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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00:54:03

로저 드 클리퍼드

이름 로저 드 클리퍼드
Roger de Clifford
출생 1333년 7월 10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모어랜드 브로엄 성
사망 1389년 7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스킵턴 성
아버지 로버트 드 클리퍼드
어머니 이사벨라 드 버클리
형제 로버트, 토머스, 존
부인 모드 뷰챔프
자녀 토머스, 윌리엄, 필리파, 캐서린, 모드, 마거릿
직위 제5대 클리퍼드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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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동했다.

2. 생애

1333년 7월 10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모어랜드의 브로엄 성에서 출생했다. 조부 로버트 드 클리퍼드는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전쟁에 참여했다가 배넉번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버지는 제3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이고, 어머니는 제2대 버클리 남작모리스 드 버클리의 딸인 이사벨라 드 버클리였다. 1344년 아버지 로버트가 사망한 뒤 형 로버트가 뒤를 이었지만, 1345년 형이 병사한 뒤 당시 12세였던 그가 요크셔,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및 웨스트모어랜드 등지의 클리퍼드 가문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또한 그는 초대 클리퍼드 남작과 모드 드 클레어의 결혼을 통해 클리퍼드 가문에 상속된 아일랜드 내 클레어 영지의 상속자였다.

1345년 3월 17일,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가 로저의 후견인으로 선임되었다. 1350년 8월 29일 윈첼시 해전에 참전했으며, 1355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하는 군대의 선봉에 서서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했다. 1354년 5월 14일 성인으로 인정되어 영지를 대부분 상속받았지만, 어머니 이사벨라의 두번째 남편이자 그의 계부인 토머스 무스그레이브가 이사벨라의 영지를 그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하면서 분쟁이 발생했다. 1366년, 왕실의 중재 하에 이사벨라의 영지까지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사우스 컴벌랜드 지역의 라몬비 및 애플비 등지에서 토지를 새로 확보했고, 1357년 자신과 아내를 위해 더럼 교구에 하트풀 교회를 세웠으며, 재산 일부를 남동생 토머스와 장남이자 상속인인 토머스에게 양도했다. 한편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딸들의 성공적인 결혼을 준비하려 노력했다. 1371년 나중에 자기 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될 그레이스토크 남작령의 상속인인 랄프의 후견인 자격으로 3년간 연간 240파운드를 받았으며, 1388년 다른 딸 필리파와 그로비의 페러스 남작령의 상속인인 윌리엄 페러스의 결혼을 위해 500마르크를 지불했다. 또한 컴벌랜드 지역 귀족 대표 직위를 유지함으로써 지위를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할아버지가 시작한 스킵턴 성 건설을 완료하고 그곳에 문과 망루를 세웠다.

1359~1360년 왕실군의 일원으로 가스코뉴 원정에 참여했으며, 1369년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1373년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원정대 일원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1361년 3월 15일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고, 1368년 7월 28일 다시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379년 9월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에게 고용되어 기사 5명, 수행원 34명, 궁수 40명으로 구성된 부대와 함께 1년간 아일랜드에서 복무했다.

그가 주로 활약한 전선은 스코틀랜드 전선이었다. 1356년 11월 처음으로 국경 수비 임무를 맡았고, 1366년 5월 국경 감시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24차례에 걸쳐 스코틀랜드 국경지대 내 여러 요충지의 사령관으로 선임되어 스코틀랜드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72년 가을, 스코틀랜드군의 끊임없는 습격에 맞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의회에 대변인을 파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374년 8월 제드워스 숲을 둘러싸고 스코틀랜드의 더글러스 가문과 잉글랜드의 퍼시 가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1377년 이후 스코틀랜드인들이 데이비드 2세의 몸값 지불을 중단하면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로저는 1377년부터 1378년까지 컴벌랜드 보안관이자 칼라일 총독으로 선임되었고, 1379년 스콭를내드 침공에 저항하기 위한 서부 국경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1380년 3월 전사 40명, 궁수 50명과 함께 서부 국경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곤트의 존이 이끄는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협상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휴전은 1383년 2월까지 연장되었다. 1383년에도 평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었다. 그 해 4월 더글러스 백작과 다시 만났고, 1383년 말에 평화 조약이 갱신되었다.

1384년 2월 2일 휴전이 만료되었고, 1384~1385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스코틀랜드에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을 파견했다. 스코틀랜드군이 프랑스군과 함께 잉글랜드 북부를 습격해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자,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이에 대응해 1385년 여름 스코틀랜드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때 로저는 전사 60명, 궁수 40명을 이끌고 후위대 사령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2세의 원정은 스코틀랜드-프랑스 연합군이 정면 대결을 거부하고 청야 전술을 벌이면서 고산 지대에 숨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1388년 8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노스웨스트모어랜드를 파괴하고 브로험 및 애플비를 포함한 클리퍼드 영지를 파괴했다. 당시 로저는 1388년 5월에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브르타뉴 원정에 함께 하고 있었기에 스코틀랜드군이 영지를 파괴하는 걸 저지하지 못했다. 1389년 1월 다시 서부 국경 사령관에 선임되었고, 7월 13일 노스요크셔 스킵턴 성에서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다.사후 볼튼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