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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급 잠수함/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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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y Wolves Of Pacific
태평양의 잿빛 늑대들

1. 개요2. 대서양 전투3. 태평양전쟁 초반4. 태평양 전쟁 중후반

1. 개요

총 77척의 가토급 잠수함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실전 배치되어 주로 태평양 해역에서 활동했다.

2. 대서양 전투

태평양 전쟁 발발 후, 6척의 가토급 잠수함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에 파견되어 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의 주 임무는 미국 동부 해안에 출몰하는 유보트의 경계였고 횃불 작전에 동원되어 북아프리카 북서쪽 해역이나 비스케이 만 일대에서 상륙작전 지원 임무에 투입되었지만 전과 자체는 미미한 편이어서 43년기에 전 함정은 태평양 전선으로 전장을 옮기게 된다.

3. 태평양전쟁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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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급 72번함 SS-283 티노사(Tinosa)[1]1942년 8월 7일]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이후, 가토급 잠수함은 단 한척인 드럼만이 완공되어 조정 훈련중에 있었으며 1942년기동안 총 8척이 실전 배치되어 태평양에 투입되었으나 1943년 후반까지 신형 어뢰인 Mark.14의 오작동과 불발, 당시로서는 원활하게 할 수 없었던 공격 전술과 기타의 이유들로 인해 전과가 상당히 미미했다.
72번함 SS-283 티노사(Tinosa) -
로렌스 다스핏 소령이 지휘하는 티노사는 3번째 초계 중인 1943년 7월 24일 트럭섬 인근 해역에서 19,000톤급 일본 유조선 제3 토난 마루를 포착했다. 느리고 호위 전력도 없는데다가 크고 흘수도 깊고 넓직한 유조선은 아주 훌륭한 표적이었지만 근거리로 접근하여 어뢰를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무려 13발이나 발사하여 명중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발도 폭발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포착한 구축함에게도 어뢰 2발을 명중시켰는데도 2발 모두 불발이 발생하고 말았다. 다스핏 소령은 격노하면서 항해일지에 "No Effect", 즉, 터지지 않았다고 거의 휘갈기듯 기록했고 증거물로서 어뢰 1발만을 남기고 모든 어뢰를 소진 후 모항인 진주만으로 귀환한 뒤 곧바로 록우드 제독에게 항의를 했다.
26번함 SS-237 트리거(Trigger) -
로이 S. 벤슨 소령이 지휘하는 트리거는 1943년 6월 10일 미타케 섬 인근 해역에서 일본 항공모함 히요를 포착하였고 6발의 어뢰를 발사해 전탄 명중시켰으나 단 한발도 폭발하지 않았다. 초계임무 종료 이후 모항인 진주만으로 복귀한 트리거의 함장 로이 벤슨 소령은 당당하게 히요를 격침시켰다고 보고했으나 록우드 제독은 통신 감청 등으로 히요는 격침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히요 격침 보고를 제외했다.
1942년 가토급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들이 세운 격침전과가 미미한 데에는 나름대로 그 이유가 존재했다.

흔히 미국 특유의 생산량 덕분에 미 해군 잠수함 역시도 건조척수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1941년 12월 7일 기준으로 보아도, 전쟁 말을 보아도 미 해군의 잠수함 척수는 극히 모자랐다. 2차대전 동안 건조/보유 및 실전배치된 모든 미해군 잠수함은 총 340척 정도인데, 진주만 공습 당시 미 해군 잠수함의 보유량은 다음과 같다.

대강 105척이고 가토급 약 73척이 한창 건조 중이거나 예산을 인가받을 예정이었다. 여기에 대서양에서 U보트를 경계하기 위해 파견되어 있는 배들까지 제외하고 나면, 실질적으로 진주만 공습 이후로 태평양전선에서 패트롤을 수행할 수 있는 잠수함의 척수는 훨씬 떨어지게 된다.

일단 O급 잠수함은 전부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태평양에서 작전하질 않았으며 대서양에서도 훈련용 잠수함 및 예비로서 운영되었다.. 그래서 태평양전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잠수함으로선 완전히 제외되며 R급 잠수함 역시도 전 함정이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완전 제외.

S급 잠수함의 경우 18척이 태평양에 배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23척은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바라쿠다급 역시도 3척 전부 대서양 배치로 완전 제외. 매크럴급 2척 모두 대서양 배치로 제외.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개전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이 가능했던 잠수함은 58척 정도였다. 이 숫자로는 넓었던 태평양을 커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여기에 체급이나 임무 등으로 인해서 장거리까지 나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잠수함 역시도 제한이 된다.

우선 S급의 경우 순항 속도인 10노트를 기준으로 5천노티컬마일, 즉 9천3백km정도의 항속거리밖에 내질 못해 실질적으로 연안작전이나 매복, 수송 임무에나 투입할 수 있었던 수준이었고 함령이 15년을 넘은 배들이 많아 실질적인 가동률은 훨씬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르고너트급과 나왈급의 경우 미해군 최대의 덩치를 자랑하는 잠수함 답게 2만5천 노티컬마일, 약 4만6천km에 달하는 장대한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잠수완료시간 및 중성부력 유지능력, 잠수시간 등에 많은 결함과 문제점이 있었고 역시 함령이 상당히 지난 상태이기에 안심하고 패트롤을 보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워낙 다급했던 터라 수송임무나 패트롤을 보내는 상황이었으며 카샬롯급의 경우 1번함인 카샬롯은 시험함 성격이 매우 강해 실질적으로 시험/훈련용 잠수함으로 쓰였고 초반을 제외하면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기에 남은 1척인 커틀피쉬만이 패트롤을 수행할 수 있었다.

사르고급의 경우 개전 당시에도 최신형 잠수함으로서 일선에서 임무를 기대해 볼 수 있으나 1척인 씨 라이온이 1941년 12월 10일 케비테 항에서 정박중 일본군의 폭격으로 항내에 착저, 전손 처리되어 폐기되었으므로 운영 가능한 잠수함은 총 9척.

이런 제한사항들을 종합해 볼 경우, 전쟁 초반 일본군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가 가능했던 잠수함은 약 39척. 연안작전 및 매복만을 주로 수행하는 상황이라도 58척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용가능 전력이 부족한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가토급의 경우 앞서 서술했듯 개전 당시 단 1척, 드럼만이 완공되어 조정 훈련중에 있었고 9척 포함 10척이 1942년기에 실전 배치되어 태평양으로 전속이동이 되었기에 1942년 말 기준으로도 10척만이 추가 배치되는 상황이었으며 총 8척의 미국 잠수함이 작전 중 격침당하거나 좌초, 사고로 손실되었다.

개전 이후 밀리던 연합군의 사정에 따라, 일부 잠수함들은 지상군에 대한 물자 지원과 수송임무, 퇴각 작전 지원 등에 투입되어서 일본 해군의 군함이나 수송선단에 신경을 쓸 겨를이 많이 없었다. 실제로 1942년기에 가토급 잠수함을 포함한 미국 잠수함들의 전과부족의 이유는 어뢰결함보다도 이 점이 가장 컸었는데,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 대신 정찰 및 수송임무와 함대 지원임무, 특수임무에 주로 편중된 임무들 때문에 실질적으로 전과를 세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으며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선 상황 때문에 수송선단 및 함대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일본 함대의 본격적인 침공에 대비해 초계임무까지 수행해야 했으며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도 주력 함대의 정찰 지원을 위해서 19척의 잠수함들이 배치되었기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도 잠수함대의 적극적인 공세는 무리에 가까웠다. 이것은 가토급 10척이 1942년 말까지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면서도 지속된 상황.

또한 194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이 개시될 시점, 미 해군 정보부에서 얻어낸 암호 해독및 도청을 통한 정보를 통해 미 해군 잠수함들은 적은 척수임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일본 수송선단의 예상 이동 위치에 매복해 공격을 시도할 수 있었다.[5]

하지만 전쟁 초반의 사정은 달랐는데, 당장 진주만 공습 이후 긴급하게 패트롤 임무를 수행한 잠수함들도 1941년동안 꼴랑 3척 격침시키고 돌아오는데에 그칠 정도였는데 이유는 일본 수송선단 및 함대에 대한 정보 부족의 이유가 매우 컸으며 당시에는 미국의 정보력이 차마 미치질 못했으며 이에 따라 무작정 나가보고 발견하면 대응하는 식의 잠수함 운영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전간기 시절 미해군은 잠망경 관측을 통한 사격제원 획득보다는 음탐 접촉을 통한 사격제원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대강 음탐접촉으로 적함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다면, 분당 스크류 회전수를 통한 속도 예상, 음탐사[6]의 감을 이용한 적함과의 거리, 적함의 침로 등을 예상을 해야했으며 설령 오차가 난다 하더라도 자기기폭장치가 있으니 직접 명중하지 않더라도 이게 제대로 터져주어 손상을 입히리라 믿었었다.

나름 선진적인 공격 개념이긴 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적인 상황에서나 이루어질까 말까한 공격전술이었다.

잠수함이 목표에 대해 어뢰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선 자함과 적함과의 거리, 적함 방위, 자함 속도, 적함 속도, 적함 침로 등의 사격제원을 얻어내 TDC에 입력해 사격제원을 송출해 어뢰에 입력해야 했는데, 일단 적함과 자함간의 거리에서 상당한 오차가 발생하게 되며 소나 조작 요원의 감으로는 적함의 거리가 멀다, 가깝다 정도만 어느정도 확인 가능했고 정확한 거리는 파악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나 핑을 통해 적함과의 거리를 정확히 잴 방법이 있으나, 소나 핑으로 인해 생기는 소음은 잠수함의 정체를 드러내는 행위이기에 호위전력이 있을 경우 소나 핑 역시도 상당히 제한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초반에 이 공격방법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후 미국 잠수함들은 독일식의 "잠수하는 어뢰정" 개념의 공격방식으로 꽤 빠른시간 내에 전환하게 되었다.[7]

이렇듯, 어뢰 문제는 분명 심각했으나 가끔은 이 어뢰도 본래 목적대로 제대로 작동해준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4번함 SS-215 그라울러(Growler) -
하워드 길모어 소령이 지휘하는 그라울러는 1942년 6월 20일 첫 초계에 나서 7월 5일 새벽 경 키스카 제도 인근 해역에서 제18구축대의 아사시오급 구축함 아라레, 카스미, 카게로급 구축함 시라누이, 카게로와 치토세급 수상기모함 치요다, 특설 수송함 아르헨티나 마루 호를 포착했다.

곧이어 그라울러는 어뢰 공격을 개시, 아라레는 침몰해버렸고 시라누이는 기관실에 정통으로 어뢰를 명중당해 항해불능 상태에 빠지고 함교가 절단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카스미는 함수가 절단되고 침수와 화재로 인해 대파되었다.

이 맹공에서 겨우 살아남은 시라누이와 카스미는 완전히 수리하는 데에 거의 1년의 시간을 소모했고 18 구축대의 지휘관은 책임을 물어 할복자살을 했으며 부대는 해체되었다. 이 전투로부터 한달 뒤인 8월 25일 그라울러는 일본 육군 수송선 센요 마루를 침몰시키고 6일 뒤인 8월 31일 수송선 에이후쿠 마루를 격침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듯이 전과 부족을 어뢰 결함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당시 미 해군 잠수함대가 전체적으로 처한 상황이 매우 복합적이었던 상황이었으며 1943년 말기에 일본 수송선단의 주요 루트로 잠수함을 보내기 시작하며 전반적인 잠수함 장교들의 대대적 교체가 이루어지고 어뢰 역시도 이후 개량을 거쳐 높은 신뢰성을 가진 Mark.23 어뢰는 물론이고 독일의 G7e 어뢰에 이은 두 번째의 잠수함 발사 유도어뢰인 Mark.27 음향유도어뢰를 사용하는 등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4. 태평양 전쟁 중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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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em Harder! (더 강하게 몰아붙여라!) - 가토급 잠수함 46번함 SS-257 하더(Harder)의 구호. 함명을 이용한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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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폭뢰공격을 받는 가토급 잠수함 6번함 SS-217 가드피쉬(Guardfish)의 기록화 - 미 해군 기록화가 프레드릭 프리먼 소령 작품


태평양 전쟁 중-후기에 들어서자마자 가토급을 포함한 미 해군 잠수함은 52척을 손실, 잠수함대 소속 장병들과 동승한 육군, 해병대, 민간인 총합 3,630명이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 실종되거나 사고로 사망하고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하거나 처형당했으며 원인 불명의 사유로 실종되었다. 이들 잠수함들은 미해군 전체의 약 5%의 척수만 존재했으며 JANAC기준 201척 540,192톤의 일본해군 군함을 격침시키고 1,113척 4,779,902톤의 일본 상선을 격침시켰다. 이 수치는 일본 전체 선적 손실의 54.6%에 달하며 항공모함 함재기들과 마찬가지로 미 해군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창이었으며 태평양 해저전의 대승리에 큰 축을 담당하였다. 활동 해역은 주로 필리핀 일대, 북태평양, 남서태평양 해역 거의 전체, 동중국해, 일본 근해와 한반도 주위의 황해, 남해, 동해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평소에는 단함 혼자서 초계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특이 단함 작전 사례.
27번함 SS-238 와후(Wahoo) -

더들리 W. 모튼 소령[8] 이 지휘하는 와후는 마지막 순찰 중이었던 1943년 10월경 동해로 이동해 일본과 식민지였던 조선 간의 수송선을 끊을 목적으로 수송선과 정기 여객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고 끝내 10월 5일 부산으로 향하던 부관연락선 콘론 마루를 침몰시키고 말았다.

이 공격으로 승객 585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중의원의원 두명이 이 배에 탑승했다가 사망하는 등 당시 이 공격은 일본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미국 잠수함에 의한 최초의 여객선 공격사례로서 미국 본토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일시적으로 일본-조선 간의 부관선 운행을 중지시키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전부터 와후는 한반도 주위를 어슬렁대며 적지 않은 전과를 얻어냈고 두들리 모튼 함장은 무전으로 "이제 JAP들은 황해에서 잠수함 때문에 고민할 것"이라는 교신을 보내기도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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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번함 SS-242 블루길(Bluegill)의 뇌격으로 발레라 곶의 암초에 좌초된 일본 육군 유조선 호난 마루. - 1945년 4월 5일 촬영

31번함 SS-242 블루길(Bluegill) -

에릭 발 주니어 중령이 지휘하는 블루길은 다섯번째 초계인 1945년 3월 28일경 프랑스-인도차이나 반도의 발레라 곶에서 일본 육군 유조선 호난 마루를 포착, 어뢰공격을 개시해 명중시켰으나 호난 마루의 승무원들은 배를 해안가로 돌진시켜 좌초해버리고 배를 버린 뒤 도주했다. 이후 4월 5일 다시금 좌초된 채 버려진 호난 마루를 발견한 블루길의 승조원들은 일본군이 인양하여 재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좌초한 호난 마루에 승선한 뒤, 불을 지르고 폭약을 설치해 폭파시켜 호난 마루를 파괴했다.


이후 1943년기부터 U보트와 유사한 늑대 떼 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는데 미국 해군 잠수함대가 최초로 감행한 울프팩은 1943년 8월 1일, 미드웨이 일대를 바탕으로 가토급 잠수함 14번함 SS-225 세로(Cero)와 24번함 SS-235 샤드(Shad), 거급 잠수함 3번함 SS-208 그레이백(Grayback) 3척으로 기록된다.

주요 목표는 일본의 각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자원, 특히 석유를 수송하던 유조선들 및 일본 본토에서 태평양 지역으로 파견되는 병력 수송선들이 주요 타겟이 되었으며 사르고급, 발라오급 등의 주력 잠수함들과의 늑대 떼 작전 등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혀 일부 수송선단의 경우 수송작전 와중에 공격을 받아 평균 2000명에서 히-71선단의 예처럼 수송선 및 해군 승무원들 포함 파견 병력의 사망자들만 7천명에서 거의 8천명에 육박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다음은 일본 수송선단 역사상 미국 잠수함들의 늑대 떼 작전중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71선단의 사례.
가토급 잠수함 11번함 SS-222 블루피쉬(Bluefish), 44번함 SS-255 해도(Haddo), 46번함 SS-257 하더(Harder), 58번함 SS-269 래셔(Rasher) -

일본의 히(ヒ)선단은 일본 본토에서부터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일본 육군 병력들의 파견과 상륙 및 물자 보급과 동시에 동남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본국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은 수송선단의 일련 명칭으로서 히-71선단은 1944년 8월 10일 일본 관동군 제26보병사단을 승선시켜 필리핀의 마닐라에 상륙시키기 위해 1944년 8월 8일 큐슈 섬의 이마리 만에서 출항했다. 선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

호위항공모함 타이요

구축함 유우나기, 아사나기, 후지나미

해방함 히라토, 쿠라하시, 미쿠라, 쇼난, 사도, 에토로후, 마츠와, 히부리, 11호 해방함

급유함 하야스이

급양함 이라코

유조선 테이요 마루, 에이요 마루, 제2 하코 마루, 니요 마루

병력수송선 테이아 마루, 아와 마루, 노토 마루, 호카이 마루

상륙함 타마츠 마루, 마야산 마루

무장수송선 노시로 마루

화물선 에이신 마루.

수송선단 호위의 지휘를 맡은 사람은 카지오카 사다미치 해군소장이었다.

이들 중 총 6척의 유조선과 병력수송선, 호위항공모함 타이요, 구축함 2척, 해방함 3척, 급유함 하야스이가 미국 잠수함들에게 격침당해 태평양의 PQ-17선단이라는 이명도 있으며 8월 18일과 19일간의 교전은 히-71 대재앙(Disaster)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미군의 대대적인 필리핀 탈환을 위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에 맞서 필리핀에 대한 병력 파견이 절실해졌다.

하지만 항해 8일째인 1944년 8월 18일경 동중국해 인근 해역에 도달한 히-71선단은 가토급 잠수함 블루피쉬, 해도, 하더, 래셔, 레이튼과 발라오급 잠수함 스페이드피쉬, 피쿠다, 레드피쉬 등으로 구성된 총 9척 규모의 미국 잠수함 울프팩 패거리들에게 포착되었고 마닐라에 도착할 때까지 히-71 선단은 지옥을 맛보게 된다.

1944년 8월 17일 히-71선단을 최초로 발견한 발라오급 잠수함 레드피쉬는 근 하루동안 이들을 추적하며 적절한 공격위치를 점하기 위해 기동을 시작했고, 보퍼트 풍력 12레벨 수준의 태풍으로 인해 선단의 속력이 느려지던 도중이었던 8월 18일 아침 5시 24분경 유조선 에이요 마루를 향해 어뢰를 발사하여 명중, 손상을 입혔다.

갑작스런 잠수함의 공격에 깜짝 놀란 구축함 아사카제와 유우나기는 긴급히 에이요 마루를 지원했으며 에이요 마루와 아사카제, 유우나기는 선단에서 이탈해 대만의 가오슝으로 이동했으며 히-71선단의 상선과 군함들은 일제히 나뉘어져 일정 거리 유지하에 따로따로 항해를 하기 시작했다. 동시간, 발라오급 잠수함 스페이드피쉬와 피쿠다는 지독한 파도 높이와 제한되는 시야 등의 문제로 히-71선단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 G. 먼슨 소령이 지휘하는 가토급 잠수함 58번함 SS-269 래셔(Rasher)는 히-71선단을 호위하는 항모 타이요에서 파도와 바람이 덜한 틈을 타 출격하여 초계비행을 수행중인 97식 함상공격기 9기를 발견, 근처에 선단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수색을 시작했다.
"달빛 한점 없는 칠흑같은 밤이며 해상 기상상태가 매우 불량하고 엄청나게 많은 비가 내리고 있음. 판단컨대 야간 공격을 감행하기 가장 이상적인 조건으로 생각됨." - 헨리 G. 먼슨 소령, 래셔의 전투보고서 중[10]

밤 8시 2분경, 래셔는 레이더로 15,000야드 거리에서 13척의 수송선, 6척의 호위함으로 구성된 히-71 수송선단을 포착, 12노트의 속력으로 이동 중인 선단에게 근 2,800야드까지 긴급 부상하여 접근, 많은 비가 쏟아지고 파고가 높아진 밤 9시 18분경 래셔는 후방 어뢰 발사관에 충수를 실시하고 발사관을 개방한 후 좌현으로 급선회, 9시 22분경에 9,845톤급의 유조선 테이요 마루를 향해 후방 어뢰발사관에서 어뢰 4발을 발사하여 2발을 명중시켰으며 테이요 마루는 수송 중이던 기름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고도 1000야드까지 버섯구름이 피어올랐고 엄청난 화염 때문에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졌으며 일부 선체 파편은 고도 500야드까지 날아오르며 완전히 박살이 난 테이요 마루는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사망자 99명.

어뢰를 발사한 래셔는 긴급 잠항을 했으며 기습적인 공격에 놀란 일본 해방함들과 구축함들은 래셔가 있을만한 곳에 견제성으로 폭뢰를 마구잡이로 투하하고 기관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대응했지만 래셔는 이를 유유히 회피한 후, 2차 긴급부상하여 밤 11시 10분경 수송선단과의 3,000야드 거리에서 17,537톤급 병력수송선 테이아 마루를 향해 전방 어뢰발사관에서 어뢰 6발을 토해냈다.

곧이어 테이아 마루에 3발의 어뢰가 명중했으며 테이아 마루는 침몰, 승무원 포함 관동군 제26사단 병력 2,665명이 배와 함께 운명을 맞이했다. 이 사망자들 중 일부는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험악한 파도와 바람 등으로 인해 익사하거나 표류를 하다 죽어갔으며 우천으로 인해 시야가 많이 제한되어 제대로 구조를 받을 수 없었다.[11]

어뢰 3발을 명중시킨 래셔는 침착하게 급선회하여 11시 14분경 후방 어뢰발사관에서 어뢰 4발을 발사, 3,500야드 거리에 있던 호위 항공모함 타이요에 3발을 명중시켰으며 타이요는 연료 탱크가 유폭을 일으키며 가라앉았으며 승무원 및 항공요원 포함 747명이 전사했다.

래셔는 다시 신속히 잠항하여 어뢰를 재장전하며 다른 선박을 노리던 중, 다른 일본 배들 2척에게서 거대한 물기둥이 일어나고 동시에 해방함 한 척이 긴급히 속도를 올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 폭발을 일으킨 범인은 찰스 M. 헨더슨 소령이 지휘하는 가토급 잠수함 11번함 SS-222 블루피쉬(Bluefish)였는데, 블루피쉬는 히-71선단에 근접하여 새벽 3시 20분경 어뢰 5발을 발사, 수송선 아와 마루와 급유함 하야스이에 각각 2발을 명중시켰으며 아와 마루는 간신히 침몰을 면했으나 하야스이는 선미부터 잠기기 시작하며 끝내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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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급 잠수함 11번함 SS-222 블루피쉬(Bluefish)의 잠망경으로 촬영한 침몰해가는 일본 해군 급유함 하야스이 - 1944년 8월 19일 촬영

재장전을 끝낸 래셔는 2,000야드 거리에 있는 화물선 에이신 마루를 향해 전방 어뢰발사관에서 4발의 어뢰를 발사, 그중 3발이 명중하여 에이신 마루는 싣고 있던 탄약들이 일제히 유폭하며 산산조각이 나 침몰했다. 이 폭발의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하여 래셔의 승무원들이 폭발의 충격을 직접 몸으로 느꼈을 정도.

다시 우현으로 급선회한 래셔는 후방 어뢰발사관에서 어뢰 2발을 발사해 7,184톤급 무장 병력수송선 노시로 마루에 1발을 명중시켜 손상을 입혔다. 침수로 인해 속력이 5노트까지 떨어진 노시로 마루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끈질기게 도망을 쳤으며 곧이어 해방함 에토로후가 래셔를 추적했지만 래셔는 유유히 도망치고 말았다.

그 시각, 발라오급 잠수함 스페이드피쉬와 레드피쉬 역시 이 난리판국에 뛰어들며 공격을 개시, 스페이드피쉬는 9,589톤급 상륙함 타마츠 마루에 어뢰공격을 가해 격침시켰으며 승무원 포함 제26사단 병력 4,406명에서 4,755명이 눈 깜짝할 새에 증발해버렸다. 다른 잠수함들도 남은 수송선들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대부분은 실패했고 어뢰로 인해 손상을 입은 아와 마루와 노시로 마루는 침몰하지 않기 위해 육지로 돌진해 좌초를 시도했으며 다른 상선과 군함들은 생존자들을 구조 후 미국 잠수함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속하게 남하했다.

하지만 히-71에 대한 공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히-71선단은 힘겹게 8월 22일경 산 페르난도 해에서 집결하여 24일 마닐라에 도착하는데에 성공했으나 대잠 해방함과 구축함들은 체스터 W. 니미츠 주니어 소령이 지휘하는 가토급 잠수함 44번함 SS-255 해도(Haddo)와 새뮤얼 데이빗 딜레이 소령이 지휘하는 46번함 SS-257 하더(Harder)와 접촉, 교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하더는 새벽 4시 56분경 침착하게 어뢰를 발사하여 대잠 해방함 마츠와와 히부리, 사도에 어뢰를 명중시켜 대파시켰으며 곧이어 하더는 확인사살을 위해 어뢰를 추가로 발사, 6시 49분경 마츠와를 침몰시켰으며 사도 역시 해도의 확신사살 어뢰공격을 받아 7시 20분경 가라앉고 말았다. 남은 히부리 역시 하더가 마무리를 지어버리며 7시 55분경 격침시키는데에 성공했다.

8월 21일경, 가오슝에서 다른 유조선인 제2 하코 마루와 니요 마루를 호위하던 구축함 아사카제와 유우나기 역시 히-71선단에 합류하기 위해 마닐라로 이동하던 도중인 8월 22일 저녁 2시 44분경 발라오급 잠수함 스페이드피쉬, 피쿠다와 조우했고 스페이드피쉬는 어뢰를 발사하여 10,023톤급 유조선 제2 하코 마루에 큰 손상을 입혔으며 제2 하코 마루는 파살렝 만에 좌초된 후 9월 18일 파도에 의해 손상을 입어 파괴되고 만다.

한편 다른 유조선인 니요 마루를 호위중이던 아사카제는 8월 23일 가토급 잠수함 헤이크, 해도, 하더와 조우하게 되었고 아사카제는 해도가 쏜 어뢰 1발에 맞아 빌빌대던 도중 야밤에 침몰하고 만다. 하지만 다음날인 24일 하더는 대잠 호위함 CD-22의 폭뢰공격으로 손상을 입고 수중에서 부력을 회복하지 못해 침몰, 함장인 새뮤얼 딜레이 소령 포함 승무원 80명이 전사했다. 일본 구축함과 대잠 해방함들의 천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잠수함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다음날인 8월 25일, 구축함 유우나기 역시 해도의 어뢰 공격으로 인해 침몰해버렸으며 겨우 남은 히-71선단은 석유 수송임무에 투입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향해 닻을 올렸으며 9월 1일경 싱가포르에 도착하는데에 성공한다.

이 울프팩 작전으로 미국은 단 1척의 잠수함과 80명의 잠수함 승조원을 잃었지만 일본은 3척의 해방함, 2척의 구축함, 1척의 호위항공모함과 1척의 급유함, 2척의 유조선, 1척의 화물선, 1척의 상륙함, 1척의 병력수송선과 8천여명의 승무원 및 육군 병력, 막대한 물자와 유류를 상실하며 수송작전은 사실상의 대 실패로 끝나버렸고 단순 사망자 교환비만 100:1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수송 도중에 공격을 받아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부대 건재조차도 유지 못하는 일본군 부대들은 안 그래도 미군의 화력에 압도되는 마당에 병력조차 적어 찬란하게 옥쇄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상군의 작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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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 근처 해역에서 일본 수송선 제3 오키노마야 마루를 덱건 사격으로 침몰시키는 네임쉽 SS-212 가토(Gato)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 - 1944년 3월 12일, 01°15'S, 133°20'E


거기에 미친 것 같은 무장능력을 바탕으로 웬만한 소형 선박들은 덱건이나 기관총만으로도 상대할 지경이었으며 가끔 일본 수송선들에 대해서도 덱건을 쏴대는 등의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잠수함 잡겠다고 멋모르고 달려드는 배들이 주로 당했다. 다음은 실제 사례.
34번함 SS-245 코비아(Cobia) -

앨버트 L. 베커 소령이 지휘하는 코비아는 첫번째 초계 중이었던 1944년 7월 20일 이오지마 인근에서 600톤급 특설초계함인 제3 유센 마루와 2척의 트롤선을 포착했으며 4인치 덱건과 40mm 보포스, 20mm 오리콘 사격을 감행해 제3 유센 마루와 1척의 트롤선을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와중 살아남은 한 척의 트롤선이 용감하게 돌진하여 코비아의 좌현을 들이받았으나 체급과 선체강도의 한계를 넘지못해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코비아의 포격으로 격침당하고 말았다.

60번함 SS-271 레이(Ray) -

윌리엄 T. 킨젤라 중령이 지휘하는 레이는 8번째 패트롤간 시암만 일대에서 총 32척의 소형 일본 선박들을 공격해 격침시켰는데, 1945년 8월 2일 말레이 해안에서 소형 선박 1척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시작해 5일간 총 9척을 격침시켰으며 8월 7일 저녁 Bang Saponnoi 에서 정박 중인 일본 소형 선박 16척을 포격으로 격침시키고 야간에 Lem Chong Pra 인근에서 정박중인 일본 선박들을 추가 포착, 장교 2명과 부사관/수병 4명을 소화기로 무장시켜 고무보트에 탑승시킨 다음 일본 선박들에 승선해 배에 불을 지르고 폭파해 총 7척을 전소/침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수송선단을 노리는 통상파괴전뿐만 아니라 일본 해군 군함들에 대한 공격도 서슴없었으며 이에 상당한 전과를 얻어냈다. 그 중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 중 4척 격침이 가토급 잠수함의 작품. 당장 태평양 전쟁 쪽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 중 알 사람은 알 만한 유명한 일본 군함들이 가토급 잠수함에게 사냥당했다. 좀 더 하자면, 전함 빼고 안 가라앉혀본 군함이 없다. 한 술 더 뜨면, 안 건드려본 배가 없다.

단함 순찰이나 늑대 떼 작전중이 아니더라도, 함대전에 참가하여 정찰 및 적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사례도 다수인데, 가토급 잠수함 4번함 알바코어와 33번함 카발라는 필리핀 해 해전 중 일본 해군의 정규 항공모함 두 척을 격침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기록했다. 가뜩이나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스코어를 기록하며 우주 너머로 날아가고 있던 일본군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았던 순간을 장식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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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해 해전 중 SS-218 알바코어의 잠망경을 통해 촬영한 일본 항공모함 다이호의 사진. - 1944년 6월 19일

4번함 SS-218 알바코어(Albacore) -

필리핀 해 해전 도중 알바코어는 필리핀 해 해전이 한창인 1944년 6월 15일 일본 함대를 감시하는 4척의 잠수함 중 한 척으로서 파견되어 근 50km의 해역을 할당받아 감시임무를 수행하였고 1944년 6월 19일 작전 도중 일본 함재기들의 활동이 활발한 해역을 확인, 추적 결과 일본의 장갑 항공모함 다이호를 발견하였다.

함장인 제임스 블렌차드 중령은 다이호에서부터 4천 8백미터까지 접근, 어뢰를 발사하려고 했으나 TDC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하는 수 없이 잠망경을 보며 순전한 감만으로 조준, 어뢰 6발을 발사했다. 이중 4발은 빗나갔고 2발은 정확하게 다이호를 향하고 있었으나 다이호에서 막 이륙하던 고마쓰 상사의 제로센이 이 어뢰의 항적을 발견, 자발적으로 어뢰를 막기위해 기체를 어뢰와 충돌시켰다.

기적적으로 고마쓰 상사의 희생 덕에 어뢰 1발은 막을수 있었으나 결국 한발의 어뢰가 명중, 항공기 엘리베이터가 파손되고 연료 탱크가 손상을 입어 함재기용 항공유와 다이호의 연료용 석유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대수롭지는 않은 피해였다고 여겨졌으나, 이 새어나온 항공유와 연료유의 휘발성분은 기화되어 항공기 격납고 내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다이호의 보수반은 이를 인식해 급히 환기장비를 가동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유증기는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결국 버티지 못한 보수반은 함내 전체에 유증기를 퍼뜨린 후 함의 전 환풍장비를 다 동원해 내보내는 바보짓을 저질렀다. 이 유증기는 배 곳곳에 퍼지게 되었고 일시적으로 발생한 스파크로 인해 인화, 대폭발을 일으키며 오후 5시 28분경 다이호는 처참하게 침몰하게 된다. 일본 해군 항공모함들 중 최고의 중장갑을 자랑하는 최신 항공모함의 비참한 최후였다.

제임스 블렌차드 중령은 처음에는 다이호에 대한 격침을 확신하지 못해 "손상 예상됨"이라고 항해일지에 기록했으나, 필리핀 해 해전이 종료된 이후 일본군 포로의 증언으로 다이호가 침몰했음을 확인한 미 해군은 알바코어의 항해일지를 주목, 알바코어가 다이호를 격침시켰음을 확인했다. 제임스 블렌차드 중령은 이 거대한 배를 박살낸 전과를 인정받아서 뒤늦었지만 성대한 축하식과 함께 해군 수훈십자장을 수여받게 된다.

33번함 SS-244 카발라(Cavalla) -

허만 코슬러 소령이 지휘하는 카발라는 첫 초계임무부터 대전과를 기록했다. 필리핀 해 해전 중인 1944년 6월 19일 카발라는 초계임무 도중 항공모함 쇼카쿠를 포착했다. 하지만 코슬러 소령은 이것이 일본 항공모함인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어 최대한 근접하여 관측을 한 뒤, 잠망경을 통해 일장기가 걸려있음을 확인한 뒤 어뢰 6발을 발사했으나 카발라의 잠망경을 발견한 일본 구축함 우라카제의 견시에 발각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카발라는 우라카제와 거의 충돌하기 일보직전까지 배짱으로 버티며 어뢰를 끝까지 조준하고 있었다. 5번째 어뢰가 발사된 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카발라는 결국 긴급 잠항을 했고 마지막 1발은 긴급잠항으로 인해 함수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발사되어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카발라가 배짱으로 발사한 어뢰 중 약 3발에서 4발의 어뢰가 순식간에 쇼카쿠에게 명중되었고 탄약 유폭 등으로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쇼카쿠의 보수반의 노력 덕에 사태가 진정되는 듯 보였으나 전기계통이 마비되어 함을 살릴 수 없었고 결국 쇼카쿠는 침몰하고 말았다.

동시에 카발라도 우라카제의 폭뢰공격에 시달리게 되었고 시험잠항심도인 90미터를 넘어 120미터까지 잠항을 하며 함수를 살짝 든 상태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소음과 공기방울이 생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속력을 내며 질기게 버텼고 경미한 침수 피해만 입은 채 카발라는 성공적으로 탈출하게 된다.

허만 코슬러 소령은 자신이 행한 공격으로 일본 항공모함을 격침시켰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었고 곧 미 해군 정보부에서 카발라가 쇼카쿠를 격침시켰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레이테 만 해전의 전초전에서 가토급 잠수함 두 척의 합동 공격으로 일본 수상함 전력의 핵심이었던 중순양함에 대한 격침/피해 전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16번함 SS-227 다터(Darter), 36번함 SS-247 데이스(Dace) -

데이빗 맥클린툭 중령이 지휘하는 다터와 블레이든 클라겟 소령이 지휘하는 데이스 2척은 1944년 10월 20일 초계임무를 할당받아 작전 도중인 10월 23일 밤 0시 16분경 팔라완 섬 인근에서 레이테 만으로 향하는 구리다 함대를 포착, 이 두 척의 잠수함은 추적을 개시했고 해상박명초 시간대인 5시경, 일본 함대의 바로 앞에서 긴급 부상한 다터는 첫번째 표적으로 구리다 함대의 기함 타카오급 중순양함 아타고를 향해 어뢰 6발을 발사하였고 그중 4발이 아타고에 명중했으며 아타고는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워낙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려 당시 아타고에 승선해있던 함대 지휘관 구리다 제독은 구명보트에 타지도 못하고 한동안 물 위에서 표류를 하고 있었을 지경.

이후 다터는 신속하게 급변침, 후방 어뢰발사관에서 어뢰 4발을 다음 목표인 중순양함 타카오를 향해 발사하였다. 이 중 2발이 명중하면서 타카오는 심각한 손상을 입어 전열에서 이탈해 브루나이로 향하게 된다.

곧이어 싸움판에 뛰어든 데이스는 아침 6시경 중순양함 마야를 향해 어뢰 4발을 발사하였고 전탄 명중을 시켜 마야 역시 아타고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때 마야에 탑승했다가 전사한 승무원 중에는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손자도 있었다.

이후 다터는 남은 일본 군함들을 추격하던 도중 24일 새벽 팔라완 섬 인근의 봄베이 암초에 걸려 좌초되었고 함장 포함 전 승조원은 데이스에게 무사히 구조되어 탈출할 수 있었다. 레이테 만 해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고 어쩌면 일본 해군의 패배를 암시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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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초한 다터와 승조원들을 구조 중인 데이스를 그린 그림. - 194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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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초된 채 방치된 다터. - 1952년경 촬영


가토급 잠수함의 공격은 이런 주력함들에 대한 공격 외에도 잠수함의 천적이라는 대잠 해방함들과 구축함에게도 가해졌는데, 이는 일본 해군의 낙후된 대잠 전력과 대잠작전에 대한 낮은 인식, 갈수록 정상적인 표적을 찾기힘들어 뭐라도 잡고보자는 미 해군 잠수함 함장 및 승조원들의 욕심까지 겹쳐 잠수함에게 역으로 당해버리는 구축함과 해방함이라는 기괴한 기록을 만들고 말았다. 실제로 가토급 잠수함과 일본 구축함, 대잠 해방함과의 교환비는 가토급 잠수함이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46번함 SS-257 하더(Harder) -

새뮤얼 딜레이 소령이 지휘하는 하더는 5번째 초계가 자신의 악명을 떨치게 되는 최고의 기간중 하나였다.

5월 26일 모항인 프레멘틀에서 출항한 하더는 6월 6일 일본군의 수송선단을 포착했으나, 수송선 대신 구축함인 미나즈키를 노렸고 곧 미나즈키는 하더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하게 된다. 다음날 같은 임무를 수행중이던 구축함 하야나미 역시 가라앉혀버리고 이틀 뒤인 9일 대잠작전을 수행중이던 구축함 타니카제를 침몰시키기에 이르렀다. 6번째 초계 중이었던 22일에는 히-71선단을 호위하던 대잠 해방함 마츠와와 히부리와의 교전에서도 당당하게 이 2척의 대잠 해방함을 격침시켜버렸다. 이 활약으로 인해 셀레베스 해 일대에 전개되어있던 일본군의 대잠초계전력과 호위전력에 심각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가토급 잠수함은 항공모함 2척, 호위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4척(1척은 공동격침), 구축함 22척, 잠수함 5척, 대형 어뢰정 및 해방함, 호위함 총 26척, 기뢰부설함 8척 등 다수의 일본 해군 군함을 격침시켰다.

함대전에서도 정찰 및 지원 임무를 톡톡히 해냈는데,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곳곳에 매복해 있던 가토급 잠수함들 때문에 거의 실시간으로 일본 함대의 위치가 보고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일부 가토급들은 기습적인 게릴라식 공격을 가해 일본 함대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이하는 상세.
12번함 SS-223 본피쉬(Bonefish), 43번함 SS- 254 거나드(Gurnard), 49번함 SS-260 라폰(Rapon), 57번함 SS-268 퍼퍼(Puffer), 61번함 SS-271 레이(Ray) -

1944년 5월 11일, 미 해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 해군 제1 기동함대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제7함대 소속 잠수함들과 제17 기동부대 소속의 잠수함 33척을 타위타위 일대 해역에 파견하여 일본 함대의 동향을 감시하게 했으며 49번함 라폰이 일본 함대와의 첫 접촉을 시작했다.

여기에 파견된 가토급 잠수함들 중 한 척인 라폰은 5월 13일 일본 해군의 함대를 발견,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이 접촉사실을 무전으로 보고했다.

그 다음 타자는 12번함 본피쉬였고 비록 라폰이 접촉한 주력 함대는 아니었으나 5월 14일 수송선단을 포착, 어뢰공격을 실시하였고 구축함 이나즈마가 본피쉬가 쏜 어뢰에 피격, 침몰했다.

그 시간, 61번함 레이가 일본 함대를 포착하여 추격을 개시하였고 다음날인 5월 15일, 본피쉬는 라폰이 접촉했던 일본 함대를 발견하는데에 성공했고 보고를 한 후 공격을 시도하려 했으나 어뢰 문제로 인해 공격을 하지 못하고 통신 주파수가 발각되어 일본 구축함들의 추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레이는 같은 함대를 포착하여 공격을 개시하려 했으나 어뢰 유효사정거리 내로 진입을 하는 데에 실패했다.

18일, 거나드는 일본 함대에서 떨어져나온 전함과 구축함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를 포착하여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도 어뢰가 빗나가면서 실패하게 된다. 이후 22일, 본피쉬와 임무교대를 위해 달려온 퍼퍼 역시 라폰이 최초로 접촉한 함대와 조우, 어뢰공격을 개시했으나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비록 이들이 실시한 공격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잊을만 하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개시해서 신경을 박박 긁었고 사실상 실시간으로 일본 함대의 위치를 상부에 보고를 해 버린 것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잠수함의 활약으로 당시 일본 제1 기동함대의 함재기 조종사 훈련이 물 건너가버렸다는 것.[13][14]


또한, 태평양에 있는 각종 섬에 대한 지상군 및 게릴라들에 대한 물자 지원, 불시착하거나 추락한 항공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들을 구조하는 임무 등에서도 맹활약했다. 꼴랑 조종사나 항공승무원 구조하는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교육하는 데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귀중한 인력인 파일럿을 구조 잘 하는 것만으로도 인원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중 하나다. 대표적인 파일럿 구조 사례로 전 미국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19번함 핀백(Finback)에게 구조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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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번함 SS-230 핀백(Finback)에게 구조되고 있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중위. - 1944년 9월 2일 촬영

19번함 SS-230 핀백(Finback) -

1944년 9월 2일, 당시 항공모함 샌 재신토의 VT-51(제 51뇌격대)소속 TBF 어벤저 뇌격기 조종사였던 부시 중위는 오가사와라 제도 폭격작전에 투입되었는데 치치지마 8천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 일본군의 대공포에 정통으로 맞아 버렸고 부시의 어벤저 뇌격기 "바버라"는 추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벤져 뇌격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 중위는 간신히 낙하산을 펼쳐서 탈출할 수 있었고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지만 미군기가 강하하고 상승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정확한 구명정의 위치를 낙하산으로 탈출한 자들에게 알려주었고 덕분에 부시 중위는 간신히 헤엄쳐서 구명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시 중위는 약 2~3시간 정도 치치시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그 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시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 19번함 핀백이 부시 중위를 구조했다.[15]


또한 침몰하는 일본군 선박에서 탈출한 연합군 포로의 구출작전에도 동원되었으며 조난자가 발생하거나 연합군 소속 함정이 피해를 입어 좌초하거나 침몰을 한 경우에도 구조작전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아래는 13번함 SS-224 코드(Cod)의 네덜란드 해군 잠수함 O-19 승무원들의 구조 동영상.

13번함 SS-224 코드(Cod) -

에드윈 M. 웨스트브룩 소령이 지휘하는 코드는 1945년 7월 8일, 난샤 제도 인근의 얕은 여울에 좌초한 네덜란드 해군 잠수함 O-19[16]의 구조신호를 받고 동년 동월 10일, 해당 해역에 도착하여 O-19의 예인 작업을 실시했으나 예인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구난작업은 실패했다. 결국 O-19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네덜란드 해군 잠수함 승조원 전원을 퇴함시켜 코드에 옮겨 태웠으며 해당 잠수함은 일본군이 인양해 사용할 수 없도록 함내에 폭약을 설치한 뒤 5인치 덱건과 어뢰 사격으로 파괴시켰다.


일부 배들은 덱건이나 로켓탄 등의 무장으로 일본군의 주요 거점에 포격을 가하는 등 테러 공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일부 가토급 잠수함은 아예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폭탄 공격을 하는 등의 특수전 임무도 기꺼이 수행해 내 잠수함의 범용성을 뽐내고 특수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도 공헌했다. 다음은 실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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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급 잠수함 9번함 SS-220 바브(Barb)의 12번째 정찰 기록. 그야말로 깽판이 따로 없다.[17]

9번함 SS-220 바브(Barb) -

유진 플럭키 소령이 지휘하는 바브는 1945년 6월 12번째 순찰기에 잠수함을 이용한 포격과 로켓 공격, 특수전을 실행해 성과를 거둔 예로 꼽힌다.

1945년 7월 2일 해상박명초 시간대인 오전 5시경 사할린 카이효 섬의 서쪽 해상에서 부상, 오전 10시부터 카이효 섬에 있던 등대, 물자창고, 레이더 기지, 감시초소를 5인치 덱건과 40밀리 보포스 등으로 포격을 하여 단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3일뒤인 7월 5일에는 사할린 남쪽의 아니바 만에 잠입하여 정박중이던 수송선 제11 삿포로마루를 격침시키고 22일 야간에는 승조원 8명을 고무보트로 상륙시켜 철로에 폭약을 설치한 후, 기차가 접근해 올때 폭파시켜버리는 미해군 역사상 유례없는 작전을 감행했으며 이 사보타주로 약 15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며 16량으로 편성된 기차를 탈선시켜 파괴하는데에 성공했다.

25일 자정에는 시로토루 마을에 로켓탄 사격을 퍼부었으며 해가 뜨자마자 인근의 츠리에 마을 항구 앞에서 부상하여 오전동안 항구 내의 선박들과 건물들에 대한 로켓 사격을 감행해 어선 4척과 연락선 1척을 가라앉히며 항구 시설과 마을에 피해를 입혔다. 이 전공들로 말미암아 함장 유진 플럭키는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 말기에는 더 가라앉힐 상대가 없어 목재 선박들이나 범선, 어선들에 대한 공격도 가할 정도였으며 이들을 침몰시키는데에 쓰는 어뢰가 아깝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 어뢰가 아깝다는 이유로 부상해서 덱건이나 기관포, 기관총 등으로 직접 공격을 해버리는 사례도 늘어났고 어선 같은 소형선의 경우엔 이조차도 아깝다며 들이박아서 가라앉히는 일까지 벌어졌다.

거기에 일본의 거의 전 해역에 기뢰를 도배해 보급선을 원천 봉쇄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으며 그나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던 조선/만주국-일본 간의 수송 라인을 끊어버렸는데, 일본은 이때의 뼈아픈 경험 때문에 미국 잠수함과 기뢰에 그야말로 학을 떼다시피 했다. 45년도 일본의 거의 모든 해안에는 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떠밀려왔다는 괴담을 만들고 근 최근까지도 이 기뢰들이 발견될 정도이며 현 해상자위대가 가공할 대잠수함 전력과 기뢰전 능력을 갖추게 하는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기도 했다.[18]

반면, 이렇다 할 활약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린 가토급 잠수함도 있으며 코비나, 도라도, 골렛 3척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가토급은 총 20척이 일본군의 공격이나 사고, 기뢰접촉 및 원인불명의 사유로 침몰했으며 살아남은 가토급 잠수함들은 한창 일본을 굶겨죽이던 도중 종전을 맞게 된다.


[1] 메어 아일랜드 조선소에서 촬영 - [2] 원래 8척이었지만 2척은 사고로 손실 [3] 원래는 27척이었지만 이들 중 3척은 나중에 영국 해군에게 대여되었고, 2척이 전쟁 전에 사고로 손실되었으며 7척이 퇴역해 해체됨 [4] 원래 51척이었지만 이중 4척은 전쟁 전 사고로 손실하였으며 전간기 동안 6척이 퇴역해 해체되었고 전쟁 발발 이후 6척이 영국 해군에게 대여됨 [5] 사실 이런 면에 상당부분을 의존한 탓에 행간의 인식과는 달리 일본 수송선단을 완전히 막진 못했고 전쟁 말에도 미 선단과 같이 적지 않은 일본 수송선단이 미국 잠수함에 의한 공격을 어느정도 피하면서 수송임무를 완수하기도 하였다. [6] 2대전기 미 해군 잠수함은 음탐 직별이 따로 없었고 주로 통신 직별의 승조원이 소나 조작을 담당했다. [7] 이 공격방법은 1944년 초반, 가토급 잠수함 하더의 부장으로 근무한 프랭크 C. 린치 대위가 TMA공식을 만들어 발표하기 전까진 사실상 완벽하게 사용을 하질않게 되었고 그나마도 전쟁 말기에 시험적 성격으로 몇번 시도해봤을 것으로 추정되나 본격적인 사용은 전후 기술발전 이후에나 제대로 가능했다. [8] 모튼 소령은 해군 수훈십자장 4개와 맥아더에게 육군 수훈십자장 1개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특히 순찰 용도로나 써먹던(물론 여기엔 미국 어뢰가 못써먹을 물건인 점도 있었다.) 미국 잠수함대를 공격적인 전문 사냥꾼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키워드를 제시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감 넘치고 틀에 얽메이지 않는 지휘관이었는데 후술하겠지만 결과적이게 이 과도한 자신감이 결국 모튼 소령과 와후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9] 문제는 이 교신인데, 이 과도한 자신감은 모튼 소령과 와후의 승조원 전원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와후의 동해상 작전 전개로 인해 2척의 선박을 손실하고 국회의원 2명이 사망한 사건이 터지자 일본군은 저 교신내용을 감청하고 위치를 파악한 다음 1943년 10월 10일경 일본 본토 소우야 해협에서 와후를 찾아내 대대적인 대잠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일본 해군의 대잠함들과 오오미나토 항공대는 근 16시간동안 맹추격을 하며 106발의 폭뢰와 폭탄을 던져 와후를 침몰시키고 말았다. 직접적인 침몰 원인은 함교에 항공폭탄이 정확히 명중한 것으로 추정. 당시 미 해군 잠수함대(COMSUBPAC)에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고 와후가 저런 최후를 맞이한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아군의 지원을 받을수가 없을 정도의 일본의 안방이었던 일본 근해나 한반도 일대에서 설치고 다닌건 전략적으로 봤을 때도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며 상대적으로 동남아시아-일본 본토와 비교했을 때 물자 운송의 중요성이 더 높았던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거기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다 라는 판단하에 1945년 6월까지 미 해군 잠수함대는 동해까지 잠수함을 투입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본토랑 조선에서 작전하고 있는 잠수함이 평문으로 저따위의 교신이나 보내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한심하지만 일본군의 도청 위협에 대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단독 작전시 통신은 필요한것이 아니면 자제하고 한다 하더라도 통신 중계 등등의 각종 코렁코렁한 꼼수들을 동원해 최대한 위치가 발각되는 것을 억제하려 노력하고, 보고는 복귀후 돌아와서 보고서로 작성해서 보고할것을 지시하게 되었다. [10] SS-269 Rasher War Patrol Report, 290페이지 [11] 당시 래셔의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어뢰 명중확인 후 테이아 마루에서 화염과 연기, 다수의 약한 불빛들을 잠망경으로 포착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불빛들은 구명정의 불빛으로 추정된다. [12] 여담으로 좌초한 다터는 본디 승무원들이 폭약으로 폭파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스의 처분사격과 일본군 항공기들의 공격으로 파괴되었고 근 최근까지 그 지점에 잔해가 남아있었다. [13] 이 감시망을 구성하기 직전 일본 해군 역시 잠수함으로 감시망을 구성해 미국 함대를 포착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엄청난 손실을 입었으며 필리핀 해 해전 내내 일본 잠수함들이 힘을 못 쓰던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선방을 한 셈. 당시 일본군 잠수함들은 일정 해역에 산개선을 편성해 잠수함들을 1열 종대로 쭈욱 늘려놓는 방법을 선호했는데, 이는 적 함대를 상대할 때에 잠수함 전력을 함대 공격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암호가 뚫리고 잠수함 한척의 위치가 파악되면 다른 잠수함들의 위치까지 손쉽게 발각당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후 일본군은 이 문제를 개선한답시고 산개면 전술을 세우게 되는데 당시 일본 잠수함 함장들의 평은 "산개선이나 산개면이나 그게 그거"였다고 회고했다. [14] 일본 해군이 왜 항공대 조종사 훈련을 하려고 했는지도 중요한데, 필리핀 해 해전 직전까지의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를 이은 라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베테랑 조종사들이 거의 갈려 나가서다. 결국 항공모함 항공대 경험이 있는 수병들을 다 긁어모아서 중대장급의 계급까지 주고 들어가야 했는데 이들 역시 필리핀 해 해전에서 갈려나간다. 결국 일본 해군의 배태랑 조종사들은 필리핀 해 해전이라는 한 번의 전투로 거의 몰살당한 것. [15] 같이 격추됐던 다른 전우들은 끔찍한 일을 겪고 모두 사망했다. 이 일로 인해 부시는 공적으로는 몰라도 사적으로는 일본을 굉장히 증오했다. [16] 이 잠수함은 1936년경 건조된 잠수함으로서 21형 유보트보다 훨씬 먼저 스노클을 장착한 잠수함이었는데, 이 배는 좌초되기 전까지 총 6척의 일본 선박을 격침시키기도 했다. [17] Rear Admiral Eugine B. Fluckey, 자서전 Thunder Below! 336~437 페이지 [18] 사실 일본이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현재 해상자위대가 미태평양함대의 보조함대 역할을 하기 때문인 것이 더 타당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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