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미 해군 구축함에 대한 내용은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3458><colcolor=#fff> 미합중국 제32대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Raymond Sprua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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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이먼드 에임스 스프루언스 Raymond Ames Sprua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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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6년 7월 3일 | ||
메릴랜드 볼티모어 | |||
사망 | 1969년 12월 13일 (향년 83세) | ||
캘리포니아 버블 비치 | |||
묘소 | 골든게이트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32대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 ||
1945년 11월 24일 ~ 1946년 2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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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58><colcolor=#fff>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
1907년 ~ 1948년 |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해군) | ||
주요 보직 |
제5함대 사령관 미국 해군대학교장 필리핀 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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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 해 해전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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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육군수훈근무훈장 해군십자장 해군수훈근무훈장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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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대장. 미드웨이와 필리핀 해의 승장으로 유명하다. 한때 미국 해군이 운용했던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계산이 빠르고 촉이 좋던 두뇌형 명장이다. 정확한 계산과 판단으로 일본 해군을 여러 차례 엿먹였다. 손해볼 일은 피하고 이기는 게임만 하려는 자세로 미군에게 여러번 큰 이득을 줬다. 그는 앞선 전투들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유인계로 손해를 만회하려 덫을 놓아도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혜롭게 전투를 회피해 결국 일본군이 만회는 못하고 계속 엄청난 손해만 보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정치질에는 소질이 없었던 탓에 홀시 제독처럼 언플과 인맥관리는 잘 못했다. 게다가 부하들이 공적을 과도하게 부풀린다는 편견 때문에 그들의 업적을 심하게 깎아 내리는 등 자기 편을 많이 만들기는 힘들었다. 확률이 낮은 게임을 피하는 성격상 항공모함을 추격하지 않고 보내줬다가 미국 내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인 일도 있다.[1] 그 때문인지 눈부신 전공에도 5성 제독을 달지 못했으며[2] 생전에는 업적에 비해 다소 저평가됐다. 현재 그는 태평양 전쟁 최고의 제독으로 점차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태평양 전쟁 동안 일선에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했던 제독들은 대개 전간기에 조종사 교육을 받고 해군 항공 특기로 빠졌던 소위 '개척자'들이었다. 하지만 스프루언스는 구축함, 전함 함장을 거쳐 제독으로 승진한 이후에는 윌리엄 홀시 제독 휘하에서 소장 계급을 달고 순양전대장을 맡았던 정통파 수상함대 사령관 출신이었다.그런 스프루언스 제독이 태평양 함대의 핵심 인물로 대두된 시기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전함 전력을 모조리 상실한 태평양 함대의 주력은 항공모함 위주로 편성된 태스크 포스였고 이 부대를 총괄하던 인물이 바로 홀시 중장이었다. 하지만 우연히도 홀시 제독이 대상포진으로 입원을 하게 되는 바람에 전투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스프루언스가 홀시의 후임으로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항공모함 부대 TF 16의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비록 항공 쪽 출신이 아니라는 약점이 있긴 했으나 오랜 기간 홀시의 휘하에서 순양전대장으로 근무했고, 기존 홀시의 참모진과도 손발을 맞춘 경력 덕분에 추천을 받은 것.
미드웨이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군 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사실 스프루언스는 TF 16을 지휘한 하위 제대의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스프루언스가 지휘한 TF 16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함대의 핵심 전력이었다. 실제 미드웨이에 투입된 미군 요격 부대는 스프루언스의 선임자였던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지휘했다. 미드웨이 해전 중 플레처 제독은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프루언스에게 휘하 부대를 분리시키도록 지시했고, 이후 요크타운이 피격당하여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자 사실상 작전의 지휘권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넘겨줬다. 요크타운이 격침되어가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건재한 상황에서 플레처 제독은 아직 멀쩡한 두 항모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스프루언스가 남은 전투에서 보다 적임자임을 인정하고 사실상 모든 지휘권을 스프루언스에게 위임하는 훌륭한 행동을 취했다. 그래서 미드웨이 해전 후반부에는 사실상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 함대를 지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드웨이 전투가 끝난 후에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 함대 참모장으로 지명하면서 잠시 함대 지휘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종합적인 근무 평가를 통해 중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이 1943년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전투 부대를 총망라해 5함대를 편성하면서 초대 사령관으로 지명받아 다시 함대 지휘관으로 일선에 복귀했다. 이후 필리핀 상륙 작전 직전까지 일본함대를 상대로 굵직한 공적을 세우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를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엄청난 승전을 거둔다.
1944년부터 미 해군은 3함대 사령관 홀시 제독과 1년마다 교대로 함대를 지휘하는 독특한 정책을 세웠다. 함대 사령관과 참모진은 둘인데 함대는 하나였기 때문. 그래서 잠시 진주만으로 복귀하여 휴식을 취했고, 일본 본토 침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다시 함대 지휘를 맡았다. 이 시기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지휘했으며 전함 야마토급 전함을 격침시키는 실적을 올렸다.
종전 후에는 주일 미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1945년 9월 15일 와키야마에 도착하여 17일에 요코하마로 넘어가 본국으로 귀국하는 홀시를 환송했다. 11월에 제5함대 사령관 지위를 존 H. 타워스 중장에게 넘긴 스프루언스는 니미츠의 후임으로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2월에 홀시는 2차대전 참전 제독들 중 네 번째이자 현재까지 최후의 미 해군 원수가 되었지만 스프루언스는 홀시의 후원자였던 칼 빈슨 하원의원의 압력으로 원수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 대신 죽을 때까지 해군 대장의 급여를 온전히 지급받는 특례를 인정받았다.[3]
두 달 후에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서 물러난 스프루언스는 1946년 2월 1일부터 해군대학의 교장으로 재임하다 1948년 7월 1일에 퇴역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페블 비치에서 아내와 함께 은퇴 생활을 즐겼지만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지명으로 1952년 1월에 필리핀 대사로 임명되어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원래 1953년에 임기를 마쳤으나 다시 차기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유임시켰기에 1955년까지 대사직을 수행했다.
이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다시 은퇴 생활을 즐기던 스프루언스는 1966년에 탈장과 백내장에 시달리다가 동맥경화증이 악화되었다. 1969년에는 장남 에드워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4] 정신적으로 이상을 느끼는 지적인지증까지 시달리던 스프루언스는 1969년 12월 13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해군에 의해 장례가 진행되어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국립묘지에 니미츠, 터너, 록우드 제독의 묘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5]
3. 평가
사실 태평양 전쟁 내내 미 해군 내에서 평가가 좋지 못했던 제독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을 박살냈음에도 밤에 계속 도망만 쳤다는 점, 마리아나 해협에서 일본 해군 함대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고 오로지 적기 요격에만 전념했다는 점으로 인해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요격에 전념하여 일본 함재기 세력은 전멸시키고 잠수함으로 일본의 정규 항모 2척을 격침시켰지만, 그 외 대부분의 주력함은 살려 보냈기 때문에 비판받았다. 당장 "항공 쪽 경험도 없는 놈이 지휘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을 골로 보낼 기회를 번번이 무산시켰다."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 윌리엄 홀시와 달리 원수 계급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미국 정부가 스프루언스를 승진시키려고 해도 미국 의회에서 제동을 걸어서 결국 연금이나 기타 예전 등을 원수급에 맞추는 꼼수를 쓴 것도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후 일본 측 자료를 열람한 결과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이 매번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미드웨이와 마리아나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야간전을 시도하거나,[8] 미 해군이 쫒아오면 매복했다가 요격할 태세[9]를 갖추었지만 스프루언스가 전혀 넘어가지 않아[10] 그냥 무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군의 의도에 그대로 호응했다면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나마 겨우 남은 항모 부대가 일본군의 전함에게 도륙당해[11] 이후의 반격이 불투명해졌을 것이며, 필리핀 해 해전은 레이테 만 해전에 맞먹는 난타전이 되면서 미군의 피해도 만만찮았을 테고 최악의 경우, 사이판 상륙 및 괌 탈환 작전 자체가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전후에는 전술적인 식견이 아주 높은 인물이란 재평가를 받았지만, 이 재평가가 이뤄질 때엔 스프루언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스프루언스 제독이 항상 정확한 결정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셜 제도 상륙작전(부싯돌 작전)에서 니미츠 제독은 마셜 제도의 주요 일본군 기지가 있는 콰잘린, 윗제, 말로에라프, 잴루잇, 밀리 환초 중 외곽의 기지들을 지나쳐 콰잘린 환초를 기습점령한 뒤 콰잘린 환초의 비행장을 기점으로 나머지 환초의 보급선을 끊고 말려죽인다는 매우 과감한 전략을 입안했다. 휘하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5함대 사령관), 리치먼드 켈리 터너 제독(상륙함대 지휘관), 해병대 홀랜드 스미스 장군(상륙부대 지휘관) 등은 이 작전안이 너무 위험하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작전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니미츠 제독을 설득해 보려고 했으나 요지부동이었고 니미츠 제독에게는 세 장성을 모두 해임해 버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므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사는 니미츠 제독이 옳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콰잘린 환초를 점령함으로서 마셜 제도 전체를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니미츠 제독도 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서 스프루언스 제독에 비해 손색이 없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한 사례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불패의 제독'. 참전한 전투 중 아무리 전력차가 심하게 벌어졌어도 패한 전투는 한 번도 없었고, 그가 거둔 승리 또한 전과 확대에 욕심을 부리는 일 없이 성급하게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을 자제함으로써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피해를 극대화시키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탁월하다는 점 등에서 현대 해전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 스프루언스 제독과 관련된 일화
- 미드웨이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은 함재기 부대를 항공모함 상공에서 편대를 형성한 후 적을 향해 날아갈 것을 지시했다. 문제는 출격 과정에서 항공기 몇 대가 말썽을 부려 스케줄이 어긋날 것 같자 상공에 대기하지 말고 적을 찾아 날아갈 것을 지시했는데 이로 인해 항공기 편대가 어그러지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 이 때문에 뇌격기 편대는 충분한 전투기 엄호를 받지 못했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고, 급박한 당시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순차적으로 내보낸 뇌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일본군의 제로센들이 저고도로 내려와야 했고, 그 덕에 길을 잃고 헤매던 급강하폭격기들이 별 방해를 받지 않고 폭탄을 내리꽂을 수 있었다.
- 5함대 기함으로 삼은 배가, 그 유명한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이다. 중순양함을 기함으로 고른 이유는, 자신이 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 인디애나폴리스여서 그랬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기함을 성의없이 고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해전 환경은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기동함대를 짜고 기함의 기동력도 중요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함 내 공간이 넖고 방어력과 기동력이 높은 정규 고속항공모함이나 고속전함에 기함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스프루언스의 사례는 명백히 기행이다.[12] 물론 상기한 것처럼 그냥 기분으로 기함을 정한 것은 아니고, 스프루언스 본인은 기함이 언제든 필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였기에 함대 진형 내 역할이 명확히 정해져 이탈하기 어려운 전함이나 지휘부의 존재가 항공작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항공모함 대신 충분히 빠르고, 필요시 다른 곳으로 재배치되어도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으며, 혹시 적에게 당하더라도 함대의 작전 수행 자체엔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중순양함을 고른 것이라고 한다. 사실 더 큰 함급이 있어도 기함을 순양함급을 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볼 수 있는데, 구리타 턴으로 유명한 구리타 제독도 레이테 만 해전을 위해 출항할 때 기함은 중순양함이었던 것 등이 있다. 결국 카미카제로 큰 손상을 입은 인디애나폴리스를 떠나 구형전함 뉴멕시코로 기함을 옮겼는데, 여기서도 카미카제 2연타를 맞고 화재가 발생했다. 참모들은 스프루언스 제독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함내를 동분서주했는데. 찾고 보니 수병들과 함께 소방호스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기함 선정은 함대 사령관의 특권이지만 참모들을 배려해야 했기에 결국 윌리엄 홀시가 미주리로 기함으로 옮기기 전 썼던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를 기함으로 정한다. 뉴저지는 전임 홀시가 기함으로 탑승했기 때문에 사령관과 참모들을 위한 큰 선실을 2개나 마련해놓아 참모들이 기뻐했다고 한다.[13] 그리고 인디애나폴리스는 전쟁이 끝나기 전 극비 임무를 수행하다가 그만 침몰하고 만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인디애나폴리스가 수리가 완료되어 복귀한다면 또다시 기함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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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함대 사령관을 맡는 동안 휘하의 주력 부대인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TF58)는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미드웨이 전투 당시에 스프루언스 제독 밑에 있었던 인물이며, 항공모함
호넷의 함장으로 작전 수행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에 언급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나타내서 스프루언스의 신임을 확 날려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통신 불통 및 정보 전달의 미비, 휘하 비행단장과 부하들의 불화로 그의 지휘 하에 있던 호넷 항공대는 거의 공적을 세우지 못했고, 거기다 미처는 후의 전투 보고서에서 의도적으로 몇몇 사실을 누락[14]시켜 은폐하려다 걸려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찍히는 바람에 전투 일선에서 쫓겨났던 전력이 있었다. 이후 다시 니미츠 제독이 미처를 함대 사령관으로 기용하려 할 때 강력히 반발한 인물이 바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하지만 마셜 제도 공략 작전에서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환상적인 항공모함 및 해군 항공대 운용 능력을 보여주자 곧 미처 제독의 능력을 인정했다.
-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홀시 제독이 3함대를 이끌고 일본 함대의 추적에 나섰다는 소식을 접하자, "나라면 원래 위치를 지켰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었다. 필리핀 해 해전 직후라 스프루언스 제독의 평가가 좋지 못했던 관계로 다들 무시했고, 본인도 그냥 넘어가는 투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실제 홀시 제독이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의 유인에 휘말려 함대를 몽땅 이끌고 올라가는 바람에 쿠리타 제독의 수상함 부대(전함 야마토가 포함)에 미군 상륙 부대가 큰 위기에 봉착하였으며, 실제로 상륙 부대를 지원하던 호위 항공모함 한 척이 격침당했다. 다행히도 스프레이그 제독이 이끌던 호위 항모 함대가 분전한 덕분에 쿠리타 제독이 홀시의 3함대와 전투하는 줄 알고 후퇴 명령을 내림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홀시 제독도 이를 두고 '' 필리핀 해에 내가 있었고 레이테 만에 스프루언스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이란 말을 했다.[15]
-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연합군의 수많은 장군과 제독들이 일본의 항복식에 참여하였지만, 스프루언스 제독만은 수상함대를 이끌고 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는 만약 일본이 엉뚱한 생각을 품어서 좋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함대를 지휘하여 일본을 끝장내라는 의미였다. 참고로 이 지시를 내린 것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으로 불의의 사태 시에는 스프루언스가 미 태평양 해군 사령부를 인수하게 되어있었다.
- 전쟁 내내 수상함 지휘관이나 전투기 조종사들이 자신에 세운 전과보다 훨씬 더 뻥튀기를 한다는 미명 하에 전과를 대폭 깎아서 보고를 올린 인물로 유명하다. 물론 이런 조치는 병력의 사기를 떨어뜨리지만 일본군처럼 스스로를 대전과를 기록했다고 속여서 전략 수립에 엄청난 오류를 저지르는 함정을 피할 수 있다는 면에서 바람직하다. 그 때문에 전후 일본 측 자료를 열람하게 되었을 때, 다른 장군이나 제독들과는 달리 전과가 훨씬 상향 조정되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미처 제독 또한 이런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스프루언스만큼 공적을 막 깎지는 못했다.
- 높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끝내 해군 원수 계급을 달지 못했는데, 이는 윌리엄 홀시의 정치적 지지자였던 하원의원 칼 빈슨이 번번히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스프루언스급은 구축함인데, 칼 빈슨은 니미츠급 항공모함 3번함(CVN-70)이었다. 빈슨의 반대로 인해 원수 진급을 승인하지 못했지만,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원수 계급의 연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의회가 육군과의 밸런스를 고려하여 원수 승진의 정원을 4명으로 제한했기에 홀시와 스프루언스 둘 중 한 명만 원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스프루언스 본인은 “나와 홀시 둘 다 원수 계급을 다는 것이면 몰라도 홀시에게 돌아갈 원수 자리를 뺏는 것이라면 내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다”라며 옛 상관 홀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프루언스급이 전부 퇴역한 이후로는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에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알레이 버크 제독은 위에 언급한 미처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인물이다.
- 스프루언스 제독은 자신의 능력만큼이나 겸손한 성격이었다. 한번은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에게 스스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 뭔가 깊은 전략 전술적 심사숙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난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을 때가 많다." 그의 겸손한 면모는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한 번은 타임지 표지에 자신의 사진이 실렸고[16] 이것을 부관이 자신의 책상 위에 두고 가자, 이 타임지의 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뒤집은 채 자신의 캐비닛에 집어넣고 캐비닛 문을 잠가버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졌다는 장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서전을 써대던 와중에도, 스프루언스는 단 한 줄의 회고도 남기지 않았다. 생도 시절 애너폴리스 미국해군사관학교 기록부에도 "부끄러움을 타는 성향이며 침착하고 순수"한 성격이라는 평가가 실린 걸 볼 때 천성이었던 모양.
- 스프루언스 제독이 은퇴하고 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은 정원과 온실 다듬기었다. 오래된 카키색 잠바와 작업화를 신고서 정원을 가꾸었다. 자신이 직접 꾸민 정원에 애착이 강했는지 집을 방문하는 손님에게 항상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 기묘할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다. 옆에 있는 게 누구든, 장소가 어디든, 시기가 어디든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맨 위의 저 표정이다. 그저 눈동자 위치만 바뀔 뿐이다.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도통 모를 사람이라는 게 주변인들의 평이기도 했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고도 입을 다물고 있거나 적에게 속아 넘어간 부하를 보고도 말리지 않는 등 속이 시커먼 듯한 모습도 보여줬지만 반대로 부하들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자신을 뭐라고 비난하든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않는 등 흡사 생불 같은 모습도 보여 주었으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태평양 함대 사령관까지 오르고도 "아... 난 교장일 하고 싶었어."하고 두 달 만에 자리를 옮기는 등 여러모로 복잡한 인물이다.[17][18] 영화 미드웨이에서도 짧은 장면들에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다. 승전 후 추격을 제안하는 참모들의 의견을 칼같이 끊어 버리는 것도 실제와 같다.
- 태평양 전쟁 내내 탁월한 전술적, 작전술적 안목을 보여줬지만, 전후 미 해군의 역할에 관해서는 적극적 해외 개입을 꺼리고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의 방어로 한정짓는 고립주의에 가까운 견해를 갖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 주류의 시각이나 대중적 여론, 그리고 실제 역사의 흐름과는 정 반대였다. 최고 수준의 함대사령관이지만 대전략 차원에서는 조금 의문부호가 붙는다는 평가의 원인. 물론 대전기간 내내 일선 함대사령관에 머물렀던 스프루언스 제독에게는 큰 단점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전략적 식견은 워싱턴에 있는 합동참모회의 의원( 윌리엄 리히, 조지 C. 마셜, 어니스트 킹, 헨리 아놀드 등)들이 충분히 채워줬기 때문이다.
-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술도 아주 조금만 마셨다. 대신 핫초콜릿과 교향곡, 체력단련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술담배를 즐기고 운동과 담을 쌓았던 동세대의 다른 제독들과는 상반된 점이다.[19] 이를 두고 홀시는 "술담배 안하는 전사는 신뢰가 안 가던데(I never trust a fighting man who doesnt smoke or drink.)."라고 놀리기도 했다.[20][21]
-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국 대통령이던 당시 초급 장교였던 스프루언스는 미국
해군력과 열강의 강대함을 전세계의 자랑하기 위해 조직된
대백색함대 중 미네소타함에 속해 일본을 방문한적 있는데 이 때 당시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의 주역이자 일본제국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를 축하연에서 만났던 경험이 있다.
[1]
단, 현대의 평가에 따르면 일본군은 당시 퇴각하는 척 하면서 잔여 함대들을 배치해 두고 재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스프루언스의 판단이 미국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일본의 손실을 극대화하는 가장 정확한 판단이었다.
[2]
그를 싫어하던 칼 빈슨 상원의원이 작심하고 훼방을 놨다고 한다. 칼 빈슨은 홀시의 정치적 후원자기도 했다.
[3]
구글링으로 알게된 내용엔 특례 대상자는 스프루언스 외에도 육군의 오마 브래들리와 공군의 칼 스파츠, 해병대의 알렉산더 밴디그리프트 장군, 해안 경비대의 러셀 웨쉐 제독으로 미국 의회에서 군종별 4성 장성 중 각 1명씩 선정해서 그들의 전시 대장 계급을 정규 계급으로 인정해주고 퇴역 후에도 현역 급여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게한 미국 의회 제80회 회기의 제791번 공법안에 근거한다. 다만 오마 브래들리는 이후에 원수 계급장을 받았다.
[4]
아들또한 2차대전 당시 해군장교로 복무하였고
발라오급 잠수함 USS Lionfish 함장으로 근무했었다. 적지않은 전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5]
태평양 전쟁을 같이 이끌어온 이 네명은 살아있을때 "죽어서는 서로의 옆에 묻히자"고 약속을 했었고, 이 약속이 이행된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말할 것도 없이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이었고, 나머지 세 제독은 니미츠 휘하의 태평양함대에서 각각 수상작전(스프루언스), 상륙작전(터너), 잠수함작전(록우드)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개인적인 친분도 두터운 사이였다.
[6]
킹은 스프루언스를 해군에서 가장 똑똑한(intelligent) 장교로 평했다. Wayne P. Hughes Jr., Naval War College Review, Volume 62 Number 4 Autumn,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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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킹은 자존심이 세고 건방진 성격파탄자로 유명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편이었는데 그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한 인물 중 하나가 스프루언스였다. 니미츠와 더불어서 스프루언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적극 비호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스프루언스에게 항공모함을 놓쳤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킹은 스프루언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프루언스, 자네는 (필리핀해 해전에서) 존나 잘했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자네의 판단이 정확했네."(Spruance, you did a damn fine job there. No matter what other people tell you, your decision was cor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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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항공전에서의 대패 후 전함을 동원해서 포격전을 하려고 미 함대를 밤새 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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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해 해전 당시, 일본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오자와 지사부로는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미군 항모 부대를 대비한 미끼로 함대의 일부를 전방에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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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에서는 밤 동안에 일본 함대를 쫓지 않고 되려 거리를 벌리며 도망갔고, 마리아나에서는 작정하고 수비에만 전념하여 일본군이 기껏 던져둔 미끼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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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아직 미국 함선에 고성능 수상레이더가 본격화되지 못했고 전력도 일본에 비해서 나은 것이 없던 상황에서 일본 해군 최강의 조함 및 수뢰전 전문가인 나구모가 지휘하는 야간 어뢰전에라도 휘말렸다가는 사보섬 해전 시즌2가 되어서 기껏 항모를 잡아서 얻은 이득을 모두 토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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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포틀랜드급 중순양함은 건조 당시부터 함대
기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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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함대 참모장의 침실은 하필이면 연돌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한낮이면 온도가 무려 38도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 참모장이 매우 고역을 치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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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위의 비행단장을 상당히 신임했었기 때문에 쉴드 쳐 주려고 은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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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리핀 해에서도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문제다. 필리핀 해에서도 기동부대가 상륙 전단을 엄호하고 있었는데 스프루언스 제독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당시 기동부대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상륙 전단의 엄호지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 격멸하는 것은 아니었다. 홀시 제독의 공격 정신은 인정할 만 하지만 그로 인해 주 임무와 상황이 받쳐주면 노려볼만한 부차적인 목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단적인 사례가 레이테 만 해전이었고 필리핀에서도 공격에 나섰다면 그에 대비 중이던 오자와 제독의 방공망에 걸려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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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나 지금이나 타임지 표지에 실린다는 건 해당 인물이 유명세와 영향력을 동시에 가졌다는 의미이다. 부정적인 일로 실린 게 아니라면 개인에게 있어서는 큰 영예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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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프루언스 제독은 폭뢰를 함미에 떨궈버렸다는 보고를 받고서 한 말이 "흠. 그럼 그거 주워서 원래 있던 곳에 다시 집어넣지?"라고 명령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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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걸로는 미드웨이 해전 때 밤동안 일본 함대를 피해 움직일 때 미상의 함대 발견 보고를 듣고는 "확인 후 이상 없으면 원래 항로로 변침하도록"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자러 갔다.
[19]
Robert Gandt, The Twilight Warrior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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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발언은 '나는 흡연이나 음주를 안하고 싸우는 남자는 절대 신뢰 안한다'는 뜻이다. 듣기에 따라 좀 예의없는 발언 같은 느낌은 있다. 다만 스프루언스와 홀시가 갈등했다는 특별한 증거는 없다. 농담을 좋아하던 홀시가 악의없이 던진 말로 보는게 적절할 것이다. 사실 술담배를 해야 사교계에 낄 수 있는 시대에서 능력만으로 장성들에게 얼굴을 알린 건 대단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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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시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스프루언스와 안 좋게 비교되는 모습도 여러 번 나타냈다. 일례로 니미츠가 보낸 메시지를 과대해석해 울부짖고 욕설하다 부하에게 한소리 들은 일은 유명하다. 과달카날에서 적의 유인책에 당해 함대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수많은 함조원을 태풍에 전진시켜 막대한 사망자를 내고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전후 각종 TV 쇼에서는 과거 실책들을 해명하면서 동료들을 멋대로 언급하는 등 구설수가 많았다. 이런 점이 스프루언스의 진중함과 비교되는 경우가 꽤 있다. 물론 스프루언스도 부하들의 전공을 마구 깎는 등 결점이 없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