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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02:55:34

갤로글라

갈로글라에서 넘어옴
파일:Durer-Irish-16thC.jpg
알브레히트 뒤러가 1521년에 그린 그림. 왼쪽의 둘은 갤로글라이고 오른쪽의 셋은 그 종복들 또는 경보병인 케헤른(아일랜드어:ceithern, 영어: Kern)들이다.

1. 개요2. 상세3.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언어별 명칭
아일랜드어 gallóglaigh
영어 gallowglass
한국어 갤로글라
갤로우글래스
갈로글라

노르드 바이킹 브리튼 섬, 아일랜드 섬 침략 이후 13세기 중반에서 16세기 말 까지 나타난 아일랜드 하이랜더 군사 엘리트 및 용병집단. 주요 구성원들은 본디 스코틀랜드 북부의 하이랜드와 서부의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살다가 아일랜드에 정착하였다. 현대에는 영어식 명칭인 '갤로우글라스(gallowglass)'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한국 내에서는 아일랜드어 표기법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아 '갈로글라'라고도 불리며 본 문서도 이 이름으로 검색해서 들어올 수 있다.

아일랜드는 12세기부터 잉글랜드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한편 내부에서는 소왕국끼리의 다툼이 이어지는, 용병이 활약하기엔 알맞은 무대였다. 이 당시 스코틀랜드 게일인 하이랜더들은 주로 소왕국 중앙군 소속의 중장보병으로 참전했다. 특히 노르드인과의 혼혈 게일인 집단 하이랜더들은 아일랜드에선 갈로글라(gallóglaigh, 외국인 전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갈로글라(갤로글라)가 영어화된 표현인 갤로우글래스(Gallowglass)는 아일랜드 소왕국의 군사력의 척도 중 하나이며, 브리튼 전역에서 용맹한 용병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일랜드 소속의 갤로우글래스가 점차 현지인 중장병으로 교체되고 화약병기를 도입한 신세대 하이랜더 용병인 레드샹크(Redshank)에게 도태되는 와중에도 17세기 아일랜드가 완전히 복속될 때까지 군사적으로 유럽 기준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던 소왕국들의 주요 병력이었다.

2. 상세

원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무력적으로든 평화적으로든 이래저래 노르드인들과 접촉이 많았다. 아일랜드인의 조상 게일인들은 스코틀랜드에도 정착했었는데 10세기 노르드인(바이킹)이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상륙해 정착, 스코틀랜드 게일인과 통혼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게일인들은 이런 스코틀랜드의 노르드게일인들을 "이방인 게일인"이라는 뜻의 갈게일(Gall Gaeil)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갤로글라라는 말이 유래했다. 이후 이들은 스코틀랜드 내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조상들의 땅인 아일랜드로 피난가기도 했는데, 대부분 용병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13세기 중반 ~ 16세기 말로 이 시기 수백년 간 갤로글라(갤로우글라스)들은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의 군사력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초의 갤로글라 집단의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노르드게일인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이 점점 더 아일랜드에 많이 건너와 정착하면서 원주민들인 토착 아일랜드 게일인들도 이들에게 병사로서 모집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어 아일랜드 사회에 어느 정도 동화되었다. 갤로글라들은 아일랜드의 군소 왕과 영주들에게 고용되어 작은 규모의 전쟁에서 활용되었으며 윌리엄 월레스,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도 월리엄 월레스를 도우면서 최초로 등장하며 활약한 바 있다. 주로 갤로글라들은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침략에 대항하는 쪽에서 재미보며 돈을 벌었으며, 아일랜드를 방어하기 위해 여러 아일랜드 소왕국들의 군대에 섞여서 용병 노릇한 것을 생각하면 태생적으로 반잉글랜드쪽 입장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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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갤로글라(좌)와 케헤른(우)을 묘사한 삽화

갤로글라는 당대 켈트- 게일 세계의 최정예 병사들로, 스칸디나비아 주목 장궁부터 스코틀랜드식 클레이모어, 재블린, 다트 등 모든 종류의 무기는 물론, 게일인들과 노르드인들의 무술까지 모두 섭렵한 노련한 중보병들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제일 유명한 갤로글라들의 무기라면 역시 긴 장대에 달린 거대한 양손도끼일 것이다.

이들은 근본이 외지인 혼혈이었고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존 게일인들의 토착 클랜 계층 체계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자신들만의 씨족체제를 유지했다. 외부인으로서, 그들은 아일랜드 씨족 정치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에서 중립적인 세력으로 보였고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의 영주들은 외부의 적들뿐만 아니라 씨족간 경쟁자들과 반대자들을 죽이기 위한 용병, 경호원, 암살자 등 무력집단으로 이들을 사용했다. 따라서 영주들 역시 유용한 무력집단인 이들이 어느정도 제멋대로 굴어도 그 행동을 용인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질서에 거의 충성심을 갖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최고 단가에 자신을 파는 용병이 되었다. 갤로글라들은 지역 토호들의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에 아일랜드의 군사지도자들은 갤로글라를 개인경호 등의 목적으로 애용했으며, 화약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갤로글라들은 아일랜드의 주요 보병 전력으로 활약했다. 이들은 10세기 이후 5~6세기 동안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전쟁을 지배했다.

다만 이들은 종자까지 딸려있는 등 다른 중세 서유럽 국가의 기사에 준하는 전문 전투집단이었기에 이들만으로 군대를 꾸리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아일랜드의 중세 영주들은 그 빈틈을 경기병이나 케헤른이라는 경보병으로 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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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글랜드 기병과 맞서는 아일랜드 갤로글라와 케헤른

16세기 말에 아일랜드인들의 무력, 자치 집단들을 탄압했던 잉글랜드 튜더 왕조와의 전투 이후 갤로글라 클랜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1542년에 아일랜드 정복을 완료한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 이후 친영국파든 아일랜드 독립주의자든 간에 갤로글라들의 뿌리를 싹 뽑아버려서 16세기의 갤로글라 클랜들은 박살났고 살아남은 소수는 해외로 떠나 용병생활을 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갤로글라들은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 각지에서 활동했으며, 스위스 용병과 함께 유럽의 주요 용병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일랜드의 전쟁에서 총기 사용이 증가했고 갈로글라들이 17세기에 황혼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로글라들은 9년 전쟁에서[1] 아일랜드 반군의 주요전력으로 남아 있었다. 1601년 킨세일 전투에서 아일랜드와 스페인 연합군이 패배한 이후, 스코틀랜드 고지 용병들이 1640년대까지 아일랜드에 계속 왔음에도 불구하고, 갈로글라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646년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의[2] 장군 오간 루어 오 넬이 벤버브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도 그 밑에서 싸웠다.

3. 매체에서의 등장

케헤른과 더불어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병종이다보니 아일랜드가 등장한다면 자주 등장하는 편이며, 시대적 차이를 무시하고 나오기도 한다.


[1] 잉글랜드에 대항한 티론 백작 이 모르 오 넬이 1593년부터 1603년까지 이끈 전쟁. [2] 영국 내전 당시인 1642년 찰스 1세 지지를 선언하며 아일랜드에 자치권을 행사한 자치정부,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이 이들을 진압함으로써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