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군,
브레이브하트로 유명한
윌리엄 월리스의 하이랜더 전사대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 병정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용맹함과 잔혹함으로 제일 악명높은 자들은 바로
켈트족 전사들이었다는 거였다.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켈트인들이
아테네 시민병들과 격돌할때부터 켈트인들은 전사들이자 용병으로써 알려졌다.
허나 켈트인들은 대이주와
로마화를 통해 점점 세가 깎여나갔고, 이 켈트 전사들의 계보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자들이 바로
게일인들이다. 게일인들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처럼 유럽의 변방인
브리타니아 제도 내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을 차지하고 살아갔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갤로우글라스로써 자랑스러운 켈트전사들의 후계를 이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각각 붙어서 서로를 베어넘기는 맥스위니 클랜의 갤로우글라스들. 이렇듯이 이들에게 혈연은 칼날을 막아줄만한 것이 못 됐다.
갤로우글라스는
바이킹들의 침략을 거쳐 탄생한 노스인들과 게일인들의 혼혈 전사집단이었다. 로마시대부터 이어져온 바이킹 침공이 남긴 유산은 잿더미 뿐만이 아니었다. 데인로(Danelaw)와 같은 브리타니아의 해안지대에는 수도없는 노스인들이 정착했고, 거기에 있던
앵글로색슨과 게일인들과 융합되었다. 이들 중 제일 악명높은 집단이
하이랜더로도 알려진 스코트인들과 바이킹들의 피를 물려받은 갤로우글라스였다.
그들은 노스인들처럼 거대했고, 켈트인들처럼 강인했고 - 무엇보다 하이랜더들처럼
클랜, 즉 씨족으로 묶였다. 민간인을 참살하는것보다 클랜의 원로를 거역하는것이 더 중대한 범죄였고, 세대를 거쳐 내려온 훈련을 통해 단련되었다. 일례로 1558년에 한 갤로우글라스는 명령을 거스르고 진영 안에서 칼을 뽑았다는 이유 하나로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씨족의 원로들은 그를 교수형에서 구해준 대신 장대로 끌고가 산채로 못박아 버렸다. 허나 중세 작가들과
음유시인들이 혐오하며 적었듯이 이들은 결국 혈연이나 인연보다는
금을 숭상했고, 전투에서 같은 클랜을 만났다고 해도 가차없이 도륙해버렸다.
갤로우글라스와 그 종자들. 갑옷 양식과 무장을 보면 15세기 즈음으로 보인다.
이들의 등장에 대해 설명해 보자면, 갤로우글라스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윌리스를 도와 잉글랜드 인들을 스코틀랜드에서 몰아냈는데, 곧 아일랜드에서도 잉글랜드 정복자들과 싸우기 위해 나타났다. 당시 아일랜드는 1169년 라인스터 왕국에 대한 간섭으로 시작된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1세기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뭐, 굳이 왕위분쟁이 아니라도 아일랜드는 인간이 처음 발을 디딘 이후로 씨족간의 분쟁과 유혈사태가 끊임없이 터져나오던 곳이긴 했다. 덕분에 전문화된 용병집단에 대한 수요는 어딜 가던 넘쳐났다.
그래서 갤로우글라스 클랜들은 하이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코틀랜드에 터를 잡았다. 이들은 반-잉글랜드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정의의 전사들보다는 돈에 미친
용병단에 더 가까웠고, 아일랜드 자체도 씨족들간의 혈투가 몇세기동안 지속되는 풍토였기에 매 전투마다 편을 갈아치우는게 흔한 일이었다. 아일랜드의 거친 황무지 위에서는 결국 잉글랜드마저도 하나의 거대한 씨족일 뿐이었으니까.
이들은 때로는 용병단으로서, 혹은 영주의 직속 부대로써 복무했는데, 한 영주나 소왕국이 보유한 갤로우글라스 부대의 규모는 곧 그 영주의
전투력 측정기가 되었다. 2, 300여명의 갤로우글라스가 모인 전투단을 배틀(Battle)이라고 했는데, 웬만큼 부유한 영주에게도 하나 이상의 배틀을 유지하는건 힘든 일이었기에 이 배틀이 갤로우글라스 부대의 유일한 단위로써 남았다. 이를 넘어서 네자릿수의 갤로우글라스를 끌어모을 정도의 재력이 있던 영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사에 이름이 남았을 정도였다. 이렇듯 갤로우글라스는
종자까지 딸려있는 등 다른 중세국가의
기사에 준하는 전문 전투집단이었기에 이들만으로 군대를 꾸리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아일랜드의 중세 영주들은 그 빈틈을
경기병이나 컨(Kern)이라는
경보병으로 메꿨다.
갤로우글라스의 장비는 다양했다. 중세 동안에는 저 뾰족한 모양의
투구와
사슬갑옷이 주된 보호장구였고, 15/16세기를 거치며 더욱 진보된 형태의 투구와
판금 흉갑이 자리잡는다.
무기로 말하자면
스칸디나비아산
주목
장궁부터 스코틀랜드식
클레이모어까지 브리타니아 제도의 거의 모든 무기가 갤로우글라스들의 손을 거쳐갔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건 그들의 바이킹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양손도끼였다. 이 양손도끼는 보통 1.5미터 언저리의 장대에 거대한 1-2킬로그램짜리 날이 달린 무시무시한 흉기였다. 유럽에서 쓰인
롱소드나 일본의
일본도가 보통 1kg을 좀 넘으니 그만큼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서는 무시무시한 힘이 필요했다.
갤로우글라스 개인들의 삶은 험난했다. 그들은 전사집단에서 태어나 아버지, 삼촌, 형들에게 전사로써 교육받았고, 오직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어갔다. 중세 아일랜드는 전투가 없다고 해도 집단적인 폭력이 오가는 일이 흔했으니까.
게일인들에게는 약자가 강자에게 밀려서 죽어나가는것은 자연의 섭리 그 자체였다. 이런 야만적인 습성을 가진 자들을 통치하던 아일랜드 영주들 간에도 집단학살과
식인을 곁들인 과시적인 폭력행위가 난무했고 이런 행위는 가끔씩 같은편에 선 잉글랜드 기사들까지 정색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평화시에도 영지간에 벌어지는 집단투쟁의 선두에 섰고, 정치적인 암살자가 되었고, 귀족들의 대전사가 되었다. 전투가 끝나서 살아돌아온다 해도 일상을 보내다가 원한관계에 휘말려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쩌다 침대에서 죽은 갤로우글라스는 거기서 칼을 맞았거나 초가삼간째로 불타죽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갤로우글라스도
귀족들간의 싸움에 등 터져서 죽는 무조건적인 희생자는 아니었다. 이들의 거구와 훈련, 그리고 욕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평민들의 희생이 필요했으니까. 위에서도 말했듯이 갤로우글라스 간에는 민간인을 재미로 죽이는 것보다 씨족의 방침에 반발하는 게 더 위험한 일이었고 영주들도 이를 묵인했으니 말 다했다.
결국 1542년 아일랜드 정복을 완료한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이 모든것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녀는 친잉글랜드파던 아일랜드 독립주의자던 간에 갤로우글라스들의 뿌리를 싹 뽑아버렸다. 16세기의 마지막 20년동안 끊임없이 터져나온 반란을 통해 갤로우글라스 클랜들은 박살났고 살아남은 소수는 해외로 떠나 유랑하게 되었다.
고향을 등진 아일랜드
용병들은 전세계로 떠나
스페인인들과
온두라스를 정복했고,
플로리다에 발을 디뎠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정예연대가 되었으며,
네덜란드군으로
나폴레옹과 맞섰다. 또다시 피와 폭력의 씨앗을 뿌리면서, 그게 그들이 배운 모든것이고, 그들이 할 줄 아는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 많은 피를 흘리고도 정작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싸우지는 못했다. 그들 중 한명이던 루칸 백작이자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였던 패트릭 사스필드는
루이 14세의 준장으로써
플랑드르에서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부상으로 죽어가며 한탄했다고 한다. "주여, 이 모든게 아일랜드를 위해서였다면..."이라고. 이 한마디가 근세 전장을 떠돌던 수십만 아일랜드 용병들의 진심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