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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22:02:33

응우옌호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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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씨 정권 초대 제후
응우옌호앙
阮潢 | Nguyễn Hoàng
파일:완황(태조).jpg
출생 1525년 8월 28일
대월 후 레 왕조 청화성
(現 베트남 타인호아성)
사망 1613년 7월 20일 (향년 88세)
대월 후 레 왕조 탕롱
(現 베트남 하노이시)
능묘 장기릉(長基陵)
재위기간 완주 초대 제후왕
1558년 11월 ~ 1613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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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호앙(Hoàng, 潢/황)
부모 부황 조조 정황제
모후 정황후 응우옌씨
형제자매 2남 1녀 중 차남
배우자 가유황후, 단국태부인, 명덕왕태비
자녀 10남 12녀
작호 하계후(夏溪侯) → 단국공(端國公)
존호 선주(仙主)
묘호 열조(烈祖) → 태조(太祖)
시호
1613년 추증 [ 펼치기 · 접기 ]
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왕
(謹義達理顯應昭祐耀靈嘉裕王)
1744년 추증 [ 펼치기 · 접기 ]
조기수통흠명공의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태왕
(肇基垂統欽明恭懿謹義達理顯應昭祐耀靈嘉裕太王)
1806년 추증 [ 펼치기 · 접기 ]
조기수통흠명공의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황제
(肇基垂統欽明恭懿謹義達理顯應昭佑耀靈嘉裕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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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후 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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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응우옌씨 정권의 제1대 국왕. 1대로 표기한 이유는 완황의 아버지인 완감(조조)이 이미 기반을 만들었고, 사실상 초대(初代) 군주이기에 초대와 1대로 나누어서 표기하였다. 후여조가 그에게 내린 작호는 단국공(端國公)이며, 정검에 의해서 위험한 변방 지대의 책임자로 임명받았으나 오히려 그곳에서 힘을 키울수 있었고, 완주를 건국하여 정주(鄭主)와 대립하는 약 200년의 시기인 남북국시대를 개막하였다.

2. 생애

그의 아버지는 완감으로 완감은 자신의 사위인 정검과 함께 막등용에 의해 멸망한 후여조 부흥운동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완감은 소종(昭宗)의 아들인 여녕(黎寧)을 추대하여 새로운 후여조의 황제가 되게 하였다가 1545년 양집일(楊執一)[1]에 의해 독살당하자 그의 첫째 아들 응우옌우옹(阮汪)이 좌승상(左丞相)을, 사위인 찐끼엠이 우승상(右丞相)을 맡았다. 동시에 응우옌호앙은 하계후(夏溪侯)로 봉해졌다. 그런데 찐끼엠이 병권을 장악하고 응우옌우옹을 죽인 뒤 정사를 혼자 좌지우지하자 응우옌호앙은 매우 불안해져 응우옌으지와 함께 칭병하고 다시는 조정에 나오지 안았다.

완황은 상단의 일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완황은 전투에서 공도 세웠고, 형도 이미 죽었기에 자신이 후계자라 굳게 믿었다. 그렇게 완황과 정검은 겉으로는 후여조 부흥에 힘썼으나 속으로는 권력을 두고 다투게 되었다. 그리고 후여조가 건국된 후 후여조의 실권은 점점 정씨의 정검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정주의 정검은 명목상으로는 황제(皇帝) 아래의 왕(王), 그러니까 신하를 칭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자는 바로 정주였다. 이런 정주의 형태는 당연히 일부 세력에게 불만을 사게 되었으며 완황 역시 이러한 세력중 하나였다.

응우옌호앙은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사람을 응우옌빈키엠에게 보내 방법을 묻게 하였다. 응우옌빈키엠은
횡산(橫山) 일대가 만대토록 몸을 의탁할 만합니다.

라고 하면서 남방에서 근거지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응우옌호앙은 매우 그렇다고 여겨 누나이자 찐끼엠의 아내인 응우옌티응옥바오(阮氏玉寶)를 통해 찐끼엠에게 투언호아(順化)를 진수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완황은 정주보다 병력과 힘이 밀렸기에 당분간은 정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가 힘을 키우려고 했다. 그런데 정검 역시 처남을 정치 중심지와 멀리 떨어진 위험한 변경 지대로부터 보내 버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완황은 1558년 변경 지역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힘을 키웠다. 이렇게 두 정권은 송 강을 국경으로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약 200년간의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완황도 왕(王)이 되었다.

해당 지역 사람들은 그를 선주(僊主)로 칭하였으며 응우옌호앙은 비록 투언호아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후 레 왕조의 조정에 충성을 표시하였고, 병사를 보내 찐끼엠이 막 왕조를 공격하는 것을 돕게 하였다. 또한 두 차례 병사를 이끌고 입조하여 황제를 알현하였다.

1593년 4월, 세종 탕롱으로 환도하였다. 5월, 응우옌호앙이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은 그를 중군도독부(中軍都督府) 좌도독(左都督), 장부사(掌府事), 태위(太尉), 단국공(端國公)으로 진봉시켰다. 그리고 1650년부터 투언호아로 돌아갔을때를 기점으로 응우옌 주는 다시 탕롱으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지 않았다.

1604년, 순화광남이처(順化廣南二處)의 행정 구역을 다시 구획하여 6부(府) 22현(縣)으로 나누었다.

1611년, 처음으로 부안부(富安府)를 설치하였고, 동춘(同春), 수화(綏和) 2현을 설립하였다.

1613년 7월 20일, 사망하니 향년 88세였다. 경종은 그에게 근의공(謹義公)을 추증하였다. 응우옌푹응우옌 시호를 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왕(謹義達理顯應昭祐耀靈嘉裕王)이라고 하였다.

3. 사후 시호

1744년 5월 23일, 응우옌푹코앗이 정식으로 왕을 칭하고 응우옌호앙의 시호를 고쳐 조기수통흠명공의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태왕(肇基垂統欽明恭懿謹義達理顯應昭祐耀靈嘉裕太王)이라 하였고, 묘호를 열조(烈祖)로 하였다.

1806년 7월 23일, 가륭제가 묘호를 태조(太祖), 시호를 조기수통흠명공의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황제(肇基垂統欽明恭懿謹義達理顯應昭祐耀靈嘉裕皇帝)로 추존하였다. 능호를 장기릉(陵長基)이라 하였다.

응우옌호앙은 응우옌 주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보편적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또한 응우옌 주와 일본 간의 긴밀한 관계를 시작하였다. 일찍이 일본의 상인인 후나모토 아키사다(船本顯定彌七郞)를 양자로 거두기도 하였다.


[1] 막조의 장군으로 부흥운동 세력에게 거짓 항복을 하고 완감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