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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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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84년 또는 1185년 | ||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 |||
사망 | 1227년 11월 24일 (향년 41~43세) | ||
폴란드 대공국 고싸바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1194년 ~
1198년 1199년 ~ 1202년 1206년 ~ 1210년 1211년 ~ 12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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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카지미에시 2세 어머니: 츠노쳄의 헬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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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루츠크의 그지미스와바 | ||
자녀 | 1남 1녀 | ||
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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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2. 생애
1184년 또는 1185년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2세와 츠노쳄 공작 콘라트 2세의 딸인 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보다 먼저 태어난 형 카지미에시, 볼레스와프, 오도는 요절했기에, 1194년 5월 5일에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소폴란드 귀족들에 의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9~1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헬레나와 크라쿠프 보이보드인 미코와이 그리피타, 크라쿠프 주교인 페우카가 섭정을 맡았다.당시 대폴란드의 공작이었던 미에슈코 3세는 카지미에시 2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폴란드 대공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소폴란드 귀족들이 어린 아이를 대공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그는 이참에 카지미에시 2세에 의해 대공에서 밀려난 울분을 갚아줄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 실레시아의 공작 미에슈코, 오폴레 영주 야로슬라프와 동맹을 맺고 내전을 일으켰다.
1195년 9월 13일, 미에슈코 3세가 이끄는 군대와 레셰크 1세를 따르는 군대가 모즈카와 전투를 치렀다. 미에슈코 3세는 이 전투에서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를 잃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퇴각했다. 얼마 후 실레시아에서 파견된 군대가 같은 장소에서 레셰크 1세의 군대와 맞붙었다. 이번에는 실레시아군이 승리했지만, 미에슈코 3세가 이미 참패하고 물러났다는 걸 알게 되자 즉시 귀환했다. 이후 미에슈코 3세는 무력으로 대공위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카지미에시 2세의 미망인이자 레셰크 1세의 어머니인 헬레나와 협상했다. 마침 헬레나도 귀족들의 전횡에 자신과 자식들의 안위가 위협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198년, 미에슈코 3세는 쿠야비야를 카지미에시 2세의 두 아들인 레셰크 1세와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1199년, 크라쿠프 총독 미코와이와 페우카 주교가 미에슈코 3세를 폐위시키고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에 복위시켰다. 1199년, 레첵 1세는 볼히니아의 공자 로만 므스티슬라보비치를 지원해 할리치나를 탈환해 갈리치아 공작에 복위할 수 있게 해줬다. 1200년, 충분히 톨치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한 레첵과 콘라트는 토지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콘라트는 마조프셰, 쿠야비아를 가졌고, 그는 산도미에시, 크라쿠프, 시에라츠, 웽치차를 확보했다.
1202년, 귀족들은 미에슈코 3세가 명목상 대공으로 복위하도록 허용했지만 모든 권력을 내놓게 했다. 미에슈코 3세는 그해 3월 14일 칼리슈에서 사망했다. 이후 미코와이는 자신의 권력이 제한될 것을 우려해 레셰크에게 측근들을 해임하고 자신의 직위를 유지시켜주면 대공에 세우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레셰크 1세가 거부하자, 그는 미에슈코 3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를 폴란드 대공에 세웠다. 1206년 미코와이가 사망하자, 귀족들은 레셰크 1세를 복위시켰다. 이후 로만이 레셰크과 콘라트의 영토를 침범하여 각지를 약탈하면서 깊숙히 들어오자, 그는 콘라트와 함께 출진해 자비호스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로만을 전사시켰다.
그후 레셰크 1세와 콘라트 1세는 로만이 가졌던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이때 헝가리 왕국의 국왕 언드라시 2세가 로만의 어린 아들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키예프 루스 분쟁에 개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난날 아버지 벨러 3세에 의해 할리치나 공작을 맡았다가 쫓겨났던 아픔을 씻어내고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레셰크는 체르니코프 공작 프셰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와 손잡고 언드라시 2세에 맞섰지만, 스뱌토슬라비치는 헝가리의 공세에 밀려 철수해야 했다. 그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 공국의 종주권을 주장했다.
언드라시가 헝가리로 돌아온 후, 프셰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의 먼 사촌인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를 점령하고 다니엘 로마노비치 일가를 추방했다. 다니엘 일가는 폴란드 대공 레셰크 1세에게 도주했고,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헝가리나 폴란드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레셰크 1세와 언드라시 2세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쳤다. 그러던 중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의 형제인 로만 이고레비치가 헝가리로 찾아와서 자신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로만은 곧 언드라시가 보내준 헝가리군에 힘입어 블라디미르를 추방했다. 이후 로만 이고레비치와 보야르들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 귀족 베네덱에게 군대를 맡겨 할리치나로 파견했다. 베네덱은 1208년 또는 1209년에 로만 이고레비치를 사로잡았고, 언드라시 2세로부터 할리치나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베네덱이 할리치나에서 폭정을 일삼자, 로만 이고레비치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1209년 또는 1210년 초에 동맹을 맺고 베네덱을 협공해 보야르들의 호응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할리치나에서 헝가리인들을 몰아냈다. 이후 할리치나에 자리를 잡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역시 폭정을 자행하자, 보야르들은 언드라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에 망명해 있는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언드라시 2세가 다니엘을 복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키예프 루스를 헝가리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판단한 레첵 1세도 군대를 파견했다. 두 군대는 곧 다니엘을 공동으로 옹립하기로 합의하고 블라디미르를 몰아내고 다니엘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실레시아 귀족들의 로비에 따라 피아스트 왕조 일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실레시아의 미에슈코를 폴란드 대공으로 삼으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었기에 그 해 7월에 보르지코바에서 공작과 귀족들도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레셰크 1세, 콘라트 1세, 교황에 의해 대공으로 추천받은 미에슈코의 아들 카지미에시, 헨리크 1세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군주가 사망한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는 특권을 완전히 포기할 테니 교령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때, 교황에 의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된 미에슈코는 바벨로 들어가서 대공을 칭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1211년 5월에 미에슈코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방문한 사절단은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한다는 확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헨리크 1세는 루부슈 공작에 선임되었다.
1214년, 할리치나에서 보야르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몰아내고 브와디스와프 코르밀리치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레셰크 1세는 폴란드로 망명한 다니엘을 복위시키기 위해 할리치나를 침공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언드라시 2세는 아예 자기 아들 칼만을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1214년 가을 레셰크 1세와 협상한 끝에 레셰크 1세의 딸 살로메아와 칼만을 결혼시키고 서부 갈리시아의 두 도시인 프셰미실과 루바초프를 폴란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할리치나의 공작에 칼만을 선출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1214년 말 브와디스와프 코르밀리치를 축출하고 칼만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옹립했다.
할리치나 문제가 매듭지어진 뒤, 레셰크 1세는 프로이센 방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초기에는 교역로를 통해 선교자들을 파견해서 프로이센인들을 개종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1222년 프로이센을 향한 십자군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원정은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도중에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인들이 국경지대를 침범해오자, 그는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기사 근위대(stróże rycerskie)를 창설하기로 하고 모든 영지의 기사들이 여기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1224년 프로이센인들이 국경을 습격했을 때, 이를 막아야 했던 기사 근위대가 뿔뿔이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이에 분노해 적에게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 근위대 지휘관을 추방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은 폴란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리피치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리피치 가문은 이에 반감을 품고 1225년 루부츠의 헨리크를 폴란드 대공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마침 레셰크 1세가 루사티아인들의 국경 습격을 저지하기 위해 동진하자, 헨리크는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 인근으로 진군했다. 그때 튀링겐 변경백이 예기치 않게 루부츠를 침공하자, 헨리크는 본거지가 털리는 것을 막기 위해 회군했다. 레셰크는 동생 콘라트와 함께 맹렬히 추격했고, 드우브니아 강 유역에서 헨리크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유혈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양자는 협상 끝에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1227년, 대폴란드의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가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내전에서 밀린 끝에 레셰크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레셰크 1세는 이 기회에 아들이 없는 브와디스와프 3세로부터 대폴란드를 상속받기로 마음먹고 중재에 나섰다. 마침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의 지원이 끊어져서 내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도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해 11월, 그는 대폴란드 국경지대에 있는 고싸바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레셰크 1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헨리크,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참석했다. 그런데 이 회담 결과에 관심이 가장 많았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싸바에서 암살당한 레셰크 1세>, 얀 알로이지 마테이코(Jan Alojzy Matejko, 1838 ~ 1893) 작.
1227년 11월 24일 아침, 그날 열릴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목욕을 하던 공작들은 암살자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 헨리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충직한 기사인 비젠부르크의 페레그리누스가 자기 몸으로 가려서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반면에 레셰크 1세는 반쯤 발가벗은 채 말을 타고 마르싱코보 마을로 달아났지만,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피살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로부터 포메라니아를 독립시키기 위해 암살했다고 밝혔다. 반면 후대의 여러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암살을 주도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레셰크 1세 암살 사건은 폴란드의 모든 공작들을 통제했던 폴란드 대공의 권위를 급격하게 약화시켰고, 크라쿠프와 소폴란드는 대공이 군림하는 곳이 아닌 폴란드의 세력 다툼에 휘말린 또다른 봉건 지역으로 전락했다. 이후 통합된 국가로서의 폴란드는 14세기에 브와디스와프 1세가 등장할 때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3. 가족
- 루츠크의 그지미스와바(1185년에서 1195년 사이 ~ 1258): 루츠크 공작 잉와르 야로스와비츠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