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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2:44:57

토야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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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oyako_banner.png
[ruby(洞爺湖町, ruby=とうやこちょう)]
토야코초 / Toyako Town
파일:Toyako_flag.png
정기(町旗) & 문장(紋章)
기본 정보
국가 일본
지방 홋카이도
도도부현 홋카이도 이부리 종합진흥국
면적 180.81km²
인구 8,556명[1]
정장(町長) 마야 도시하루(真屋敏春;
[[무소속(정치)|
무소속
]])
정의회 (12석)
의장(議長) 오니시 사토시(大西智;
[[무소속(정치)|
무소속
]])
회파 유시회(侑志会) (4석 / 33%)
일본 공산당 (2석 / 17%)
공명당 (2석 / 17%)
레이와회(令和会) (2석 / 17%)
정민넷 토야코(令和会) (2석 / 17%)
상징
정화 제비꽃(スミレ), 철쭉(ツツジ)
정목 벚나무(サクラ), 마가목(ナナカマド)
홈페이지
파일:Toyako.png
아침의 토야코
파일:Toyako_cs.gif
컨트리 사인

1. 개요2. 역사
2.1. 아부타초(虻田町)2.2. 토야무라(洞爺村)2.3. 합병 후
3. 관광지4. 부속 도서5. 교통6.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 홋카이도 이부리 종합진흥국 서부에 위치한 정(町)이다. 2006년에 아부타초(虻田町)와 토야무라(洞爺村)가 합병하여 만들어졌다.

남으로 우치우라만(内浦湾)과 우스잔(有珠山)[2], 산카쿠야마(三角山), 동으로 토야코로 둘러싸여있다. 산카쿠야마와 우스잔 사이 우치우라만과 접하는 평지에 중심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외 토야코 남부에는 온천마을이, 북부에는 토야마치(洞爺町)라는 중규모 마을이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산과 숲과 농경지이다. 토야코 주변과 남부 산지는 시코츠토야 국립공원(支笏洞爺国立公園)으로 묶여있다.

토야코초라는 지명은 당연히 토야코에서 따온 것인데, 토야코의 토야는 아이누어로 호숫가를 뜻하는 to-ya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한편 합병 이전 지명인 아부타(虻田)는 아이누어로 '낚싯바늘을 만드는 강'이라는 뜻의 '아프타펫' 혹은 '언제나 우바유리(백합의 일종)의 알뿌리를 캐는 곳'이라는 뜻의 '하프타우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나가와현 하코네마치와 자매결연을, 카가와현 미토요시와 우호도시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중국 안후이성 황산시와는 우호호수(友好湖) 각서를 체결했다.

2. 역사

2.1. 아부타초(虻田町)

우치우라만에 접한 이리에(入江)에서 패총이 발견되어 조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초의 기록은 1663년 우스잔(有珠山) 분화로, 막대한 양의 화산재가 분출하여 산기슭에 살던 주민 5명이 사망했다. 화산활동은 보름 정도 이어져 야마가타까지 소리와 진동이 전달되었고 히로사키에서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화산 분출물이 떨어졌다. 또한 근처 소베츠에는 화산 분출물이 3m 가까이 쌓였다.

화산 외 인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669년의 것으로, 당시 14~15채의 치세[3]가 있었다고 한다. 샤쿠샤인 봉기 이후 마츠마에 번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이곳에는 아부타바쇼(アブタ場所)[4]가 세워졌으며, 주변 지역[5]과의 교역과 다시마, 연어, 청어, 해삼 등의 어업이 성행하였다. 그 중 말린 해삼을 이리코(イリコ)[6]라고 불렀는데, 맛이 뛰어나 중국에까지 수출되기도 했다. 1769년에는 우스잔이 다시 분화했는데, 소규모 화산쇄설류가 발생하여 가옥이 다수 소실되었다. 1800년에는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목장을 건설했다. 당시 홋카이도는 도로가 정비되지 않았고 지형이 험했기 때문에 말이 교통수단으로서 필수적이었으므로 아부타는 말 공급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1822년에는 2500마리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데없이 재앙이 찾아왔다. 1822년 윤1월 16일, 수 십 회의 지진이 발생하여 아이누들이 우스잔이 분화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결국 19일에 반나절 간 100회 정도의 지진 끝에 오후 8시 경 우스잔이 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누 장로들은 급히 에무시[7]를 뽑고 퇴마의식을 행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결국 주민과 승려 등이 벤베, 후레나이[8] 방면으로 피난을 떠났다. 우스잔은 20일에 다시 분화했다가 22일 아침에 대분화했다. 기록에 따르면 4도타루(四斗樽; 약 72L)짜리 술통만한 불붙은 돌이 저녁까지 유성처럼 날아들었다고 한다. 산은 불길에 휩싸이고, 시라오이 무로란에는 화산재가 쌓여 자작나무 껍질을 태워 불을 밝혀야만 했다. 이어 26일에도 분화했고, 2월 1일에는 화산쇄설류 화쇄난류가 한꺼번에 발생했다. 이때까지는 지형상 주로 남쪽과 동쪽으로 분출물이 날라갔는데, 1일 대분화 때는 외륜산(外輪山)을 넘어가서 19일에 사람들이 피난갔던 그 곳을 덮쳤다. 오사루가와(長流川) 하구[9]부터 아부타코탄, 후레나이에 이르기까지, 산림, 회관, 치세, 목장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이 불타올랐으며, 목장주, 바쇼청부인[10], 아이누 원주민 등 5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홋카이도에서 유일하게 말을 교배하여 기르던 목장의 말도 2,468마리 중 1,430마리가 희생되었다. 분화는 2월 말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이 때의 일련의 분화를 분세이 분화(文政噴火)라고 부르는데, 이로 인해 바쇼의 중심지였던 아부타코탄은 궤멸적 피해를 입어 없어졌고, 주민들은 그나마 피해가 적었던 후레나이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목장은 1870년까지 운영을 계속했다.

1853년에는 우스잔이 다시 대규모로 분화하여 화산쇄설류가 발생했으나, 마을이 없는 토야코 방향으로 흘러들었고, 주민들도 재빨리 대피해서 큰 피해는 없었다.

1869년 홋카이도에 개척사가 설치됨에 따라 개척사 관할에 속하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1869년부터 쇼나이 번(庄内藩) 소속이었다가 1872년에 와타리 번(亘理藩) 영토가 되고, 1873년이 되어서야 니시몬베츠 호장사무소(西紋鼈戸長役場)에 소속되어 관리가 파견되었다. 1880년에는 아부타, 나에후리(振苗), 벤베(弁辺), 레분(礼文)에 따로 호장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아부타무라(虻田村)는 1882년에 나에후리무라를 병합하였으나 1893년에 쿳찬무라(倶知安村)[11]가 떨어져나가고, 1897년에 다시 맛카리무라(真狩村)[12]가, 1909년에는 벤베무라(弁辺村)가, 1920년에는 토야무라(洞爺村)가 분리되었다.

1910년에는 우스잔 북서쪽 기슭의 콘피라야마(金比羅山)에서 분화가 시작되었으나 6일 전부터 전조 지진이 있어서 경찰서에서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켰기 때문에 주민의 인명 피해는 없었다. 다만 지은 지 4달밖에 되지 않은 콘피라지(金毘羅寺) 본당 등 건축물 20동이 파괴되었고 농작물 8500ha가 피해를 입었다. 또한 무로란에서 분화를 구경하러 온 사람이 통제선을 넘어 들어갔다가 100도에 가까운 라하르(화산이류)에 휩쓸려 사망했다. 하지 말라는 걸 하면 이렇게 된다 다만 이 때의 분화로 토야코 주변에서 온천수가 용출하여 지역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1917년에 최초의 온천료칸이 세워졌고, 1928년 무로란 본선 개통에 이어 1929년 토야역에서 온천지로 이어지는 토야코 전기철도(洞爺湖電気鉄道)도 부설되어 관광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정(町)으로 승격되었다.

1943년에는 지진이 빈발하기 시작하더니 1944년 6월에 우스잔이 다시 분화했다. 화산재에 의해 유아 1명이 질식사했으며, 옆 소베츠초에는 쇼와신잔(昭和新山)이라는 산이 생겨났다. 1949년에는 토야코 주변이 시코츠토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7년에 우스잔이 다시 분화하여 연기가 12,000m까지 솟아올랐고 홋카이도 남부 전역이 화산재로 뒤덮여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화구에 있던 목장???은 아예 사라졌고 라하르로 사망자 2명, 실종자 1명이 발생하였다. 이 때의 피해 흔적은 소베츠초의 '에코뮤지엄 1977년 화산유구공원'(エコミュージアム1977年火山遺構公園)에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이를 계기로 홋카이도대학 우스화산관측소가 개설되어 데이터 수집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 다시 우스잔이 분화했으나, 전번 분화 당시 개설된 관측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이틀 전에 기상청에서 긴급화산정보를 내고 주민 1만여 명을 대피시켰다. 당시 관측소는 144시간 안에 분화한다고 예측했는데, 정확히 예측 143시간 만에 분화했다. 폭발 직후부터 내각 산하 안보위기관리실 주도로 오샤만베역에서 운행을 멈춘 특급열차를 토야역으로 돌려 피난열차로 쓰게 하는 등 빠른 대응이 진행되었다. 분화로 인한 지반융기로 도오자동차도 230번 국도가 불통되고 일부 지역이 수몰되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

피해복구가 거의 완료될 때 쯤 토요우라초, 토야무라와의 합병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토요우라초는 2005년에 주민투표에서 합병 반대파가 우세해서 이탈했고, 아부타초와 토야무라만이 합병협정서를 체결했다. 2006년 3월 27일에 토야코초가 탄생하고 아부타초는 페지되었다.

2.2. 토야무라(洞爺村)

1920년에 아부타무라(虻田村)에서 떨어져 나왔다. 2000년까지의 화산폭발 등의 역사는 아부타초와 대동소이하다.

아부타초와의 합병에 있어서 꽤나 잡음이 많았는데, 2003년에 촌의회에서 촌장의 합병에 대한 자세가 소극적이라며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려다가 폐기했으나, 2004년에 결국 가결되었고 촌장은 맞대응으로 촌의회 해산을 통보하여 촌의회 선거가 다시 실시되게 되었다. 국회를 보는 듯하다 결국 촌의회 의원선거에서 찬성파가 10석 중 7석으로 다수를 점했고, 반대파여던 촌장은 다시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어 물러났다. 이에 따라 새롭게 선출된 촌장이 합병협의회에 참가했으며, 2006년 3월 27일에 토야코초가 탄생하고 토야무라는 페지되었다.

2.3. 합병 후

2008년에 더 윈저 호텔 토야 리조트&스파에서 제34회 주요 7개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2009년에는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3. 관광지

4. 부속 도서

모두 토야코에 있는 섬으로, 무인도이다.

5. 교통

JR 홋카이도 무로란 본선 토야역이 속한다. 한때 토야코 전기철도(洞爺湖電気鉄道)도 있었으나 1941년에 폐선되었다.

토야코온천터미널(洞爺湖温泉ターミナル)에서 도난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무로란, 다테, 노보리베츠, 토요우라로 가는 노선이 있다. 조잔케이(定山渓)나 삿포로로 가는 노선은 예약제로 운행된다.

고속도로는 도오자동차도가 지나며, 국도는 37번, 230번이 지나간다. 미치노에키는 아프타(あぷた)와 토야코(とうや湖)가 있다.

토야코 기선(洞爺湖汽船)의 유람선으로 토야코를 관광할 수도 있다. 30분마다 운행하며, 하절기에는 나카자마(中島)에 들어갈 수도 있고 불꽃놀이 관람선도 운항한다. 동절기에는 나카지마 주변을 돌아볼 수만 있다.

6. 기타

가수 아야노 마시로가 이곳 출신이다.
TVA 천체의 메소드의 주 배경무대.

한때 일본 서적의 영향으로 1970년대~80년대에 한국에서 발간된 어린이용 과학 서적에는 "쇼와 신 산", "쇼와 새 산"이란 명칭과 사진이 빠짐없이 나왔었는데 바로 이 곳에 있는 우스 산의 1944년 대분화에서 비롯한 산이다. 현재는 한국이 세계화되면서 더 많은 해외 사례들이 실리는데 특히 바닷속에서 섬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아이슬란드의 서트시 섬이 유명하다. 이쪽은 분화를 촬영한 컬러 필름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심지어 NHK도 1988년 다큐 제작을 하면서 이걸 갖다 썼다.


[1] 주민기본대장 2020년 9월 30일 기준. [2] 2000년에도 분화한 적이 있는 활화산이다. [3] cise, 아이누 전통 가옥 [4] 바쇼(場所)란, 농사가 거의 불가능했던 홋카이도의 사정상 다른 번들처럼 고쿠다카(石高) 기반의 봉록을 지급하지 못하는 대신, 바쇼(場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의 교역권과 어로권을 주는 형태로 봉록을 지급했던 마츠마에 번 고유의 제도였다. [5] 레분게, 오프케시, 후레나이, 벤베 등 [6] 서일본에서 건멸치를 뜻하는 이리코와는 동음이의어이다. [7] 아이누의 의례용 칼 # [8] 지금의 토야코초 중심지 [9] 다테시 중심지 근처 [10] 바쇼(場所)를 관리하는 마츠마에 번의 가신 [11] 쿳찬초 쿄고쿠초 [12] 맛카리무라, 루스츠무라, 니세코초, 키모베츠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