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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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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641B27,#e5e5e5> 1960 4.18 학생 시위
2011 의과대학생 성추행 사건
2013 김지훈 일병 자살 사건
화공생명공학과 살인 사건
2017 독어독문학과 학생회 신고자 사과요구문 사건
2019 조민 부정입학 의혹
2020 집단 부정행위 사태
2021 비대면 수업 신음 사건
2022 의대생 불법촬영 사건
개별 문서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고려대학교/사건사고 문서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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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0세기
2.1.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2.2. 1972년 본관 백골 시체 발견 사건2.3. 1975년 휴교 사태2.4. 1985년 김준엽 총장의 강제 사임2.5. 1989년 입시비리 파문2.6. 이화여자대학교 축제 난입 사건
3. 2000년대
3.1.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학교 방문 차단 사건3.2. 이건희 명예박사 학위수여식 중 소요사태3.3. 일본재단 자금 장학재단 설립 사건3.4. 2006년 교수 감금 사태
3.4.1. 배경3.4.2. 사건의 전개3.4.3. 제1차 징계와 제1차 소송전3.4.4. 제2차 징계와 제2차 소송전3.4.5. 제3차 징계와 제3차 소송전3.4.6. 제4차 소송전3.4.7. 평가
3.5. 문과대학 교수 성추행 사건3.6. 2009학년도 고교등급제 의혹3.7. 김병철 전 총장 등 교수 4명의 대학원생 인건비 탈취 사건
4. 2010년대5.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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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대학교의 사건사고를 정리한 문서.

2. 20세기

2.1.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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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972년 본관 백골 시체 발견 사건

1972년 4월 1일, 고려대 본관 4층 409호 강의실에서 공사 중이던 전기공 김씨가 천장에서 백골 시체를 발견한 사건이다. 시신은 영단어책을 머리에 베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형상이었으며 주위에는 약병이 함께 있었다. 조사 결과 시체의 신원은 1961년에 실종된 정치외교학과 2학년 허 군이었으며, 생활고에 의한 자살로 수사종결되었다. #

2.3. 1975년 휴교 사태

1975년 4월 8일 17시를 기하여 고려대학교에 대하여 휴교를 명한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 7호에 의해 강제로 휴교되었다. 이 조치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추진에 거세게 저항하던 고려대 학생과 김상협 총장을 억압하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후 군병력이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진압을 명분으로 학교에 난입하자 김상협 총장은 이에 항의하며 총장직을 사임했다.

2.4. 1985년 김준엽 총장의 강제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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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김상협의 뒤를 이어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여러가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사사건건 맞서다 결국 1985년 강제로 사임하게 된다.

2.5. 1989년 입시비리 파문

1989년 제 22대 총학생회 등 학내단체의 진정에 따라 교육부는 고려대에 대해 특별감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고려대 교무처는 1989년도분을 비롯해 이전의 모든 입시관계 서류를 소각 처분했다. 컴퓨터 마그네틱 테이프에 입력된 내용도 지우고 그 위에 다른 자료를 입력했다. 불살라버린 서류는 89학년도 이전의 △ 입학시험 성적 일람표 △ 입학시험 답안지철 △ 불합격자 입학원서철 △ 입학시험 면접대장, 88학년도 이전의 △ 입학지원자 접수대장 △ 입학시험 사정부 등 입시부정을 밝히는데 필요한 중요 증거물 한 트럭분이었다.

또한 고려대는 특정인을 합격시키기 위해 학력고사점수를 대폭 조작하여 전산입력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결과에 따르면 교무처장 등 고려대 입시부정 담당자들은 이 학교 전자계산소로부터 수험생들의 실제 성적이 계산된 예비사정자료를 미리 건네받아 ‘교직원 자녀 중’ 불합격예정자가 있으면 점수를 가산시켜 합격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지원학과의 최저합격 예정점수(커트라인)의 25% 상당을 가산하여 합격권내에 들어가면 합격처리했고, 이에 들어가지 못할 경우에는 2 · 3지망으로 합격시켰다.

교무처측의 이같은 부정입력처리 요구에 따라 미리 개발된 일명 ‘특기자 프로그램(KEE 1431)’이런 변태적 방법을 이용, 기취득점수에 입력한 가산점을 처리해서 대상자가 무사히 커트라인 안에 든 것처럼 출력되도록 조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예과 지원자 1명의 경우 88년 12월4일자 합격자 사정원부에는 불합격으로 처리한 뒤 12월21일자 교무처장 전결로 사정기준 없이 입학허가, 89년 3월17일자 문교부 신입생 보고 명단에는 합격자로 둔갑시켜 제출했다. 또 의예과 추가 합격자와 동일한 점수를 받은 한 학생을 불합격처리하고 대신 입학원서 지망학과를 토목공학과로 고쳐 입학을 허가하고 문교부 신입생 명단에 보고하기도 했다.

1989년도 8개 단과 대학 3학년 졸업정원의 2% 범위내인 87명의 학사 편입생을 모집하면서 지원자 3백4명을 대상으로 사정기준의 결재품의 없이 합격자를 결정했다. 무역학과에서 6명의 미등록자가 발생하자 역시 임의로 결원을 보충했다. 결원보충 과정에서 필답고사 성적이 5점이나 더 높은 2명을 제외시키고 성적이 낮은 지원자를 입학시킨 사실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 그리고 교무위원회는 회의록을 10년간 보존 유지 관리하도록 학칙에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87년 7월8일 이후부터 교무위원회 회의록을 일체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등록을 마감한 뒤 45개 학교에서 1백75명의 미등록자가 발생하자 입시관리위원회 및 교무위원회의 심의나 입학허가권자인 총장의 결재 없이 불합격자중 추가합격자 1백75명을 임의로 합격자명부에 등재했다. 또 미등록자에 대해 등록포기 여부 확인 등 구체적인 증거서류 없이 임의로 불합격 처리한 사실도 감사결과 밝혀졌다. #

결국 이준범 총장은 해임되었고 김진웅 총장서리가 직책을 대신했다.

2.6. 이화여자대학교 축제 난입 사건


고대생들의 이화여대 축제 '깽판' : 12년 전통의 집단 성폭력 "이대생은 우리 것, 숙대생도 우리 것"

1980년대 중반부터 약 12년간 고려대학교 남학생들이 이화여자대학교 축제 때마다 이화여대로 몰려와 깽판을 치는 악습이 존재했었다. 이들은 "쁘띠부르주아 분위기가 강한 신촌에 민족고대 문화를 심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며 이런 행위를 벌였으나, 이는 명백한 성폭력이었다. 이들은 근처 숲에서 술을 마시며 성희롱을 하고, 학생회장에게 막걸리를 붓고, 자제를 요구하는 교수의 자동차를 부수고, 여학생의 머리채를 끌고 가 실신시키는 등, 이화여대에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곤 했었다.

이러한 행태가 무려 12년간 이어지던 때인 1996년 5월 29일, 이화여대 축제인 대동제에 몰려 온 고려대 학생 500여명이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해 이화여대 4학년 학생 1명이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이화여대 학생들은 고려대 학생들의 추태를 카메라에 담아 진실을 알리려 했다. 참고로 해당 영상에서 인터뷰를 한 고려대 학생의 발언이 크게 문제시 되었다. 학생은 "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려대 학생이 이화여대 축제에 난입하여 깽판을 치는 것은 쭉 있어왔던 연례 행사이다."라고 해 이화여대의 분노를 심화시켰다.

폭발한 이화여대 측은 명백한 성폭력이라며 고려대 측에 항의했고, 상기한 촬영된 영상을 증거로 언론을 통해 이 문화가 재조명되자 고려대 측도 이를 수용, 해당 학생 7명을 정학시키고 양 대학간 축제난동 근절 대책위까지 설립했다. 이후 다음해 축제 때는 지킴이가 생기고 비디오카메라 팀이 동원되면서, 고려대 학생이 떼지어 몰려오는 문화는 사라졌다.

남성들이 여성 지식인을 어찌 대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자 여대생들의 수난사 중 하나. 이 사건 이후로 이화여대 축제에는 주점이 사라졌으며, 한때 정문에 '개와 고려대 학생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있을 정도로 앙금이 심했었다고 한다.

3. 2000년대

3.1.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학교 방문 차단 사건

2000년 10월, 고려대 총학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학교 방문을 차단한 사건이 있었다. 행정학과 함성득 교수의 초청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고려대학교를 방문하려고 하자, 고려대 총학은 고려대 정문 앞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방문에 항의하면서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차량 내부에서 장시간 기다렸으나, 결국 고려대 정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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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건희 명예박사 학위수여식 중 소요사태


2005년 5월 2일 고려대는 이건희에 대한 명예박사 학위수여식을 인촌기념관에서 가지려고 하였으나, 고려대 총학생회는 행사장으로 향하는 이건희와 삼성 관계자를 덮치는 등의 소란을 벌였다. 고려대는 당일 저녁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총장이었던 어윤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건희는 고려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의 재단을 합병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이 날 학위수여식에서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소요 등의 이유로 최종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2020년 10월 이건희의 사망 이후 밝혀졌다.

3.3. 일본재단 자금 장학재단 설립 사건

일본재단은 A급전범 사사카와 회장이 세웠고, 겉으로는 기부와 투자로 알려지나 뒤로는 극우행보와 역사왜곡을 한다고 알려진 단체다. 위키백과 고려대는 지난 1987년 일본재단으로부터 10억원 상당을 받은 뒤 아예 사사카와 회장의 이름을 딴 사사카와 영-리더 장학금을 조성했으며 이 돈의 이자로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

3.4. 2006년 교수 감금 사태

3.4.1. 배경

1971년에 우석대 의대가 고려대로 인수된 이후 ‘우석대학교병설의과기술초급대학’은 ‘고려대학교병설의과기술초급대학’이 되었으며, 1979년에 ‘고려대학교병설보건전문대학’, 1998년에 ‘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으로 개칭되어 2005년까지 이어져왔다.

고려대 입장에서도 병설 보건대학(전문대)를 운영하는 것이 여러 모로 힘들었으므로 통합을 추진했었는데,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의 고려대학교와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의 통합 승인으로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은 폐교되고, 2006년 고려대학교의 단과대로서 보건과학대학을 신설했다.

고려대 보건과학대학은 2006년부터 신입생을 받기 시작하였으므로, 그 이전에 입학한 병설보건대 학생들은 고려대학교 체제로 편입되지 못하였다. 병설보건대학 학생회를 비롯한 병설보건대학 학생들도 고려대학교 학생처럼 학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수차례 요구하였으나, 고려중앙학원에서는 2005년 말부터 2006년 4월까지 병설보건대학 학생들의 이런 움직임에 무대응으로 일관하였다.

학교의 입장은 보건대학 2, 3학년들은, 2006년도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보건과학대학에 입학한 1학년들과는 다르게, 여전히 보건대학의 학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지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의 학적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1]

학생들의 입장은 폐교예정인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 학생들에게 고려대학교 본교 학생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주자는게 골자였다. 신설된 보건과학대학 학생들은 이미 고려대학교 본교 소속이었기 때문에 투표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3.4.2. 사건의 전개

당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2005년 11월의 선거가 참여 부족으로 무산되고, 2006년 1학기 초에 총학생회 재선거를 실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제38대 총학생회 전체학생대표자회의[2]에서는 고려중앙학원의 결정과는 관계없이 총학생회의 권한이 닿는 범위 내에서 기존 병설보건대학 학생들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정회원으로 대우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병설보건대학 학생들도 2006년 1학기 초에 실시되는 39대 총학생회 재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사건은 고려대학교 본교 소속이 아닌 고려대학교병설보건대학 재학생에게도 고려대학교 본교의 학생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는 시위의 맥락에서 일어났으나 더 자세히 보면 학생회와 학교의 여러 갈등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 사실 이전 해에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주는 것에 대해 시위를 했다가 교직원들과 마찰이 일어난 적이 있고[3], 이 사건 역시 사람마다 의견이 갈렸다.

이러한 총학생회의 결정은 고려대학교와 고려중앙학원의 결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고려중앙학원은 학교 홈페이지 공지사항과 총학생회에 보내는 공문을 통해 기존 병설보건대학 학생들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정회원이 될 수 없다고 공지하였다. 그러자 학교 당국의 공식 입장을 확인한 병설보건대학 학생들은 지난 몇 개월간 그랬던 것처럼 2006년 4월 5일 고려대학교 본관에서 시위를 열고, 교직원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의견서를 제출하려고 하였다. 당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및 이에 관심이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공지사항의 입장을 고수하며, 의견서 수용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시위대가 퇴근하려는 처장단의 길을 막고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해줄 것을 강요한다.
17:40 경 증인 및 보건과학대학장의 감금 소식을 전해들은 여섯명의 처장들이 올라와서 증인을 데리고 내려가려고 계단을 내려가자 이때 원고 오진호의 “막아”라는 구호를 시작으로 나머지 시위자들은 한 평 남짓한 층간 복도에 8명의 교수와 학생지원부 직원 4명을 감금하기 시작하였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기획예산처장이 학생들과 학생들의 행위가 불법이며 적절치 않음을 지적하고자 마이크를 달라고 하였으나 원고 조정식이 야유와 함께 거절하였지요.

기획예산처장이 원고 조정식에게 “자네, 혹시 나의 국제법 강의들었던 조정식 군이 아니냐?”라고 묻자 원고 조정식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우리 유명하신 박기갑 교수가 드디어 나의 정체를 파악했네요 ∼∼”라며 학생들의 야유를 유도하였지요.

성영신 교수의 증언 中 조정식 강사와 관련된 부분 발췌

다만 고려대 명예교수인 이상신 교수가 했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언론이 '감금'이라고 보도하던데, 정말 어이가 없다. '감금'이라니. 그건 안기부나 깡패들에게 질질 끌려가서 당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그렇게 했나. 그 자리에 있었던 교수들은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교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해결했어도 된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밤샌 후에 감금당했다고 홈페이지에 띄우고 하는걸 보니 그 의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을 부도덕한 패륜아로 몰아가기 위한 저의가 분명하다.

고려대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오르비[4] 같은 곳에서는 다수가 주동자들을 비판하는 쪽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절대 성범죄자 수준의 극악무도한 범죄자 취급을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과격시위를 한 운동권에 대한 반응 정도에 가까웠다. 물론 당시 노무현 정권 시절의 20대의 정치성향이 2020년대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다.[5] 교수에게 그러냐 식의 유교적 감성이 먹힐 쌍팔년도 아니었고 고려내 내부에서, 혹은 다른 대학에서 주동자들에 대한 옹호 의견이 적지 않게 나왔으며, 특히 진보적 성향의 대학생들 중에서 그런 의견이 많았다. 학생들이 교수에게 했다고 인터넷에 알려진 과격 발언에 대해서도 학교와 언론[6] 의한 왜곡 보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3.4.3. 제1차 징계와 제1차 소송전

어쨌든 감금 사건이 일어나고 2006년 4월 6일 신속하게 시위 주동 학생들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리게 되었고, 시위를 주도한 총 19명의 학생이 회부되었으며, 이 결과 7명에게 견책, 5명에게 1개월 유기정학, 7명에게 출교 조치[7]가 내려졌다. (MBC) 학생들은 실명을 내걸고 인터뷰를 하며 반발하였다. 이를 통해 출교 7명이 '강영만, 김지윤, 서범진, 안형우, 오진호, 조정식, 주병준'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출교 조치를 받은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징계에 불복하여 고려중앙학원을 피고로 하여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관련 기사
제1심에서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요지는 (1) 상벌위원회에서 학생측의 소명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일방적인 징계라는 점, (2)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는 점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심 판결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위의 성영신 교수의 증언과 배치되는 내용이 있다.
이 사건 감금행위 당시 피해 교수들은 총학생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작성한 이 사건 요구안을 단지 수령만 하였다면 언제든지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을 떠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비록 이 사건 감금행위가 법률적으로는 감금으로 평가된다 하더라도 그 불법성의 정도에는 참작할 만한 점이 있다...이 사건 감금행위는 이 사건 요구안을 피신청인에게 전달하겠다는 학생들의 단순한 의도가 교수들의 거부로 좌절되자 이를 현장에서 즉시 관철시키고자 했던 집단적 정서와 분위기에 의해 돌발적으로 행해진 것으로서... 끈기있는 대화와 합리적인 토론이 아닌 집단적인 물리력에 의존해서라도 그 의사를 즉시 관철시키고자 했던 경솔함 내지 민주주의적 소양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지...대학 본연의 업무를 방해하고자 하는 악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또한, 이 사건 감금행위의 당초 계기가 된 보건대학 학생들에 대한 투표권 부여에 관한 학생들의 주장은 대학 내 자치활동의 일환인 총학생회의 구성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에 근거한 것으로, 그 주장 내용 자체가 명백하게 부당하다거나 상식에 반한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대학은 학생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경청하고... 일방적인 통보가 아닌 대화와 설득을 통해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을 거쳐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성숙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음에도, 고압적이고 관료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결국 신청인들로 하여금 이 사건 감금행위에까지 이르게 한 면이 있다.

그러나 고려중앙학원이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한편 이와 별개로 학생들은 이번 재판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학생들의 출교처분을 효력정지하는 가처분을 2007.11.2. 신청하였고 법원은 2008.1.28. 이를 인용해 주었다.

사실관계와 전후사정이 복잡한데, 이 문단의 출교관련 건은 고려대 측에서 어차피 징계를 다시 양정, 심의하게 되었으므로 논의의 실익이 없어졌다. 이에 2008.3.24. 피고가 항소취하하여 제1심대로 확정되었다.

3.4.4. 제2차 징계와 제2차 소송전

고려중앙학원 측은 가처분은 받아들였으나, 출교 조치가 효력정지 됨과 동시에 제1심 법원 판결의 취지대로 2007.12.13. 상벌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번에는 학생들에게 소명 기회를 부여하였다. 그러고는 2008. 1. 21. 학생상벌위원회의 이름으로 원고들에게 2008. 2. 9.까지 이 사건 감금행위에 대한 사과 또는 반성을 공개적으로 할 것을 요구하는 권고문을 발송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2008. 2. 5. 사과와 반성을 하는 것은 이 사건 감금의 원인과 책임을 모두 원고들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사과와 반성을 할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을 보냈다. 그러자 2008.2.12. 해당 학생들을 다시 조건부 퇴학 조치 시켰다. 사과와 반성을 하면 재입학을 고려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단 것. 이는 같은 달 15. 학생들에게 도달하였다.[8]이에 반발한 관련 학생들은 이에 2008.2.27. 다시 퇴학처분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08카합669). 법원은 2008. 3. 17. 이를 인용하였다.

결국 2008년 3월 19일, 고려중앙학원 측은 출교생들의 퇴학 조치를 취소하고, 출교생들은 전원 복학하여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고학번이던 징계혐의자들은 속속 졸업하여 무사히 학업을 마쳤다.
1. 피고가 2008. 2. 15. 원고들에게 한 각 퇴학처분은 무효임을 확인한다.
2.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위 제2차 제1심에 대하여 고려대 측은 항소하지 않았다.

3.4.5. 제3차 징계와 제3차 소송전

제2차 제1심 판결이 나온 뒤 몇 달이 지난 2009년 4월 2일, 학교 측은 해당 출교생들의 출교 기간을 '무기정학'으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이에 출교생들이 항의를 했다.

이에 2009.6.11. 또다시 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면서 제3차 소송전이 벌어진다. 2010년 5월 31일, 법원은 피고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철회 또는 무효화하라는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2010년 6월 11일, 출교생들은 출교생 커뮤니티에 화해권고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아래와 같이 주문이 나온걸 보면 고려대학교는 끝까지 버티게 되었다.
(2) 이에 원고들은 2009. 6. 11. 위 무기정학처분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서울중앙지방법원 2009가합65947호로 무기정학처분무효확인의 소를 제기하였는데, 법원은 2010. 9. 1. 원고 A, C, D에 대하여는 위 원고들이 무기정학처분 당시 이미 졸업하여 G대학교 학생의 지위에 있지 않았음에도 무기정학처분을 하였다는 이유로, 원고 B, E에 대하여는 무기정학처분 자체는 적정하나 무기정학처분의 효력을 처분일 이전부터 소급하여 발생하도록 하였다는 이유로 또다시 원고들 승소 판결을 선고하였다. 한편, 피고는 이에 대하여도 항소하지 않아 위 판결이 그 무렵 그대로 확정되었다.

3.4.6. 제4차 소송전

이렇게 세 차례의 징계와 세 차례의 승소를 거둔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피고 고려중앙학원을 상대로 위와 같은 징계 양정이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제1심에서는 원고들 측이 완전히 패소하였다. 다만 판결문 말미에 "그렇다면, 피고의 이 사건 각 징계처분으로 인하여 원고들이 사실상 고통을 받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피고에게 어떠한 불법행위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이를 전제로 한 원고들의 이 사건 각 청구를 모두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라고 하여 이례적으로 원고들 측의 고통을 인정하였다.

그러다 항소심에서 원고들의 항소가 일부 인용되어 불법행위책임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권순일 주심대법관이 나선 상고심에서, 파기환송된다. 제1심이나 항소심에 비해 월등히 긴 판결문 길이를 자랑한다.
제3차 징계인 무기정학처분이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고려대학교의 불법행위인가?
위 사실관계와 기록상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① 원고들은 학생처장이 학생들의 요구 등의 내용이 담긴 문서를 수령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적 위세를 동원하여 피고 소속 처장단 교수들을 본관 2층과 3층 사이의 좁은 공간에 약 15시간 동안 강제로 감금하였고, 이는 그 소속 대학의 학문적 스승이자 대학사회의 공동구성원인 교수들을 상대로 집단적 위세를 동원한 감금행위를 통하여 무리하게 그 의사를 관철하고자 한 행위로서 대학사회의 지적, 도덕적, 민주주의적 건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이므로, 원고들의 행위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징계사유에 해당하는 점, ② 이 사건 무기정학처분의 내용은 이미 졸업한 원고 1, 2, 3뿐만 아니라 졸업하지 아니한 원고 4, 5의 경우에도 이미 경과한 기간, 즉 원고들이 이 사건 출교처분으로 인하여 학생으로서의 모든 권리가 정지되어 사실상 불이익을 받은 2006. 4. 19.부터 퇴학처분 효력정지 가처분이 결정된 2008. 3. 17.까지의 기간에 대하여만 무기정학처분을 한 것인 점, ③ 이처럼 피고는 위 가처분 이후에 원고들이 대학을 다니면서 취득한 학점을 인정하고 졸업도 유효하게 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내용으로 이 사건 무기정학처분을 한 것으로서, 원고들에게 새로이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아닌 점, ④ 피고로서는 이 사건 무기정학처분을 통상적인 징계처분이 아니라 이 사건 감금행위가 무기정학처분 상당의 처분을 받을 정도로 중대하고 심각한 비위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는 처분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살펴보면, 이 사건 무기정학처분이 위법하게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건전한 사회통념이나 사회상규에 비추어 용인될 수 없음이 분명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파기환송심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일부 학생들만 재상고하였다. 2016.2.18. 재상고가 기각되면서 10년에 걸친 소송전이 마무리되었다.

3.4.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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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문과대학 교수 성추행 사건

2007년 문과대학 교수가 술에 취한 여성 제자를 여관으로 데려가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해당 교수는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조건으로 피해자로부터 고소 취하를 받아내, 검찰은 해당 교수를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범행의 죄질이 불량할 뿐 아니라 피해자가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며,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 그런데 사건 발생 1년이 지나도록 고려대학교에서 해당 교수에 대한 징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감싸기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고려대학교는 법원의 최종심을 기다린 뒤 징계 여부를 결정하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해명하였다. 고려대, 女제자 성폭력 교수 감싸기 논란

결국 항소심 진행 중 고려대학교는 해당 교수에 대한 직위를 해제하였다. '제자 성추행' 고려대 교수 직위해제

3.6. 2009학년도 고교등급제 의혹

2009학년도 수시 2-2 전형에서 고교등급제[11]를 시행하여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바 있었고 이와 관련한 1차 소송에서는 피해자측의 승소로( #), 항소에서는 고려대가 승소( #)하였다. 현재 대법원 항소가 예정[12]되어있기는 하지만, 고교등급제 의혹이 있었던 당시에는 사회적인 반발이 심해 고자대학교라는 폄칭이 탄생한 것은 물론, 교훈을 억압, 거짓, 비리으로 비꼬는 일도 있었다. 그 이전인 2008년에도 해당 폄칭이 간간히 쓰인 일은 있었으나 이 의혹으로 폄칭이 확산된 건 사실이다. 문제는 내신 공식에 들어간 α값과 K값이라는 상수인데 2010년 국정감사장에 고려대학교 총장이 직접 나왔을 때 영업비밀이라며 밝히지 않았다.[13][14]

3.7. 김병철 전 총장 등 교수 4명의 대학원생 인건비 탈취 사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고려대 총장에 재임한 김 전 총장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산학협력단에서 154차례에 걸쳐 6,460여만 원을 챙긴 혐의로 벌금 500만 원의 약식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이와 함께 3억 6천여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는 교수 A 씨는 벌금 1,500만 원을, 2억 7천여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는 교수 B 씨는 벌금 1,0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았으며, 법원은 또 1억 8천여만 원을 챙긴 교수 C 씨에게는 벌금 7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이 밖에도 사기 및 위증 혐의로 교수 D 씨 불구속기소 돼 재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연구실 교수가 지명한 대표연구원 등에게 공동계좌를 만들어 관리하게 하면서, 산학협력단에서 지급하는 학생연구원 인건비를 이 계좌로 받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고려대 산학협력단 교외연구비 관리 지침 등에 의하면 학생연구원에게 지급되는 학생 인건비의 경우, 연구 책임자인 교수의 청구에 따라 연구 관리 부서인 산학협력단으로부터 학생연구원에게 직접 지급되며, 연구 책임자가 이를 공동 관리할 수 없게 돼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고려대 측은 "해당 교수들이 규정을 어긴 것은 맞다."라면서 "다만 해당 교수들이 연구비를 공동 계좌로 관리하면서 개인적인 목적이 아닌 연구 활동에 사용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미 징계시효인 3년이 지나 따로 징계할 순 없고, 이들 중 한 명에 대해서는 학교 측이 이미 징계를 내렸다."라며 "향후 연구비 집행 규정 준수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KBS 취재진 측이 김 전 총장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대 김병철 전 총장 등 교수 4명, 대학원생 인건비 가로챈 혐의 벌금형

4. 20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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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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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건대학 2, 3학년들에 대한 재학생명단 및 학적부 관리 등 학사행정은 안암캠퍼스에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정릉에 있는 보건대학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었고 이들에 대한 수업도 안암캠퍼스가 아닌 정릉 캠퍼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2] 고려대 학생사회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의 의결기구다. [3] 이 사건에 대해서도 한 학생은 중립적인 시각에서 "학생들도 좀 오버하고 교직원도 좀 오버했다"라고 말을 했었다. [4] 뉴스 댓글을 제외하면,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가장 많이 논의되었던 대형 커뮤니티이다. 참고로 당시에는 고파스가 없었고 학교 공홈 자유게시판만 있었다. [5] 지금은 우경화된 오르비지만 당시에는 교육을 제외하면 진보좌파적인 의견들이 활발히 개진되던 시대였다. 물론 다수는 그냥 침묵. [6] 보수 언론 [7] 출교는 퇴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조치이다. 퇴학은 재입학이 가능하지만, 출교는 재입학 불가는 물론 입학 사실조차 기록에서 지워지는 중징계이다. [8] 제2차 제1심 판결문 주문에 따르면 2008.2.15. 징계로 일컬어지고 있다. [9] 구글에서만 검색해도 바로 여럿 나온다. [10] 고려대학교 측이 제1심 패소 후 징계를 반복한 이유는 졸업해버리면 징계를 못 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1] 출신 고등학교를 서열화하여 학생의 등급을 매기는 제도. 당연히 '3불제도'로 금지하고 있는 행위이지만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12] 고교등급제가 아니라 입시비리로 소송을 걸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해당 소송은 어떻게든 고교등급제가 아니라는 것만 밝히면 고려대가 무조건 승소하게 되어있는 구조이지만 입시비리로 소송을 걸 경우 같은 학교 내에서도 내신이 뒤바뀐 이유가 명확하지 않고 모집요강과 관계없이 당락이 뒤집혔다면 고려대가 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13] 고려대학교에 대한 국감은 아니었고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대한 국정감사였는데 하필 당시 대교협 회장이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국감에서 하라는 대교협 감사는 안하고 고려대 고교등급제 의혹만 계속 나오다 파행. 이 때문에 고려대를 규제해야 할 대교협에서 오히려 고려대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의혹이 있다. [14] 당시에는 수시를 1차, 2차로 나누어 1차에서 13~17배수의 학생을 서류(내신)로만 뽑았다. 문제가 된 건 1차 선발과정으로서 당시에 재수학원 같은 반이었던 외고생들은 내신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죄다 뽑혔고, 일반고 학생들은 내신이 1등급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줄줄이 탈락했다. 공식이 있든말든 이건 차별을 가하는 게 명백히 드러나는지라 소송이 걸린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