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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8:39:21

곽도

곽공칙에서 넘어옴
<colbgcolor=#fecd21> 최종직위 도독(都督)
(郭)
(圖)
생몰연도 ?년 ~ 205년
공칙(公則)
고향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역임한 관직 계리(計吏)[1]→도독(都督)[2]

1. 개요2. 생애
2.1. 원소의 전폭적인 기용2.2. 관도대전에서의 실책2.3. 원가 내분
3. 평가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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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부하이며 는 공칙(公則)으로 예주 영천군 사람이다.

조조의 모사인 곽가와 같은 영천 곽씨이며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원소 휘하에서 항상 곽도와 함께 행동했던 신평은 곽가와 출신 현까지 똑같다. 때문에 곽도 역시 곽가와 같은 영천군 양책현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며,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2. 생애

2.1. 원소의 전폭적인 기용

처음에는 영천군의 세무과 담당쯤 되는 하급관리였다. 당시 영천군에서는 문서과 담당(主簿)이었던 순욱이 곽도의 동기쯤 되었던 모양. 순욱, 순유 등과 나란히 영천 태수 음수에게 발탁되어 조정에 천거되었고 뛰어난 재사로 이름을 빛냈다고 한다.

이후 동향인 신평과 함께 원소를 섬겼고, 순심 등과 함께 원소의 논객으로 파견되어 기주 한복을 협박해 원소에게 기주목의 지위를 양도하도록 했다.

《위서》 <원소전>에 따르면, 195년 사자로서 헌제에게 파견되었고, 기주로 돌아오자마자 원소에게 헌제를 맞이할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헌제전>과 《 후한서》 <원소전>에 따르면 이는 저수의 계책이며 곽도는 오히려 순우경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199년, 저수 전풍 조조에 대하여 지구책을 주장하자 이에 반대하여 곽도와 심배는 함께 단기결전을 주장한다. 원소는 곽도와 심배의 의견을 따른다.

또한 곽도는 감군(監軍, 원소군의 총사령관에 해당)의 지위에 있는 저수의 세력이 너무 강하다고 불평을 했다. 또 원소는 곽도의 의견을 듣고 감군의 지위와 권한을 3개로 분할해서 저수, 곽도, 순우경을 각각 분할된 도독으로 임명시켰다.

이렇듯이 곽도는 관도에서 패하기 직전까지 원소에게서 그야말로 전폭적으로 기용되어 그 위세가 거의 하늘을 찌를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 무렵부터 원소와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한 전풍, 저수가 기주의 호족들이었고 곽도는 원소와 같은 예주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호족의 견제라는 측면에서 여러모로 푸쉬를 받은 듯하다.

2.2. 관도대전에서의 실책

200년 2월, 관도대전이 시작되자 순우경, 안량과 함께 백마에 주둔하고 있는 유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조군의 저항으로 안량 문추가 전사하였다.

관도대전 막판에 조조가 군량기지 오소를 공격하자 곽도는 "지금이야말로 조조의 본진을 공격할 때"라며 진언했지만 장합은 "본진은 수비가 견고할 테니 오소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소는 곽도의 의견을 채용하여 장합에게 조조의 본진인 관도를 공격하라고 보낸다. 그러나 오소에 주둔하던 순우경이 먼저 궤멸해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3] 곽도는 그 책임을 본진 공격을 갔던 장합에게 전가해서 열받은 장합이 조조군으로 배신하여 영채에 불을 지르고 원소를 습격해 총사령관 원소의 생사까지 불분명해지게 되는 초대형 사고를 저지른다. 삼국지 독자들이 잘 아는 위나라의 오자양장 중 1인인 명장 장합이 곽도 때문에 원소군을 버린 것.

참패하고 하북으로 돌아온 원소는 반란을 일으킨 군현을 쳐서 평정하는 등 내부 결속을 다져 세력을 다시 수습하지만, 슬슬 곽도를 배제하며 심배를 중심으로 다시 친위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즉 관도전의 패배 이후 곽도의 위세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2.3. 원가 내분

이런 시점에서 절묘하게도 원소가 죽자 곽도는 신평과 함께 어린 원상보다 나이가 많은 원담이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원담을 후계자로 밀었다. 그러나 곽도와 사이가 나빴던 심배 봉기는 원상을 지지하여 대항한다.

원담도 이에 호응해 청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으로 향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심배가 기주를 장악하고 원상을 옹립했기에 실패로 돌아간다. 원담은 처음엔 원상의 승계에 불복해 여양에 군사를 주둔시키며 거기장군을 자칭하는 등 원상과 대립했다. 하지만 곧 조조가 하북으로 쳐들어오자 곧 원상의 승계를 받아들여 일단은 조조를 물리쳤는데, 이 직후 곽도의 절묘한 부추김으로 눈이 돌아가 원상을 습격하면서 원씨 간의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물론 결과는 참패...

물론 곽도는 이런 부분도 처음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애당초 세력적으로나 명분적[4]으로나 원담의 불리한 입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원상을 습격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조에게 항복하고 그 힘을 빌려 원상을 무너뜨린 뒤 원상의 세력을 흡수하여 조조와 붙으라는 진언을 했던 것인데, 원담도 이 진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상과의 리벤지 매치에서도 참패를 거듭해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원담은 결국 곽도의 진언을 받아들이게 되어 조조에게 항복한다.

덕분에 원상은 조조, 원담에게 양면으로 공격당하는 형국이 되어 대판 깨진다. 조조의 하북 정벌이 빠르게 진행되자 심배는 원담에게 서신을 보내어 곽도를 죽이고 조조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청하였지만, 원담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심배도 조조한테 사로잡혀 참수.

하지만 원담도 이때는 이미 곽도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있어서 별 힘을 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론(典論)》에 따르면, 원담은 심배의 서신을 읽고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실권을 모두 쥐고 있었던 곽도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고 한다.[5]

그 후 원담과 곽도는 조조와 원상을 치는 틈을 타 따로 기주를 공격해 세력을 크게 확대하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205년, 남피에서 원담과 곽도는 조조의 반격을 받아 죽는다.[6]

3. 평가

위의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정사로도, 연의로도, 삼국지 최악의 책사로 손꼽힌다. 행실을 떠나 능력면으로도 번번히 실책을 저지르며 관도대전을 말아먹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는 과연 그가 능력적으로 최악의 책사냐는 것에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그로 인해 세력을 말아먹은 정도를 따져보면 곽도가 부동의 원탑이다. 원소의 세력은 4개 주에 걸친 당대 최강의 세력이었는데, 이걸 거의 혼자서 다 작살내버렸기에 경쟁 상대를 찾기도 힘들다.[7] 동향에 동성(同姓)이라 친척으로 추정되는 적 세력 참모 곽가는 삼국지 최고의 책사 반열에 들어가는 인물임을 감안하면 대조적이다.

거기다 자신의 실수를 장합이나 고람에게 전가해서 배반하게 만들거나, 자신의 보신을 위해 원담을 꼬드겨 아직 건재하던 원가의 세력을 반토막 내서 조조에게 먹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등 인간성마저도 최악이다. 결국 곽도로 인해 관도대전의 패배는 물론 원가가 멸망한다.[8] 물론 최종적으로는 전풍, 저수 등 명책사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곽도의 말만 들은 원소의 책임이지만, 곽도가 최악의 책사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곽도는 당시에도 원가의 다툼을 유발한 행적들로 원상은 물론 유표 등 동맹국에서도 심지어는 원담 진영 내부에서까지도 대차게 까인 것 같다. 유표가 원담, 원상을 화해시키기 위해 보낸 편지에서도 "신평과 곽도에게서 재앙이 비롯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당시 청주의 별가[9]였던 왕수는 본디 원담이 원상에게 대드는 것을 반대하면서 "흉신(凶臣)을 베고 원상과 화해하십시오"라고 원담을 설득하였는데, 여기서 "흉신"은 곽도와 신평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남아있는 심배의 서신에 의하면 곽도가 재차 업을 치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홀로 노모를 봉양하는 아들을 "노모를 모셔도 몸이 멀쩡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냐"라며 징용했고 이를 전해들은 모든 사람들이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효(孝)는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럴이었고 일단 원씨 세력의 창업자인 원소가 간판으로 내걸었던 이미지부터가 (피도 안 섞인 계모이자 숙모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의붓아버지를 위해) 삼년상을 두 번 지낸 '효자' 였기 때문에 특히 원소의 계승자를 주장하는 입장에선 분명 패륜적 행위로 책 잡힐 짓이었다.

이 외에도 백성들을 수탈해 쥐어짜며 야만족이나 도적떼 같은 무리에게 돈을 뿌려 우군으로 삼았던 행위 등으로도 비난받고 있다. 정말 여러 모로 이미지가 안 좋다. 이렇게 아군과, 적군과, 심지어 동맹에게까지 전방위적으로 까인 책사는 삼국지 내에서 달리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런 곽도임에도 불구하고 원소에게 중용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바로 짬밥 그 하나밖에 없다. 곽도는 일찍이 원소의 숙부인 원외가 살아있을 때부터 원소를 섬기고 있었으니 원소 휘하 인물들 중에서 그 짬밥은 단연 넘버원이었다. 허나 다른 세력의 짬밥 1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폐급 인간이었다. 유비 휘하의 짬밥 1등인 간옹은 사람은 좀 주책맞아도 기본적으로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사무 및 외교능력을 갖춘 인물이었고, 조조 휘하의 짬밥 1등인 하후돈, 하후연 형제는 하후돈은 비록 군재에 하자가 있을지언정 지방관으로서는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며 하후연은 조조 휘하에서 온갖 험한 일을 전담하면서 묵묵히 그 일을 다 해낸 인물로 곽도와는 달리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손견 휘하의 짬밥 1등인 정보는 숫제 곽도와 완전히 정반대인 인간으로 손견, 손책, 손권을 모두 음으로 양으로 보좌했다. 다른 세력의 짬밥 1위들은 이렇게 주군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 인물들이 대부분인데 곽도만 독보적으로 원소세력 짬밥 1위 주제에 원소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쳐왔다. 원소는 그럼에도 곽도가 짬밥 1위라서 숙청하지 않은 것이다.

재밌는 건 순욱전에서 순욱 전풍, 허유는 물론 심배, 봉기 등까지 포함해 원소군 주요 간부들의 단점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데 정작 원소군 패망에 일조한 곽도와 신평에 대해서는 뭐라고 까는 말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는 것. 둘 다 순욱과 같은 동문인 점을 감안한다면, 순욱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관도전 이전의 곽도는 이렇다 할만한 실책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심배를 포함한 다른 참모들과는 달리 협천자를 옹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곽가 역시 원소를 떠나며 곽도와 신평에게 속을 터놓고 한탄을 했던 일화도 있다. 당시 대부분의 명사들에게 가차없이 정확한 평가를 내렸던 순욱이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싸주었다는 것이야말로 그저 후세 사람들의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른다.

사실 애초에 그는 순욱 등과 함께 조정에 천거되어 원소를 섬기기 전부터 벼슬생활을 했고, 몇십년 간 원소를 모셔왔으나 관도대전 이전까지 기록은 그가 원소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 즉 망한 세력의 책사란 점 때문에 기록이 부실하며,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승자인 조조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관도대전 당시와 원소 사후에 바보짓에 대한 것 밖에 없다. 조정의 관리로 일한 세월이나 원소 세력의 초창기 멤버로서 몇십 년간 어떻게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행적이 거의 생략되어 있는데, 그의 능력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무리다. 결국 곽도가 명백하게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은 200년 1년에 거의 몰려있기 때문. 순욱이 별다른 비난하지 않은만큼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관도대전 때 너무나 바보같은 짓을 저질러버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래부터 바보였을 수도 있으나 확실한 건 그의 능력에 대해 확실히 평가할 정도의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10]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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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에는 영천군의 하급관리였다 [2] 원소군 휘하 [3] <무제기>에는 이 때의 전투가 상당히 격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허유가 배신했더라도 원소가 장합의 말을 들었다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4] 원소, 원담, 원상 항목에 모두 서술되어 있다시피, 이미 원담은 원소의 형의 양자로 입적되어서 원소의 적자로서의 자격은 없는 상태였다. 원상이 나이가 어려 쌓은 실적이 없다시피한 것(=능력적인 검증이 되지 않았다)이 문제였을 뿐, 원담이 원상에게 패배한 시점에서 능력 검증 측면에서의 명분마저 사라진 셈이었다. [5] 단, 이는 전론의 저자가 조비임을 감안할 때 후계자 경쟁구도에서 장자의 입장이었던 원담에 대한 동정심이 들어가 있는 서술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조비의 주도 하에 쓰여진 기록들은 일괄적으로 원담을 '합당한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긴 현명한 장남'으로, 원상을 '예쁘장한 외모만으로 자리를 꿰찬 어리석은 놈'으로 쓰고 있는데, 이 부분 역시 '이런 멍청한 짓을 한 탓이 원담은 아니었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원담은 기반 세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공손찬의 부하 전해를 몰아내고 청주를 점령한 호걸이었다. 정치적으로 폐급이어서 문제지. [6] 연의에서는 악진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7] 곽도에 비견될만한 간신이라면 촉한을 말아먹은 황호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황호도 곽도에 비하면 덜 말아먹었다고 볼 수 있다. 촉한은 조위에 비해 약소한 익주 1개 주만을 강역으로 가진 세력이었지만, 원소의 세력권은 기주-청주-병주-유주의 4개 주에 달하여 조조보다 훨씬 강대한 세력을 혼자서 말아 먹은 것이다. 실제로 촉한 정벌은 대략 반년 정도로 끝났으나, 하북 정벌은 최소 4년 이상(조조가 하북 전역을 시작한 203년 ~ 원상이 사망한 207년) 걸렸다. 또한 애초에 황호는 곽도처럼 책사도 아니라 일개 환관인지라 그냥 부정부패로 야금야금 국력을 약화시킨 것에 가깝지만, 곽도는 오소의 실책으로 원소가 유리하던 관도대전을 한순간에 작살내버렸으며, 원담을 부추겨 세력의 내분을 조장해 하북 4개 주의 역량을 순식간에 갉아먹었다. [8] 사실 관도대전 만으론 패배 이후에도 원가의 세력이 조조보다 월등히 컸다. 실제로 원담과 원상이 힘을 합치자 조조를 물리칠 수 있었을 정도. 그러나 이후 둘의 내전 당시 조조를 끌어들인게 원가 멸망의 시작이었고, 이 아이디어를 낸게 곽도란 점에서 결정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씨를 말아먹은 셈이다. [9] 주 내의 2인자다. [10] 물론 '대부분 경력이 미지수이기에 그의 생과 능력을 공정하고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지, 현재 기록으로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는 부분인 그의 200년 이후의 경력에 대해서만 평가하면 천하의 머저리이자 흉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