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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7:14:52

마중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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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중영.jpg
국민혁명군 제36사단장
본명 마부잉(馬步英, 마보영)
정체 馬仲英
간체 马仲英
한국식 독음 마중영
영문 Ma Zhongying
자재(子才)
출생 1912년 청나라 청해성 임하현
사망 ?[1]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소련 파일:소련 국기.svg
학력 중화민국 육군 군관학교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3. 평가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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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감숙성, 청해성을 기반으로 한 후이족 군벌인 마가군벌의 일원이었으며 소위 서북오마의 한 사람이다. 1862년 회민 반란을 일으켰다가 좌종당에게 투항한 후이족 지도자들의 후손으로 서북의 마씨 군벌들 중 10대에 불과한 제일 어린 나이에 사단장에 올랐다. 1931년 하미(쿠물)에서 진수런의 폭정에 항거하여 봉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하미의 전임 재상이었던 니야즈 호자와 투르판의 유력자 율바르스가 마중잉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마중잉은 처음에 수백여명의 후이족 군대만 이끌고 하미의 진수런 군을 대패시키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마중잉의 후이족 군대는 위구르인들과 갈등하며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강력한 군벌 정권으로 성장하는 듯 했으나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는 성스차이에게 패해 소련으로 망명했고(...)[2] 이후 소련군에 입대한다.

2. 생애

1912년 청해성에서 서북의 대군벌 마부팡의 사촌으로 태어났다. 10대의 나이로 삼촌 마치(1869)의 휘하에 종군하여 청해, 감숙, 수원 등지에서 기병대 지휘관으로 대활약했으며 1927년 펑위샹에 대항하는 황하사변을 일으켰지만 삼촌인 마린 마훙빈에게 진압당했다. 1929년 난징의 중화민국 육군 군관학교에서 공부했다. 1929년, 국민정부로부터 17세의 나이로 국민혁명군 36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한 군공을 세웠기 때문에 어린 장군, 대마(大馬)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 봄, 그의 야심을 경계한 사촌 마부팡과 마부칭의 압력으로 감숙성으로 밀려났으며 1931년 하미(쿠물)에서 봉기를 주도한 율바르스 칸의 원조 요청에 응하여 진수런에 대항하여 신강성을 침공하였다. 1931년 여름, 500명의 선봉 기마대를 파견하여 하미로 이어지는 서향 도로에서 진수런의 군대를 습격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고 신병들을 모았으며 니야즈 호자의 위구르인들과 함께 다시 하미를 포위하고 바르콜을 공격했다.

진수런은 마중잉을 상대하기 위해 계속 부대를 파견하였으나 마중잉은 이들을 잇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하미 공격에서 하미의 지휘관 장페이위안과 백계 러시아인 난민 출신 군인들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다시 감숙성으로 퇴각했다.

감숙성에서 요양하는 동안 마중잉은 중대장 마스밍을 파견하여 니야즈 호자와 율바르스 칸을 원조하게 하였고 1933년 1월, 6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신강성으로 진공하여 신강성 동부를 점령하였다. 이때 마중잉의 명성은 매우 높아져서 후이족의 구심점이 되니 마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933년, 4.12 디화 정변이 일어나 성스차이가 신강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자 마중잉은 성스차이와 담판하여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1933년 10월, 협정을 깨고 성스차이를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포위했다. 12월, 성스차이가 소련과 협정을 맺어 소련군 8여단을 이끌고 반격하자 1934년 1월, 공군과 장갑차를 앞세운 소련군에게 크게 패하여 신강성 남부로 밀려났다.

소련과의 거듭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부상당한 마중잉은 후이족들에게 외면받게 되었는데 소련은 명망이 높은 마중잉에게 소련으로의 망명을 타진하였다. 가망이 없다고 여긴 마중잉은 이 제안에 응하여 28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소련 대표단의 안내를 받아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소련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이후 마중잉은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군관이 되었는데 소련군 기병장교 제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사진과 서신, 음성녹음을 호탄에 주둔한 36사단의 잔존세력에게 보내면서 한동안은 연락을 취했으나 1937년 이후 완전히 소식이 두절되었고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6년에서 1937년 시점에 소련군에 복무하던 중 전사했다는 풍문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검증된 바는 없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다가 사망했다는 설과 스페인 내전에 파견되었다가 죽었다는 설, 독소전쟁 중 전사했다는 설 등이 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는데 자세한 정보가 발굴되지 않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3. 평가

수백여명의 기병만으로 하미의 진수런 군대를 일소하는 등 뛰어난 전술 감각과 수려한 외모로 명망을 얻는 데 성공했으나 인성과 정치력이 부족하여 노련한 위구르인 정치가들이던 니야즈 호자와 율바르스 칸, 한족 군벌 성스차이에게 자주 이용당했다.

마중잉의 성격을 그냥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위구르인 정치가들의 배신에 분노하여 카슈가르에서 위구르인 민간인과 포로 4천여명을 학살하며 단순히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한순간에 신장 전역의 위구르인들을 동지에서 적으로 돌렸다.

소련 영토 내 둥간족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등 정치적 이용 가치가 높았음에도 소련 망명 이후에 소문만 무성한 것을 보면, 마중잉의 인격의 결함이 심각했다는 주변의 증언이 사실이었던 듯 하다.

4. 참고문헌



[1] 1936년 이후로 추정. [2] 소련은 성스차이와 마중잉 양쪽을 모두 지원하면서 이간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