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목사. 분단 전에는 '안악산골의 호랑이'라는 치유의 기적으로 유명하였다. 그 유명세로 인해 북한의 종교 와해 공작을 위한 단체인 친정부 종교 단체 조선기독교도련맹에 강제로 가입되고는 총회장으로 추대될 정도로[3] 크게 견제를 받던 인물이었으며,
대한민국 국군 입성을 환영하는 집회를 광고하다가
6.25 전쟁 도중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사망했다.[4]
김익두는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의 어느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희망에 의해 과거 시험에 급제하기 위해 주경야독으로 한문을 깨우쳤고, 6년 간의 학업 끝에 과거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였다. 과거 시험에 낙방한 절망 속에 있은지 얼마 안 된 1886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고, 삶의 허무함을 느끼며 영원함에 대한 의문을 가지며 아버지의 묘를 찾는 게 김익두에게 일상생활처럼 자리잡았었다.
그러다가 김익두는 상업에 종사하고 다니다가, 1893년 이후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하더니 술에 빠져 살면서 황해도 안악 일대를 중심으로 칼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깡패가 되어[5]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졌고, 날이 갈수록 행패가 더욱 강해져 마음놓고 살 수 없던 사람들은 경찰을 대동하였다. 그러나 그런 김익두를 잡으러 온 경찰들 또한 김익두에게 피습을 당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익두는 장터에서 복음을 전하던 여선교사와 마주하게 되어 전도지 한 장을 받게 되었고, 복음에 대한 호기심에 그 전도지 한 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도지에 적힌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말씀을 읽어보고는 세세토록이라는 단어에 영원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는 여러 날을 성경 말씀에 붙들려 다른 것을 할 수 없자[6], 주변 사람의 권유에 의해 자신도 궁금해하던 참이라며 당시 황해도 안악지역에 있던 안악교회에 처음으로 가 보게 된다. 당시 안악교회에서 설교하던 스왈런(한국명 소안련) 선교사의 설교[7]를 듣고는 강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영접하고 같은 해 7월에 세례를 받았다.
바로 다음 해인 1901년, 김익두는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교회 전도사로 교역에 첫 발을 들였고, 그해 10월에 황해도 신천으로 옮겨 장터와 길거리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전도에 열심을 쏟아 3명의 구도자를 얻어 교회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어느 부호의 헌금 800원[8]으로 예배당을 마련해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그 교회가 바로 신천교회였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1994년에 탈북한 탈북민 출신 목사 조바울이 외손자인데, 탈북 계기 및 과정이 다음과 같다.
함경북도 청진시에 위치한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서 근무하던 당시인 1994년에 퇴근길에 몰래 탄 화물차에 있던 꿩 18마리를 팔았는데, 그 꿩이
김정일이 사냥해 함경북도 도당 간부 18명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간 뒤 톈진시에서 인천항으로 가던 국제여객선에 불법 승선해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2012년에 정식 안수를 받았다.[9] 2014년에 약초 및 더덕을 팔러 자주 들르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에 아예 정착해 월악산 자락에 작은 개척교회를 세웠다.
[1]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
[복수전공]
[3]
김익두도 김일성을 지지한다는 선전을 위함이었다. 북한에서는 '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는
가짜뉴스를 제작하는 공작까지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4]
이때 교회당 안에서 성도들이 피난을 권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거든 내 손으로 지은 이 예배당에서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하며 끝까지 피난하지 않았다.
[5]
이때 그로 인하여 익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6]
김익두는 그의 옷 주머니 안에 그 전도지가 헤질 정도로 넣어가지고 다니며 보게 되었다.
[7]
당시 설교 제목 또한 "영생"이었다.
[8]
현재 가치로 환산 시 약 8억 원 정도다.
[9]
이 때 이름을 조영호에서 조바울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