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The Return of Martin Guerre
1. 개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프랑스의 아르티가라는 지역에서 마르탱 게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두고 법정에서 공방전을 벌였던 이야기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16세기 초, 중반에 다뤄진 이야기이며 당시 툴루즈의 고등법원 판사였던 장 드코라스(Jean de Coras)[1]의 《잊을 수 없는 판결》(Arrest Memorable)이라는 저서에서 처음 소개가 되었다. 이후 6번이나 재인쇄되었고,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로도 여러 번 발간되었다.영화가 나온 이후, 나탈리 저먼 데이비스[2]가 《The Return of Martin Guerre》라는 제목으로 인문학 서적을 출간했다. 덕분에 본 저서와 영화는 대학 등에서 중세 유럽을 다루는 미시사 수업 및 강의 교재로 즐겨 사용되고 있다.
2. 등장인물
- 마르탱 게르[3] - 이 소설의 주인공
- 아르노 뒤 틸 - 마르탱 게르의 전쟁 동기였다. 훗날 마르탱 게르 행세를 하다가 진짜 마르탱 게르가 법정에 나타나자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베르트랑드 드 롤스 - 마르탱 게르의 아내
- 장 드 코라스 - 툴루즈의 고등법원 판사였고, 당시 마르탱 게르 사건을 맡았다. 훗날 《잊을 수 없는 판결》 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마르탱 게르 사건을 세상에 소개했다.
- 피에르 게르 - 마르탱 게르의 삼촌
3. 줄거리
3.1. 어린시절과 결혼
발루아 왕조가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었던 1525년 바스크 지방[4]에서 태어난 마르탱 게르는 두 살때였던 1527년, 국경지대의 불안한 정세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아르티가 지방으로 이주했다.[5][6]아르티가에 정착한 마르탱의 가족들은 그곳에서 조용히 농사를 짓고 살다가 1538년 마르탱이 13세가 되던 해 레즈 강 맞은 편에 사는 부농이었던 롤스 집안의 딸, 베르트랑드 드 롤스와 아르티가의 교회에서 혼인을 하게 되었다.[7][8]
3.2.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 그리고 집을 떠나다
결혼 생활이 어느덧 8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탱 부부에게는 자식이 생기지 못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마법[9]에 걸린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10]그래서 성적인 시험이나 미신 등을 이용하여 아이를 가지게끔 노력을 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11] 그러나 한 노파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그들에게 마법을 푸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마법을 푸는 방법은 바로 신부가 네 차례나 미사를 진행하고, 신성한 빵과 과자를 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베르트랑드는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12]
허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탱 게르의 결혼 생활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마르탱은 아르티가에서 다른 젊은이들과의 칼싸움 및 곡예 등을 제외하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또한 가족들과의 관계나 재산에도 관심이 없었다. 마르탱이 원하던 것은 바로 좁은 아르티가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었다.[13] 그러나 아버지가 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결국 이를 두고 아버지와 갈등을 벌였고 24세때 아버지의 곡식을 훔쳐 달아나게 되었다.[14] 그 후 그 어느 누구도 마르탱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3.3. 아르노 뒤 틸
마르탱 게르로 위장한 아르노 뒤 틸의 아르티가에서의 생활과 툴루즈의 법정에서 삼촌 및 마을 사람들과 법정 공방전을 벌였던 이야기다.3.3.1. 갈등과 의심
마르탱 게르로 위장한 아르노 뒤 틸은 곧장 아르티가로 가지 않고, 이웃 마을의 한 여관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마르탱 게르라고 말하고, 울면서 가족들이 그립다고 말했다. 그 소문이 아르티가에 있는 마르탱의 가족들의 귀에 들어가자 가족들은 기뻐하며 그의 볼에 키스를 했고, 피에르 역시 그와 포옹을 했다.[15]그 후 3년이라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그 사이에 두 딸이 태어났다.[16] 그러나 토지문제에서 삼촌인 피에르와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게르 집안이 소유해오던 땅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17][18]
더군다나 피에르가 관리하고 있었던 회계 장부까지 넘기라고 요구함으로써 피에르의 입장에서는 노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새 마르탱은 피에르가 재산 일부를 빼돌린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고, 결국 리으의 판사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19]
더 큰 문제는 1559년에 벌어진 두 가지 일이었다. 하나는 로쉬포르에서 온 병사 한 명이 아르티가를 지나쳐 가다가 새 마르탱 게르가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2년 전에 있었던 생캉탱 전투[20]에서 마르탱 게르가 다리 하나를 잃어 의족을 하고 있다며 말한 뒤 제 갈길을 갔던 것이다. 또 하나는 새 마르탱 게르가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과 증언들이 더더욱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피에르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 리으의 법정에서 베르트랑드의 대리인을 자처했다.[21] 결국 새 마르탱은 툴루즈의 감옥에 가 있다가 1560년 1월에 석방이 되었다. 그 후 베르트랑드는 감옥에서 돌아온 남편에세 발을 씻기고 침대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피에르와 그의 사위들은 베르트랑드의 이름으로 새 마르탱을 체포하여 리으의 감옥에 쳐넣었다.[22]
결국 리으에서 새 마르탱 게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부를 두고 법정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검사와 판사들은 마르탱 게르의 진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증인들을 통해 마르탱 게르의 기억들과 얼굴 생김새 그리고 부모의 얼굴 등의 증언들을 종합한 결과, 가짜 마르탱 게르라고 판단한 뒤 새 마르탱에게 참수[23]와 능지처참을 선고했다. 그러나 새 마르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역시 툴루즈의 고등법원에 항소를 했다. 바로 그 유명한 툴루즈의 법정 공방전이 시작된 것이다.
3.3.2. 툴루즈에서의 법정 공방전
이후 새 마르탱은 콩시에르쥬리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24] 그리고 5월초에 아내인 베르트랑드와 삼촌인 피에르가 재판장에서 대질심문을 하게 되었다.[25] 이 과정에서 베르트랑드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쳐 놓은 덫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피에르가 꾸민 것이라고 주장했다.[26] 대질심문을 한 뒤 재판소에서는 피에르와 베르트랑드를 투옥할 것을 명령했고 두 사람은 새 마르탱이 있는 콩시에르쥬리에 갇히게 되었다.[27]덕분에 1560년 여름 내내 장 드 코라스는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하게 되었고 쓸 내용을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증인들의 자백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왜냐하면 9명~10명은 새 마르탱이 진짜라고 밝혔고, 7명~8명은 가짜 마르탱인 아르노 뒤 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 마르탱이 바스크어를 사용할 줄 모른다고 하자 장 드 코라스는 새 마르탱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28] 이번에는 아내인 베르트랑드에 관한 증거를 살펴봤다. 하지만 그 증거 또한 도움이 되질 못했다. 왜냐하면 선서를 거부한데다가 새 마르탱이 가짜 마르탱이라는 것을 그녀가 끝까지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피에르 게르와 피고인 새 마르탱을 살펴보고 법정에서 심문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판사들은 새 마르탱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로 결정했다.[29] 그런데 재판장에서 선고하려던 그때……… 한쪽 다리에 나무 의족을 차고, 자신이 마르탱 게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3.4. 마르탱 게르의 귀환과 이후
다리에 의족을 차고 들어온 남자가 자신이 마르탱 게르라고 주장하자 법정에서는 대질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새 마르탱은 라며 소리를 쳤다. 이후 여러 차례 대질심문을 했고, 아내인 베르트랑드에게 의족을 찬 사람이 진짜 남편이냐고 묻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자 마르탱은“눈물을 치워라, 나의 누이들과 삼촌을 내세워 변명하지 말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 이상으로 아들, 조카, 형제를 잘 아는 아버지, 어머니, 삼촌, 누이, 형제는 없다. 우리 집에 내린 재앙에 대해서는 너 이외에 탓할 사람은 없다.”
라고 베르트랑드에게 일침을 내렸다.법정에서는 새 판결문을 준비했고, 결국 새 마르탱, 아니 아르노 뒤 틸은 마르탱을 사칭하여 사기를 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아르티가의 교회에서 아르노 뒤 틸은 흰색 옷을 입고 공개적으로 사죄를 했으며, 장 드 코라스와 진짜 마르탱 게르 및 그의 아내 베르트랑드와 가족들, 그리고 아르티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교수형을 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베르트랑드가 낳은 아르노 뒤 틸의 딸은 일단 적자로 인정받았다. 마르탱과 베르트랑드는 일단 화해하고 같이 살면서 아들 2명을 더 낳긴 했지만 마르탱은 이후 재혼해 자식을 더 낳았다.
3.4.1. 마르탱 게르에 관한 진실
사실 새 마르탱이었던 아르노 뒤 틸과 진짜 마르탱은 같은 군 입대 동기였다. 우선 진짜 마르탱을 한번 살펴보자. 마르탱은 집을 나간 뒤 압스부르고 왕조 통치하의 스페인군에 입대하여 펠리페 2세가 직접 이끌었던 생캉탱 전투에 참전했다.( 1557년) 전투 과정에서 마르탱은 다리에 총을 맞아 부상을 입게 되었고, 결국 총탄을 맞은 다리를 절단하여 나무로 된 의족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고향에서 새 마르탱을 두고 법정 분쟁이 벌어지자, 고등법원에서 마르탱이 다리를 절단한 것이 맞는지 확인 조사를 위해 조사관을 스페인에 파견했고, 그 소문을 들은 뒤 고국인 프랑스로 귀국한 것이었다.
반면 새 마르탱이었던 아르노 뒤 틸은 어땠을까? 우선 아르노 뒤 틸에 대해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역시 프랑스 출신이었다. 단지 뒤 틸의 고향은 아르티가에서 족히 하루거리인 롱베즈 교구지역이었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에 마르탱 게르처럼 가족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고, 결국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아르노 뒤 틸은 마르탱이 있었던 스페인군에 입대했고, 병사들 사이에서 마르탱과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아르노는 그걸 알고 교묘히 마르탱에 관한 모든 것을 익히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마르탱으로 완전히 위장한 후 아르티가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30]
4. 이 이야기가 주목 받은 이유
책의 내용상으로는 아르노가 먼저 사기를 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아르노를 보고, 마르탱이 아니냐며 먼저 말을 건다. 아르노는 이것을 듣고 사기를 칠 것을 확실하게 정하게 되었다.한편 베르트랑드는 돌아온 마르탱이 가짜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작중에서 베르트랑드는 분명히 인지를 했으며, 장 드 코라스는 베르트랑드가 돌아온 마르탱이 가짜인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베르트랑드를 추궁했다. 하지만 베르트랑드와 진짜 마르탱과의 금슬이 그리 좋진 않았고, 베르트랑드는 그런 결혼 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돌아온 마르탱이 가짜인 것을 알았어도 그를 지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도의적인 면에서 아르노 뒤 틸도 고민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이며 재판 과정에서 계속 주장이 오락가락한다. 하지만 결국 아르노는 베르트랑드를 사랑했고, 더이상 자신을 변호하길 원치 않았으며 아르노를 사랑한 베르트랑드는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진짜 마르탱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과했다.
한편 해당 재판이 열리게 된 경위는 아르노 뒤 틸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아르노는 피에르가 가져간 돈이 원래 자신(=진짜 마르탱 게르)의 돈이므로 돌려달라고 했는데, 안 그래도 당시 여러 썰들로 의심이 생긴 데다가 원래 돈에 인색했던 피에르는 돈을 절대 줄 수 없다고 말하며 재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르노가 만약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진짜 마르탱 게르가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르노는 계속 아르티가에서 살았을 수도 있다.
아르노는 완벽하게 마르탱의 행세를 했고, 사람들은 그가 마르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정적으로 귀환하던 군인이
"그는 '팡세트'라고 불리며, 마르탱은 생캉탱 전투에서 다리를 잃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르노는 계속 마르탱인 상태로 살았을 것이다.아르티가 마을 주민 전체가 속았고, 부인 베르트랑드는 가짜 마르탱인 아르노 뒤 틸을 진짜 남편이라고 말하며, 피에르와 아르노는 돈 때문에 불화가 생겼으니 세상 사람들이 주목한 것이었다.
5. 영상화
5.1. 영화
- <마틴 기어의 귀향>(Le Retour de Martin Guerre, 1982): 장클로드 카리에가 원작에 충실하게 각색한 영화판으로, 프랑스에서 제작했다. 한국에서는 영어판 제목을 직역한 <마틴 기어의 귀향>으로 1992년 4월 25일에 뒤늦게 개봉했다.
- <써머스비>(Sommersby, 1993): 위 영화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버전으로, 시대를 남북 전쟁 때로 옮겨서 각색한 작품이다. 써머스비는 이 작품에서의 마르탱의 이름이다. 결말은 원작과 달리, 진짜 써머스비는 죽었으며 가짜 써머스비와 써머스비 부인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지만,[31] 진짜 써머스비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 저지른 살인사건이 드러나[32] 가짜 써머스비가 잡혀가게 되는데, 가짜 써머스비는 자신이 가짜라고 밝히면 풀려날 수 있었지만 써머스비 집안의 재산이 써머스비의 아내에게서 인간 말종인 써머스비의 동생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가짜임을 밝히지 않은 채 처형당하며, 써머스비의 아내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것으로 각색되었다.[33]
5.2. 드라마
실제 이야기 - 돌아온 가짜 남편. 1542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남편이 뒤바뀐 실제 사기 사건과 1607년 조선 선조 때 실제로 벌어진 가짜 남편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판사 장 드 코라스가 기록한 《 마르탱 게르의 귀향》과 백사 이항복이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인 《유연전》을 재해석했다. |
공식 홈페이지 |
2024년 한국의 JTBC에서 방영한 < 옥씨부인전>이 이 작품과 백사 이항복의《 유연전》을 재해석해서 영상화했다. 문서 참조.
[1]
1515년
알비 지방의 레알몽에서 네 명의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변호사인 아버지가 있었던
툴루즈에서 성장했다. 13세 때는 민법을 해석했고, 21세 때인
1536년에는 ‘법학의 위대한 선각자’로 유명한 필리푸스 데키우스로부터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고향인 툴루즈로 돌아와 대학의 강사로 채용되어 민법을 가르쳤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을 두고 아버지와 법정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결혼까지 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아내가 사망한 후에는
앙리 2세가 페라라 공작 및 추기경과 협상을 할 때, 조언을 한 덕분에
1553년 2월, 툴루즈의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앙리 2세의 신임은 두터웠는데 훗날 앙리 2세가 <비밀 혼인에 관한 칙령>을 선포할 때 이를 지지하는 책을 올려 국왕으로부터 9년 동안 저술한 책을 얼마든지 재인쇄하고 독점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1560년 툴루즈의 형사 재판소에서 판사로 근무할 때 마르탱 게르 사건을 맡았고, 훗날 《잊을 수 없는 판결》을 썼다. 또한 그는 법뿐만 아니라
라틴어 학자이자 저명한 인문학자였다. 이후 장 드코라스는 수도인 파리에서 판사로 활동했는데, 신교도였던 그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당시 살해당했다.
[2]
1928년 11월 8일~2023년 10월 21일, 미국역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3]
흥미롭게도 마르탱의 성씨인 게르(Guerre)는 프랑스어로 전쟁을 뜻한다. 실제 마르탱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가족과 이별하여, 행방불명이 되었고, 이후 등장한 가짜 마르탱도 그의 전쟁 동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법정 공방을 일종의 전쟁으로 비유한다면, 꽤나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4]
프랑스 남서쪽 끝에 위치한 지역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었다.
[5]
이주 당시 게르는 아버지, 어머니, 피에르 삼촌과 함께 갔었다.
[6]
참고로 이 책의 시대적인 배경을 설명하자면 16세기 초중반 당시
프랑수아 1세의 시대였는데,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를 정치적인 면에서 극도로 증오하여 전쟁을 자주 벌였다.(
이탈리아 전쟁) 그럼에도 막상막하로 승부가 나지 않자 잉글랜드의
헨리 8세를 끌어들였지만 그마저도 실패를 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카를 5세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손해를 봤다. 이를 위해 훗날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와 함께 그 유명한 이교도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 마르탱 게르의 가족들이 아르티가로 이주한 이유도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에 벌어진 잦은 전쟁이라는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7]
베르트랑드도 결혼 당시 마르탱과 비슷한 나이대였다.
[8]
마르탱과 베르트랑드의 결혼 당시 계약서에는 50~150 리브르의 현금과 '데부라'(Dellbourat)라고 불린 레즈 강 서안의 포도밭, 그리고 깃털 베개, 아마포와 양모 이불, 자물쇠가 달려있는 금고와 그에 맞는 열쇠, 다른 색깔로 된 두세 벌의 옷이 선물로 주어졌다.
[9]
여기서 말하는 마법이란? 게르 집안과 롤스 집안의 결합을 시샘하는 마녀, 또는 시샘하는 남녀 대리인을 의미하는 말이다.
[10]
당시 16세기의 사람들은 결혼 밖의 어떤 여자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1]
그 때문에 베르트랑드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마르탱과 헤어지라는 재촉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결혼이 완성되지 않으면 헤어질 수 있었고, 3년 후에 교회법에 따라 재혼할 수 있었다.
[12]
이름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인 '상시'라고 지어주었다.
[13]
당시 촌락 사회에서의 젊은이들에게도 숨돌릴 기회는 있었다. 예를 들어 바스크 지방에서는 고래잡이와 항해가 있었고, 양치기라는 직업도 있었다. 또한 '르 포사'라는 학교를 다녀 법학사가 되거나 군대에 입대하는 방법도 있었다.
[14]
바스크 지방의 법에 따르면 가정 내에서 절도가 일어났을 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15]
이후 마르탱으로 위장한 아르노 뒤 틸은 아내인 베르트랑드와 함께 열심히 살아보겠노라고 밝혔다.
[16]
하지만 두 딸 중에 한 명은 죽었고, 남은 한 명은 아들 상시의 여동생이 되었다.
[17]
한마디로 토지매매를 시도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18]
더군다나 토지매매는 바스크 지역의 관습에도 맞지 않았다.
[19]
결국 게르 가족은 분열이 되었고, 아르티가 마을 전체와 너머로까지 확산이 되었다.
[20]
1557년에 일어난 생캉탱 전투는 스페인군과 프랑스군이 생캉탱이라는 지역에서 벌인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21]
한마디로
거짓말쟁이를 잡기 위해 피에르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되었던 것이다.
[22]
사실 새 마르탱이 툴루즈의 감옥에 있는 동안 피에르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23]
원래 참수는 귀족들에게만 시행되어야 하는데 새 마르탱 같은 평민에게 했다는 건 참 의외이다.
[24]
그것도 두 다리에 족쇄를 찬 채 갇혀 있었다.
[25]
당시 16세기 프랑스의 형사 재판소는 고등법원 휘하의 5개 재판소 중 하나로서 교대로 10명~11명의 판사들과 두세 명의 재판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르탱 게르 사건을 맡았던 장 드 코라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26]
장 드 코라스의 보고에 따르면 피에르는 매우 확신이 찬 얼굴이었고, 앞서 말한 롤스보다 훨씬 더 그리해서 배석한 판사들 중 피고가 진짜 남편이며, 거짓말은 아내와 삼촌쪽에서 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27]
단 새 마르탱이 있는 곳에 갇히지는 않았다.
[28]
왜냐하면 바스크의 토박이 사람이 자신의 언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어려서 라부르를 떠났기 때문에 실제 부모들의 말을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
[29]
그것도 무고한 한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을 벌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이 낫다라는 로마법의 원칙에 따라서 결정한 것이었다.
[30]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전에, 아르노 뒤 틸의 고향인 롱베즈의 사람들조차도 아르노가 사기꾼 기질이 있다고 하여 그를 팡세트라고 불렀다.
[31]
당연히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32]
진짜 써머스비는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아 부부 사이가 매우 나빴고, 마을 내에서도 행실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써머스비가 남북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몰라보게 선량한 인물로 변해서, 정말 그 써머스비가 맞는가 라는 의심을 품는 이들이 생겼던 것이다.
[33]
두 영화 모두 2020학년도 9월 모의고사 국어 영역 25번 보기에서 언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