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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0:13:40

마렝고 전투

1. 개요2. 전개3. 절정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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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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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Bataille de Marengo
영어: Battle of Marengo

제2차 이탈리아 전쟁 중이던 1800년 6월 14일 이탈리아반도 피에몬테[1] 지방의 도시인 알레산드리아 근처에서 오스트리아의 미하엘 폰 멜라스 남작(Michael Friedrich Benedikt Freiherr von Melas)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군을 기습하면서 벌어진 전투.

쿠데타 집권 이후 아직 권력이 불안정했던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하마터면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뻔 했다.

2. 전개

나폴레옹의 계획은 마세나 제노바에서 멜라스 장군의 군대에 저항하는 사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군의 뒤를 치는 것이었으나, 1800년 6월 4일, 마세나는 항복했고, 이제 멜라스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군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9일 나폴레옹의 선봉을 지휘하던 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몬테벨로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분견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이 이 시점에서 가장 걱정한건 오스트리아군과의 정면승부가 아닌 멜라스가 군대를 제노바로 후퇴시킨 뒤 제노바를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과연 멜라스와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 앞에 단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고 이에 나폴레옹은 멜라스가 제노바로 후퇴하고 있다고 판단, 드제와 부뎃에게 각자 한개 사단을 맡기고 클로드빅토르 페랭의 부대를 지원하는 동시에 제노바를 차단해 궁극적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그의 소중한 병력을 분산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멜라스의 함정이었다. 부뎃과 드제의 병력이 출발하자 갑자기 튀어나온 멜라스가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미 전투는 시작부터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었다.[2] 또한 나폴레옹이 받은 쇼크 또한 컸는데 과거 본인이 지휘했던 1차 이탈리아 원정 당시 자신이 오스트리아의 병력이 분산된 틈을 타 분쇄하던 기술을 구사했는데 자신이 반대로 분산된 상태로 분쇄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

다만 '나폴레옹이 아무것도 못했고, 프랑스군은 드제의 병력이 올 때까지 속절없이 밀렸다.'라는 세간의 인식은 매우 왜곡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본대는 드제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6시간 이상을 비교적 적은 수의 사망자와 포로를 내어주며 저항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군이 약 3만여명, 나폴레옹의 본대가 2만2천명인데 비해 드제의 사단은 6천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본대 없이 드제의 병력만으로 역전할 수 있는 상황이 절대로 아니었다.

어쨌든 늦은 오후 무렵에는 프랑스군은 방어에 유리했던 지점들을 내주고, 3km 후방에 위치한 마을까지 밀려났으며, 프랑스의 주력 예비대였던 통령 근위대 역시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기습을 당해 와해되었다. 프랑스군의 패배가 유력해지자, 오스트리아군 총지휘관 멜라스가 지휘권을 참모장에게 넘겨주고 전장을 떠날 정도였다.[3]

그렇게 혁명 프랑스가 망하기 직전에 몰린 그때...

3. 절정

오스트리아군에겐 갑작스럽게도, 제노바를 차단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드제 장군과 기병 포병을 비롯한 병력들이 전장에 도착했다. 전투 와중에 나폴레옹이 보낸 긴급한 전언을 읽고 재빠르게 전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에 나폴레옹은 참담한 심정으로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다.
귀관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에 드제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분명히 이 전투는 패배했습니다. 이젠 우리가 이길 차례입니다.
프랑스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 태세를 갖춘 반면, 이 사실을 모르던 오스트리아군은 추격대형으로 프랑스군의 사거리에 들어왔다. 마르몽이 지휘하던 포병대가 오스트리아 군을 포도탄으로 타격하자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켈레르만 조아킴 뮈라가 지휘하는 기병대가 측면에서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격파하자, 사기가 떨어진 중앙의 오스트리아 보병대의 전열이 붕괴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이 6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8000명이 포로로 잡힌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4700명으로 적지 않았지만 포로와 실종자는 900명에 불과했다. 이외에도 오스트리아군의 수십개의 군기와 대포가 프랑스군에게 노획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주역 드제는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 총에 맞아 전사했다. 전투 후에도 드제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근처 마을 사람들이 사상자들의 옷을 뒤져 귀중품을 빼앗은 뒤 시체를 쌓아두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드제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급하게 수색했는데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옷이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후 그의 장례는 성당에서 성대하게 치러지고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끝마쳐지게 된다.

그런데 드제가 죽은 바로 그 날,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이 남겨두고버리고 온 이집트 주둔군을 지휘하던 장바티스트 클레베르 장군(Jean-Baptiste Kléber, 1753~1800)이 무슬림 광신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떠난 후 지휘권을 넘겨받고 흔들리던 이집트 주둔군을 바로잡은 후 오스만 제국군을 두 차례에 걸쳐[4] 궤멸시켰던 유능한 장군이었기에 이 손실은 뼈아팠다. 이후 클레베르의 지휘권은 자크프랑수아 므누 장군(Jacques-François de Menou, Baron of Boussay, 1750~1810)[5](1750~1810)가 이어받았지만, 영국에게 해상을 장악당하고 고립된 이집트 주둔군은 결국 1801년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파일:마렝고검2.jpg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사용한 검
흔히 마렝고 전투는 나폴레옹의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선전효과로 인해 많이 과장된 것이고, 사실 마렝고 전투의 군사적 업적은 그의 여러 전투들에 비해 군사적 재능을 빛낸 전투는 아니다.[6] 어찌보면 빠른 시간안에 본대에 합류해[7] 역전을 이끈 드제의 행동력이 나폴레옹 이상으로 돋보이는 전투이기도 하다.

마렝고 전투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처럼 적군을 섬멸한, 나폴레옹 본인이 흔히 말하는 '완벽한 승리'가 아니었다. 마렝고 이후로도 사실 오스트리아군은 충분히 전쟁을 계속할 수 있던 상태였으며 오히려 프랑스군은 죽다 살아난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즉, 마렝고 전투의 업적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실수로 1개 군단이 박살날 뻔한, 그대로 졌다면 나폴레옹의 흑역사로 치부될 전투였던 것. 그렇지만 이 전투에 부여된 의미는 결코 적지 않았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처한 상황에서 만약 마렝고 전투에서 패했다면 그의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전투였으니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는 전투였고, 또한 패전 직전의 상황에서도 전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생길 때까지 상황을 유지했던 나폴레옹의 통솔력과 지구력, 그리고 이후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능력은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정치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활용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프랑스를 적대하는 제국들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스 국내에서 나폴레옹의 실각을 노리던 불만세력들에 대해서도 마렝고 전투의 승리는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원하던 완벽한 승리는 그의 손이 아닌 모로의 손에 의해 호엔린덴 전투에서 이루어지게 된다.[8]

훗날 거의 정확히 15년 후에 벌어진 워털루 전투(1815년 6월 18일)와 비교되는 부분이 있는데, 드제가 살아 있었다면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으며 원수로 진급했을 것이고, 군사적 재능을 보인 드제가 워털루 전투에서 그루시의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컸다. 워털루 전투가 마렝고와 약간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나폴레옹이 위기에 처했을때 그루시는 3만이라는 예비병력을 이끌고 숲속탐험을 하고 있었다. 에마뉘엘 그루시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와 비슷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결정적 판단을 함으로써 전황은 물론이고 나폴레옹의 운명 자체를 결정지어 놓았다.

4. 기타

이 전투를 마치고 나서 지친 나폴레옹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그의 요리사가 만들어 올린 닭고기 요리가 '치킨 마렝고' 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게 주류이다. 치킨 마렝고를 만들었다는 뒤낭이란 요리사는 마렝고 전투가 끝난 후 5년 후에 나폴레옹의 요리사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학자들은 치킨 마렝고에 들어가는 토마토도 6월의 이탈리아 북부에서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 본다. 자세한 것은 마렝고 전투 부분 참조.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서 착용했던 이각모가 모나코 왕실에서 경매로 나왔는데, 하림그룹 김홍국 회장이 188만 4,000유로(약 26억원)에 낙찰받아 화제가 되었다. 현재 경기도 판교 하림그룹 계열사 NS홈쇼핑 별관 나폴레옹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1] 토리노가 있는 피에몬테는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 왕국의 중심지였으나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빈 회의에 따라 사르데냐 왕국에 반환되었다. [2] 당시 오스트리아군에겐 대포가 무려 100문이나 있었던 반면 나폴레옹에겐 고작 24문뿐이었다. [3] 멜라스는 가벼운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4] 타보르 산 전투, 헬리오폴리스 전투. [5] 1795년 당시 나폴레옹이 바라스에 의해 '방데미에르 13일 폭동'의 진압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 전임자가 바로 므누였다. 므누가 폭동을 진압하기를 주저하자, 바라스는 그를 반역죄로 감옥에 넣어버리고, 후임으로 나폴레옹을 임명했다. 이후 무죄를 선고받고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 원정에 종군했다. 이집트에서 나폴레옹은 현지의 민심을 얻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하려고 했으나, 참모들이 말려서 포기했고, 대신 므누가 개종하고 이집트 유력자의 딸과 결혼했다. 위의 언급만 보면 무능한 겁쟁이인 것 같지만, 의외로 전장에서 수차례 부상을 당할 정도로 용감했고 이후로도 계속 요직을 맡은 것을 보면, 무능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에투알 개선문에도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6] 위인전이 많이 읽히던 시절, 나폴레옹 위인전에서는 알프스를 멋지게 넘은 나폴레옹이 방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완벽하게 기습해 말 그대로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나온다. 위의 문단에서처럼 이는 당연히 나폴레옹을 띄우기 위해 전투의 개요를 엄청나게 과장한 서술이었고, 정작 급습당해 대위기에 처했던 쪽은 프랑스군이었다. [7] 드제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그의 부대가 복귀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사실 이는 오스트리아 군의 공격이 주공이라는 것을 파악한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평소 나폴레옹의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간곡한 어조의 명령서를 보면 상황이 꽤나 심각했다는 점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그람 전투에서의 요한 대공처럼, 합류명령을 받았음에도 여유를 부리다 패전을 초래한 지휘관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드제의 행동력은 칭찬할 만 하다. [8] 그러나 모로는 이후 강한 견제를 받고 거의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