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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용상(金用祥) |
본관 | 광주 김씨[1] |
출생 | 1876년 12월 21일 |
평안도
철산군 여한면 연수동 (현 평안북도 철산군 연수리)[2] |
|
사망 | 1950년 12월 20일[3] |
평안북도 선천군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6년 12월 21일 평안도 철산군 여한면 연수동(현 평안북도 철산군 연수리)의 빈곤 가정에서 아버지 김원옥(金元玉, 1842 ~ ?)과 어머니 밀양 박씨(? ~ ?. 1. 17) 사이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결혼한 직후인 1902년 온 가족을 이끌고 선천군 읍내면 천남리(현 선천군 선천읍)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 북장로교 위대모(Rev. Norman C. Whitmore, 魏大模)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위대모 선교사가 선천에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설립하려 하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위대모 선교사로부터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받았고 그 길로 진학하여 1911년 3월 제4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때 평안북도노회에서는 그에게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를 개척·설립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김석창은 그에 힘입어 같은 해 가을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자신이 개척한 선천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한편,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양준명· 홍성익 등과 함께 선천군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이 경성부에 방문하여 선천군을 통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선천 지역 유지들과 회합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함을 알리고자 그 의원단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이어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만세시위를 다시 일으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독립 희망의 열렬함을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광복군총영 결사대원 박치의(朴治毅)가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로 가서 이학필(李學弼)이 밖에서 망을 보게 하고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몇 종류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일단 피신하였다.
김석창은 이 '선천경찰서 투탄사건'에 연루되어 곧 체포되었고,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이에 상고까지 했으나, 같은 해 7월 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그는 고문의 여독으로 두 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를 얻었다. 출옥 후 1926년 9월 1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5대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평안북도노회장을 3차례 역임하는 등 교무에 몸바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그는 선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는데, 1946년에는 곽산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에 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해 오랫동안 몸져 눕기도 하였다. 1947년 진갑연에서 가족들에게, 이곳에서는 북조선로동당의 횡포로 앞으로는 신앙생활이 어려울 것을 예견하고, 모두들 남쪽으로 월남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신은 교회를 위하여 교인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목자로서 끝까지 돌보아야 할 임무가 있음으로 월남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교회를 지키고자 했다. #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유엔군이 북으로 진격하자 유엔군 환영 행사를 주도한 김석창 목사는 유엔군이 철수한 후 대한민국 국군이 후퇴하고 선천군이 다시 조선인민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그해 12월 20일경 총살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