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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金冠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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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2d2f34><colcolor=#fbe673,#f9d537> 피장자 | <colbgcolor=#fff,#1f2023> 이사지왕 | |
출토 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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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금관총 금귀걸이
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금관총 금귀걸이
사진 출처 : 영남일보 금관총 전시실
1. 개요
1921년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의 이사지왕의 무덤인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 신라시대 순황금 귀걸이 500여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2. 내용
사진 출처 : 중앙일보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 귀걸이 |
일제강점기인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등의 여러 황금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다양한 한국의 금귀걸이들로, 유물의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5세기경(서기 400년대)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금관총에서는 순금제 귀걸이, 금제와 은제 팔찌, 반지 등과 각종 구슬, 금제와 은제의 허리띠, 금동제 신발 등의 각종 장신구를 비롯하여, 도검, 갑옷(甲胄), 창신(槍身), 쇠화살촉(鐵鏃), 쇠도끼(鐵斧) 등의 무기류와 말안장금구, 말방울, 말띠장식, 교구, 혁대금구 등의 말갖춤류(馬具類), 신라토기, 목칠기, 유리용기, 쇠솥(鐵釜), 금속제용기, 조개제품 등 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곡옥(曲玉)을 포함한 각종 구슬류만도 무려 3만 점이 넘었으며, 다른 유물까지 합쳐 약 4만점이 넘는 신라시대 화려한 문화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금관총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귀걸이의 경우 수량이 많아서 일일이 세어보기 힘들었고, 무게로 재본 결과 황금의 총량만도 7.5㎏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금관총 이후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부 분류한 결과 약 500여점이 확인되었다.
황남대총 금귀걸이,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호우총 금귀걸이,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은령총 금귀걸이, 경주 월성로 금귀걸이, 금귀걸이 등과 함께 고신라시대 귀걸이 문화를 연구해볼 수 있다. 오직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고신라시대의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금관총 금제 허리띠 도난 사건 때 이 귀걸이들 중 일부도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