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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13:44:56

독일 춤과 오락 악단

독일어: Deutsches Tanz- und Unterhaltungsorchester
영어: German Dance and Entertainment Orchestra

1. 개요2. 창단 동기3. 창단과 활동4. 전후의 평가

1. 개요

나치 독일 시기에 있던 재즈 빅 밴드 비슷한 단체.

2. 창단 동기

원래 나치는 재즈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방관적이기는 커녕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애당초 나치즘이라는 사상이 인종차별을 밑밥으로 깐 것이었기 때문에 재즈와 블루스는 '열등한 흑인으로부터 유래된 음악' 이었고, '속된 장단과 가락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저질의 소음' 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나치는 집권 초기에 재즈를 유대인, 사회주의 성향의 작곡가들이 쓴 작품과 함께 말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히틀러 독일 총리로 실권을 잡은 지 2년 뒤인 1935년 10월에 괴벨스의 부하였던 나치 선전성 방송 담당관 오이겐 하다모프스키[1]는 독일의 모든 방송국에서 재즈 방송을 금지시켰고, 재즈의 퇴폐성을 부각시키는 선전 방송을 계속 내보냈다.

비록 이 조치는 올림픽 때문에 한시적으로 완화되기도 했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그런 거 없었다. 1938년에 뒤셀도르프에서 개최한 '퇴폐음악(Entartete Musik)' 이라는 전시회에서도 재즈를 엄청나게 깠는데, 아예 포스터부터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흑인이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비드의 별을 가슴에 달고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디자인되었다.

파일:Entartete_musik_poster.jpg
이런 식으로.

하지만 비슷한 취지로 먼저 개최한 퇴폐미술 전시회와 달리, 퇴폐음악 전시회는 나치의 높으신 분들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 애당초 흑인=유대인이라는 공식 자체가 억지 중의 억지였을 뿐 아니라 없는 건 아닌데, 퇴폐음악의 아이콘으로 내세운 색소폰(Sax+o+phone)이라는 악기는 본래 벨기에의 악기 제작자 아돌프 작스(Adolf Sax)가 개발한 '아리아적 악기' 였기 때문에 색소폰 제조 업자들이 '퇴폐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를 만든다고 뜬금없이 까이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 선전성의 음악 전문가들은 재즈 방송을 금지했음에도 여전히 독일인들의 재즈 선호도가 높았기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1939년에 독일군 폴란드 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자, 독일 선전성은 재즈 통제 문제로 더 골치아픈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선전성은 적국의 라디오 방송 청취를 금하고 발각될 시 사형까지 가능한 엄한 처벌을 가했지만, 여전히 많은 독일인들이 몰래 적국 방송을 청취했고 그 과정에서 방송을 타고 나오던 재즈의 인기도 계속 유지되었다.

3. 창단과 활동

결국 나치의 선전 전문가들도 재즈를 완전히 금지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 대신 미국식 빅 밴드에 현악 앙상블을 더해 재즈의 리듬을 죽이고 스윙감도 약화시킨 형태의 밴드를 계속 정책적으로 밀어주는 방식으로 물타기를 시도했다. 1941년 10월에 괴벨스는 영화음악과 가요 작곡가였던 프란츠 그로테에게 이러한 형태의 38인조 대규모 밴드를 조직해줄 것을 의뢰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악단이 이 독일 춤과 오락 악단이었다.

괴벨스는 이 악단을 여타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들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같은 클래식 관현악단과 같은 위상으로 올려놓으려고 했고, 이 때문에 단원들도 주로 독일 국적의 순혈 아리아인 음악가로 엄선했다. 다른 독일 재즈 밴드들이 외국인 음악가들-물론 이들도 순혈 아리아인이라는 전제 하에-을 적극 영입했던 것과는 반대의 행보였고, 실제로 창단 당시의 악단 단원 중 외국인은 불과 네덜란드인 한 명-트럼페터 헨리크 '헹크' 브뤼인스-뿐이었다.

새로 조직된 이 악단은 제국방송(Reichs-Rundfunk-Gesellschaft)의 휘하 단체로 편입되었고, 그로테와 게오르크 헨셸이 공동 지휘자를, 호르스트 쿠드리츠키가 부지휘자를 맡았다. 1942년 7월 부터는 베를린의 마주렌알레에 있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매주 새로운 곡들을 준비해 방송용 녹음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다만 상업용 음반 제작은 전쟁 중에 물자 절약을 이유로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로 제국 방송국들의 방송 전용으로만 소량 제작되었다. 녹음 제작 외에는 가끔 공개 무대에서 공연도 했지만, 매우 드물었고 주 활동은 방송녹음이었다.

이 악단의 레퍼토리는 주로 독일 작곡가들, 그 중에서도 순혈 아리아인의 가요나 오페레타, 레뷰 같은 무대 작품, 영화음악의 히트 넘버에서 고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다른 밴드도 가능한한 '재즈색을 죽인다는 조건으로' 외국인 작곡가-심지어 적국인 영국이나 미국 작곡가까지도-의 곡을 골라 연주할 수 있었지만, 이 악단은 아예 '새로운 독일의 무도음악'을 취지로 삼은 만큼 외국곡을 가능한한 배제한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물론 당시 같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라든가 중립국이기는 했지만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 작곡가의 작품 연주는 허락되었다. 또 점령국 작곡가들의 작품도 어용이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반나치적이 아니면 용인되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레퍼토리의 절대 다수는 독일 작곡가들의 곡들이었다.

독일 본토가 연합군 공군 폭격에 시달리게 되자 악단은 1943년 봄에 폭격의 위협에서 비교적 안전한 프라하로 거점을 옮겼고, 프라하의 제국 방송 스튜디오에서 계속 방송 출연과 녹음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 밴드도 다른 잔존 재즈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틈만 나면 선전성에서 '너무 뜨거운 거 아니냐', '리듬이 너무 거칠다'는 식으로 계속 간섭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창단 멤버인 그로테와 헨셸은 1944년 2월에 영화음악 쪽의 일이 과중하다는 '공식적인' 이유로 좌천되었다. 이들의 후임으로는 도이칠란트젠더 방송국의 전속 경음악단을 이끌었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빌리 슈테히와 헝가리인 바이올리니스트 겸 경음악단 지휘자 버르너바스 폰 게치가 영입되었고, 이들은 패망 직전까지 직책을 유지하면서 악단을 이끌었다.

1944년 9월에는 여타 제국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악단 멤버 전체가 소위 '신의 은총을 받은 이들의 목록(Gottbegnadeten-Liste)'이라고 불리는 병역 면제 예술인 목록에 포함되어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덕분에 이 악단은 괴벨스의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진 뒤에도 징집되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5년 5월 5일에 체코 빨치산들이 제국 방송의 프라하 스튜디오를 습격해 점령하면서 이 악단의 역사도 끝났다. 이 과정에서 악장(콘서트마스터)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쿠르트 헨네베르크와 편곡자 에리히 카슈베츠 같은 일부 단원들은 격렬한 시가전에 휘말려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포로로 붙잡혀 수감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였고, 심지어 나치 당원이었던 슈테히는 풀려난 뒤 연합국의 제재 능력이 미치지 못하던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활동하면서 활동 금지 조치가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복귀해 계속 재즈 음악가로 활동했다. 다른 생존 단원들도 비나치화 심사를 거쳐 활동 재개를 허락받은 뒤 계속 독일 재즈계에서 연주 활동을 벌였다.

4. 전후의 평가

물론 독일 재즈 음악계에서 이 밴드는 '실재했지만 언급하기는 껄끄러운' 존재로 남아 있다. 비록 이들이 찰리와 그의 악단처럼 노골적인 정치 선전에 활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괴벨스의 지시로 조직된 관제 악단이라는 한계를 가진 것은 마찬가지였고 그 때문에 정치적으로 이용된 재즈 밴드의 안좋은 사례라는 반면교사 격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그 이전과 이후의 빅 밴드와 비교해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실제로도 이들의 음악은 스윙감도 별로 없는 데다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같은 부드러운 음색의 현악기로 떡칠을 해서 이게 재즈인지 무드 음악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애매모호한 성격 때문에 전후에도 계속 평가절하되고 있다.[2] 결국 아무리 좋게 봐줘도 짝퉁 재즈(Pseudo-jazz). 그래서 당시 청소년들을 비롯한 젊은 세대들도 전반적으로 이들의 음악을 경멸했으며, 특히 스윙 청소년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인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 밴드의 멤버 상당수가 전후에도 계속 음악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편제나 음악 스타일은 전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패전 후 독일 각지의 방송국에서 창단된 탄츠오케스터(Tanzorchester, 영어로 하자면 댄스 오케스트라)들은 대부분 빅 밴드+현악 합주라는 편제로 구성되었고, 이들 악단의 리더도 빌리 슈테히, 호르스트 쿠드리츠키, 아달베르트 루츠코프스키 같이 대부분 이 악단에서 활동한 이들이 맡았다. 과거를 반성하기 보다는 잊어버리자는 전후 복구 시기의 풍토 속에서 이들의 음악은 예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소비되다가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본토인 미국과 마찬가지로 록 음악을 비롯한 팝 음악의 대공세를 받으며 서서히 잊혀졌고, 현재는 주로 구세대들의 추억팔이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들이 남긴 방송용 녹음들은 일부 유실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보존되어 종전 후 소련군 관할 지역에 속해 있던 베를린 제국 방송국을 접수해 만든 구 동독의 방송국 자료실에 소장되었다. 하지만 나치 관제 밴드였기 때문에 이 녹음들의 음반화는 동독에서 아예 금지되었고, 1970년대에 동서독 방송 자료 교환이 성사되었을 때 녹음의 일부가 서독 한정으로 폴리도르에서 두 장의 LP로 발매되었다.

독일통일 뒤 이 악단의 녹음 자료들은 여타 동독 소재 자료들과 함께 포츠담의 독일 방송 자료실로 이관되었고, 1990년대에 이들의 방송 녹음 대부분에 해당되는 82곡의 녹음들이 모노폴(Monopol)이라는 음반사에서 여섯 장의 CD와 LP로 출반되었다. 모노폴 음반 발매 이후에는 코흐(Koch)에서 13곡, 유베(Jube)에서 아홉 곡의 미공개 녹음을 담은 CD를 각각 내놓았고, 이들 음반은 지금도 유통되고 있다.


[1] NSKK (국가사회주의 자동차 군단) 집단지도자, 나중에 괴벨스와의 갈등으로 나치당 중앙권력에서 밀려난 후 무장친위대 중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소련군에 의해 전사했다. [2]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시도를 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돈을 끌어모으기 쉬웠던 백인 밴드 리더들인 아티 쇼, 글렌 밀러, 진 크루파, 해리 제임스 같은 이들이 자신의 빅 밴드에 현악 합주를 더해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이 악단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재즈사에서 그다지 큰 비중이 없고, 하물며 이 아이디어를 나치에서 강제해 실행한 이 악단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