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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39:03

멜레스 제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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መለስ ዜናዊ / Mälläs Zenaw
1955년 5월 8일 ~ 2012년 8월 20일 (향년 57세)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에티오피아 독재자이자 정치인으로 2012년 수상으로 재임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멩기스투를 몰아내고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독재자가 된 이후 약 21년이라는 세월 동안 장기집권했다.

에티오피아인은 아랍인들처럼 두 번째 이름부터는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멜레스가 본명이다.[1] 출생명은 티그리냐어로 라가사 제나위 아스라스(ለገሠ ዜናዊ አስረስ / Läggäsä Zenawi Asräs)이다.[2]

2. 생애

1955년생으로 아드와 전투가 발발했던 아드와의 티그라이인 가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최고 명문인 아디스아바바 대학교 의과대학 2학년 과정에 재학 중이던 19살에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 멩기스투 정권에 저항하는 게릴라 투쟁에 가담했다. 26세에는 반군 지도부 반열에 들어섰다.

소련이 해체하는 바람에 군사 원조가 끊긴 멩기스투 정권이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반군 연합에 밀려 1991년 붕괴하자, 멜레스는 5년간 대통령을 맡았다가 이후 실권을 가진 수상으로 20년 동안 장기 집권했다. 이 시기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렀다.

2006년에는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해 모가디슈 함락전과 제3차 모가디슈 전투를 벌이기도 했으며, 에티오피아가 역내에서는 소말리아, 지부티 같은 나라들을 압박하면서 패권국가 행세를 하기도 했다.

초반에는 서방으로부터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았고, 실제로 국제사회의 구호·원조를 받아 나라를 살리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해외에서 그는 국내 경제 발전과 교육 그리고 건강 보호을 증진시킨 인물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며, 제나위 총리의 주도로 에티오피아는 UNEP의 '10억 그루 나무 심기 캠페인(Billion Tree Campaign)'에 동참했으며, 2007년 이래 약 17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데 성공했다. 지금까지 193개국에 126억 그루의 나무가 식수된 가운데, 에티오피아는 인도,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나무심기 운동에 기여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 정치를 하기는 매한가지여서 휴먼 라이츠 워치의 표현에 의하면 "수개월 간에 걸친 야당 지지자에 대한 위협 끝에 2010년 총선에서 제나위 총리가 이끄는 인민혁명 민주전선이 99.6% 득표율로 또 이겼다."고 전해진다.

또한 인권단체들은 독자적인 언론 매체들에 대한 제재를 포함해 그가 다양한 인권 유린 행위들을 자행해 왔다며 신랄히 비난하기도 했으머, 국제엠네스티의 주장에 의하면 에티오피아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이나 NGO 활동은 불법으로 간주되며, 종종 민간인이 재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특히나 2005년 6월 7일부터 11일까지 아디스 아바바 및 전국 주요도시 전역에서 총선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는데 정부가 시위대, 구경꾼들에게 발포하며 민간인 193명이 사망하고 763명이 다쳤으며 야당 당원 및 시위 가담 혐의자 등 3만~6만 명 가량이 체포되면서 제나위는 제대로 독재자 인증을 하셨다.

그러나 멜레스 제나위는 친미 성향의 정치인이며, 당시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였기 때문에 미국은 에티오피아를 이시기 알게 모르게 많이 후원했다. 그나마 양심적인 미국 의회는 에티오피아의 인권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군사 원조를 중단하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법 조항상 테러 방지 목적의 원조는 가능하게 되어있어 있으나마나한 법률이었다. 그리고 미군은 현재까지도 에티오피아군을 훈련하고 있다.

멜레스 총리는 2012년 7월 중순에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연합(AU) 정상회의에 불참해서 중병설이 나돌기도 했는데 에티오피아 정부는 멜레스 총리가 모종의 병에서 회복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죽으면서 중병설은 사실로 드러났다.

2012년 8월 20일 그는 벨기에의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에티오피아 국영 TV에 의하면 외국의 한 병원에서 두 달간 입원 진료를 받던 중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다가 돌연한 감염으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그가 사망한 이후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이 총리 대행을 맡게 되었다.
파일:external/gdb.voanews.com/64027AB4-5016-4FE9-802C-1636CBCC3A36_cx13_cy0_cw85_w300_r1_s_r1.jpg
멜레스 제나위의 장례식

장례식이 2일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수천명의 조문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에서 치러진 국장에는 르완다 폴 카가메, 우간다 요웨리 무세베니,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 등 아프리카 정부 인사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장례식이 끝난 뒤 그의 시체는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성삼위일체 대성당(መንበረ ጸባኦት ቅድስት ሥላሴ)에 안치됐다. 사후 민주화가 되나 싶었지만 후임 총리인 하일레마리암 데살렌도 독재 정치를 폈는데,[3] 그나마 그가 반정부 시위에 퇴진하고 2018년 아비 아머드 알리 총리가 취임하며 점진적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3. 기타

독서가 취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중엔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을 담은 900쪽 분량의 영문 서적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정순석 전 주에티오피아 한국 대사 왈 그의 참모들이 한국 대사관에 관련 물자를 구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째 다 일방 소통 같지만 넘어가자.

2010년 G20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2011년 11월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이때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으며 한국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즉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딱 잘라 말하기도 했다.

에티오피아 내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은 멜레스 제나위 정권 당시 복권되었다고 한다.

[1] 애초에 에티오피아 자체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동 백인 국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장 에티오피아인들도 아랍인이나 유대인 같은 중동 백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전형적인 흑인의 스테레오타입과는 다르게 생겼으며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 또한 아랍어 히브리어와 같은 셈어파이다. [2] 티그리냐어의 ä는 한국어의 'ㅏ'에 가까운 [ɐ\] 모음이다. 다만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이자 동일한 문자체계를 사용하는 암하라어의 ä는 [ɛ~ə\]로 조음되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e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멜레스 제나위의 이름 역시 Meles Zenawi와 Legesse Zenawi로 알려져 있다. [3] 에티오피아에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