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승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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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懶翁1320년-1376년 (향년 56세)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공민왕(恭愍王)의 두 번째 왕사였다.[1] 고려 말의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인물로, 지공(指空) · 무학(無學)과 함께 고려 말 3대 고승으로 손꼽힌다.
2. 생애
나옹은 충숙왕 7년(1320)에 태어났다. 나옹의 속성은 아(牙), 속명은 원혜(元惠)이다. 아버지는 고려의 하급 관료로, 나옹 또한 어린 시절에는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게 살았던 듯하다. 승려가 된 뒤 사용한 법명은 혜근(惠勤)이고 법호가 나옹(懶翁)인데, 흔히 '나옹화상' 또는 '나옹선사'란 호칭으로 알려졌다.나옹이 아직 7살이던 충숙왕 13년(1326) 3월에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00-63)[2]이 원나라를 거쳐 고려로 왔는데, 회암사 자리를 보고는 "산수(山水)의 형세가 인도의 날란다 사원과 비슷하구나!" 하며 중창했다고 한다. 지공은 당시 고려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서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받았다. 지공은 회암사뿐만 아니라 법기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금강산을 참배하고 그 외에도 고려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임금부터 백성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설법을 듣고 무생계(無生戒)를 받았다. 지공은 고려에서 2년 6개월을 보내고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나옹 또한 지공에게서 무생계를 받았다.
나옹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21살이 되는 충혜왕 복위 1년(1340)에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 25세)에 양주의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은 고려 불교계에서 크게 추앙받은 지공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충목왕 3년(1347, 28세)에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지공은 연도(오늘날 북경)의 법원사(法源寺)에 있었는데, 나옹은 지공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나옹은 지공의 제자가 되었지만 법원사에만 머물지 않고 원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중국의 다른 고승들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스승은 분명 지공이었다.
나옹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자초(自超)라는 승려를 만나 제자로 거두었는데, 자초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친구이자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사가 된 무학이었다. 무학은 지공과도 만나서 다시 그 문하에 들어갔다고 하므로, 무학의 사승관계가 좀 꼬였다. 여말선초 불교계에서는 지공과 나옹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에, 무학은 스스로를 지공과 나옹의 법맥을 이은 자로 내세웠다.
1356년(37세)에 원나라 혜종이 나옹을 불러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를 맡겼다고 하므로, 당시 원나라 불교계에서도 나옹에게 명성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나옹은 얼마 안 있어 주지 직을 내려놓았다. 무학은 이 무렵에 고려로 돌아갔고, 나옹 또한 스승 지공과 상담한 뒤 1358년(39세)에 귀국하였다. 귀국하기 전에 스승 지공은 나옹에게 회암사에서 불법을 일으키라는 유지를 남겼다. 공민왕 9년(1359)에 오대산에 들어갔다는데, 이듬해(1361)에 공민왕이 나옹을 불러 법문을 듣고 황해도의 신광사(神光寺) 주지로 임명했다.
그가 주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일어났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할 정도로 고려군이 크게 몰렸는데, 나옹은 신광사에 계속 머무르며 절을 불태우려는 홍건적 무리들을 막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키려는 나옹의 태도에서 고승의 면이 보였는지, 홍건적들도 차마 신광사를 불태우거나 나옹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고려군이 홍건적을 몰아내자 공민왕도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행적 덕분인지 나옹은 고려에서 고승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 그는 2년간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주지 직을 내려놓고 공민왕 18년(1369, 50세)에는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공민왕 19년(1370, 51세)에는 원나라에서 입적한 지공의 사리가 고려에 이운되었다. 나옹은 이를 계기로 회암사에 지공의 부도탑을 세우고 회암사를 중창하고자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는 고려의 왕사로 임명되었고 공민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호를 받았다.
나옹은 우왕 2년(1376, 57세)에 드디어 회암사 중창공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열었으나 사대부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런 비난 때문에 나옹은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병이 나서 오늘날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에 도착한 뒤 입적하였다. 우왕은 나옹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추숭하였다.
여말부터 조선 조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는 지공과 나옹을 기꺼이 조사(祖師)라고 여겼고, 여기에 무학 또한 조사로 숭앙받았다. 지공과 나옹과 무학을 모두 일컬어 3화상(三和尙)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16세기 말, 임진왜란 무렵을 즈음하여 3화상(특히 무학)이 민간신앙이나 불교계에서 더 부각되었다. 오늘날 불교의례에서도 3화상을 '증명법사' 역할로 청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옹은 우리나라의 여러 불교 전설에서, 비록 원효나 도선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신이한 일을 행하는 고승으로 언급되곤 한다. 또한 나옹의 어린 시절을 과장하여 아버지가 관가에 빚을 지고 도주했고 어머니가 혼자 나옹을 낳고는 버렸더니 까치가 날아와 날개로 아기 나옹을 덮어 주었다거나 하는 전설도 전한다. 역사적 인물 나옹을 모르더라도 불교 전설을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나옹화상'이란 호칭이 친숙해질 정도. 역사책보다는 우리나라의 불교 전설에서 나옹화상이란 이름을 접한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