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세기 중반에 개발 및 생산된 초기 볼트액션 소총으로, 후술할 두 총은 연관성이 전혀 없는 별개의 총기이나 볼트액션 구조에 페이퍼 카트리지 & 퍼커션 캡 조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소총 모두 철자는 다르나 동일하게 "그린"이라고 발음된다.2. 미국에서 개발한 그린(Greene) 소총
Greene Rifle 그린 소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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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 볼트액션 소총 | ||
원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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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 ||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 1859년~ 1860년대 초반 | ||
개발 | 제임스 듀렐 그린 | ||
개발년도 | 1857년 | ||
생산 | A.H. 워터스 병기창 | ||
생산년도 | 1859년~ 1860년대 초반 | ||
생산수 | 4,500정 | ||
단가 | $36.96 ( 1862년 기준) | ||
사용국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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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전쟁 | 남북 전쟁 | ||
세부사항 | |||
탄약 | .53구경 페이퍼 카트리지 | ||
급탄 | 단발 | ||
작동방식 |
볼트액션 퍼커션 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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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열길이 | 889mm | ||
전장 | 1,340mm | }}}}}}}}} |
사격 영상 |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제임스 듀렐 그린의 본래 성은 "Green"이었으나, 자신의 아버지(제임스 다이먼 그린, James Diman Green)와 미들네임 이니셜까지 동일하였기에 구분을 위해서 자신의 성을 "Greene"으로 변경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다니던 그는 케임브리지 민병대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1] 남북 전쟁에 참전하여 앤티텀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 등에 참여하여 대령까지 진급했다가 1867년 명예 준장 계급으로 전역했다. 군인으로서도 유능했지만 그린의 주요 관심사는 무기 개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854년에는 자신이 설계한 그린 카빈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여 영국에 2,000정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그린 카빈 문서 참고하십시오.
제임스 그린은 그린 카빈에 뒤이어 1857년에 그린 소총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는데, 초기에는 미국 내에서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으나 바다 건너 러시아 제국과 이집트 왕국에 각각 3,000정과 350정의 판매 계약을 성사시켰다. 1862년에는 미군 병기부의 테스트를 받았는데, 후술할 디자인 문제 때문에 혹평을 받았으나 정당 $36.96씩 900정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군인이었던 그린은 계약된 총들을 생산할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매사추세츠주의 A.H. 워터스 병기창에서 생산을 담당했다. 3개국에 대한 계약 물량을 모두 합쳐 약 4,500정이 1859년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었다. 미군 계약 물량은 1863년 워싱턴 무기고에 전달되었으나,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고 치장물자로 계속 비치되어 있다가 1895년에 민간에 불하되었다. 그러나 약 250정의 물량은 앞선 3개국의 계약 물량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남북 전쟁 중에 매사추세츠주 민병대에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앤티텀 전투 전장에서 그린 소총의 탄약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 총이 실전에 투입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2]
그린 소총의 구조는 당대 볼트액션 소총들과 비교해 봐도 정말 특이했는데, 페이퍼 카트리지부터가 그랬다. 화약의 폭발력으로 탄환을 총구 밖으로 밀어낸다는 총기의 기본적인 상식에 따라 일반적인 (그리고 현대의) 탄약은 화약이 탄환의 뒤에 위치해 있으나, 그린 소총의 카트리지는 화약이 탄환의 앞에 들어가 있었다. 이는 화약은 전단에 위치해 있는 별개의 탄환을 발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들어가 있고, 카트리지에 동봉된 후단의 탄환은 연소 가스가 역류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밀봉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사유로 동시기에 개발된 칼리셔 앤드 테리 카빈 또한 화약 후단에 윤활제에 적신 패드가 카트리지에 동봉되어 있었으나, 차탄이 연소 가스 밀봉 역할을 하는 설계는 확실히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 카트리지의 구조 때문에 총기의 작동 구조 또한 특이했는데, 사격 후 장전하기 전에 가스 밀봉 역할을 하고 있던 차탄을 앞으로 밀어서 약실 위치로 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에 볼트를 앞으로 미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또한, 당대의 일반적인 총기들은 퍼커션 캡이 총의 위쪽에 씌워졌던 반면 그린 소총의 퍼커션 캡은 총의 아래쪽에 씌워져야 했다. 때문에 총의 해머도 총의 아래쪽에 붙어 있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언더해머 구조의 소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다른 총기들이 이런 방식으로 캡을 안 씌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미군에서의 테스트에서는 씌워 놓은 퍼커션 캡이 너무 쉽게 떨어져 나간다는 단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타원형 구조의 내부 총열 또한 특이점으로, 장축은 .54인치였던 반면 단축은 .53인치였다. 약실부터 총구까지 이 타원이 회전하는 형태의 총열이었기 때문에, 별도의 강선이 없음에도 탄환이 타원의 단축과 맞물려 강선과 같은 회전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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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국에서 개발한 그린(Green) 소총
Green Percussion Rifle Пушка система Грин 그린 퍼커션 소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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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츠 소총(위) / M1867 그린 소총(아래) | |||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 볼트액션 소총 | ||
원산지 | [[틀:깃발| | ]][[틀:깃발|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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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 ||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 1867년~ 1878년 | ||
개발 | C.E. & J 그린 | ||
개발년도 | 1859년~ 1860년 | ||
생산 | 크라구예바츠 군사 기술 연구소 | ||
생산년도 | 1867년~ 1869년 | ||
생산수 | 27,000정 | ||
사용국 |
[[세르비아 공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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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전쟁 |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 ||
기종 | |||
원형 |
패턴 1853 엔필드 로렌츠 소총 (M1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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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생형 | M1867 | ||
세부사항 | |||
탄약 | 13.8mm | ||
급탄 |
브리치로딩 단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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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방식 |
볼트액션 퍼커션 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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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 1,335mm | ||
중량 | 4.5kg | }}}}}}}}} |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통해 전장식 총기에 대한 후장식 총기의 우위가 확실시되자, 각국은 기존에 제식으로 보유하고 있던 강선 머스킷을 후장식 소총으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초창기에는 전장식 구조를 후장식으로 전환하는 정도의 개조가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로렌츠 소총을 벤츨 소총으로 개조했고, 미국은 스프링필드 M1861을 M1865로 개조했다. 영국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기존의 제식 머스킷인 패턴 1853 엔필드를 후장식으로 개조하고자 하였고, 그린 소총 또한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이다.
그린 소총은 영국의 C.E. & J 그린 형제가 개발했으며, 초기의 후장식 소총은 브리치블록이나 폴링 블록 등의 방식을 사용한 데 비해 원시적인 볼트액션 방식을 채용했다는 특징이 있다.[3] 그러나 드라이제나 샤스포 소총 같이 탄약에 뇌관까지 붙어 있는 방식이 아니고, 샤프스 소총처럼 구멍이 뚫린 페이퍼 카트리지를 따로 삽탄하고 격발은 퍼커션 캡을 통해 해야 했다. 뇌관과 탄환이 일체화된 당대의 후장식 소총에 비해 명백히 뒤떨어지는 구조였던 탓에 그린 형제의 설계는 금속 탄피와 브리치블록 구조를 사용하는 스나이더-엔필드에 밀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린 형제의 설계는 전장식 총기를 개조하는 데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구조도 단순하다는 장점도 있었기 때문에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국가에게 알맞은 선택일 수 있었는데, 세르비아 공국이 바로 이에 해당했다. 1865년 당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인 속국으로서 자치권을 인정받은 상태였으나 이웃 국가 및 잠재 적국의 군사력 증강에 따른 안보적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4] 그에 따라 세르비아도 자국의 정규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소총을 구매할 예산이 부족했던 세르비아는 기존의 전장식 총기를 후장식으로 개조하고자 했고, 마침 남북 전쟁이 끝나면서 무더기로 시장에 풀린 로렌츠 소총 27,000정을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로렌츠 소총을 값싼 가격에 후장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그린 형제의 설계였다.
1867년부터 크라구예바츠의 군사 기술 연구소[5]에서 로렌츠 M1854 소총을 그린 소총으로 개조하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869년에 27,000정의 개조를 모두 끝마치고 M1867이라는 새로운 제식명칭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실전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자마자 그린 M1867은 여러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탄약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페이퍼 카트리지는 쉽게 찢어지고 날씨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격발 후 찌꺼기가 많이 남아 자주 청소를 해 줘야 했다. 무엇보다 퍼커션 캡은 페이퍼 카트리지 용으로 설계된 물건이 아니었기에 불발률이 심각했다. 결국 M1867 그린 소총은 불발률 50%라는, 제식 소총이라고 믿을 수 없는 처참한 결과를 내고 말았다.
결국 세르비아는 M1867 그린 소총을 2선급으로 도태시키고 금속 탄피를 사용하는 피보디 방식의 M1870을 주력으로 밀어 주기로 했다.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진행된 세르비아-오스만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로 최전선의 병력은 피바디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그린 소총은 후방 병력에 지급되었다. 또한 전쟁 중 6,000정이, 전쟁이 끝난 후 모든 그린 소총이 피바디로 개조되었다. 현재 M1867 그린 소총의 유일한 실물은 베네치아의 해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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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고 자료
- 그린(Greene) 소총
-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Durrell_Greene
- https://guns.fandom.com/wiki/Greene_rifle
- https://www.nramuseum.org/guns/the-galleries/a-nation-asunder-1861-to-1865/case-15-union-muskets-and-rifles/greene-breechloading-underhammer-percussion-rifle.aspx
- https://collegehillarsenal.com/greene-rifle-scarce
- 그린(Green) 소총
[1]
원래 그린은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어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진학을 포기했다.
[2]
앤티텀 전투는 미군과 계약이 성사되기 1년 전인 1862년에 벌어졌으므로, 민병대 측에서 자체적으로 그린 소총을 조달해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의 초기 볼트액션 소총으로
칼리셔 앤드 테리 카빈이 있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벤츨 소총에서
베른들 소총으로 교체 중이었으며, 오스만 제국도 스나이더-엔필드를 채택한 상황이었다.
[5]
자스타바의 전신 쯤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