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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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니엘 폰세카 Daniel Fonse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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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니엘 폰세카 가리스 Daniel Fonseca Gar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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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9년
9월 13일([age(1969-09-13)]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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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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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3cm | 체중 77kg | |||
직업 |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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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선수 |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1988~1990) 칼리아리 칼초(1990~1992) SSC 나폴리(1992~1994) AS 로마(1994~1997) 유벤투스 FC(1997~2001) CA 리버 플레이트(2001~2002)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2002) 칼초 코모(2002~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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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31경기 10골( 우루과이 / 1990~19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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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비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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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이다. 주로 이탈리아의 세리에 A에서 활약했으며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에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해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결승 헤더골을 터뜨려 팀을 16강으로 이끌었다.(최종 16위)[2]2. 선수 시절
2.1. 클럽 경력
폰세카는 1988년 우루과이 리그인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 곳에서 그는 2년 동안 14경기를 뛰며 3골을 넣는 활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칼리아리 칼초로 이적해 유럽 무대에 입성했고 그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2년 동안 활동하면서 50경기에 출장해 17골을 넣었다고 한다. 칼리아리 칼초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그는 1992년에 SSC 나폴리로 이적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게 된다.1992년부터 1994년까지 2년 동안 나폴리에서 활약하며 총 58경기에 출전해 무려 31골이나 뽑아내는 맹활약을 했다. 그리고 UEFA컵에서 스페인의 발렌시아 CF를 상대로 5골을 뽑아내는 인상깊은 활약을 했다. 이 때 폰세카의 활약을 눈여겨 보던 AS 로마는 그를 설득해 자기 구단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1994년 로마로 건너간 폰세카는 이곳에서도 65경기에 출장해 20골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펼쳐 세리에 A의 최고 공격수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1997년에는 마침내 세리에 A의 최고 구단 중 하나인 유벤투스 FC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유벤투스에서 그는 실패를 맛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포지션이 갑자기 변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래 중앙 공격수인데 당시 유벤투스의 감독이었던 마르첼로 리피는 그를 왼쪽 윙으로 쓰기를 고집했고 결국 제 포지션이 아니었던 탓에 4년 동안 40경기를 출장하는데 그쳤다. 그래도 10골은 넣으며 나름 제 몫을 다하긴 했다. 유벤투스에서 실패를 맛본 그는 유럽 리그를 떠나 다시 남미로 돌아왔고 아르헨티나 리그의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1년 간 활동한 후 다시 첫 소속팀인 우루과이의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에서 잠시 활동했다. 그리고 2002년에 다시 이탈리아의 칼초 코모로 건너갔지만 이제 선수로서의 황혼기가 되어 별 다른 활약을 못하고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그의 대표적인 국제 대회 출전은 바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3]이었다. 당시 그는 주로 후반 조커로 출전하였다. 이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스페인, 벨기에 그리고 대한민국과 함께 죽음의 조 E조에 속했다. 슈퍼스타 엔조 프란체스콜리를 앞세운 우루과이는 지역예선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여서 당시 브라질의 펠레로부터 우승후보라는 극찬을 받았고 개최국 이탈리아와 함께 결승전에서 겨루게 될 것이란 예측을 들었을 정도였다.하지만 정작 24강 본선에서 우루과이의 모습은 한심했다. 1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선 부실한 경기력으로 0 : 0으로 어렵게 비긴 승점 1점을 얻은 뒤 2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선 제대로 힘 한 번 못 써보고 무너지며 1 : 3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제 우루과이로서는 3차전 상대 대한민국을 이겨야지만 16강에 오를 수 있었다. 폰세카는 1차전과 2차전에서 모두 결장했다. 이탈리아 우디네의 스타디오 프리울리에서 대한민국과 운명의 3차전이 열렸다.[4] 이 경기의 주심 이탈리아인 툴리오 라네세는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우루과이 편을 들며 도와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는 좀처럼 한국의 골문을 열지 못했고 오히려 한국의 거센 반격에 막히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 탈락하는 우루과이로서는 어떻게든 승부를 내야 했고 후반 17분,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이 승부수로 폰세카를 투입했다. 이로서 폰세카는 처음으로 월드컵 경기를 뛰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는 좀처럼 한국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심지어, 후반 25분에 다소 석연찮은 이유로 한국 수비수 윤덕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며 수적 우세까지 등에 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코어는 0 : 0이었다.[5] 심판까지 자신들 편에 한국 선수 1명이 퇴장당하기까지 했는데도 좀처럼 한국의 골문을 열지 못하며 쩔쩔매던 우루과이는 후반 45분, 결정적인 프리킥 찬스를 얻었고 그 볼을 페널티 박스에 있던 폰세카가 곧바로 헤더로 연결해 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폰세카의 위치는 명백히 오프사이드였다! 링크된 영상의 1:37에서 멈추고 보자. 우루과이 선수가 프리킥을 찬 시점에 폰세카는 분명히 우리 최종 수비 라인보다 앞쪽에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골킥이나 스로인, 코너킥 상황에서 볼을 직접적으로 받아 득점한 경우는 오프사이드에서 제외되지만 프리킥은 그렇지 않다. 상대 진영에서[6] 프리킥을 찬 시점에서 상대편 골키퍼 포함 2번째 수비수보다 앞에 있으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프사이드다. 그런데도 당시 선심이었던 가봉 국적의 장 피델레 디람바(Jean-Fidèle Diramba)와 튀니지 국적의 네지 주이니(Neji Jouini)는 모두 고개를 돌리며 못 본 척했고 툴리오 라네세 심판조차도 페널티 박스에서 다 보고 있었는데도 그냥 우루과이의 득점으로 인정해버렸다!
이렇게 심판의 편파판정 덕분에 어거지로 조 최약체 한국을 1 : 0으로 겨우 이기는데 성공한 우루과이는 조 3위를 했지만 16강 진출에 성공했다.[7]
그리고 우루과이의 16강 상대는 바로 개최국 이탈리아로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펠레의 예측과는 달리 턱도 없이 16강에서 만나게 된 셈이다.
이 때 폰세카는 처음으로 선발 출전했다. 하지만 24강 조별리그에서 최약체 대한민국을 상대로도 심판의 편파판정 도움으로 겨우 1 : 0으로 이길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던 우루과이인지라 폰세카는 아무런 활약도 못하고 이탈리아의 빗장수비에 철저히 지워졌고 결국 0 : 2로 완패로 16위로 탈락하며 폰세카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도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월드컵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한 우루과이였지만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달랐다. 1990년 월드컵 당시 겨우 21세에 불과했던 폰세카도 이제 나이를 5살 더 먹어 26세가 되어 기량이 좀 더 성숙해져 있었고 AS 로마에서 맹활약 중이었다. 대표팀 주전 공격수로 도약한 폰세카는 베네수엘라와의 1차전에서 전반 14분에 선제골을 넣으며 우루과이의 4 : 1 대승을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나머지 2경기에선 득점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활약했고 우루과이는 파라과이를 1 : 0으로 꺾은 뒤 멕시코와 1 : 1로 비기며 2승 1무의 준수한 성적으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전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폰세카는 전반 30분에 팀의 2번째 골을 터뜨려 우루과이의 2 : 1 승리를 이끌었다. 4강에 진출한 우루과이는 콜롬비아를 2 : 0으로 제압하고 결승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결승전 상대는 바로 1년 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이었다. 우루과이는 전반 30분에 툴리오 코스타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어려운 경기를 했지만 후반 6분에 파블로 벤고에체아의 동점골로 기사회생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 득점은 없이 1 : 1로 경기를 마쳤고 승부차기 끝에 우루과이가 5 : 3으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서 폰세카는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3. 여담
- 축구선수 은퇴 이후 축구 에이전트로 일했다. 대표팀 후배 히오르히안 데아라스카에타와 계약하기도 했다.
- 아들 니콜라스 폰세카와 마티아스 폰세카도 프로 축구선수로 뛰었다.
[1]
생김새가
비버를 닮아서 별명이
비버였다고 한다.
[2]
후술하겠지만 이 골은
오프사이드였다.
[3]
24개국 본선
[4]
참고로 한국도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를 3점 차 이상으로 꺾으면 조 3위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5]
후반 4분에 윤덕여와
엔조 프란체스콜리가 충돌했는데 주심
툴리오 라네세는 프란체스콜리가 윤덕여의 얼굴에 헤딩하는 짓거리를 했는데도 아무런 카드도 안 받았고 보복 태클을 한 윤덕여에게만 경고를 주었다! 그 뿐 아니라 후반 25분에는 윤덕여와
최인영 골키퍼가 백패스를 주고 받는 것을 시간 지연했다는 이유로 또 경고를 먹여 퇴장시켰다! 참고로 시간 지연이란 이기고 있는 팀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윤덕여가 퇴장당할 당시 경기 스코어는 0 : 0으로 비기고 있었다.
[6]
오프사이드 룰은 무조건 하프 라인 너머 상대 진영에 있을 때만 적용된다.
[7]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탈리아가 16강 상대로 만만한 우루과이랑 만나려고 억지로 우루과이의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하필 이 경기 심판이
이탈리아인이라 더욱 그런 음모론이 잘 먹혔다. 만약, 이 때 우루과이가 한국을 이기지 못했으면 오스트리아가 16강에 가게 되고 이탈리아의 대진 상대는 콜롬비아가 되었을 것인데 이 당시 콜롬비아의 전력은 우루과이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는 평을 받았었다. 실제로 이 때 콜롬비아는 약체 한국을 상대로도 비실거리다 심판 편파판정 덕에 겨우 1 : 0으로 이긴 우루과이와 달리 이 대회 우승팀인 서독과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로 선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