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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17대 : 해군 제2참모차장 / 초대~9대, 17대~현임 : 해병대사령관 / 30대~현임 : 서북도서방위사령관 겸임 | |||||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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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101f><colcolor=#ffd800> 출생 | 1919년 3월 8일 | |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 (현 황해북도 승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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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1년 12월 30일 (향년 92세) | |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193호 | |
본관 | 김해 김씨[1] | |
재임기간 | 제5대 해병대사령관 | |
1962년 7월 1일 ~ 1964년 7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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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101f><colcolor=#ffcc00> 학력 |
메이지대학 법학부 (예과 / 중퇴) 육군대학 (수료)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국제대학[2] (국문과 / 학사) 단국대학교 (국문학 /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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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대한조선공사 사장 단국대학교 교수 광복회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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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
금성을지무공훈장 수훈 은성을지무공훈장 수훈 대통령표창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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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임관 | 군사영어학교,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1기) | |
복무 | 대한민국 해병대 | |
1949년 ~ 1964년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해병대) | |
주요 보직 |
대한민국 해병대 정보참모 제1해병연대 연대장 제1해병사단 사단장 대한민국 해병대 부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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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제주 4.3 사건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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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2. 생애
1919년 3월 8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현 황해북도 승호군)에서 태어났다.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하는 등 엘리트코스를 밟았지만 1936년 신사참배 거부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첫 항일운동 경력을 남겼다. 1943년에는 겸이포제련소의 용광로 폭파계획을 세우다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병대 창설 멤버들 다수가 간도특설대, 일본 해군 육전대 출신임을 상기하면, 김두찬의 항일운동 경력은 특기할만한 부분.광복 후 군사영어학교 시절 통위부 참위(소위)로 임관했으나 배정받았던 경리직이 마음에 들지 않자 경리직을 반납하고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하여 교육이수 과정에서 해군으로 전입하여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제주 4.3 사건이 벌어지고 이후 해병대가 제주도 계엄임무로 투입되자, 당시 정보참모 신분이던 김두찬은 예비검속 대상자의 총살을 지시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3]
6.25 전쟁에 해병대가 본격적으로 참전한 상황에서는 서해 도서작전과 동해 원산만 전면의 9개 도서 점령작전을 주도하여 동해안, 서해안에서 적의 보급물자와 병력이동을 완벽히 봉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예편 후에는 대한조선공사 사장과 광복회 고문을 역임했으며 단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80년에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11년 12월 30일에 별세하였으며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