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지코눌프 | 지코 | 피에트로 | 아데마르 | 구아페르 |
과이마르 1세 | 과이마르 2세 | 기술프 1세 | 판둘프 1세 | 판둘프 2세 | |
만소 조반니 1세 |
조반니 2세 | 과이마르 3세 | 과이마르 4세 | 판둘프 3세 | |
기술프 2세 | }}}}}}}}}}}} |
Guaimar III | ||
생몰년도 | 983년 ~ 1027년 | |
출생지 | 살레르노 | |
사망지 | 살레르노 | |
재위 기간 | 994년 - 1027년(살레르노 대공) |
1. 개요
살레르노 공국 13대 대공.2. 행적
살레르노 공국 12대 대공 조반니 2세의 둘째 아들이다. 988년 조반니 2세의 통치를 돕던 형 귀도가 사망한 뒤 989년 아버지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지명되었다. 99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살레르노 공국의 대공이 되었다.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베네딕토회 수도자 아마투스(Amatus)가 기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999년경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 노르망디 공국으로 귀환하던 40명의 노르만족이 살레르노에 잠시 들렀다. 이때 사라센 해적이 쳐들어오자, 그들은 두려워하는 살레르노인들을 독려하고 해적들을 몰아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과이마르 3세가 그들을 고용하려 하자, "우리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센이 도시를 짓밟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었을 뿐이다"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뒤 동포들을 초대해 대공을 섬기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시기에 살레르노 공국과 노르만족간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 것만은 분명하다. 11~12세기 잉글랜드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데리크 비탈리스(Orderic Vitalis)에 따르면, 과이마르 3세는 노르망디 공국에 사절을 보내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1009년, 바리의 랑고바르드계 귀족인 멜루스가 처남 다투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바리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아스콜리와 트로이아를 석권했다. 그러나 1010년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가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면서 1011년 6월 11일 바리를 상실하고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은거했다. 과이마르 3세는 반란 진압 후 살레르노에 찾아온 바실리오스 메사르도니테스를 융숭하게 대접하며 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지만, 한편으로는 멜루스를 보호하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렸다.
멜루스는 과이마르 3세와 교황 베네딕토 8세의 지원에 힘입어 가릴리아노 요새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노르만 용병대장 라눌프 드렝고(Rainulf Drengot)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원하면서, 풍부한 전리품을 약속했다. 1017년, 라눌프와 노르만 용병대는 카푸아에서 멜루스 휘하의 랑고바르드군과 합세한 뒤 아풀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1018년 10월까지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며 동로마 제국을 남이탈리아에서 축출하는 듯했다.
그러던 1018년 10월, 바실리오스 2세로부터 바랑인 친위대와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은 이탈리아 총독 바실리오스 보이안네스는 군대를 일으켜 그 옛날의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투와 같은 장소의 칸나이에서 랑고바르드-노르만 연합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동로마군의 압승이었고, 멜루스는 아내와 아들 아르이로스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 병력, 세력 기반을 모조리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과이마르 3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동로마 제국에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102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 대공이자 과이마르 3세의 처남인 판둘프 4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베네벤토로 진군해 베네벤토 대공 란둘프 5세를 굴복시키자, 과이마르 3세는 즉시 제국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공물을 바쳤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한 뒤 새 황제 콘라트 2세가 각지에 반란에 시달리면서 남이탈리아에 간섭할 여력이 없자, 제국에 사절을 보내 처남을 석방시켜달라고 간청해 허락을 얻어낸 뒤 카푸아로 돌아온 판둘프 4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거부했다.
과이마르 3세는 포르포라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기술프와 조반니 3세를 낳았다. 기술프는 1012년 또는 1013년에 사망했고, 조반니 3세는 1015년 살레르노의 공동 통치자로 선임되었지만 1018년에 사망했다. 이후 카푸아의 판둘프 4세의 누이인 가이텔그리메( Gaitelgrime)와 재혼하여 과이마르 4세, 귀도, 판둘프를 낳았다. 1027년 과이마르 3세가 사망한 후 과이마르 4세가 살레르노의 새 대공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