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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감시탑에서 바라본 모습, 아래는 정궁의 왕좌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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မန္တလေး နန်းတော်
Mandalay Palace
1. 개요
미얀마 만달레이에 소재한 왕궁. 미얀마 최후의 왕조인 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정궁이었다.만달레이 왕궁은 1857년 경 민돈 왕이 만달레이로 천도하면서 지어졌다. 민돈 왕은 당시 무너져가는 꼰바웅 왕조의 위엄을 과시하고 세력을 일신하기 위해서 거대한 궁전을 설계했고, 영국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해자를 파고 물을 채워 거의 요새 급의 방어벽을 궁전 주변에 세워버렸다. 왕궁 자체는 전통적인 미얀마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고, 겉보기에는 지붕이 여러 층으로 지어져있지만 실제로 안에 들어가보면 모조리 단층 건물들이다. 보통 처마 지붕이 많이 겹겹이 쌓여있을수록 중요한 건물이다.
민돈 왕을 이어 미얀마 마지막 국왕인 티바 민 국왕 역시 만달레이 왕궁에서 지냈다. 그러나 1885년 11월 28일, 3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영국군이 만달레이를 함락하고 왕궁으로 쳐들어와 왕실 가족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야 만다. 영국 식민정부는 군사시설처럼 견고하게 지어져있던 만달레이 왕궁을 '뒤페린 요새'로 개명하고[2] 군사 기지로 사용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만달레이 왕궁에 대대적인 폭격이 가해졌고 왕궁은 감시탑과 일부 건축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전소해버렸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을 1990년 미얀마 정부에서 재건해 놓은 것이다. 다만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콘크리트나 철골 등을 이용해 복원했고, 그마저도 미얀마 내부의 혼란으로 제대로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실정.[3]
2. 역사
왕궁 일대의 항공사진. 비슷한 시기의 후에 황궁 및 둘의 원형인 자금성과 비교된다.
궁성의 각루와 해자
한창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 등을 정복하면서 이름을 날리던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는 지나친 영토 확장 탓에 인근의 인도 제국을 다스리던 영국에게 침략의 빌미를 주고야 만다. 결국 꼰바웅 왕조는 영국과 2번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전근대적 무기를 운용하던 꼰바웅 왕조가 당연히 당대 세계 최강대국이던 영국 군대를 상대할 리가 없었고, 영국군은 미얀마 군대를 처절할 정도로 박살내면서 점차 미얀마 식민화 작업에 밑작업을 깔기 시작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민돈 국왕은 영국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하도록 만달레이로 수도를 천도했다. 민돈 왕은 만달레이에 새롭게 왕궁 건설을 지시했고, 이로 인해 1857년 만달레이 왕궁 공사 작업이 첫 삽을 떴다.
야심차게 시작한 왕궁 공사였지만 이미 망해가는 미얀마가 번쩍번쩍한 왕궁을 통째로 신축하는 것은 무리였다. 재정은 파탄났고 외세가 점차 영토를 잠식해오고있는 마당에, 왕궁을 새로 짓는 데에 큰 돈을 쏟아붓는 것은 지나친 무리였던 것이다.[4] 결국 민돈 왕은 이전 수도였던 아마나푸라의 궁전을 그대로 해체해 코끼리에 실어 만달레이에 대부분 가져왔고, 일부 부분을 신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만달레이 왕궁은 '만달레이 언덕'을 중심으로 지어졌고, 413 헥타르에 달하는 궁전 부지를 중심으로 거대한 정사각형 모양의 요새와 2km에 달하는 성벽이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지어졌다. 게다가 이도 모자라 성벽 바로 바깥에는 너비 64m, 깊이 4.5m의 거대한 해자를 파내어 왕궁의 방비를 할 수 있는한 튼튼히 짓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정사각형 형태의 성벽에는 한 면마다 각자 3개씩 성문이 뚫렸고, 해자에는 총 5개의 다리를 놓았다. 궁전 건설은 1859년 5월 23일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지어놓은 궁전 역시 오랫동안 쓰이지는 못했다. 미얀마를 아예 먹어치울 작정이었던 영국은 1885년 11월 결국 미얀마의 수도 만달레이를 침공했고, 이 때 마지막 왕인 티바 민과 왕족들이 사로잡히면서 미얀마는 완전히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영국군은 왕궁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근위대에 포격을 퍼부으면서 왕실 도서관을 불태웠고, 성벽 일부를 허물어버렸다. 또한 왕궁에 보장되어 있던 왕실 보물들 역시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박물관으로 보내 전시했고, 이 보물들은 무려 1964년까지 런던에 전시되어 있다가 이후 친선우호의 의미로 다시 미얀마로 돌아왔다. 영국은 왕궁을 요새로 개조했고, 이름을 당시 인도 총독의 이름을 따서 '뒤페린 요새'라고 명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본군은 왕궁을 보급기지로 사용했고, 연합군 부대가 왕궁에 폭격을 퍼부으면서 결국 왕궁은 감시탑과 왕실 조폐청 건물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미얀마가 독립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가 권력을 독점했다. 군부는 민족주의 증진과 정통성 확보의 의미로 불타버린 만달레이 왕궁 복원사업을 추진했고, 결국 1989년 미얀마 문화부의 주도로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국가평화발전평의회(SLORC)는 다른 것도 아니고 문화재 복원 따위에 큰 예산을 할당할 여유도 생각도 없었다. 결국 궁전 복원은 만달레이 주 정부와 인근 단체들에서 거의 자치적으로 진행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복원 공사는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옛 왕궁은 오직 티크 나무로만 지어져 있었던 것에 반해 현재의 궁전은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물들로 만들어져 있다. 정부는 114동 중 64동을 복원했으나, 이는 겉모습의 피상적인 복원에 그쳤고 내부는 제대로 복원하지 않아 대부분 건물들은 안쪽이 황량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장식물의 화려함이나 정교함은 옛 시절의 찍어놓은 사진과 비교해보면 훨씬 싸구려티가 난다. 그마저도 관리가 되어있지 않아 기둥의 페인트가 벗겨지는 등의 일이 발생하고 있다.
3. 내부
사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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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알현실(Great Audience Hall) 만달레이 왕궁의 핵심 시설. 왕의 알현실이자 왕좌가 놓여있는 건물이다. 크게 중앙의 높은 탑과 양 옆의 북쪽과 남쪽 홀로 이루어져 있다. 탑 바로 아래에 있는 왕좌가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기에 북쪽 홀이 왕좌 기준 왼쪽에 있고 남쪽 홀이 오른쪽에 있다. 전체 길이는 77.1m로 상당히 길고, 궁전 기단부에는 서양식 대포 몇 문이 배치되어 있다. 왕궁 내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들 중 하나로 왕실의 상징인 공작새의 형태를 모티브로 지어졌다고 한다. 때문에 건물 곳곳에 공작 장식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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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좌(Lion Throne) 왕이 앉던 왕좌이다. 왕궁에 있는 8개의 왕좌들 중 가장 중요한 왕좌이기도 하다.[5] 당연히 오직 국왕만이 앉을 자격이 있었다. 왕좌 형태의 기본적인 모티프는 연꽃으로, 부처가 앉았다는 연꽃에서 형상을 따온 것이다. 왕좌의 발치에 황금빛 사자상이 2개 세워져 있어 사자좌라는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사자좌는 동아시아의 옥좌처럼 옆이나 앞의 계단으로 출입하는 것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간다. 자세히 보면 왕좌 뒤편의 등을 기대는 쪽이 벽이 아니라 문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을 통해서 내려갔다올라갔다 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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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웅도 사웅(Baungdaw Saung) 대알현실과 승리의 홀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3층 건물이다. 왕관을 비롯한 왕 소유의 장식품들과 기타 보물들을 보물하는 수장고 역할을 하는 건물이었다. 그 외에 왕이 의식을 치르기 전 의상을 입으면서 대기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왕을 알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알현실에 들어가기 직전 대기하면서 머무르는 장소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바웅도 사웅은 여러 칸의 방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방들 모두 왕실 근위대가 있는 경호실, 수장고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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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궁전(Glass Palace) 만달레이 왕궁 건물군 전체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 보통 사진만 보면 워낙 크기가 압도적으로 커서 왕궁의 알현실이나 정전(正殿)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는 국왕이 생활하는 편전(便殿)으로, 왕들은 주로 이 곳에서 머물렀다. 중간에 나무 칸막이가 있어 2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동편에 있는 방에는 ' 벌의 왕좌'가 있다. 왕좌의 발치 부분에 꿀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방에서 왕비의 즉위식, 왕실 결혼식, 신년행사 등이 열렸다. 서편에 있는 방은 왕의 생활공간으로, 원래는 더 작은 방들로 분리되어 있었다. 오직 국왕과 간택받은 왕비들만이 이 곳에서 잠잘 수 있었다고 한다. '유리 궁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유리 모자이크들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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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탑(Watch Tower) 높이 24m의 상당한 크기의 감시탑. 7층 지붕을 가진 금빛 누각이 위에 얹혀있다. 물론 누각 안쪽에서 살펴보면 단층 건물이다. 옛 시절에는 주로 왕이나 왕비 등이 위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을 때 계단을 올라 경치를 감상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1885년 영국군이 만달레이 왕궁을 침공할 때에 수파얄랏 왕비가 이 감시탑에 서서 영국군들이 왕궁 내로 쏟아져들어오는 것을 바라봤다고.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습을 살아남은 극소수의 건물들 중 하나이다. |
[1]
참고로 저 붉은색 지붕들은 모두 함석으로 만든 판에 붉은 페인트를 칠해 만든 것이다. 원래 옛 궁전은 모두 귀중한 티크 목재로 지어져 있었으나 미얀마 정부가 졸속으로 복원하면서 현재 왕궁은 콘크리트와 철골로 지어져버렸다. 또한 예전에는 지붕 장식에 금을 쓴 것과 달리 지금은 금빛 페인트를 칠했다.
[2]
당시
인도 제국 총독의 이름을 따왔다.
[3]
미얀마 정부는 만달레이 왕궁의 겉모습은 114동 중 64동을 복원했으나 정작 내부 모습 재현에는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현재 왕궁 내 건축물 대다수의 내부는 거의 황량하기 그지없다.
[4]
공사 시작 5년 전인 1852년에 제2차 영국-버마 전쟁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얀마가 당연히 대패했고, 미얀마는 영국에게 막대한 이권과 함께 배상금을 지불했다.
[5]
그 외에도 함사 왕좌, 코끼리 왕좌, 사슴 왕좌, 공작 왕좌, 벌 왕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