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
구로다 내각 黒田内閣 | Kuroda Cabi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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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6px -11px" | 1888년 4월 30일 ~ 1889년 10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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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이토 내각 | 제1차 야마가타 내각 | }}} | |
<colbgcolor=#808080> 내각총리대신 | 구로다 기요타카 / 제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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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8년에서 1889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내각으로 내각총리대신은 구로다 기요타카였다. 초대 총리이자 조슈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제정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번벌간 총리직을 교대로 맡기로 한 약속에 따라 사쓰마벌의 중심 중 하나로 이토 내각에서 농상무대신을 지낸 구로다 기요타카가 다음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 것.사실 사쓰마벌의 기존 핵심인물들이 세이난 전쟁과 이후 수습 과정을 거치며 대거 사라진 탓에 총리직을 맡을만한 중량급 인물이 구로다 외에 드물었던 것도 이유가 됐다.
1889년 10월 25일, 구로다 기요타카가 사임을 표한 후 그 해 12월 24일까지 산조 사네토미 내대신이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리로서 내각을 이끌었는데, 이를 산조 잠정 내각이라고 한다. 메이지 덴노가 구로다 총리의 사표만 수리하고 나머지 각료들은 대부분 유임시키면서 산조에게 임시로 내각을 맡기며 생긴 일이다.
아직 대일본제국 헌법이 공포는 되었어도 발효는 되지 않아 제도의 운용과 관련해 천황의 재량이 무제한으로 허용되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2. 인사
2.1. 국무대신
관직 이름 | 대수 | 이름 | 취임일 | 퇴임일 |
내각총리대신 | 2대 | 구로다 기요타카 | 1888.04.30 | 1889.10.25 |
내각총리대신 | 잠정 | 산조 사네토미 | 1889.10.25 | 1889.12.24 |
외무대신 | 3대 | 오쿠마 시게노부 | 1888.04.30 | 1889.12.24 |
내무대신 | 2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 | 1888.04.30 | 1889.12.24 |
대장대신 | 2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 1888.04.30 | 1889.12.24 |
육군대신 | 2대 | 오야마 이와오 | 1888.04.30 | 1889.12.24 |
해군대신 | 2대 | 사이고 주도 | 1888.04.30 | 1889.12.24 |
사법대신 | 2대 | 야마다 아키요시 | 1888.04.30 | 1889.12.24 |
문부대신 | 2대 | 모리 아리노리 | 1888.04.30 | 1889.02.12 |
대행 | 오야마 이와오 | 1889.02.16 | 1889.03.22 | |
3대 | 에노모토 다케아키 | 1889.02.16 | 1889.03.22 | |
농상무대신 | 대행 | 에노모토 다케아키 | 1888.04.30 | 1888.07.25 |
4대 | 이노우에 가오루 | 1888.07.25 | 1889.12.23 | |
체신대신 | 2대 | 에노모토 다케아키 | 1888.04.30 | 1889.03.22 |
3대 | 고토 쇼지로 | 1889.03.22 | 1889.12.23 |
2.2. 기타
관직 이름 | 대수 | 이름 | 취임일 | 퇴임일 |
반열[1] | 1대 | 이토 히로부미 | 1888.04.30 | 1889.10.30 |
내각서기관장 | 2대 | 고마키 마사나리 | 1888.04.30 | 1889.12.24 |
법제국장관 | 3대 | 이노우에 고와시 | 1888.04.30 | 1889.12.24 |
[1]
무임소대신의 기능을 수행했으나 사실상 추밀원의장을 국무대신으로 명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