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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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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2. 중세3. 근세4. 근대5. 현대

1. 고대

석기 시대 몰타에 거주하던 선주민들은 화전 농업에 의한 환경 파괴와 지력 고갈로 전멸[1]하고 한동안 무인도로 유지되다가 기원전 4000년경부터 다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Malta9.jpg

당시 거대한 석조 유적들을 많이 지었는데 그 규모도 엄청나지만 나비 모양을 비롯한 복잡한 구조의 석실을 조성한 완성도 높은 건축물이다. 지어진지 6천년 이상 되었는데 스톤헨지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천 년도 더 앞선 시기에 조성되었다. 몰타의 거석 신전 항목 참조. 그러나 이러한 거석 구조물을 건설한 주민들도 기원전 2350년경 역시 화전 농업에 의한 지력 고갈로 몰락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기원전 7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가 된 몰타는 페니키아 본토의 도시들이 약화되자 그 후신인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다.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몰타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잇는 무역 기지가 되었으며 그리스 문화의 많은 요소가 도입되기도 했으나 섬 주민은 페니키아계였다.[2]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몇백 년에 걸쳐 지중해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기독교 사도 바울로가 로마로 압송될 때 배가 풍랑을 만나서 몇십 일에 걸쳐 표류하다가 기적적으로 도착한 멜리테(Μελίτη / Melítē)가 바로 오늘날의 몰타에 위치한 므디나(Mdina)다.

2. 중세

파일:Aerial_view_Mdina,_Malta.jpg

중세 몰타의 중심지이던 음디나 성채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다시 섬을 점령했으나 이후 사라센 해적들의 공격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서기 870년에는 아랍 무슬림 아글라브 왕조에 점령당했다. 이후 많은 아랍인들이 해적 기지 삼아 섬에 정착했으나 1091년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이 몰타를 점령하고 섬 주민들을 다시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고대 페니키아어 아람어를 사용하던 몰타 주민들은 기독교 개종 이후에도 스페인/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와 다르게 일상 생활에서 한동안 계속 아랍어를 사용했다. 페니키아어, 아람어와 마찬가지로 아랍어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했고 아랍어가 별 이질감 없이 중세 몰타인에 문화에 융화되었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종교마저 바뀌어도 언어의 변화가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몰타어 문서 참조.

12세기 이후 시칠리아 왕국 하에 안정을 누리던 몰타는 1429년 튀니스에서 발진한 70척의 하프스 왕조 함대의 침공을 받았다. 1만 8천의 하프스 군대는 고초 섬에 상륙해 음디나를 포위하고 함락하지 못하자 3일간 주변을 약탈한 후 주민 3천을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약탈로 얻은 부는 튀니스의 각종 건축 사업과 문화 발전에 투입되었다. 이후 시칠리아 왕국이 몰타의 재건을 위해 시칠리아 등 남부 이탈리아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기존 몰타어의 아랍어 성격이 줄고 이탈리어가 대대적으로 섞이게 되었다.

3. 근세

파일:Fort-St-Angelo_Credit-tenmay_iStock_www.istockphoto.com_gb_photo_fort-st-angelo-in-birgu-malta-in-the-grand-harbour-of-malta-gm1041960364-278965993-1.jpg

성 안젤로 요새

파일:Malta-city-wall.jpg

옛 성 미카엘 요새 터

1522년 오스만 제국 쉴레이만 1세(1520~1566)가 구호기사단의 근거지였던 에게해 로도스섬을 정복하자 기사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1516~1556)가 1530년에 기사단에게 매년 (hawk) 1마리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몰타를 사실상 무상 증여했다.[3][4] 이때부터 몰타는 성 요한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고 이 시대를 가리켜 몰타에서는 기사들의 시대(Żmien il-Kavallieri)라고 한다.

몰타는 기사단의 이전 거점인 로도스에 비해서 여러모로 열악했다. 우선 크기부터 몰타는 로도스의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좁은 섬이었고 식수가 될 만한 수자원도 부족했으며 바위섬이라 토양마저 척박하여 자급자족이 힘들었다.

다만 바위가 많은 환경은 수비 면에선 엄청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주변에 보급 기지가 될 만한 섬 하나 없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상륙 지점도 마땅치 않은 데다 땅이 워낙 좁아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격자가 숫적 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몰타는 로도스와 맞먹을 정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바르바리 해적들 덕분에 서지중해까지 넓어지긴 했지만 이곳은 서유럽 국가들의 앞마당이기도 했기 때문에 동지중해에서와 같은 우위를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슬람 선박들은 최대한 안전하게 동지중해와 서지중해를 오가려면 몰타와 튀니지 사이의 해협을 지나가야 했는데 지중해, 한가운데 그것도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중간에 자리잡은 몰타는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좋은 위치였다. 기사단은 다시 이슬람 상선과 해적선 가리지 않고 엄청난 해적질을 하며 어그로를 왕창 끌었다.

쉴레이만은 다른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바쁜 데다 거리가 멀어서 기사단이 이사간 몰타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1564년 오스만 황실의 선박이 기사단에 나포되어 기사단 항구에 전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굴욕을 당한 쉴레이만 1세는 1565년 몰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지만 세 달에 걸친[5] 공방전 끝에 함락에 실패했다. 당시 방어 병력은 기사단원 500~600 명에 현지 징집병과 전투 직전에 고용한 용병 등을 포함한 6~8천 명 정도였다.[6] 이 승리로 기사단은 명성이 유럽에 퍼져 몰타의 지명도도 올라갔다.[7] 몰타 공방전 이후 기사단에 입단하는 지망자도 늘어나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교황령을 위시로 한 가톨릭 국가들의 기금 원조도 늘어나 기사단은 이슬람 해적과 상선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구호기사단의 해적 활동은 17~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4. 근대

파일:Bastion_Valletta.jpg

영국 지배기에 세워진 발라타의 육중한 성벽과 해자

1798년 나폴레옹 이집트로 원정하는 과정에서 기사단의 항복[8]을 받아내서 점령 직후 기사단은 몰타에서 퇴거했지만 시칠리아 왕국의 요청으로 영국군이 1800년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몰타를 점령했다. 빈 회의(1814~1815)의 결과 몰타의 영국 영유가 승인되어 몰타는 1816년부터 공식적으로 영국 영토가 되었다.[9]

5. 현대

파일:f7b5ecf3-139d-4c55-b89f-a79f655e2224.jpg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과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를 원정하면서 지원하기 위한 보급 루트도 중요해졌는데 몰타의 위치가 세로로는 시칠리아-트리폴리의 독일군, 이탈리아군의 보급선 한가운데였고 가로로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의 영국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몰타를 점령하는 쪽이 자신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반대편의 보급로를 끊어 버릴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추축군은 '허큘리스 작전'으로 엄청난 공군력을 쏟아부어 몰타 전역을 연일 폭격했다. 크지도 않은 섬을 하도 폭격해 대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폭격당한 곳'라는 소리를 듣기도 할 정도였다.

그 치열한 격전내역은 몰타 항공전 문서 참조.

하지만 영국은 본토를 제외하면 최초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주둔시키는 등 계속해서 몰타의 전력을 증강했으며 그 덕분에 독일은 몰타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물론 큰 피해를 감수하고 처리할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주축이 될 공수부대가 크레타 섬에서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 성공을 거뒀기에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해 방치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이탈리아군의 보급선이 완전히 끊겨 버려 북아프리카에 주둔한 이탈리아군과 독일군 모두 전멸하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2차대전이 끝나자 몰타에서는 식민지가 아니라 영국 본국으로 완전히 편입하든지 영연방 왕국으로 만들라는 여론이 일어났고 이에 1955년의 원탁회의를 거쳐 1956년 주민투표를 실시했는데[10] 영국에 편입하는 것에 몰타인의 77%가 찬성했다. 당시기사 몰타는 다른 식민지와는 달리 영국이 자국으로 흡수하는 것을 심각하게 검토한 지역이었고 실제로 1956년의 주민투표는 몰타가 영구히 영국 영토가 될 수도 있었던 갈림길이었지만 문제는 독립주의자들이 보이콧한 관계로 투표율은 59.1%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59.1%도 낮은 투표율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좀 그랬는지 영국에 편입하자는 주민투표 결과는 묻고 가기로 하고(...) 1964년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하는 영연방 왕국인 몰타국( 영어: State of Malta, 몰타어: Stat ta' Malta)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다.

몰타국은 입헌군주국이었으나 1974년에 헌법을 개정해 공화정을 수립했고 국호도 몰타 공화국(Republic of Malta, Repubblika ta' Malta)으로 변경하였다. 1989년 몰타에서 냉전의 종말을 확정한 몰타 회담이 열렸다. 독립 40주년을 맞은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11]


[1] 과거 윤작 비료가 발달하기 전의 고대 농업은 지력을 서서히 고갈시켰는데 이는 청동기 시대 수천 년 동안 이어지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 사막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2] 사실 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식민도시이므로 본토인에서 식민지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뿐이긴 하다. [3] 원래 기사단은 스페인이 점령한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를 요구하였으나 카를 5세가 번번이 거부하였고 카를 5세가 대신 내어준 곳이 몰타였다. 기사단이 생각했던 최적의 활동지 트리폴리는 1551년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는데 기사단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4] 이 조공은 기사단이 몰타섬에 들어 온 1530년부터 프랑스군에 의해 쫒겨난 1798년까지 약 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빼먹지 않고 지켜졌다. 이것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소설이 대실 해밀 몰타의 매다. [5] 정확히 3개월 3주 3일동안 계속되었다. 최후의 기독교 기사단의 항전이었다는 것 때문에 현재 서구권에서는 몰타 공방전을 'Great Siege'로 칭한다. [6] 이후 스페인령 시칠리아에서 8천여 명의 지원병을 파병해 주기는 했는데 이들은 공방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도착했다. 지원 부대는 조기에 소집되었으나 함대 손실을 우려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가 병력 수송을 제지했다. [7] 공방전 당시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싸운 기사단장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는 공방전이 끝난 후 요새를 복구하고 증축하였으며 본래의 수도 므디나가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들어 새로운 수도를 만들 계획까지 세웠고 토목 작업의 토대가 될 주춧돌을 놓는 작업까지 직접 마친 뒤 죽었는데 이 도시가 바로 현재 몰타의 수도 '발레타'다. [8] 기독교도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기사단의 원칙에 따라 오스만과의 항전과는 다르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 다만 보급 협상 관련해서 차질이 생겨 몰타 섬 서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프랑스와 기사단 양측 모두 사상자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전투가 아예 안 벌어진 건 아니지만 그 피해는 양측 모두 미미하고 기사단은 대부분 포로였다는 것을 보면 제대로 된 충돌까진 아니었을 것이다. [9] 참고로 다시 쫒겨난 기사단은 교황령이 받아주어 로마로 망명해 이 때부터는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본업인 구호 사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구호기사단은 지금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 [10] 몰타에서는 3명의 의원을 영국 서민원에 보내고, 국방, 외교, 납세를 영국이 가지되 몰타 자치의회를 두는 안이었다. [11] 2004년은 유럽연합에 새로 가입한 국가 수가 가장 많은 해기도 하다. 몰타를 포함해 무려 10개국이 이 해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