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連続テレビ小説, ruby=れんぞくテレビしょうせつ)] NHK 연속 TV 소설 주연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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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후기 | 1983년 | 1984년 전기 |
후지요시 쿠미코 (藤吉久美子)) |
다나카 유코 (田中裕子) |
에노키 타카아키 (榎木孝明) |
요-이 땅! (よーいドン) |
오싱 (おしん) |
로망스 (ロマンス) |
<colbgcolor=#76555b><colcolor=#fff> 다나카 유코
田中 裕子 | Yuko Tana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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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ruby(澤田, ruby=さわだ)][ruby(裕子, ruby=ひろこ)] 사와다 히로코[1] |
출생 | 1955년 4월 29일 ([age(1955-04-29)]세) |
오사카부 이케다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메이지대학 문학부 연극학과 (졸업) |
데뷔 | 1979년 NHK 드라마 'マー姉ちゃん' |
신체 | 160cm |
배우자 | 사와다 켄지(1989년 결혼 ~ 현재) |
가족 | 남동생 다나카 류조(1957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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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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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세
일본 드라마 혹은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최소 한 두번은 마주했을 일본의 국민 배우이다. 한국 배우로 치환하자면 김혜자, 고두심 정도의 포지션과 비슷하다. 젊은 시절 귀여운 외모와 요염한 연기력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착실히 커리어를 쌓았고 2010년 자수포장을 수상했다.오사카 출신으로 중학교 1학년 때 회사원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삿포로로 이사를 갔다. 이후 메이지 대학 문학부 연극학과에 진학해 1979년에 졸업했다. 재수생 시절 노인들에 섞여서 빌딩 청소를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려 했는데, 홀서빙 알바는 귀찮을거 같은 반면 빌딩 청소는 정해진 시간 안에 자유롭게 청소만 마치면 된다길래 했다고 한다. 시급 300~350엔 정도였다고 한다.
취업 시즌에 명문 극단인 '문학좌'에 응시했는데 운 좋게 붙었다고 한다. 처음엔 여배우가 아닌 조명 일을 하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권유받은대로 1979년 NHK 연속 TV 소설 마네짱에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주인공의 여동생 역으로 발탁되며 정신차리고 보니 여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1981년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여우조연상, 신인배우상을 수상했고, 1983년에는 영화 '아마기 고개'로 몬트리올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싱에서 남편 역을 맡은 배우 나미키 시로의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은 '문학좌'의 야간부여서 접점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주간부에 굉장한 여배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었고, 그녀가 야간부 배우들에게 연기를 보여주는 기회가 있었는데 완전히 레벨이 달랐다고 한다.
그녀가 국민적 여배우에 오르게 된 작품은 일본에서 1983년부터 방영된 NHK 연속 TV 소설 < 오싱>으로, 평균 시청률 52.6%, 최고 시청률 62.9%라는 일본 TV 역사상 최고 시청률 기록했다.[2]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이 드라마는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이에 중국과 이란 등에서도 다나카 유코는 인지도가 꽤 있는 편이다. 반면 당시 한국은 일본문화가 금지였던 시절이라 대부분 2000년대 이후 알게 된 사람이 많은 편.[3]
귀엽고 단아한 외모지만 특유의 분위기 있는 목소리[4]와 요염하면서 어딘가 다크한 이미지도 가지고 있는 입체적인 매력으로 다양한 배역을 도전해 왔으며, 젊은 시절부터 수위 높은 노출 연기나 베드신도 하는 등 상당히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이다.
2010년 중일합작 드라마 < 창궁의 묘>에서 서태후 역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 중국에서는 중일합작으로 제작되고 서태후 역을 일본인 배우가 맡는다는 사실에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으나, 막상 방영이 되고나서는 고증이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반응을 보여 덕분에 더우반에서도 10점 만점에 8점대의 높은 평점을 받고 있다.
2010년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가 쓴 마더에서 명연기를 선보였으며, 이후에도 사카모토 유지 작품에 자주 출연하고 있다. 2023년에는 사카모튜 유지가 각본을 맡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에 출연하여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3. 여담
국민적 가수 사와다 켄지와의 불륜 스토리가 유명한데, 사와다는 이미 1975년 이토 에미와 결혼했던 유부남이었으나 1982년 영화 출연으로 만난 다나카 유코와 불륜에 빠져 1987년 18억 1,800만엔의 위자료를 지불하고 이혼했다.[5] 이후 1989년 결혼해 지금까지 부부로 지내고 있다. 다나카 유코가 80년대 당시 가수로도 활발히 활동했는데, 사와다 켄지가 앨범 작업을 맡았었다.
[1]
결혼 전의 본명은 다나카 히로코. 예명인 유코와 한자는 같지만 읽는 방식이 다르다.
[2]
물론 당시에는 시청률 자체가 지금보다 높았지만, 50~60%는 당시로서도 엄청난 수치였다. 일단 일본은 인구가 1억2천인데다 공중파 갯수도 여러 개였기 때문에, NHK 연속 TV 소설이라 해도 당시 30%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었다.
[3]
다만 오싱의 시나리오집을 번역자 김균이 소설로 만든 것이 크게 성공하여, 한국에서도 오싱 자체는 인지도가 있다. 당시 한국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4]
모노노케 히메의 에보시 역 성우와
게드전기의 거미 역의 성우로도 활동했다.
[5]
일본 연예계 역사상 3위에 해당하는 위자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