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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문화혁명소조원 | ||
본명 | 저우위펑(周玉峰) | |
한문 | 關鋒 | |
간체 | 关锋 | |
한국식 독음 | 관봉 | |
영문 | Guan Feng | |
출생 | 1919년 7월 중화민국 산둥성 경운현 최구진 주신촌 | |
사망 | 2005년 6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직업 | 정치가 | |
종교 | 없음( 무신론) |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1956년 중앙정치연구실에 전근되어 철학팀장을 맡은 이래 <홍기> 편집위원으로서 반우파 투쟁에 열성적으로 임하고 '반혁명분자' 규탄에 앞장섰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으로 인민일보와 홍기에 류사오치, 펑더화이 일파로 규정된 인사들을 비난하고 홍위병을 선동하는 사설을 여러차례 게재하는 등 혁명의 광기를 증폭시키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반영감정을 부추기다가 주중 영국 대사관 점령 사건을 야기해 중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되어 1982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철학 연구에 매진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관펑은 1919년 7월[1] 산둥성 경운현 최구진 주신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저우위평(周玉峰)이며, 수산(秀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20세 때 공산당 지하활동에 참가하면서 이름을 관펑으로 개명했고 죽을 때까지 이 이름을 사용했다.관펑은 어렸을 때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서당에서 2년간 공부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 공산당 지하조직을 접했고 1933년 겨울 산둥 경운현 사범학교에 다닐 때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관펑은 1937년 9월 중공 기노변구 항일구국군 제1로군 정치부 주임에 취임했고 1938년 중국 산둥성 낙릉현 당서기에 부임했다.
1944년 중공 산동분국 발해구 행서 교육과장을 역임한 그는 1948년 10월 발해 후기 사범학교[2]를 설립해 교장을 맡았다. 1949년 이후엔 <여명보(黎明報)>사 사장을 역임한 뒤 1950년 2월 중국 공산당 동분국 선전부 이론교육처장으로 전보되었다. 1952년 9월, 관펑은 산둥 정치학교 교장을 겸임했고 뒤이어 제3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1955년 4월 중앙당교 제4중급 당교 부총장을 역임했다.
2.2. 마오이즘의 철학자
관펑은 중국 공산당 동분국에서 근무할 때 캉성과 알게 되었다. 캉성은 그가 혁명 이론을 숙달했다며 크게 칭찬했고, 관펑은 1956년 캉성의 추천으로 베이징에 차출되어 중앙정치연구실에 근무했다. 중앙정치연구실은 중난하이에 설치된 고급연구 자문참모기구로, 당시 이곳에 근무한 사람들은 천보다, 아이쓰치(艾思奇), 후셩(胡绳), 톈자잉(田家英) 등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조예가 깊고 정치 경험이 풍부한 거물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사상계통팀을 구성할 때 조장을 맡아 당 고위층이 참관한 간행물 <사상계 동태> 편집을 담당했다.1956년 11월 중순, 중국 인민대학교 철학과는 펑유란(馮友蘭)을 초청해 학술 보고대회를 열었다. 펑유란이 다룬 주제는 중국 철학적 유산에 관한 것이었다. 펑유란의 연설 전문은 1957년 1월 8일 <광명일보>에 게재되었다. 오전계(吳傳啟)는 펑유란의 '중국 철학유산을 계승하자'는 의견을 "추상의 계승법'이라고 간주했고 관펑은 오전계의 해석은 펑유란의 견해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평가했으며 펑유란 자신도 이를 인정했다. 관펑은 펑유란의 '추상적 상속법'을 비판하는 많은 기사를 작성했으며 "추상적 상속법은 철학적, 방법론적 수정주의"라고 간주했다. 관펑은 펑유란의 주장에 반대하며 "3가지 법칙을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그가 없애자고 주장한 3가지 법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떤 철학적 명제의 특별한 의미를 결정하고 그 일반적인 의미를 물려받는다.
둘째, 어떤 철학적 명제의 중요성을 결정하지 않고 다른 의미를 물려받는다.
셋째, 개별 요소의 일부를 계승하고 전체적인 의미를 부정한다.
둘째, 어떤 철학적 명제의 중요성을 결정하지 않고 다른 의미를 물려받는다.
셋째, 개별 요소의 일부를 계승하고 전체적인 의미를 부정한다.
당시 펑유란은 부르주아 계급의 교수로, 관펑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간주되었다. 베이징 대학 철학과 졸업생 맹상재(孟祥才)는 졸업식 연설에서 풍유란에 대한 비판 중 관펑의 비판 수준이 가장 높다고 평가했다.
1957년 중국 공산당은 반우파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중앙정치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던 관펑은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공격한 우파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 당 중앙에 보고했다. 또한 그는 우파에 대한 반격 기사를 써 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에 투고했다. 1957년 8월 26일에 중국청년보에 실린 <모든 지도계급은 한계가 있다는 문장에 반박한다>는 그의 글은 우파에 대한 반박글 중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관펑은 야오원위안, 왕리와 함께 좌파 신예가 되어 중앙에 진출할 수 있었다.
1958년, 관펑은 홍기 편집부로 발탁되어 마오쩌둥이 집필한 <사상이론동향>을 편집했다. 관펑이 쓴 자료와 글은 마오쩌둥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홍기를 주관하는 천보다도 관펑을 고평가했다. 그리하여 관펑은 오래지 않아 홍기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광명일보에 '중국 철학사 연구방향'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중국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마오쩌둥 사상의 지도 아래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모택동은 이 문장을 보고 관펑의 해박한 철학 지식에 크게 칭찬했다. 관펑은 뒤이어 양헌진(杨献珍)의 '합이양일(合二而一)'이론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는 양헌진의 관점은 계급 대립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계급 투쟁을 부정하고 계급 조화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본 마오쩌둥은 관펑에 대한 호감을 더욱 두텁게 가졌다.
1961년 2월 11일, 관펑은 광명일보에 '허밍(何明)'이란 필명으로 <관례는 무엇인가? 지도원칙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었다. 2월 15일, 마오쩌둥은 이 글을 보고 "좋은 글이다."라는 평을 남기고 천보다에게 한번 읽어보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이듬해 측근들이 관펑이 허밍이란 필명으로 쓴 에세이를 마오쩌둥에게 건네자, 마오쩌둥은 읽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나는 허밍의 문장을 일찍 보았는데, 그런대로 괜찮았다."
1962년 11월 6~12일 제남에서 공자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이때 관펑도 이 토론회에 참석했다. '철학연구' 편집부장 임관시(林聿時)는 토론회를 준비하기 위해 16,000단어에 달하는 연설문을 작성했다. 전국 16개 성에서 온 노인, 청년 전문가, 학자 등 160여 명이 모인 토론회 당일 밤, 관펑은 전 철학연구실 동료 두명을 찾아가 회의 논문을 제출했다. 이후 그들은 밤새 글을 썼고 다음날 오전 대회 진행자에게 일정을 변경해 4명 중 2명이 발언하게 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관펑은 토론회에서 계급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계층의 근본 이익을 이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계급을 초월한 사상 체계와 사상가는 없다고 발언했다. 또한 그는 공자의 철학, 정치, 윤리설은 계급을 초월하여 영원불멸하거나 비판없이 계승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1967년 1월, 야오원위안은 1962년 공자토론회가 "부르주아-우익 세력의 오만힌 모임"이라고 비난하는 논평을 발표했고 인민일보도 공자토론회를 우파 세력의 독이 가득 담긴 모임이라고 공격했으며 토론회에서 공자를 옹호한 이들은 큰 탄압을 받았다.
2.3. 문화대혁명의 일원
1965년 11월 10일, 야오원위안은 베이징 부시장 우한의 희곡 '해서파관'에 대한 평론을 발표했다. 베이징 주재 문회보 기자는 특별히 관펑을 찾아가 이에 대한 논평을 청했다. 이때 관펑은 야오원위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1965년 12월 21일, 마오쩌둥은 항주에서 천보다, 후셩, 아이쓰치, 톈자잉, 관펑 등을 불러 우한의 해서파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마오쩌둥은 이 자리에서 <해서파관>은 "관원을 해임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지적했다.1966년 2월 중하순, 장칭은 설 연휴 동안 상하이에서 관펑과 비밀리에 만나 그에게 글을 써서 야오원위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관펑은베이징에 돌아온 후 즉시 중국철학연구팀 임원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우한을 비판하는 투쟁에 참가하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야오원위안을 지지하는 글을 공개하며 야오원위안의 관점을 강조했고 그의 문장을 극찬했다. 이후 관펑은 <5.16 통지>기안자 중 한사람이 되었다.
1966년 5월 8일, 관펑은 "눈을 씻고 진위를 구별하라"는 글을 실으며 베이징일보와 4월 16일의 '옌산야화(燕山夜話)'를 비판했다. 이 글은 후에 베이징 주간신문에서 영문으로 번역되었다.
966년 5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에 중앙문혁조가 설치되었는데, 관펑은 중앙문혁팀의 일원이 되었다. 중앙문혁소조원이 된 후, 관펑은 반동세력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홍위병을 선동하여 그들이 관료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했다. 또한 관펑은 왕리와 함께 홍기와 인민일보의 사설과 평론,문장을 편집해 여론을 조작했다.
1966년 4월 12일, 관펑과 치번위는 중앙에 펑더화이가 3선에서 지휘를 맡기는 것에 대해 사상적으로 반대한다는 통지문을 보냈다. 6월 16일, 관펑과 치번위는 연명으로 천보다, 캉성, 장칭에게 편지를 보나 펑더화이는 3선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부정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고 중앙에서 그의 지휘직을 폐지할 것을 검토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펑더화이는 아직도 수정주의에 물들여 있으니 중앙이 적절한 시기에 펑더화이의 반당, 반사회주의적 활동을 인민에게 공표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중국판 흐루쇼프로 간주하고 축출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지만 그와 류사오치의 정치적 갈등을 노선 투쟁으로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관펑은 한 차례의 사색을 통해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사시의 의견 차이는 노선 투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66년 7울 24일 장칭에게 편지를 보내 현재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으로 인해 사실상 두개의 노선 투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이미 하나의 역류가 나타났다고 알렸다. 또한 그는 편지를 통해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혁명의 불길을 끄려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장칭은 즉시 이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전달했고, 마오쩌둥은 이 편지를 중국 공산당 8기 11중전회의 대회 문서로 인쇄하기로 결정했다. 8기 11중전회 후기, 관펑은 처음으로 연단에 서서 "자산계급 반동 노선"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의 투쟁을 노선 투쟁으로 간주하였다.
회의가 끝난 후, 린뱌오는 관펑 가족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묻기 위해 아내 예췬을 보냈다. 또한 린뱌오는 관펑을 인민해방군 정치부 부주임으로 지명했다. 관펑은 총정치부주임의 직책에서 물러나지만, 전군 문화혁명소조 부팀장에 임명되어 해방군보를 관리하고 사설을 검열하며 평론했다. 그리고 1966년 12월 26일 마오쩌둥 생일 만찬에 초대받는 등 마오쩌둥에게도 큰 신임을 받았다. 이후 관펑은 왕리, 치번위와 함께 중앙 문혁팀의 핵심 간부가 되었으며, 도처에서 홍위병을 선동하여 혼란을 일으켰다.
1967년 1월 10일, 관펑은 왕리와 함께 '해방군보' 편집자 당평주(唐平鑄)와 호치(胡痴)를 소집해 "해방군 선전 지침에 관한 제안"을 공동으로 작성했다. 이 '제안'은 자본주의의 한축을 철저히 파헤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장칭은 이에 대해 동의를 표했고 다음날 린뱌오도 "완전히 찬성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횅횅했던 "군대 내 자본주의의 싹을 뽑자"는 구호를 비교적 일찍 쓴 문건이었다.
1967년 7월 18일 밤, 중앙문혁팀은 중앙선전부 교육동 소강당에서 베이징의 일부 조반파 홍위병 대표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열었다. 장춘차오, 관펑, 치번위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관펑은 "일부는 오늘 하나 잡고, 내일 하나 잡자고 한다. 노인들은 어느 것 하나 지나치지 않고 늘 큰 것을 잡으려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이러한 경향은 옳지 못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한 치번위는 관펑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직접 언급하며 "지금 사회 일각에는 반역파를 포함해 관펑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오늘 그에게 사정을 말하는데, 관펑이 이토록 야위는 동안 너희는 뭘 했느냐"고 일갈했다.
7월 25일, 캉성은 우한의 7.20 사건 발생 후 신화사 전신원고를 심사하면서 군부 내 자본주의 세력을 뿌리뽑자고 말했다. 인민일보, 홍기도 우한 군구사령관 천자이다오(陳再道)를 성토하면서 여러 차례 군부 내 반동세력을뿌리뽑자고 호소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관펑은 8월 1일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중국 인민해방군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총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군대 내의 작은 자본주의의 길인 당권파를 폭로하여,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 그들을 때려눕히고 악취를 제거하라."
이 사설은 발표하자마자 전국을 뒤흔들었다. 홍위병들은 군 기지를 습격해 총과 탄약을 약탈하고 군인들을 향해 총격전을 벌이고 군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그러나 관펑은 자신이 쓴 이 사설이 자신을 몰락으로 몰아가는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2.4. 갑작스런 몰락
1967년 8월 1일 관펑의 사설은 문화대혁명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인민해방군을 권력기반으로 삼고 있던 린뱌오의 불만을 야기했다. 또한 마오쩌둥도 8월 초순 상하이에서 이 사설을 본 후 격노하여 사설 옆에 다음과 같이 썼다."대독초!", "내 장성들을 돌려달라!"
마오쩌둥의 이러한 의중은 곧 중앙문혁소조에게 전달되었다. 캉성은 자신이 군대 자본주의 세력을 축출하자고 말한 것을 부인했고 천보다도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나 관펑은 자신이 직접 사설을 썼기 때문에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8월 11일 중앙문혁소조 소집대회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무산계급 혁명파는 인민해방군을 신뢰하고 의존해야 한다며 '주어진 군대'라는 표현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왕리가 8월 7일 외교부의 권한을 빼앗는 담화를 발표하고 뒤이어 8월 22일 홍위병들이 중국 주재 영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불태우는 대형 사건이 터졌다. 이에 8월 25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양청우(楊成武)에게 왕리의 담화를 전하고 마오쩌둥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마오쩌둥은 양청우로부터 보고를 들은 뒤 "왕리, 관펑, 치번위는 문화대혁명을 파괴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니 총리 혼자서 처리하라. 다만 치번위는 일단 내버려두고 자아비판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26일 정오, 양청우는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날아가 저우언라이에게 마오쩌둥의 결정을 단독 보고했다. 그날 밤, 저우언라이 주최로 중앙문혁소조 회의가 열려 왕리, 관펑에 대한 격리 심사를 선포했다. 결국 관펑은 왕리와 함께 독방에 감금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그가 같은 댜오위타이 2호실은 매일 최신 신문을 볼 수 있고 라디오도 들을 수 있었으며 정해진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등 조건이 좋았다. 또한 매일 전담자가 그의 방을 청소해줬고 의사가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해줬다. 그에게 노동 임무는 없었고 단지 반성문을 쓰는 임무만 주어졌다.
1967년 10월, 당 중앙은 그를 베이징 위수구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날 관펑과 왕리는 베이징 서산으로 압송되어 각각 두 채의 별장에서 연금 생활을 계속했다. 관펑의 생활 대우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책을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보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6일, 관펑은 중앙의 결정에 따라 청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는 살림이 부족하고 먹을 것도 형편없었으며 생활의 자유도 박탈되었다. 또한 그는 오래지 않아 공산당적에서 해임되었다.
2.5. 말년
1982년 1월 28일, 관펑은 가석방되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과 하께 홍기 잡지사의 숙소에서 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끝장났지만 그곳에서는 일반 간부 수준으로 대우받았다. 1988년 전기작가 예융례(家葉永)가 관펑과 인터뷰했다. 이때 관펑은 "현재 나는 창문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모른 채 책벌레가 될 뿐이다."라고 말했다.관펑은 말년에 철학에 관련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안 보고, 말하지 않고, 쓰지 않고, 듣지 않는다."는 '사불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자신 앞에서 문화대혁명을 언급하는 자는 비롯 친한 사람이라도 외면했다. 또한 그를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전기작가 예융례는 말년의 관펑이 간부 모자를 쓰고, 중산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매일 세 끼의 평상 요리를 하며, 노자, 장자, 공자 연구에 몰두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옌창구이(閻長貴)는 관펑이 '사불원칙'을 고수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며 관펑은 문화대혁명의 추억과 연구에 관심이 많고 이 방면의 책을 탐독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1980년대에 문화대혁명을 언급하자, 관펑은 "그들이 이겼다!"고 대답했다. 관펑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비롯 실패했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적어도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마오쩌둥 주석이 조직을 지배하지 못한 큰 결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1986년에 자유의 몸이 된 관펑은 치번위와 여러 차례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중국 사상사에 관한 책을 썼다. 그후에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철학 연구에 전념하던 그는 2005년 6월 7일 밤 21시 40분에 베이징에서 향년 8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3. 저서
-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고 주관주의를 반대하자>, 1955년 상하이 인민출판사
- <변고집(邊鼓集)>, 반우파의 글 수록. 1957년 산둥 인민출판사.
- <왕충 철학사상 연구>, 1957년 상하이 인민출판사.
- <손자 군사철학사상 연구> 1957년 상하이 인민출판사
- <구학집>, 1964년 상하이 인민출판사.
- <춘추 철학사 논집>, 임관시와 공동 집필, 1966년 인민출판사
- <법학과 법학발생학>, 1990년 중국인민대학출판사
- <혜시 사상 및 선진 명학>, 1990년 해양 출판사
- <노자통>, 1999년 지린 인민출판사
- <손자병법대사전>, 치번위와 공동 집필, 1994년 상하이콥 출판사
- <중화역학대사전>, 치번위, 채상사(蔡尚思) 등과 공동 집필. 2008년
- <공자 비판>, 2002년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