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키 유지 古関裕而|Yuji Kose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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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코세키 유지 ([ruby(古関勇治, ruby=こせき ゆうじ)]) | ||
출생 | 1909년 8월 11일 | ||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 | |||
사망 | 1989년 8월 18일 (향년 80세) | ||
카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미야마에구 스가오초 (성 마리아나 의과대학 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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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
직업 | 작곡가, 지휘가 | ||
장르 | 응원가, 가요, 군가, 행진곡 | ||
역임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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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colbgcolor=#ffffff,#1f2023>구제 후쿠시마 상업학교[1](졸업) | |
활동 기간 | 1930년 – 1986년 | ||
배우자 | 코세키 카네코(古関金子)[2] | ||
가족 |
아버지 코세키 사부로지(古関三郎次) 어머니 코세키 히사(古関ヒサ) 남동생 코세키 히로시(古関弘之) 장남 코세키 마사히로(古関正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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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에 히데마로,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기품있고 격조 높은 곡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대중적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전히 수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의 명곡 다수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죽기 전까지 5천곡이 넘는 곡을 혼자서 작곡했다.그의 작품은 가요, 응원가, 대학 교가, 군가 및 전시가요가 주를 이루며, 각각 대표곡으로 가요 <나가사키의 종(長崎の鐘)>과 <고원열차는 간다(高原列車は行く)>, 고시엔의 상징으로 유명한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여름 주제가 < 영광의 관은 그대에게 빛나리(栄冠は君に輝く)>, 와세다대학 응원가 <紺碧の空>와 게이오기주쿠대학 응원가 <我ぞ覇者>, 일본제국 육군의 군가 < 노영의 노래(露営の歌)>와 < 새벽에 기도하다(暁に祈る)>, 육상자위대 주제가 영광의 깃발 아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응원가 <투혼을 담아(闘魂こめて)>와 일명 롯코오로시(六甲おろし)로 유명한 한신 타이거스의 응원가 <한신 타이거스의 노래(阪神タイガースの歌)>[3], 도쿄도 소방청의 주제가인 도쿄소방 행진곡, 파이오니아, 야마이치 증권 사가 등이 있다.
유소년기부터 이미 음악과 작곡활동에 흥미가 있었고, 청년 시절에는 키스 요시노신(金須嘉之進)을 스승으로 삼으며 작곡을 배웠다. 1929년에는 국제현대음악협회 주최 음악제 작품공모전의 영국 지부 추천작품으로 자신의 작품이 후보에 오르게 되는데, 이를 일본의 신문사들이 '공모전 2등 입선'이라며 대서특필한다. 이러한 홍보 덕에 코세키는 당대 유명 작곡가였던 야마다 코사쿠의 추천으로 도쿄의 음악가 반열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것이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코세키의 수많은 유행가와 동요, 영화음악이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전후에는 1964 도쿄 올림픽의 선수단 입장 행진곡 <올림픽 마치(Olympic March)>, NHK 스포츠 중계 테마곡 <스포츠쇼 행진곡(スポーツショー行進曲)> 등 정부 행사나 각종 기관 및 단체 행사 음악의 작곡에도 여러 차례 초빙되는 등 말년까지 국내외를 넘나들며 작곡가로서 활약했다.
2. 생애
2.1. 유소년기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 오마치(大町)에 있던 노포 오복점 키타산(喜多三)의 8대 당주였던 아버지 코세키 사부로지(古関三郎次)와 어머니 코세키 히사(古関ヒサ)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다. 도통 아이가 생기지 않아 양자를 데려올 것을 생각할 정도로 고심하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기에 더욱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해 고세키가 어렸을 무렵에도, 다이쇼 시대 당시 일본에서도 흔치 않았던 축음기를 구입하여 집안에서는 항상 레코드를 틀어 놓았었다고 한다.이렇듯 음악 속에서 자란 배경 덕분인지, 코세키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독학하며 작곡가로서의 길을 꿈꾸게 된다. 마침 그의 고향 오마치에는 스즈키 키하치(鈴木喜八)이라는 5살 연상의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훗날 작사가가 되어, 노무라 토시오(野村俊夫)라는 예명으로 코세키와 함께 수많은 곡들을 쓰며 일본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16년, 7살이 된 코세키는 후쿠시마현 사범학교 부속 소학교[4]에 입학한다. 그런데 우연히도 담임이었던 엔도 키미지(遠藤喜美治) 역시 음악 애호가로, 고세키의 음악 지도에 힘을 쏟아주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10살이 되던 무렵, 코세키는 악보를 완벽히 익혔고, 더이상 학교 수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게 된 그는 세노오 악보[5] 등의 당시 시판 악보를 이곳저곳에서 수집하는 데에 열중했다. 그러다 때때로 같은 반 친구들이 자신이 만든 시에 곡을 붙여달라며 코세키에게 의뢰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더욱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