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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3 00:54:41

로트레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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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tréamont

1846~1870

1. 개요2. 생애3. 예술사적인 평가4. 기타

1. 개요

프랑스의 시인으로 본명은 '이지도르 뤼시앵 뒤카스(Isidore Lucien Ducasse)'

2. 생애

아버지가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프랑스 영사관의 부영사로 재직 중에 태어나 우루과이에서 태어나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몬데비데오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고 13살 때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교육을 위해 부모님의 고향인 프랑스 타르브((Tarbes)로 와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중고딩 때 성적은 중상위권으로 수학을 특히나 잘했다고 하고, 본인이 쓴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에는 수학을 찬양하는 산문시 한 편도 있다.
그러나 대학교에는 진학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 대학에는 입학 사실없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증명서도 없어서 중퇴했는지 졸업했는지도 의문이고, 여하튼 이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중저가 호텔에서 살면서 24살이 되도록 우루과이에 사는 아버지한테 용돈을 받으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러면서 작가가 되기를 꿈꾸며 노력했고 자비출판으로 말도로르의 노래 시집도 출판했으나 그 어떠한 평가도 아무런 비평적 성공도 못받고 절망을 맛보다가, 2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서양 나이로 스무 한 살 때인 1868년에 '첫번째 노래(말도로르의 노래의 1장에 해당한다)'를 작가명이 없이 '***' 별 세개로 출판하고 이듬해인 1869년에 산문시집 《말도로르의 노래 (Les Chants de Maldoror)》을 로트레아몽 백작이라는 필명으로 자비 출판했다. 이 말도로르의 노래는 6장으로 나눈 산문시집이지만, 독자도 평론가한테도 주목받지 못하고 다음해 출판사가 내용이 우울하고 음침하다는 이유로 절판 시켜버렸다. 애당초 시집 자체가 보들레르 악의 꽃에서 영향을 받은 19세기 퇴폐주의(데카당스(décadence)) 사조에서 나온 작품으로 주인공인 말도로르(Mal은 악(惡)이라는 뜻의 접두어다)는 살인쯤은 가볍게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고, 결국 기독교의 신( 야훼)과 대적하고 싸우는 신성모독으로 가득찬 내용이다.

《시(詩):미래의 서적에의 머리말 Poésies: Pré-face à un livre futur》(1870)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본명으로 발표했지만 그런 책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잊혀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점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던 시점이라 그런 책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것은 프랑스의 문학평론가한테 보낸 편지 모음집으로 ,앞으로 이런 작품을 쓰고 싶다라든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은 서간집이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 외로 이런 저런 문학 작품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말도로르의 노래만 읽으면 작가가 똘끼 가득한 반(反)사회적 사이코패스(미친 또라이 새끼)라고 판단되지만, 이 글에는 이성적이고 본인 작품(말도로르의 노래)의 의도가 나와 있어서, 작품과 작가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나는 미스끼예비츠, 바이런, 밀턴, 싸우디, 뮈세, 보들레르 등이 한 것처럼 악을 노래했습니다. 물론 나는 단지 독자를 억압하기 위해서만 절망을 노래하는 그 숭고한 문학의 의미 안에서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독자에게 치료제로서 선을 바라도록 하기 위해서, 음역(音域)을 조금 과장하였습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포위된 파리를 빠져나가지 못한 채 그곳에서 24살에 요절하고[1], 사후에 초현실주의 문학가와 예술가에게 재발견되어 근대시의 선구자로 추앙받았다.

3. 예술사적인 평가

자국인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평가가 좋다. 그 이유는 카운터컬쳐라고 기존의 일부의 상류층 귀족만 고상하게 즐기는 예술 문학에 대해 맞선(카운트) 주먹질(펀치)를 먹인 작품이다. 기존의 기독교적인 질서에 반항해서 인간이 신에 대항해서 싸우고 반항하는 내용으로 프리드리히 니체(1844~1890. 로트레아몽보다 2살 많다)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처럼 기독교 세계관을 그 근본부터 흔들고 때려뿌시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트(예술)를 지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둬야 할 필독서다. 물론 한국에서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데. 외국 예술가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통한다. 예술가(아티스트)의 사명은 인간의 이쁘고 아름다운 선(善)한 모습만 미화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추하고 냄새나고 더럽고 악(惡)한 실재하는 진짜 현실도 그려야 한다는 19세기 말 모더니즘 사상. 근대미술과 근대 문학을 시작한 선구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보들레르 악의 꽃(1857년, [말도로르의 시]보다 9년 전에 출판)과 함께 음울한 산문시의 절정이라고 평가되곤 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말도르르의 노래의 연작 삽화를 그렸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한국에서도 1980대 초반에 서울대 불문과 출신 번역가가 1장만 번역 출판했다, 내용만 보면 원문인 산문시를 그 뜻만 충실하게 번역했다. 그런데 기존의 일본에서 출판한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한 흔적이 보인다. 한국어 단어를 써도 될 문장 표현에 굳이 일본식 한자어 표현이 보이기 때문이다. (뭐 까놓고 말해서, 이 당시는 원래 이랬다. 불문학 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을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로 한국어로 중역하는 것이 흔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문학연구 자료도 서울대 불문학(프랑스 문학)라고 해도 그 레퍼런스는 일본인 학자들이 연구했던 자료를 참고했다.) 이후 만화 카멜리온 시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1990년 후반에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의 다른 번역가가 1장과 2장을 번역 출판했고, 몇 년 후에 완역본이 출판됐다. 그러나 이 완역본은 문장은 한국어로 쓰여져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문장 자체가 어색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게 횡설수설 엉터리로 번역해놨다. 프랑스어를 모른다면 차라리 영어나 일본어 번역본을 읽으면 대충 내용 파악은 가능하다. 일본에서는 7명의 일본인 불문학자가 각자 번역한 [로트레아몽 전집]이나 [말도로르의 노래]만 번역한 시집이 11권. 일본인 학자에 의한 연구서가 4권이 출판됐다. 일본 위키피디아 참고 이는 6명의 학자가 번역한 이제까지 출판 된 6권의 영어 번역본 보다 많은 숫자다. 한국은 3명인데 그 중에 한 명은 [말도로르의 노래] 1장만 번역했다.
2018년에 출판한 황현산 평론가의 마지막 번역서가 바로 이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다. 기존에 나왔던 역서보다 훨씬 읽기 쉬우며 각주를 통한 해설과 로트레아몽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번역본을 읽어보면 난해한 문장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일본인이 번역한 번역본이 더 그 내용파악이 쉽다. 애당초 이 작품에 대해 애정이 깊고 여러 연구 자료를 읽고 번역을 했다고 쳐도, 어설프게 도전하면 황현산처럼 괴작 번역이 나오기 십상이다. 그걸 알 정도면 니가 번역하든가

프랑스어로 된 원문은 과장 1도 없이 프랑스어 그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과장된 표현이 장광괴설이 문장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한 문장이 마치 마약먹고 뽕간 랩퍼가 주절주절 쉴새없이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것처럼 처음 시작한 주어가 그 주어에 대응하는 술어로 연결이 안 되는 미친놈 헛소리에 가깝다 (한 문장 자체가 너무 길어서 후대에 출판된 것에는 원문에는 없는 쉼표를 마구마구 찍었는데도 그 내용 파악이 어렵다. 평론가들은 운문시에서 읽는이에게 운율감을 주기위해 문장 내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대충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사이사이 집어넣었기 때문에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자동기술법이라고 정신병 환자가 마구 지껄이는 것을 그 내뱉은 말을 그대로 문장으로 기록한 병원 기록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가 머리속에서 나오는 것을 아무 제한없이 그대로 기록하는 초현실주의 수법이라고 여겼다. 초현실주의자 예술가는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는 이런 자동기술법의 시초라고 평가하고 있다. 20세기 현대소설에서는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소설)가 자동기술법으로 주인공의 머리 속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나마 문단과 문단 사이에 끝낼 때에 같은 문장을 반복하면서 그래도 뭔가 운문시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수술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이라는 구절이 초현실주의계에서 유명하다. 이 문장은 꽤나 유명해서 20세기 중반까지 자칭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했다. 초현실주의를 신봉하던 당시의 아티스트 예술가들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의 핵심인 꿈과 무의식을 무척 대단히 굉장히 중요시 여겼는데, 이 수술대 위에서 우산이랑 재봉틀처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물건이 뜬금없이 만난 것이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인생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존의 서양에 퍼진 기독교 사상의 신적 존재( 야훼)가 인간의 인생을 모두 결정해준다는 운명론적인 세계관가 아니라, 인간의 인생은 의도치 않은 어떠한 상황의 연속이고 그런 상황이 인생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해석했다.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기독교적인 결정론에 사로잡힌 인간(매주 일요일 교회 꼬박꼬박 나가고 십일조 잘 내고 무슨 일이든지 신에게 열심히 기도로 요청하기만 하면 인생이 은혜를 받고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신에 대항해서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이길 수 있다는 모더니즘 근대사상에 입각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이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게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몰랐고 여러 해석이 난무했다. 결국 '이게 뭔 소린가?'라고 훗날 문학평론가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추적하다보니, 당시에 출간된 프랑스의 어떤 잡지에 실린 우산과 재봉틀 광고가 한 페이지에 같이 실려있는 것이 있었는데, 평론가는 말도로르의 노래의 글쓴이인 본명 이지도르 뒤카스(필명: 로트레아몽)가 이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이런 구절이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냥 잡지의 광고 페이지에 실린 우산과 재봉틀을 보고 우산과 재봉틀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수술대'도 역시나 큰 의미는 없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이후 '우산'이고 '재봉틀'이고 '수술대'고 그 단어 하나하나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서 로트레아몽의 산문시를 해석하는 평론은 철퇴를 맞은듯이 깡그리 사라졌다. 사실 애초 초현실주의의 시작이 무의식적인 구술이었기에 로트레아몽의 서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게 맞았다. 당대의 평론가들이 초현실주의를 잘못 이해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생긴 일이 되었다. 물론 초현실주의 작품 중에서도 의미가 담기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그 경우는 대부분 작가 본인이 해석을 할 수 있게 하는 경우가 잦다. 대표적인 사람이 르네 마그리트.

4. 기타

1980년대 중반 허영만 대본소 만화 《카멜레온의 시(詩)》(1986)(스토리는 김세영)은 《말도로르의 노래》의 구절을 많이 인용했다. 무식한 만화 편집자는 [말도로의 노래]를 줄곧 [말도로의 노래]로 잘못 표기했다.
인간 족속에 관한 한, 나는 우정과 사랑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극중 준주역인 '나라'(성씨가 '나'이고 이름이 '라'라고 한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즐겨 읽는 시집으로 나온다. 이 밖에도 여러 대목이 인용되었다. 하지만 만화 내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냥 허세.

일본의 전위( 아방가르드)예술가 겸 영화감독인 테라야마 슈지가 1977년에 '말도로르의 노래'라는 타이틀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1] 전쟁 중에 식량이 떨어져 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나빠졌고 그도 그 때문에 허약해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었던 여관 주인은 사인에 대해 길게 적지 않았다. 포위 중에 역병을 우려하여 그의 시체는 다른 사람들의 시체들과 함께 공동묘지에 묻혀버렸으며, 또한 따로 남겼을 지 모르는 노트나 일기도 전해지지 않아 그의 인생에 대해 알려진 것은 위에 쓰여진 것이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