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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08:40:06

대사(의사)

1. 개요2. 파워블로거3. 연재목록들4. 논란5. 사건
5.1. 오항녕 교수 관련5.2. 5.18 북한간첩개입설 주장
5.2.1. 주장5.2.2. 반대자에 대한 인신공격5.2.3. 검증: 1000명 이상 시민들을 모아 무기고를 몰색해 행동개시?
5.2.3.1. 문제5.2.3.2. 전문가의 견해5.2.3.3. 무기고 습격과 총기 탈취의 전문성 여부5.2.3.4. 비교의 오류5.2.3.5. 분야 문제
5.2.4. 현재

1. 개요

와룡 내과를 운영하는 의사이자 네이버에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파워 블로거.

인터넷상에서 특히 밀리터리 매니아들 사이에선 태평양 전쟁을 다룬 블로그로 명성이 높다. 태평양 전쟁의 육/해/공군의 전략/전술/전투기록은 물론 정치/군사행정 등등을 아우르는 공간전사(空間戰史)의 정리 및 분석을 내놓고 있다. 태평양 전쟁의 여러 전투 서술 중 특히 미 해군, 미 해병대 관련 서술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아버지는 김만청 제독이다.[1]

개인적으로는 군의관이 아닌 공중보건의로 병역 의무를 마쳤다고 한다.

2017년 12월 초에 네이버 한성숙 대표가 장차 블로그 서비스를 다른 서비스에 통폐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자 # 만약을 대비해 이름만 걸어두고 있던 이글루스 티스토리로 자료를 백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2018년 10월 경부터 유튜브 채널에서 턴제전략시뮬레이션 오더오브배틀의 공략 영상을 올리고 있다.

2021년 부터는 블로그에 기술했던 내용을 유튜브 컨텐츠로도 올리고 있다.

2. 파워블로거

높은 명성 때문에 네이버에선 해마다 파워블로거로 선정된다.

3. 연재목록들

4. 논란

여기까지 보면 2차대전사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평범한 밀리터리 매니아같지만, 정작 다른 부분에서 항상 논란이 된다.

정치적으로 전직 박사모 회원이였으며 매우 강경한 극우성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블로그에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극우적 관점과 역사왜곡 때문에 논란이 된다.

우선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 음모론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지만원을 좋아할 듯 아래 서술하듯이 나무위키 내 토론에서도 근거도 없이 5.18에 관해 왜곡된 어거지 궤변을 계속 늘어놓으면서 상대방한테 인신공격을 퍼부은 흑역사가 있다. 대사의 주장 일단 5.18 북한개입설은 현재 폐기한 모양.

2016년 10월 본인 블로그에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로 죽은 것이 아니며 빨간우의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글을 올렸다 # 그리고 이에 대해 반대의견과 함께 악플들이 달리자 '고소는 유족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경고를 했다.

5. 사건

태평양 전쟁사에 관해선 대부분 호평하지만, 극우 성향 때문에 아래 같은 사건사고들이 계속되고 있다.

5.1. 오항녕 교수 관련

오항녕 교수는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보지도 않은 주제에 무슨 말들이 그리 많아!'라는 통념을 비판했다.
해당 사건에 가까운 시대에 살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건을 보다 후대의 사람들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사건을 직접 겪은 당사자 본인이라면 모르겠거니와, 단순히 시간대 상의 멀고 가까움이 곧 사건의 진실을 판가람을하는 척도 그 자체로 기능할 수는 없다는 것. (중략) 요컨대 특정한 사건에 관심이 비교적 적거나, 기억력이 좋지 않거나, 폭넓은 자료를 접하기 어려우면, 그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중략) 이건창은 조선시대 정치사를 이해할 수 있는 여건 면에서 우리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다. 이건창은 실록도, 승정원일기도, 그 많은 문집도 오늘날의 우리만큼 접할 수가 없었다. 이런 현실적인 조건이 이건창의 인식 수준을 일차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

이런 주장에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살아보지 않았으면 아예 말을 마라..라는 소리를 듣는 경우는 대체로 자기의 얄팍하고 왜곡된 선입견을 무슨 사회과학적인 성찰 능력으로 착각하는 철부지들이 헛소리하다가 듣는 경우도 많지요.
가령 전두환 시절에는 자기 아버지 정자 속에 들어있던 덜 떨어진 건방진 애송이가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
"전두환 시절에는 길가다가 국기 하강식할 때 그 자리에 서서 국기에 대해 경례하지 않으면 경찰서 잡혀가서 죽도록 두드려 맞았다."[4]
같은 헛소리를 버젓이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런 애송이들은 꼭 그 당시는 국기 하강식 할 때 서서 경례하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거 지키지 않았다고 무슨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고 실제로 길가다가 국기하강식한다고 그대로 멈춰서서 주변에서 좀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더 많아서 제대로 지키기가 쪽팔리는 상황이었다고 아무리 좋은 말로 설명을 해도 말귀를 못 알아먹어요.
그 때 하는 말이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았으면 아예 말을 하지 마라"
라고 하는 거죠.
주인장이 그런 말을 많이 들어 보았으면 한 번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
오항녕 교수의 글은 조선시대를 근거로 하여 학술적으로 해당 통념이 잘못되었다는 글이나, "자기의 얄팍하고 왜곡된 선입견을 무슨 사회과학적인 성찰 능력으로 착각하는 철부지들", "자기 아버지 정자 속에 들어있던 덜 떨어진 건방진 애송이가 어디서 주워듣고" 온 경우 등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사례를 들어 반론을 폈다. 더불어 주인장과는 상관없는 사례로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는 과격한 충고를 했다. 정작 본인은 일본 제국이나 북한에는 정자 상태로라도 살아 본 적도 없지만 그 나라들에 대해 노골적인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모순 그 자체이다.

5.2. 5.18 북한간첩개입설 주장

5.2.1. 주장

5.18 북한간첩개입설을 주장했다. 일단 5.18의 개시 자체는 북한군과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무장 과정에서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장큰 문제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그러면서 들이댄 근거라는 게 '광주시민들이 조직적인 무기고 습격을 했다'는 것인데 정작 '조직적인 습격을 했다'는 증거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답정너식의 궤변을 계속 이어갔을 뿐.

대사의 주장
21일만 떼어놓고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광주시민이 무장하게 만들었다는 금남로의 대규모 총격 사태는 12시 30분에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불과 10분 후인 12시 40분에는 이미 화순에서 무기탈취가 시작되었지요.
오후 2시부터는 불과 20분 만에 38군데의 무기고가 거의 동시에 털렸습니다.
그것도 전부 광주 외곽에 있는 무기고들이었고, 광주시내에서 빼돌린 무기들까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되어 경비라야 대부분 1-2명이었고..

시위대는 금남로의 발포 이후 1시간 50분 만에 5,400 정의 소총과 29만발의 총탄, 그리고 550발의 수류탄을 확보했습니다.
무기탈취에 투입된 버스와 트럭만도 수십대이고 동원된 인원은 최소한 1천명이 넘으며 더구나 이들이 타고간 버스와 트럭은 이미 오전 9시에 아세아 공장을 습격하여 확보된 상태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오후 12시 30분에 계엄군이 발포하여 무장을 해야하겠다고 생각한 '일반' 시민들이 최소한 1천명 이상의 인원을 조직하여 각 버스와 트럭에 할당하고 운전사를 수배하고 각 습격대의 책임자와 목적지를 정하고 38군데의 무기고를 동시에 습격하여 1시간 50분 만에 소총 5400 정과 실탄 29만발을 확보하는 것이 정녕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더군다나 일단 무기와 실탄을 확보한 이후에는 추호도 흔들림없이 즉시 광주로 돌아와 시민들을 무장시키기 시작하여 오전 3시 20분에 이미 1,000 명을 무장시켰습니다.
오후 5시에는 발포 이후 4시간 30분 만에 5,000 명을 무장시켰구요..
게다가 여기에 사용한 버스와 트럭은 이미 오전 9시에 확보되어 있었지요..

당시 광주의 '일반' 시민이 과연 4시간 30분 만에
"무장하자고 결정하고, 1,000 명 이상의 인원을 모으고, 공격할 무기고를 물색한 다음 인원을 나누어 배당하고, 각 습격대의 책임자를 정하고, 운전사를 구하고, 20분의 시차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동시에 습격하여, 광주로 돌아와서 5,000 명을 무장시킨다. 이 모든 과정을 4시간 30분 안에..그것도 전체 상황을 주관할 뚜렷한 조직조차 만들지 않고 자발적으로..광주의 일반시민이던 각 습격대의 책임자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성공적으로 사라지고.."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예비역?
당시 광주 예비역들은 비정규전 전문가들로만 편성한 모양이지요?

제가 보기론 이건 대단히 수준이 높은 비정규전 전문가의 작품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정부가 5,000 명을 상대로 동원령을 내려도 4시간 30분 만에 5,000 명을 모아 소총을 지급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는 이 일을 주도한 세력이 최소한 200 명 이상으로 이루어진 고도로 조직화되고 잘 훈련된 비정규전 전문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광주에 이만한 숫자의 비정규전 전문가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과연 어느나라 사람들이었을까요?
미국?일본?소련?중국?소말리아?리비아?탈레반?알 카에다?
[출처] 솔저 님께..광주시민의 무장과정에 대하여..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대사
2011.05.18. 16:01
저는 시민들의 무장과정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솔저 님께..광주시민의 무장과정에 대하여..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대사
2011.05.18. 16:02
제일 큰 문제는 드러나는 조직이 없다는 것이지요.
현재까지 무기탈취과정을 종합적으로 지휘한 시위대의 조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런 일이 조직의 일사불란한 지휘가 없이 저렇게 빠른 시간 안에 자발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 때 대사는 여기에 대한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5]

5.2.2. 반대자에 대한 인신공격

한 유저가 5.18 북한간첩개입설 = 환빠라는 글을 올렸다. # 이 글은 대사를 저격한 글은 아니었고, 5.18 사이비 역사 세력과 환빠의 유사점을 지적한 글이었다. 그러나 대사는 여기에 여전히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여전히 제시하지 않았으며, 이론적으로 환빠와 5.18 음모론자들이 어떻게 다른지도 전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인신공격들을 행했다.
대사2011.05.19. 11:01
피식.. 환빠로 부르던 뭐라고 부르던 상관 없습니다[6].
어차피 미친소나 멍게 부르스 난리치던 부류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내가 멍게도 아니고..

다만 난독증은 치료하시길..
제가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의 개입에 의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적었던가요?
만일 그러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저는 서슴없이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빨갱이들이 사주한 '광주무장반란' 으로 부릅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의혹을 제기하면 환빠라..
그따위 사고 방식으로 환빠 노래나 부르고 다니니까 서석구 같은 사람이 힘을 얻는 겁니다.

그래놓고.. 소통?
하긴 지 마음에 안 든다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일간신문을 폐쇄하겠다는 정치깡패 새끼들이 완장차고 제멋대로 설치게 만들던 자들이니..
[출처] 518항쟁에 북한 운운하는 자들은 신종 환빠?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토치로

r58에 다음 주장이 올라왔다.
글을 쓴 후 다른 일하는 동안에 환빠 운운하는 글이 올라와서 댓글을 달았고 그걸 빌미로 경고를 먹고 이후 강퇴됨. 환빠 운운한 작자는 대사를 환빠와 같은 부류라고 공격한 것임
그러나 글에서는 정작 대사를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
토치로, 518항쟁에 북한 운운하는 자들은 신종 환빠? 글이 올라온 날짜는 2011.05.18. 23:36이다. 5월 18일에 5.18 민주화운동을 주장으로 글을 올리는 건 매우 자연스러우며 이런 주장은 대사 혼자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해당 글에서 대사가 환빠와 동급이라 주장한 글은 전혀 없다.

5.2.3. 검증: 1000명 이상 시민들을 모아 무기고를 몰색해 행동개시?

5.2.3.1. 문제
글은 긴데 정작 1차 문서나 보고서나 논문같은 자료는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특히 이부분이 문제다.
당시 광주의 '일반' 시민이 과연 4시간 30분 만에 "무장하자고 결정하고, 1,000 명 이상의 인원을 모으고, 공격할 무기고를 물색한 다음 인원을 나누어 배당하고, 각 습격대의 책임자를 정하고, 운전사를 구하고, 20분의 시차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동시에 습격하여, 광주로 돌아와서 5,000 명을 무장시킨다. 이 모든 과정을 4시간 30분 안에..그것도 전체 상황을 주관할 뚜렷한 조직조차 만들지 않고 자발적으로..광주의 일반시민이던 각 습격대의 책임자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성공적으로 사라지고

4시간 30시간만에 1000명이 넘는 인원이 한 조직으로 모였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1,000 명 이상의 인원을 모으고'라는데 최초의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인 김영택 박사 논문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국방부 보고서에도 없는 내용이다. 국방부 보고서

공격할 무기고를 물색한 다음이라는데 무기고를 몰색했다는 증거부터 제시되어 있지 않다. 4시간 30분 안에 5000명이 무장했다는 근거도 전혀 제시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할 전개를 보면 대사가 한 주장과 전혀 다르다. # 예로 이미 2시간전에 털었던 광산구를 또 15:00에 몰려와서 털지 않나. 광주 시내에 있는 무기고는 냅두고 광주 시외로 무기고를 계속 털지 않나. 3시간이 지나서야 광수 시내를 털질 않나 광주 시외를 털다가 시내를 터는 걸 왔다갔다 한다. 또한 무기고를 터는 과정도 4시간을 훌쩍 넘어간다. 그리고 당시는 고등학교가 병영집체교육하던 시기인데 광주 숭일고교는 무장탈취를 시작한지 7시간만에 턴다. 거기다 여러 시위대가 무장탈취하러 분노하고 왔다가 31사단이 설득하니 돌아가는 일도 여럿있었다. 조직적인 해산 무기도 없는 곳을 엉뚱하게 몰려왔다가 없으니 괜히 기물을 파손하고 오토바이를 탈취하기도 했다. 빈탄창만 있는 무기고를 습격하기도 한다. 쓸데없이 완도까지 갔다가 무기고 없는 곳을 습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1000명 이상 참여한 건 사실이니 증거라는 주장이 있다.
무기탈취과정에 1,000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는 증거를 볼까요?...따라서 무기탈취에 참가한 인원이 1,000 명을 넘는다는 제 주장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건 논리적 오류인데 여기서 대사가 사실이라 전제한 내용은 이것이다.
4시간 30분 만에 "무장하자고 결정하고, 1,000 명 이상의 인원을 모으고, 공격할 무기고를 물색한 다음 인원을 나누어 배당하고, 각 습격대의 책임자를 정하고, 운전사를 구하고, 20분의 시차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동시에 습격하여, 광주로 돌아와서 5,000 명을 무장시킨다.
여기서 논리적 오류가 있다. 참여한 인원이 1000명을 넘는 것1000명 이상 모은 후 행동을 개시했다는 다른 주장이다.

결국 '1000명 이상의 인원을 모아서 무기고를 몰색한 다음 행동개시'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5.2.3.2. 전문가의 견해
오히려 김영택 박사같은 논문을 보면 매우 비조직적이고 오합지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5월 18~5월 21일까지 광주민중항쟁은 무조직 무지도자로 이뤄진 저항이라 설명하고 있다.

오합지졸이라 설명이 된 부분
이들은 훈련 한번 제대로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 분명하다. 비록 군에 복무했던 예비군들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으나 총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10대의 중고교생이나 20대들도 많 았다.
김영택, 광주민중항쟁 연구, 184쪽
그러나 막강한 공수부대 병력이 오합지졸인 '시민군'에게 밀려서 철수했다고 보기에는 그들의 화력과 군사력으로 보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무자비한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를 꽉 메운 채 시위하는 군중을 상대로 1개 중대 병력만으로도 막혔던 큰길을 훤하게 뚫어가는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철수할 무렵까지 산발적인 시민군의 응사가 없지 않았지만 도청주변에는 아무도 얼씬거릴 수가 없었다.……이런 군대가 오합지졸이 시민군에 밀려 후퇴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의 일이다. …철수를 시민들의 '역전의 승리'라고 내세우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다.…이와 같은 정황을 전제로 할 때 이 날 공수부대의 철수는 철수 후에 닥쳐올 자체적인 혼란을 계산한 어떤 정치적 음모가 깔려있는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전개하여 완벽하게 '광주소요'를 제압함으로써 '우리가 해냈다'는 자신들의 위상에 걸 맞는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김영택, 광주민중항쟁 연구, 189~191
이들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구식무기인 카빈과 M1소총으로 무장한데다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민간인에 10대 소년들까지 끼어 총 한 방 쏘아 본 경험조차 없는 오합지졸, 군대라기보다는 장난감 같은 소총을 가진 잡동사니 병졸에 불과한 '시민군'이어여 했다.
이들이 초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세계적으로도 최강성 북한군을 상대해 필승할 수 있을 만큼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대한민국 최정예 전투부대원을 상대하는 것은 갓난 아기가 어른을 상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시민군'의 의미는 광주시민이 국가공권력을 부당하게 폭력화시켜 행사하는 신군부의 반국민적 반국가적 군대에 저항한다는 상징적인데 불과했다.
김영택, 광주민중항쟁 연구, 184쪽, 404쪽

무조직·무지도자 라 설명된 부분
선량한 시민들이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살상행위에 분노의 공감대를 이룬 채 자신들을 이끄는 지도자나 사전계획이 없는데도 즉흥적 · 감정적으로 발로된 정의감 하나만을 가지고 잔혹한 공수부대의 총검을 몰아낸 것이 광주민중항쟁이기도 하다.…그러나 그 승리가 신군부의 위계로 인한 허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같이 무지도자·무조직 항쟁의 역사를 창조한 나흘을 지나 닷새째가 되어 5.18의 역사를 이어가야 할 22일 아침까지도 항쟁마당의 한 복판, 도청 안에는 아무런 조직이나 리어그룹이 출연하지 않은 허탈한 상태였다.
(박사학위 논문) 김영택, 광주민중항쟁 연구, 196쪽
세 번째로 지적할 것은 '5.18'에서는 배후조직도 지도자도 없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이러한 무조직·무지도자 상태는 21일의 협상과정이나 발포후 시민들의 무장상황까지 계속되다가 공수부대가 철수하면서 자치시기가 도래한 22일에야 시민군 편성과 수습위원회 구성을 계기로 조직화 된다.
(박사학위논문)김영택, 광주민중항쟁연구, 401~402쪽
5.2.3.3. 무기고 습격과 총기 탈취의 전문성 여부
없다.
1990년대 초에 예비군 무기 이관 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전국의 경찰서나 파출소, 출장소에 무기를 보관했다. # 당시 무기고는 보안이 허술한 경우가 상당했고 그에 따른 범죄가 여럿 일어났다.
카아빈 3정 모두 예비군서 훔쳐

한편 문과 이가 3년동안 범행에 사용한 총은 카아빈 3정으로 이총들은 이들이 자살한 후 현장에서 각각 발견됐다. 이들 총은 모두 72년 9월 4일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 6시사이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모 예비군 분산 무기고에서 도난당했던 총으로 확인됐다.[7]

경찰에 따르면 도난당일밤 무기고를 지키던 야간근무자 사명은 무기고에 자물쇠를 잠가놓은 채 근무지를 이탈, 마을로 내려가 있었다는 것인데 경찰은 그동안 수사결과 총기의 행방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74.07.29 #
예비군 교육중 카빈 도난
김씨 총기 수사서 드러나

이정수씨 피납사건의 용의자로 검거된 김지홍 씨가 숨겨둔 카빈 총의 출처 수사에서 서울 성동구 신사동 예비군 중대에서 카빈총 1정을 잃어버린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예비군의 무기관리가 소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동아일보 1972.10.10 #
청년구속 예비군무기소서 총 훔쳐

[대전] 1일 보령경찰서는 예비군 무기소에서 총을 훔친 서울 서대문구 연희1동 108 김영국씨(20)를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달 29일밤 본적지인 보령군 웅천면 독산리 예비군무기고의 문을 부수고 카빈1정과 실탄60발을 훔쳐 달아난 혐의다. 충남도경은 현지무기고 관리책임자를 문책할 방침이다.
동아일보 1971.12.02 #
또 카빈 5정 도난
예비군 무기고 실탄 9백발도
직장예비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소총과 훈련용 실탄이 관리소홀로 대량 도난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9일 경찰에 따르면 전남 여수시 충무동 한전 여수 지점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카빈소총 5정과 훈련용 카빈 소총 실탄 9백발이 지난 4일 상오 9시부터 7일 사이에 도난당했다는 것.

이 같은 총기류 도난 사고는 지난 7일 하오 3시 한전 여수 지점 경비원이 순찰근무중 무기고 출입문을 잠가놓은 철제 빗장이 파손돼 있는 것을 발견, 무기고 내부를 확인한 결과 밝혀졌다.
경향신문 1982.03.09 #

5.18의 전이나 후나 무기소를 허술하기로 이미 유명했다. 심하면 학생들에게도 여러번 털렸다.
영등포 공포 3시간
카빈 든 10대 둘 다방서 난동
경관 두명 사살
백여발 난사
네명 중경상
예비군무기고 총 훔쳐 심야인질 손님이 검거

17일 밤 10시 30분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4가 2 제일나사 2층 대호다실(주인 박동근, 사이)에서 강원도 영월서 상경한 박모(17) 김모(16)군 등 2명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쳐 갖고 온 카빈총을 난사, 손님과 종업원등 팔 명을 인질로 삼고 영등포 경찰서 중앙 파출소 정윤종 순경과 행인 김봉주 씨 등 2명을 쏴죽이고 행인 한병호 씨 등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동아일보 1971.08.18 #
허술한 예비군 무기고
두 중학생 소총 3자루 훔쳐

예비군 무기고에서 소총 3자루를 훔쳐낸 중학생 2명이 경찰에 붙잡혀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경찰에 따르면 같은 마을 친구인 대구시 D 중 3년 조모군(15)과 경북달성군 D중 3년 이모군(15)등 2명은 지난 1월 22일 밤 9시경 달성군 옥포면 모 예비군 무기고에서 담을 넘어 환기창을 뜯어내고 침입, 이무기고에 있던 M1소총 1자루와 카빔[8]1자루를 훔쳐내 무기고에서 1백m가량 떨어진 비닐하우스에 숨겨두었다가 다음날 3km정도 떨어진 야산바위틈에 묻었었다는 것.

또 이 들은 1월 25일밤 9시 경 같은 방법으로 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M1 1자루를 다시 훔쳐냈다.
동아일보 1982.03.05 #
보면 알겠지만 무기소 습격에 필요한 전문성은 전혀 없다. 중학생조차 장난으로 터는 곳을 전문가, 조직적 운운을 한 것.
5.2.3.4. 비교의 오류
대사는 반박사례의 예시로 우리나라의 예비군을 들었다.
아마 우리나라 정부가 5,000 명을 상대로 동원령을 내려도 4시간 30분 만에 5,000 명을 모아 소총을 지급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건 오류인데, 일단 '1천명 이상을 모은 후에 무기고를 습격했다'부터가 대사 본인의 가설이지 팩트가 아니다. 당시 무기고 습격이 1천명 이상을 모은 후에 시작한건지, 여러 다중 집단이 정해진 조직없이 무기고를 습격했는지에 대한 증거부터가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가 5000명을 모아 소총을 지급한다면 그건 엄연히 군인 체계를 갖춘 채로 하는 것인데, 무기고를 습격한 시민들이 군인 체계를 갖췄을리가 있나? 당시 광주 현장에 있으면서도 여러 참여자들의 증언을 읽은 김영택 박사만 해도 오합지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5월 21일 당시 무장시위대는 군대 체계가 제대로 갖춰있지 않았다. 체계없는 탈취와 체계에 맞춰진 소총 지급을 동일하다고 본 것 부터가 오류다.
5.2.3.5. 분야 문제
위의 전문성 여부 항목 설명을 보면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시민들은 무기고의 위치를 인지한 상태이며 그 무기고 습격에는 어떠한 전문성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대사라 주장하는 이 #는 나무위키에 다음같은 주장을 하였다.
국방부 진상보고서 P.90-91 을 보면 시위대는 21일 오후 1시부터 2시 30분까지 90분 동안 무기고 16곳을 습격하여 소총 2,651 정과 탄약 178,293 발을 탈취한 것으로 나온다. 이런 속도와 탈취 규모는 비조직적이고 오합지졸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r59 판)

그런데 이런 주장엔 문제가 크다. 이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설이 나온다.
당시 여러 시민들이 무기고의 위치를 인지한 상태이며 그 무기고 습격에는 어떠한 전문성도 요구되지 않는다고 해도, 다중으로 된 군증들은 비조직 상태에서 약속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공감하여 대규모로 무기고를 습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대규모 무기고 습격이 일어났다면 그건 반드시 조직이 갖춰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미 역사학도 아니고, 군사학도 아니고, 정치학 분야도 아니다. 사회학(Sociology)이나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의 영역이다. 그런데 정작 여기엔 어떠한 사회학이나 사회심리학 문헌을 내놓지 않고 있다.

5.2.4. 현재

현재 자신을 대사라 주장하는 유저에 따르면 저런 생각은 일단 북한개입설은 버린 것으로 보인다. 링크 그러나 조직이 있었다는 주장은 이 문서에도 반복하고 있다.


[1] 1962년 해군사관학교 16기로 임관하여 해군참모차장을 역임한 뒤 중장으로 예편했다. [2] 괌 함락도 부수적으로 다룸. [3] 대만 항공전도 같이 다룸. [4] 경찰서 잡혀가는 것까지는 오바라고 할지라도 우익 성향 강한 학교 선생님에게 체벌을 당하는 일은 충분히 있었다. [5] 여기에 늑대라는 유저가 반박글을 달았다. "대사님이 하신 말씀 절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국회 속기록이나 전교사 전투일지 계엄군 상황일지, 시청 상황일지 아무리 계엄군 관련일지를 보아도 오직 공수부대 전투상보에만 앞서서 기록돼있고, 제가 언급한 자료들이나 다른 증언에는 나와있지 않는 상황인데 어디 설명해보시죠." "공수부대 전투상보는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조작이라는 판단을 했을 정도로 나중에 조작흔적이 있었고,계엄군 상황일지와 작전명 전교사 상황일지는 1980년 7월에 발견되 자료들 입니다." 회원이 따로 글을 올리자 대사는 근거를 제시했는데 그게 과거의 무등일보 자료였다. 대사에게 반박했던 회원은 분노하며 이런 덧글을 달았다. "어디 청문회 속기록이나 보고 이야기 합시다. 이거 자료질 떨어져서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거 무등일보 기록 계속 업데이트 되신 것 아십니까. 광주권 신문만 하더라도 전남일보, 전남매일, 광주일보 엄청나게 많은데 어디서 무등일보 자료만 가져옵니까" #이후 토론 내용은 없다. [6] 당시 글은 대사를 직접 환빠라 지적한 글은 아니고 5.18 왜곡세력과 환빠의 유사점을 지적한 글이었다 [7]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 에 대한 기사이다. 해당 항목 참조. [8] 카빈의 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