤희중에게 그 모습은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며 더 나아가 그의 모습에다가 서울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한다. 서울에서의 윤희중을 상징하는, 혹은 윤희중이 앞으로 될지도 모를 속물적인 인물.
- 하인숙: 무진중학교의 음악 교사. 서울에서 음악대학을 나왔다. 본인이 원해서 무진에 온 것이 아닌, 발령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무진에 머무르고 있다. 말끝마다 서울에 데리고 가달라고 하며, 결혼을 하든 뭘 하든 어떻게 해서라도 무진을 탈출해 서울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
3. 명문장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
소설의 첫 문장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그들은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이라고 느낀 나의 감각은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 그렇지만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이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보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었던 것은 아니다.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어느 별과 그리고 그 별과 또 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가, 과학책에서 배운 바로써가 아니라, 마치 나의 눈이 점점 정확해져 가고 있는 듯이, 나의 시력에 뚜렷하게 보여 오는 것이다. 나는 그 도달할 길 없는 거리를 보는 데 홀려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순간 속에서 그대로 가슴이 터져 버리는 것 같았었다. 왜 그렇게 못 견디어했을까.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분해서 못 견디어했을까.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國語)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이 바닷가에서 보낸 1년, 그때 내가 쓴 모든 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다소 천박하고 이제는 사람의 가슴에 호소해 오는 능력도 거의 상실해 버린 사어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무렵의 내게는 그 말밖에 써야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일이든지 설령 도둑질이라고 할지라도 서투르다는 것은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미끈하게 일을 처리해 버린다는건 우선 우리를 안심시켜 준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소설의 마지막 문장
4. 평가
보편적인 해석을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무진은 탈일상적 공간이며, 서울에 아내를 두고 혼자 내려와 이곳(비록 참담한 어린 시절의 과거가 있는 곳이라지만)에 머무르는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무진에 거주하는 음악 교사 하인숙[1]을 통하여 일탈을 꿈꾼다. 주인공의 이러한 행동은 현실과 일탈 사이에서 번뇌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해석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안개로 뒤덮인 무진은 몽환적이며 비현실적이며 동시에 탈일상적인 공간을 대표하는 상징 매체가 된다.김승옥의 문학은 1960년대 문학사를 공부할 때 굉장히 중요하다. 이는 당시 6.25 전쟁이 끝난 후 발표된, 즉, 최인훈의 『 광장』으로 대표가 되는 한국 전후문학 특유의 무기력증과 엄숙주의, 그리고 퇴폐성에서 벗어나[2] 당시 1960년대의 대표상들을 김승옥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효과적인 공간 선택과 동시에 어울러지는 캐릭터성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높다.
5. 무진
작중 배경인 '무진'은 안개 무( 霧)와 나루 진( 津)를 써서 만들어진 "안개 나루"라는 이름처럼, 짙은 안개가 늘 껴 있는 항구 도시이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인구 오륙만의 중소도시로 무진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 부산이나 울산 등과 같은 대형 항구 도시라기보다는 소규모 어항(漁港)이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이렇다할 평야도 없어 어촌이나 농촌 어떤 기능에도 부족한 어중간한 도시로 나온다.비평에 따르면 무진은 안개와 바다로 나타나는 일상에서 벗어난 곳, 비일상의 이상 세계를 뜻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지역이지만, 비평계에서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전라남도 순천시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소설 초반부에 화자와 함께 탄 승객들의 대화나 작품 자체에서 묘사하고 있는 '무진'의 풍경을 보다 보면 저자가 어린시절 살던 곳인 전라남도 순천의 풍경에서[3] 그 모티브를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 특별한 산업 시설이 없고 바다와 가깝다지만 얕은 갯벌로 이루어져 있어 항구 등 해양 산업 분야도 변변치 않은,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소비 도시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1960년대의 순천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한 남해의 순천만과 인접해 있지만 작은 어항들만 존재한다. 순천에서는 관련 행사도 하고 있다.
간혹 무진이 허구의 장소임을 모르는 60년대의 문학 청년들이 서울역에서 무진행 기차표를 구매하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서 무진기행에 대한 오마쥬의 의미로 무진시라는 지명이 작중 배경으로 사용되었고,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문학이나 영화, 드라마등의 창작물이나 인터넷상에서 무진이 가공의 지명으로 사용되는 일이 종종 있다. 관련해서는 무진시 문서 참조.
6. 실사화
총 3차례 영화화가 됐고 3번 전부 김승옥이 직접 각색했다.첫 번째 영화화는 1967년 개봉작이자 흑백영화인 안개. 감독은 김수용, 주연배우는 신성일과 윤정희. 사실 영화상에서 여럿 각색이 되어 달라진 점도 있다. 그리고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작품중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10년대에 화질이 복원되어 DVD로 발매되었다. 네이버캐스트에서도 무료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영화화는 1974년 황홀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남자주인공은 남궁원으로 바뀌었지만 여주인공은 황홀에서도 윤정희가 맡았다.
세 번째 영화화는 1986년에 "무진 흐린 뒤 안개". 이 작품은 무진기행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갔던 앞의 두 영화화는 달리 인숙이 기준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주위를 맴도는 스토리가 추가되었다.
이외에도 TV문학관에서 실사극화 한적이 있는데, 무진역 역사는 창동역을 빌려서 촬영했다고 한다. 당시는 노원구가 개발되기 이전이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 노원구는 미개발지,아니면 판자촌에 공장이 듬성듬성 있던 그런 동네였다는듯하다.) 저런 시골역(?)으로 나와도 위화감이 없었다.
7. 여담
- 전라남도 순천시에서는 이 점과 순천이 저자의 고향이란 인연으로 인해 같은 순천 출신의 동화 작가인 정채봉 씨와 김승옥 씨를 기념하는 순천문학관을 설립했으며, KBS 순천 방송국에선 이름을 딴 '김승옥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 문학 평론가 유종호는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이 작품에 바쳤다. 하지만 정작 김승옥은 이 작품을 구성이 좀 진부하다고 말했으며, 문학 평론가 김현은 그냥 찢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혹평했다고 한다.[4]
- 최근에는 2017년 알쓸신잡에서 무진기행에 대한 각자의 감상, 술회가 한 꼭지처럼 다뤄지기도 했다.
- 2022년 개봉한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나오는 가상의 도시 '이포'는 무진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1]
하인숙은 무진을 탈출해 서울로 올라가기를 원하며, 주인공은 같이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지만......
[2]
하지만 이미 『무진기행』에서 드러났듯이, 환상(낭만)을 좇으나 결국에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측면만 볼 때에는, 현실에 대한 어쩔 수가 없는 패배의식 내지는 현실-환상(낭만)에 대한 허무의식만큼은 적어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최인훈의 광장 안 주인공이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기존의 전후문학에서 보여주는 무기력증을 서술하는 대체적인 방식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도피→환상(낭만)의 세계 or 도피→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옴→허무/무기력의 서술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 비단 『무진기행』만이 아니라 『
서울, 1964년 겨울』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구조다. 단, 명백하게 비교가 되어야만 할 것은 전후소설의 무기력증은 전쟁으로 인한 무기력증이고, 김승옥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허무주의는 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일 뿐이다.
[3]
안개가 많이 끼는 순천만 인근 대대포구로 짐작이 된다.
[4]
김현과 김승옥은
서울대학교 불문과 동기이자 같은 동인인 《산문시대》의 일원으로 절친한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