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22:09:18

뜨득 황제

뜨득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ccc02, #FAFA00 20%, #FAFA00 80%, #cccc02); color: #DD1E1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DD1E1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세조 성조 헌조 익종
<rowcolor=#DD1E1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공종 협화제 간종 함의제
<rowcolor=#DD1E1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경종 성태제 유신제 홍종
<rowcolor=#DD1E1F> 제13대
보대제
조조 · 태조 · 희종 · 신종 · 태종
영종 · 현종 · 숙종 · 세종 · 예종 · 흥조
}}}}}}}}}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응우옌 왕조 제4대 황제
뜨득 황제
嗣德帝 | Tự Đức
파일:익종 사덕제.jpg
출생 1829년 9월 22일
대월 응우옌 왕조 후에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사망 1883년 7월 19일 (향년 53세)
대월 응우옌 왕조 후에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능묘 겸릉(謙陵)
재위기간 제4대 황제
1847년 11월 5일 ~ 1883년 7월 19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푹홍남(Phúc Hồng Nhậm, 福洪任/복홍임)
→ 푹티(Phúc Thì, 福時/복시)
부모 부황 헌조 장황제
모후 의천장황후
형제자매 35남 29녀 중 차남
배우자 여천영황후 외
자녀 양자 3남
신장 153cm
묘호 성조(成祖) → 익종(翼宗)
시호 계천형운지성달효체건돈인겸공명략예문영황제
(繼天亨運至誠達孝體健敦仁謙恭明略睿文英皇帝)
연호 뜨득(Tự Đức, 嗣德/사덕, 1847년 ~ 1883년)
}}}}}}}}} ||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응우옌 왕조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익종(翼宗). 시호는 계천형운지성달효체건돈인겸공명약예문영황제(繼天亨運至誠達孝體健敦仁謙恭明略睿文英皇帝). 즉위 전 이름은 완복홍임([ruby(Nguyễn Phúc Hồng Nhậm, ruby= 阮 福 洪 任)])이었으나, 즉위 한 후에는 휘를 완복시(完福時)로 고쳤다. 헌조(憲祖)의 아들이다. 원래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지만, 형을 제치고 황제가 되었다.

2. 생애

1847년, 아버지 소치제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사덕제는 쇄국정치를 펼쳤으며 유교를 진흥하고, 서구 가톨릭 유입에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이와는 별개로 쯔놈으로 쓰인 역사책 대남국사연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1858년, 가톨릭 신자가 늘어나자 외국인 선교사와 신도들을 처형하는 등 박해를 가하였는데,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침공하였다. 사덕제는 청나라의 지원으로 프랑스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1882년, 사덕제는 프랑스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1883년, 사덕제는 5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죽기 전에 건설한 흐엉 강의 상류 지역에 있는 능에 묻혔다. 사덕제가 성불구자[1]라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조카인 완복응진(阮福膺禛)이 뒤를 이었다.

3. 여담

후에에 사덕제의 릉이 남아있는데, 그가 직접 무덤을 조성[2]하고 정무를 후에 황궁이 아닌 이곳에서 봤기 때문에 웅장한 궁궐이나 사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 가운데 가장 재위기간이 길다. 긴 재위기간 동안에 외세에 의해 나라가 잠식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고종과 유사점이 있다. 사덕제는 외세에 완고한 거부를 보였으며, 이는 프랑스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계속적으로 빚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 어릴 때 앓았던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됐을거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2] 아들이 없었기에 원래 태자가 쓰는 것이 관례인 공덕비의 문구도 자신이 직접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