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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08:04:26

건봉사


파일:불교 종교표지(흰색).svg 일제강점기 불교 31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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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건봉사의 모습
건봉사
乾鳳寺 | Geonbongsa
종류 종교시설 / 관광지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냉천리)
개장 연중무휴
소유주 건봉사 (사유지)
연락처 033-682-8103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3. 주요 건물 및 문화재
3.1. 불이문
3.1.1.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
3.2. 능파교
3.2.1. 보물 제1336호3.2.2. 능파교기비
3.2.2.1. 해석문
3.3. 대웅전3.4. 석가불치상입탑비
3.4.1. 해석문
3.5. 승탑3.6. 진영(초상화)
4. 건봉사를 거쳐간 스님5. 여담6. 부속 암자

[clearfix]

1. 개요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냉천리)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다. 대한민국( 휴전선 이남)의 최북단 사찰이다.

건봉사는 6.25 전쟁때 완전히 전소된 뒤 폐사지로 남아있던 1982년 11월 3일 강원도 기념물 제51호 '고성건봉사지 (高城乾鳳寺址)'로 지정되었다가, 1994년 전소된 가람들을 일부 복원하면서 절을 복구했고 2023년 2월 28일에는 '고성 건봉사지 (高城 乾鳳寺址)'라는 명칭으로 사적으로 지정됐다.

주지스님 : 우송스님

2. 역사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하면 520년 고구려 승려 아도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고, 그 후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사찰을 중수하고 절의 서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로 개칭했다. 1358년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화상이 다시 한번 사찰을 중수하고 지금의 '건봉사'라고 개칭되었다.
파일:pan001658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jpg
사명대사기적비[1]
임진왜란 사명대사가 건봉사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왜군이 통도사에서 훔쳐간 부처님 진신치아 사리를 사명대사가 되찾아서 봉안했다고 한다.

세조가 건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2]한 이래로 열성조의 어필(御筆)이 봉안된 곳이라 조정에서도 특별한 곳이라고 세금을 탕감시켜주는 등[3] 나라의 배려로 절이 계속 커졌으나 1878년의 큰 불로 3183칸이 전소되는 참화를 겪었다.
파일:강원고성 건봉사 근경.jpg
파일:강원고성 건봉사 전경.jpg
일제강점기 건봉사의 모습 일제강점기 건봉사의 모습
이후 복구를 계속해 일본 강점기 무렵에는 642칸의 건물과 보림암 등 124칸의 18개 부속암 등 9개 말사(末寺)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으나, 광복 후 1945~1950년 동안에는 불교를 탄압한 북한 치하에 있었고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이 과정에서 ( 1920년에 세워진) 불이문(不二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탔다.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종각 등이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만큼 비석도 꽤 있다.

3. 주요 건물 및 문화재

3.1. 불이문

파일:건봉사 불이문2 강원도청,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파일:건봉사 불이문3 현판 해강 김규진 강원도청,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파일:건봉사 불이문4 강원도청,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불이문의 모습
불이문은 1920년 세워진 문으로 현판은 영친왕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이 썼다. 또한 불이문은 한국전쟁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기도 하며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었다.

3.1.1.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건봉사 절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불이문은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는 문이다. 건봉사터에 남아 있는 불이문은 1920년에 세운 것이다.

불이문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각각의 기둥에는 금강저 문양을 새겨 놓았으며 앞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이었던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불이문의 주변에는 '나무아미타불석주', '능파교비'등을 세웠다.

3.2. 능파교

파일:건봉사 능파교 강원도청,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파일:능파교 근경(문화재청).jpg
파일:금강산건봉사 능파교 너머 입구.jpg
능파교의 모습

3.2.1. 보물 제1336호

* 문화재청 홈페이지: 고성 건봉사 능파교 (高城 乾鳳寺 凌波橋)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라 이름하였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3.2.2. 능파교기비

1708년 능파교를 세우며 세운 비석으로 운파 청면이 찬했다. 능파교신창기비라고도 하며 능파교비라고도 한다.
3.2.2.1. 해석문
금강산(金剛山) 건봉사(乾鳳寺) 능파교(凌波橋) 신창기(新創記)를 허곡(虛谷)의 상족(上足) 운파청면(雲坡淸眠)이 찬하고 아울러 전서(篆書)를 쓰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지 31년 갑신(甲申) 이 절의 승(僧) 신계(信戒)가 스스로 강을 건너는 공으로 중록(衆綠)을 얻어 비로소 영여(令如)의 달에 시작하여 경상(景相)의 가을에 일을 마쳐 홍교(虹橋)가 이에 이루어졌으니 어찌 진수(溱水) 건너는 사사로운 은혜라고 하더라고 왕정(王政)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모든 다시를 건설하는 공덕의 성씨(姓氏)를 아래에 열거한다.

숭정(崇禎) 후(後) 81년 무자(戊子) 3월 세우다. 두겸(斗兼), 통정(通政) 석(釋) 민(旻), 가선(嘉善) 탁환(卓還), 가선(嘉善) 책민(策旻), 통정(通政) 찬수(粲朱), 통가(通嘉) 상찬(上贊), 비구(比丘) 석(釋) 잠(岺), 가선(嘉善) 노상업(盧尙業), 가(嘉) 김수선(金愛先), 가선(嘉善) 숭계(崇戒), 비구(比丘) 수증(首能), 비구(比丘) 쌍명(雙溟), 가선(嘉善) 행암(幸岩), 가선(嘉善) 신각(信覺) 가선(嘉善) 신기(信己) 박씨(朴氏), 가선(喜德) 노상인(盧尙仁), 김수선(金朱先), 통정(通政) 치건(致建), 가선(嘉善) 처진(處珍), 가선(嘉善) 숭희(崇熙), 가선(嘉善) 충해(沖海), 가선(嘉善) 찬인(粲仁), 비구(比丘) 숭신(策信) 김귀선(金貴先) 사복(司卜) 정부업(鄭付業), 강□□(姜□□), 정오(鄭五還), 가선(嘉善) 신해(信海), 가선(嘉善) 묘찰(妙察), 통정(通政) 처열(處悅), 가선(嘉善)일담(一淡), 가선(嘉善) 만균(萬勻), 정일종(鄭一宗), 통정(通政) 정자인(鄭自仁), 가(嘉) 김성립(金成立), 김종례(金終禮), 마수옥(馬受玉), 가선(嘉善) 책차(策次), 총정(通政) 여익(汝益), 통정(通政) 선은(處訔), 통정(通政) 윤흥인(尹興三), 윤세헌(尹世憲), 가(嘉) 전용주(全龍柱), 가선(嘉善) 안병업(安▨業)業, 가(嘉) 박▨▨(朴▨▨), 장석이(張石伊), 가선(嘉善) 옥정(玉淨), 가선(嘉善) 여즙(汝汁), 가선(嘉善) 선각(善覺), 가선(嘉善) 도암(道嵒), 찰방(察訪) 윤세임(尹世壬), 윤필상(尹弼尙), 최승길(崔丞吉), 황성사(黃成士), 가선(嘉善) 문걸(文屹), 통(通) 이성립(李成立), 가(嘉) 묘희(妙熙), 산중대덕령면(山中大德靈眠), 석수질(石手秩), 가(嘉) 김수달(金愛達) 장실업(將實業), 가(嘉) 찬희(粲熙), 승(僧) 통묘근(統妙根), 각수(覺修), 가(嘉) 무섭(無攝), 도감(都監) 가(嘉) 도섬(卓暹), 통(通) 취극(取克), 전주지(前住持) 민행(旻行), 문탁(文琢), 쌍려별좌(雙淚別坐), 가(嘉) 신화(信和), 이업(李業), 선수승(先首僧) 여만(呂萬), 조역(助役) 주공(主供) 통(通) 찬변(粲卞), 가(嘉) 이보남(李普男) 때의 주지(住持) 상일(尙日), 초세(招世), 옥형(玉浻), 가(嘉) 김만립(金萬立), 가(嘉) 최정(崔丁) 선수승(先首僧) 찬형(粲浻), 여상(呂尙), 단조(坦照), 통(通) 김오장(金五壯), 김최명이(金崔命伊), 최일경(崔一敬), 두문(斗文), 화주(化主) 가(嘉) 신계(信戒), 박씨예금(朴氏禮今), 전신업(全信業) 가(嘉) 송▨도복(宋▨刀卜), 야장(冶匠) 최상철(崔尙哲), 여찬(呂贊), 김사남(金士男), 가(嘉) 김▨봉(金▨奉), 비구(比丘) 취호(取昊) 각(刻) 성징(性澄), 가(嘉) 김전수길(金全守吉), 가(嘉) 서봉일(徐奉一), 비구(比丘) 천희(天熙), 최귀봉(崔貴奉), 이자번(李自番), 김유성(金有成), 전승천(全承天), 이애남(李愛男), 가(嘉) 김사룡(金士龍), 가(嘉) 한천동(韓天同), 오자건(吳自建)

-해석자 김혜완-

3.3. 대웅전

파일:강원고성 건봉사 대웅전.jpg
파일:금강산건봉사 대웅전.jpg
건봉사 대웅전
한국전쟁 때 탄 것을 복원한 것이다.

3.4. 석가불치상입탑비

1726년 세워진 비석으로 월봉선사 쌍식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3.4.1. 해석문

건봉사석가치입상탑비

간성(杆城)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의 석가여래 치아를 봉안한 탑비(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

석가여래의 치아 탑비명(釋迦如來齒相塔碑銘)­서문을 곁들임­

봉래산(蓬萊山) 춘파(春坡)의 제이세(第二世)인 운파(雲坡)의 문인(門人) 월봉선사(月峯禪師) 쌍식(雙式)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전액의 글씨도 아울러서 씀

듣건데, 과거에 자장법사(慈藏法師)께서 몸소 서방 인도에 가서 석가여래의 정골(頂骨) 및 치아(齒牙)의 사리(舍利), 그리고 금박을 입힌 가사(袈裟) 몇 벌을 얻어와 양산(梁山)의 통도사(通度寺)에 간직해 두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전해 내려온 지가 몇 천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중간에 왜적이 쳐들어와 가져가는 바람에 온 나라 사람이 실망했는데, 우리 사명대선사(泗溟大禪師) 유정(惟政)이 일본으로 사신으로 가서 치아 12매(枚)를 도로 봉환해 와서 건봉사(乾鳳寺)의 낙서암(樂西庵)에 간직해 두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보배롭게 여긴 지가 또한 여러 해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불법(佛法)이 땅에 떨어지자 사람도 가벼워지고 법도 가벼워졌으니, 밖으로 드러내어서 봉안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탑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는 각각 재물을 출연(出捐)하고 장인을 불러서 탑 돌을 다듬어 건봉사의 서쪽 산록의 적당한 곳에 안치하였다.

비록 ‘불법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불도를 받드는 성의가 더욱 깊고 치밀하다 하겠다. 이에 구름도 즐거워하고 강물도 기뻐하며, 스님도 탄복하고 속인도 승복하니, 그 일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가 없다. 이는 참으로 고금에 보기 드문 좋은 인연이다. 그렇다면 재물을 시주한 사람들과 일을 진행한 사람들, 돌을 가다듬은 장인들 등은 부처님의 보아(寶牙)로 하여금 오늘날에 다시 빛나게 한 것이다. 오, 아름답도다. 내가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머리를 조아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이분이 우리의 대각(大覺)이시니
중생(衆生)들의 스승이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입적(入寂)하시자
도리천(忉利天)에 탑을 세웠다네.
팔만 나라를 주류하다가
우리 나라에 인연이 있었네.
보배로운 석가여래의 치아를 봉안하니
기린의 뿔과 같이 진귀(珍貴)하도다.
산문(山門)에 면선(面鮮)하니
수립한 바가 탁월한데,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니
용천(龍天)이 호우(護佑)하도다.
온 나라의 아름다움이요
만세의 영풍(英風)이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로다.

황명 숭정기원후 100년 태세(太歲) 병오년(영조 2, 1726) 6월 일에 비석을 세움.

-해석자 김동석-

3.5. 승탑

건봉사에 있는 스님들의 탑이다. 한용운이 지은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 기준으로 이 장을 썼다.

3.6. 진영(초상화)

1928년 한용운이 지은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 기준으로 이 장을 썼다.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린 것으로 보인다.

4. 건봉사를 거쳐간 스님

조선사찰의 역사의 불완전은 공통적 결함이 될 것이다. 단편적 기록은 다소 있으나 물론 계통적이 아니오. 또한 통일적이 아님으로 조선사찰은 역사의 불완전이라고 하기 보다 실로 역사가 없는 것이다. 사찰의 역사는 불교역사의 대부분이 될 것인즉 사찰역사의 결함은 곧 불교역사의 결함이라 이것이 어찌 불교도의 중대한 책임이 아니리오. 내가 건봉사주지에 피임(임명)한 후로 생각이 이에 미쳐서 위선건봉사본말사(爲先乾鳳寺本末寺)의 역사를 편찬코자 하여 연구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본말사회의의 의결을 경하여 편찬에 착수 할 새 먼저 김일우최관수양사(金日宇崔觀洙兩師)로 각 말사를 역방(여러 곳 방문)하여 고기록을 초집하여 마침내 편집을 준성(竣成, 완성)하기에 지(至)하니(이르니) 실로 흔행(기쁨과 행복)을 불감(견디지 못하다)하는 바이다. 나아가서 차(此)가 후일에 조선사찰역사완성의 일조가 된다면 어찌 영행(다행한 영광)이 아니리오.
대략적 내용은 사찰의 역사가 기록되지 못한 것은 중대한 결함이며, 이에 이 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5. 여담

현재 건봉사가 있는 거진읍 냉천리는 마을 전체가 민통선 내에 있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다. 이곳을 방문한다면 양쪽 방향으로 출입할 수 있는데, 고성군청이 근처에 있는 건봉사 남쪽의 신안리 교동리 해상리 쪽에서 들어갈 때에는 별다른 검문 구간이 없으나, 거진읍 사무소 부근의 건봉사 북쪽의 송정리에서 진입하는 길은 군인들이 검문한다. 건봉사 방문을 위해 단순 통과 시에는 확인을 한 뒤에 주의할 점을 알려 준다.[21] 이후 절대로 차를 세우지 말고 바로 건봉사로 가야 하고, 사진 촬영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22]

위치가 위치인 만큼 한적한 편이며, 보물 제 1336호인 능파교를 건너 입구 전각 위층에서 명상 음악과 함께 고즈넉함을 즐길 수 있다.

6. 부속 암자

큰 절이었던 만큼 암자가 많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거의 사라졌다. 극락암만 위치를 옮겨서 다시 세워졌다.

[1]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했다고 하나, 여러 사정으로 왕의 행차가 가능한 곳이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상원사 어가동순록,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피 묻은 적삼 등의 실제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세조가 상원사 간 사실에 대해 스스로 일기까지 썼으며, 상원사에 세조가 도착하고 이를 기념하여 과거시험을 열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까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 다만 상원사 외에도 유점사와, 낙산사 방문한 기록이 있어서 실록에 기록만 되지 않았지 지나쳤을 가능성은 있다. [3]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8월 1일 경인 1번째기사 [4] 1708(숙종34)년 건립 [5] 1726(영조2)년 건립 [6] 1730(영조6)년 건립 [7] 1731(영조7)년 건립 [8] 1770(영조46)년 건립 [9] 1771(영조47)년 건립 [10] 1799(정조23)년 건립 [11] 1800(정조24)년 건립 [12] 1904(광무8)년 건립 [13] 1904(광무8)년 건립 [14] 1906(광무10)년 건립 [15] 1906(광무10)년 건립 [16] 1908(융희2)년 건립 [17] 1924년 건립 [18] 1936년 건립 [19] 1941년 건립 [20] 맞춤법과 몇몇 단어만 편집자가 현대어에 맞게 바꾸었다. [21] 간혹 차를 세우면 그냥 지나가라고 할 때도 있다. [22] 반대쪽도 검문만 없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는 행동은 하지 말자. 괜히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게 아닐 만큼 중요한 군사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