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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7:19:02

그라임스 자매 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자매의 실종3. 자매를 찾아라4. 얼어붙은 자매5. 자매가 살아있었다?6. 용의자들
6.1. 에드워드 베드웰6.2. 맥스 플라이그6.3. 찰스 르로이 멜퀴스트
7. 이후

파일:Grimes_Sisters.jpg
왼쪽이 언니 바바라, 오른쪽이 동생 패트리샤.
Murder of the Grimes sisters

1. 개요

그라임스 자매 살해 사건은 1956년 12월 28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시에서 발생한 미해결 살인 사건으로, 15세 바바라 그라임스(Barbara Grimes)와 여동생인 12세 패트리샤 그라임스(Patricia Grimes) 자매가 영화관에 갔다가 실종되고 1개월 후에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

시카고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실종자 수색에 들어갔던 사건 중 하나이며 일리노이주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은 카운티인 쿡 카운티(Cook County)에서 가장 노동 집약적(labor-intensive)이었던 사건임과 동시에 시카고의 대표적 미제사건 중 하나이다.

2. 자매의 실종

1956년 12월 28일, 조셉 코넬리우스(Joseph Cornelius)와 롤레타 마르셀라 그라임스(Lorretta Marcela Grimes) 사이에서 태어난 7명의 자녀 중 피살자 바바라와 패트리샤는 영화 Love Me Tender의 상영회를 보기로 결정했다.[1] 자매들은 어머니에게 자정 전에 집에 오겠다고 약속하고 대략 오후 7시 30분에 집을 떠났다.

자매가 상영회를 보려고 한 브라이튼 극장은 집 에서 약 1.5마일(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자매들이 어떻게 브라이튼 극장까지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패트리샤의 학교 친구 도로시 웨이너트(Dorothy Weinert)는 오후 9시 30분경 자매들이 팝콘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그들의 태도에서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두 자매 모두 Love Me Tender의 두 번째 상영을 보기 위해 머물렀고, 두 번째 상영이 끝나면 자매는 아무리 늦어도 오후 11시 45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딸들이 자정까지 집에 도착하지 않자, 그들의 어머니인 롤레타는 그들의 누나인 테레사(17세)와 조이(14세)자매에게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버스가 세 대가 지나갈 동안 정류장에 소녀도 내리지 않자 언니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롤레타는 이미 친구들을 통해 바바라와 패트리샤가 친구들의 집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테레사와 조이가 자매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12월 29일 오전 2시 15분에 시카고시 경찰국에 실종 신고를 냈다.

3. 자매를 찾아라

그라임스 자매의 실종은 쿡 카운티 역사상 가장 큰 실종 사건 중 하나였고, 소녀들을 찾기 위한 시 전역의 수색이 신속하게 시작되었다. 12월 29일에 시작된 지상 수색 작업은 수백 명의 지역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아 브라이튼 공원 전역을 방문하여 조사를 실시했으며 수많은 운하와 강에서 수색 작업을 진행했다 . 또한 15,000장 이상의 전단지가 지역에 배포되었으며, 수녀회에서는 자매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가로 1,000달러의 보상금을 약속했다. 30만 명이 심문을 받게 되며, 약 2,000명은 집중 조사를 받았지만 실제 체포와 기소는 범죄를 자백한 두 명에 대해서만 이루어졌다. 이중 한 명인 에드워드 베드웰(Edward Bedwell)은 장기간의 심문을 받은 후 자백을 강요 당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증거는 거의 나오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건진 증언은 12월 28일에 브라이튼 극장에 있었던 몇몇 십대들의 증언으로, 자매가 엘비스 프레슬리와 외모가 비슷한 청년과 대화를 하다가 청년이 운전하는 머큐리 모델 차량에 탑승하는게 목격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여느 미제 실종사건이 그렇듯 처음에 사건에 배정된 여러 조사관은 자매들이 가출을 했거나, 자스스로 남자를 따라갔다고 일반화지었다. 약 1주일이 지난 후에야 조사관은 이들의 실종을 실종 사건으로 심각하게 간주하여 처리하기 시작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자매들이 프레슬리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테네시 주 내슈빌 로 여행을 갔을 ​​수도 있고, 프레슬리의 생활 방식을 모방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집을 떠났다는 이론도 많이 있었다.

4. 얼어붙은 자매

1957년 1월 22일, 레너드 프리스콧(Leonard Prescott)이라는 건설 노동자는 최근 내린 폭설로 눈이 쌓인 윌로우 스프링스(Willow Springs)의 저먼 처치 로드(German Church Road)를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가드레일 뒤에서 "이 살색의 것들"이라고 묘사한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고 그 형태가 마네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프레스콧은 나중에 아내 마리와 함께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 "무언가"는 실제로 나체로 얼어붙은 그라임스 자매의 시체였으며 이를 알게된 프리스콧의 부인 마리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시골 마을이 시신 유기 현장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소녀들의 시신은 가드레일 바로 뒤의 눈 덮인 평평한 수평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바바라는 다리를 몸통쪽으로 약간 끌어올린 채 왼쪽으로 누워 있었고 패트리샤는 언니의 머리를 몸으로 덮은 채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고, 머리도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바바라의 가슴에서는 송곳에 찔린 상처와 비슷한 세 개의 상처가 발견되었고, 얼굴과 머리에는 둔기로 추정되는 무언가에 의해 생긴 부상이 보였다. 패트리샤의 얼굴과 몸에서는 타박상과 유사한 부상이 많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아버지 조셉에 의해 그라임스 자매로 확정지어졌다.

부검 결과, 전문가들은 위 내용물을 조사하여 두 소녀가 12월 28일 늦은 저녁 또는 12월 29일 이른 아침에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 전문가들은 소녀들의 몸에서 발견된 상처 중 상당수가 설치류에 의해 가해진 것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실제 자상은 사망 후 가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 두 소녀의 몸에서 명백히 치명적인 상처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망하기 전에 술에 취하거나 약을 먹은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시신은 야외에서 발견된 것 치고는 유독 깨끗했지만 자매들의 옷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패트리샤는 성폭행이 없었으나 바바라는 강제적이 아닌, 서로간의 합의에 의해 진행된 성관계는 있을 수 있다고 밝혀졌다. 자매의 정확한 사인은 저온 노출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추정됐다.

부검을 수행한 검시관 중 한 명인 월터 맥캐런(Walter McCarron)은 자매들의 시신이 최종 발견되기 전까지 며칠 동안 도로의 가드레일 뒤에 발견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고 추측했으며, 맥캐런은 1월 9일 즈음에 눈이 그 지역을 덮었기 때문에 소녀들의 시신이 3주 이상 발견되지 않은 채 누워 있었으며, 발견되기 직전에 눈이 급속하게 녹은 덕분에 시신이 발견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쿡 카운티 검시관 실의 수석 조사관인 해리 글로스(Harry Glos)는 공식적인 사망 시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소녀들의 얼굴에 폭력의 흔적이 많이 있었다며, 설치류에 의한 훼손이 아닌, 자매가 살아있을 때 폭행을 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글로스는 또한 자매들의 시신에서 발견된 얇은 얼음층을 보면 그들이 적어도 1월 7일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1월 7일까지 이들에게 체온이 있어야 몸에서 열이 발생해 위에 쌓인 눈이 살짝 녹으며 얼음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글로스는 두 소녀 모두 성폭행을 당했다고 덧붙였다.

5. 자매가 살아있었다?

마치 해리 글로스의 추측을 뒷받침하듯, 1956년 12월 28일 브라이튼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25일 후 시신으로 발견될때까지, 그 사이에 시카고 안팎에서 확인되지 않은 자매의 목격 사례가 시카고 경찰국에 신고되었다.

대부분의 증인들은 자매가 아처 애비뉴(Archer Avenue)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 도시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고, 이 증인들 중에는 버스 운전사도 포함됐다. 자매들은 대략 오후 11시 5분쯤 극장과 집 사이의 중간 지점인 웨스턴 애비뉴(Western Avenue)에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증언들이 사실일 경우, 자매들이 왜 웨스턴 애비뉴에서 하차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로저 미나드(Roger Menard)라는 청년은 12월 28일 Love Me Tender 상영회에 참석했으며 자매의 뒤에 앉았다고 조사관에게 증언했다. 미나드에 따르면, 두 명의 10대 소년이 탄 검은색 1949년식 머큐리 세단이 소녀들 옆에 멈췄고, 자매는 이를 보고 웃었다고 한다.

에드 로던(Ed Lorden)과 알 자스트로(Earl Zastro)라는 십대 소년들은 12월 28일 오후 11시 30분경에 소녀들의 집 근처를 운전하던 중 35번가에서 자매를 보았다고 수사관에게 알렸다.

잭 프랭클린(Jack Franklin)이라는 경비원은 나중에 수사관들에게 두 소녀가 극장을 떠난 지 약 12시간 후인 12월 29일 오전에 로렌스와 센트럴 파크 애비뉴 근처에서 어느 소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프랭클린은 후에 그 소녀들이 그라임스 자매라고 결론내렸다. 그가 이 대화를 기억한 유일한 이유는 두 소녀가 무례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날, 바바라의 친구인 주디 버로우(Judy Burrow)는 수사관에게 오후 2시 30분쯤에 아처 애비뉴(Archer Avenue) 서쪽 방향으로 걷고 있는 자매들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29일 저녁에는 패트리샤와 같은 학년 캐서린 보락(Catherine Borak)이 패트리샤가 자신이 있던 레스토랑 앞을 지나갔다며 경찰에 알렸는데 이때 패트리샤는 처음보는 두 명의 어린 소녀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캐서린의 목격 이후 6시간이 지난 오전 12시 45분에 시카고 시내의 클라크 극장에서 계산원 케이트 앤더슨(Kate Anderson)이 자매를 목격했는데, 이때는 바바라와 패트리샤를 모두 보았다고 주장했다.

버나드 노튼(Bernard Norton)이라는 철도 차장은 글렌뷰(Glenview) 북쪽 교외에 있는 오대호 해군 훈련 센터(Great Lakes Naval Training Center) 근처에서 기차에 타고 있는 두 소녀를 목격했다고 신고했다. 노튼에 따르면 두 소녀는 "테리"와 "래리"라는 두 명의 선원을 찾고있었다고 한다.

12월 30일 오전 5시 40분, 웨스트 매디슨 1340번 거리(1340 West Madison)에 있는 레스토랑의 주인은 두 소녀를 모두 봤다고 증언했는데, 이때 패트리샤는 취한듯이, 또는 아픈 듯이 비틀거리며 걸었다고 한다. 이 위치는 브라이튼 극장에서 5.5마일 이상 떨어져 있었다.

1957년 1월 1일에는, 소녀들이 다먼 애비뉴(Damen Avenue)의 버스에서 목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다음 주, 웨스트 61번가에 있는 유니티 호텔의 야간 직원은 두 명의 소녀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방을 빌려주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 점원은 문제의 소녀들이 그라임스 자매라고 확신했다.

1월 3일, 잉글우드(Englewood)의 백화점 직원 3명은 두 소녀가 매장의 레코드 카운터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때 자매들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1월 14일, 이른 시간에 패트리샤의 동급생 산드라 톨스탄(Sandra Tollstan)의 어머니 앤(Ann Tollstan)은 익명의 전화 두 통을 받았는데 첫 번째 통화에서는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약 15분 후 두 번째 전화에서는 "두려워하고 우울한 느낌의" 젊은 여성이 "당신인가요, 산드라? 거기 산드라가 있나요?"라고 물어왔다. 앤이 딸에게 이를 알리려 하자 전화는 끊어졌다. 앤 톨스탄은 발신자가 패트리샤였다고 확신했다.

1월 17일, 펄 네빌(Pearl Neville)이라는 여성이 수사관에게 연락하여 1월 9일 내슈빌 화장실에서 두 소녀를 만났으며 일자리를 알아봐주는 국영 기관에 같이 갔다고 증언했다. 네빌에 따르면 두 소녀 모두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이 기관의 직원은 나중에 사진을 통해 그 자매가 그라임스 자매가 맞다고 했으며 두 소녀 모두 지원서에 "Grimes"라는 성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 목격담은 자매가 실제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내슈빌로 가지 않았나 하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1월 19일, 엘비스 프레슬리가 직접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나와 자매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카고 선-타임스(Chicago Sun-Times)의 칼럼니스트인 앤 랜더스(Ann Landers)는 "자매들이 경찰에 의해 차에 강제로 탑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한 소녀가 쓴 익명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에는 부분적인 차량 번호가 적혀있었지만 이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편지의 작성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실제 내용도 확인되지 않았다.

1957년 5월, 롤레타 그라임스는 자신의 딸들의 옷을 벗기고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한 누군가로부터 익명의 전화를 받았는데, 이 전화는 에드웨드 베드렐과 같은 용의자를 비난하는 경찰의 노력을 비웃으며 자신이 실제로 범인일 수 있다는 정보로 전화 통화를 끝냈다. 가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어린 딸에 대해 다른 누구도, 심지어 경찰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소녀의 발가락이 발에서 꼬여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이 말을 한 직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라임스 가족은 소녀들의 실종 이후 수많은 사기 전화를 받았지만 이 전화만큼은 기억에 남는 것이 너무나도 섬뜩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6. 용의자들

6.1. 에드워드 베드웰

에드워드 리 "베니" 베드웰(Edward Lee "Bennie" Bedwell)은 21세의 반 문맹 노숙자였으며 원래 테네시 출신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매우 닮았고 키가 컸다고 한다. 당시 베드웰은 웨스트 매디슨 스트리트(West Madison Street)의 한 레스토랑에 고용된 상태였는데 가게 주인 미니 듀로스(Minnie Duros)에 따르면, 12월 30일에 베드웰과 다른 젊은 남성이 그라임스 자매와 비슷한 소녀들과 있던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듀로스는 이 사실을 1월 24일 경찰에 전달했고 베드웰은 체포되어 3일간 심문을 받았다.

베드웰은 사람을 착각했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공식적으로 기소되었다. 1957년 1월 27일, 자매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그는 자신과 윌리엄 콜 윌링햄(William Cole Willingham)이라는 28세의 지인이 실제로 12월 30일부터 1월 7일까지 자매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14페이지 분량의 자백서를 작성했다. 이 자백서에 따르면, 자매들이 그의 성적 요청을 거절하자 그와 윌링햄이 자매들에게 핫도그를 먹인 직후, 소녀들을 구타하고 나체 상태로 눈이 가득한 도랑에 던졌다고 한다. 이 자백서를 읽은 후 어머니 롤레타 그라임스는 "거짓말입니다. 내 딸들은 웨스트 매디슨 스트리트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윌링햄은 12월 30일 이른 시간에 베드웰 그리고 두 명의 소녀와 함께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그 소녀들이 그라임스 자매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살인에 연루된 사실도 강하게 부인했다. 베드웰은 나중에 자신이 수사관에게 제공했던 자백을 철회했으며, 자백을 하면 자신이 석방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4일 동안 구금된 후에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두 소녀에 대한 부검 보고서도 피해자의 혈액이나 소화 기관에서 알코올이나 핫도그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소녀들이 구타를 당해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백이 잘못되었음을 뒷받침했다. 또한 베드웰은 1956년 12월 28일 오후 4시 19분부터 12월 29일 오전 12시 30분까지 자신의 근무지에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월 6일, 베드웰은 누군가 보석금을 대신 내주며 풀려나게 되었다. 무죄 판결을 받은 같은 해, 베드웰은 플로리다주 오크힐 에서 13세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72년 11월에 사망했다.

6.2. 맥스 플라이그

맥스 플라이그(Max Fleig)는 자매 살해 사건의 17세 용의자로, 비공식적인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 과정에서 살인을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테스트를 증거로 사용할 법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를 기소 없이 석방해야 했다. 플레이그는 나중에 다른 젊은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6.3. 찰스 르로이 멜퀴스트

2013년, 은퇴한 웨스트시카고 경찰관 레이먼드 존슨은 이 사건의 범인이 당시 23세였던 찰스 르로이 멜퀴스트(Charles LeRoy Melquist)라는 이름의 아동 살인자라고 추측했다.

멜퀴스트는 1958년 9월 보니 리 스콧(Bonnie Leigh Scott)이라는 15세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 소녀는 멜퀴스트와 살해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스콧의 시신은 실종 된 지 2개월 후 10마일도 안 떨어진 곳에서 참수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이 장소는 그라임스 자매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었다. 스콧의 시신이 발견된 후 수사관들은 이번 살인 및 시신 처리에서 그라임스 자매의 유사점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퀴스트는 그의 변호사가 그가 심문대상이 되는 것을 막아서 그라임스 자매 살인 사건에 대해 질문을 받지 않았다 .

한편 보니 리 스콧의 시신이 발견된 다음 날, 로레타 그라임스는 스콧의 살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개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경우 전화를 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또 다른 완전 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은 경찰이 해결하지 못할 또 다른 범죄이며 베드웰이나 배리 쿡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전화를 건 사람은 1957년 5월에 롤레타에게 연락하여 언론에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던 패트리샤의 발 기형을 폭로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찰리 멜퀴스트는 그라임스 자매의 죽음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고 2010년에 사망했다.

7. 이후

실종된 후 딸의 시신이 발견되기까지 몇 주 동안 롤레타 그라임스는 일을 할 수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라임스 가족의 친구와 이웃, 그리고 자매의 급우와 교사는 가족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조직했고 지역 언론과 의회를 통해 모금되며, 기부금을 모았다. 결과적으로 모금액을 통해 바바라와 패트리샤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바바라 그라임스와 패트리샤 그라임스는 1월 28일 일리노이주 알십에 있는 성묘 묘지에 나란히 안장되었으며 장례식장에서는 모든 서비스 비용을 공짜로 진행해줬다.

20년 정도 지난 1975년, 메릴랜드에서 비슷하게 12세와 10세의 라이언 자매가 납치,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라이언 자매 사건은 30년도 넘게 지났지만 해결이 되었다는 점.

그라임스 자매 실종 18주년이 되는 날, 처음부터 소녀 살인 사건 수사에 참여해 계속 수사에 배정된 유일한 형사 어니스트 스피오토(Ernest Spiotto)는 언론에 믿을만한 용의자가 없다고 발표했다. 공식적으로 그라임스 자매의 살인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사건 당시 11세였던 남동생 제임스 그라임스는 2013년에 "결코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공개적인 '사건 재개'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1] 바바라와 패트리샤는 떼어놓을 수 없는 친한 자매였으며, 그들이 각각 다녔던 토마스 켈리 고등학교와 세인트 모리스 가톨릭 학교에서 유독 세심한 학생 으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