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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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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성3. 우지의 등급( 다이카 개신 이전)4. 고대 이후의 쓰임5. 창작물

1. 개요

우지([ruby(氏,ruby=うぢ)])는 고대 일본에서 널리 쓰였던 성씨이다. 고대의 문헌에서는 주로 씨()라고 쓴다. 묘지(苗字)와 구분하여 혼세(本姓, 본성)라고도 한다.

2. 구성

오늘날 일본의 성씨는 묘지(苗字)만 남아있으며, 우지는 묘지와 아주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천황이나 종실 또는 백제 부여씨 등 그에 준하는 다른 나라 종실이 내려준 성만 우지라고 부른다. 우지 가운데 타타라(多多良)는 천황이 아닌 쇼토쿠 태자가 하사한 우지라는 전승이 있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위덕왕 관산성 전투에서 뛰어난 활솜씨로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ruby(筑,ruby=つく)][ruby(紫,ruby=しノ)][ruby(國,ruby=くに)][ruby(造,ruby=ノみやつこ)])에게 쿠라지노키미([ruby(鞍,ruby=くら)][ruby(橋,ruby=じ)][ruby(君,ruby=ノきみ)])를 내려주었다는데 백제왕에게 받은 우지도 인정해주는 걸로 추측된다.

우지는 카바네(姓)[1]와 더불어 고대/중세 일본의 씨성제를 이루는 핵심요소이다. 신적강하도 바로 종친에게 우지를 하사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2] 종친과 노비를 제외한 양인(良人) 모두가[3] 율령제 성립 이후에는 우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헤이안 시대 초만 해도 우지는 일본에서 보편적인 성씨였다. 우지가 묘지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3. 우지의 등급( 다이카 개신 이전)

당연한 말이지만 우지라고 다 똑같은 우지가 아니었으며, 그 씨족의 위세에 따라 등급이 나뉘었다. 이 문단에서는 지방 연합체 국가로서의 성격이 남아있던 다이카 개신 이전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4. 고대 이후의 쓰임

이렇게 고대 사회에서 널리 쓰이던 우지는 헤이안 시대를 지나면서 잘 쓰지 않게 되었다가 가마쿠라 시대에서는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 공가(公家)만 해도 후지와라노 다다미치가 죽고 아들들이 섭관가를 이루면서 모두 후지와라란 우지를 안 쓰게 되었으니 나머지 집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무가(武家)는 오슈 후지와라 헤이케 같은 무사단의 두령 집안은 그래도 다른 무가와 달리 우지를 유지했으나 이마저도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죽고 무사단의 모든 두령 집안이 대가 끊어지면서 무가조차 우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아주 버린 건 아니어서, 섭관가가 우지를 안 쓰게 된 뒤에도 후지와라노 요리츠네 후지와라노 요리츠구는 여전히 우지로 불리며, 외교문서나 조칙에서는 묘지가 아니라 우지를 썼다.

외교문서의 예를 들자면 아시카가 요시미츠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 자신을 '미나모토노 요시미츠([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義,ruby=よし)][ruby(滿,ruby=みつ)])'라고 썼다든가[15] 오닌의 난의 핵심 인물들인 야마나 소젠과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조선왕조실록에 각각 미나모토노 모치토요와 미나모토노 카츠모토로 기록된다든가 유즈야 야스히로가 조선의 문헌에서 '타치바나노 야스히로([ruby(橘,ruby=たちばなノ)][ruby(康,ruby=やす)][ruby(廣,ruby=ひろ)])'라고 적혔다든가 징비록에서 소 요시토시가 '타이라노 요시토시([ruby(平,ruby=たひらノ)][ruby(義,ruby=よし)][ruby(智,ruby=とし)])'[16]로 기록된 게 그런 까닭이다.

조칙을 예로 들자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조서 칙령을 비롯한 조정의 공문서에서는 이름을 쓸 적에는 우지와 카바네를 꼭 써야 했다. 다시 말해 천황에게 벼슬을 받으려면 벼슬에 임명한다는 선지(宣旨)에 대상자의 우지가 꼭 들어가야 했다.[17] 그래서 우지가 없는 하시바 히데요시는 처음에 타이라를 일컫다가 아무래도 구라인 게 뻔해서 고노에 사키히사 양자가 되어서 후지와라를 일컬었으나 이것도 영 모양새가 안 살아서 나중에 고요제이 덴노에게 아예 도요토미노아소미([ruby(豐,ruby=とよ)][ruby(臣,ruby=とみ)][ruby(朝臣,ruby=ノあそみ)])라는 우지와 카바네를 받잡고 관백으로 제수되었다. 그렇기에 사실 도요토미노아소미 히데요시라고 불러야 하지만, 아무래도 출신이 비천해서 그런지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준다.[18] 한편 조선 말엽에 대마도에서 가바네인 아소미(朝臣)까지 적은 공문서를 보낸 적이 있는데, 조정에서는 이것이 가바네인 줄 모르고 그대로 조정의 신하라 해석하여 공문서의 하자로 인식하였다.[19]

일본에서는 우지와 카바네를 쓰는 이름 실명으로 여겼기에 이것을 본명으로 삼았다. 우삼동으로 알려진 아메노모리 호슈의 실명은 후지와라노아소미 노부키요([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誠,ruby=のぶ)][ruby(淸,ruby=きよ)])고 오규 소라이의 실명은 모노노베노아소미 시게노리([ruby(物,ruby=ものノ)][ruby(部,ruby=べ)][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茂,ruby=しげ)][ruby(卿,ruby=のり)])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실명은 미나모토노아소미 아리토모([ruby(源,ruby=みなもと)][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有,ruby=あり)][ruby(朋,ruby=とも)])고 이토 히로부미의 실명은 오치노스쿠네 히로부미([ruby(越智,ruby=をち)][ruby(宿,ruby=ノすく)][ruby(禰,ruby=ね)][ruby(博,ruby=ひろ)][ruby(文,ruby=ふみ)])고[20] 가쓰라 다로의 실명은 오오에노아소미 키요즈미([ruby(大,ruby=おほ)][ruby(江,ruby=え)][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淸,ruby=きよ)][ruby(澄,ruby=ずみ)])고 오키타 소지의 실명은 후지와라노아소미 카네요시([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房,ruby=かね)][ruby(良,ruby=よし)])고, 세리자와 카모의 실명은 타이라노아소미 미츠모토([ruby(平,ruby=たひ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光,ruby=みつ)][ruby(幹,ruby=もと)])고, 에토 신페이의 실명은 타이라노아소미 타네오([ruby(平,ruby=たひ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胤,ruby=たね)][ruby(雄,ruby=を)])고, 야마나미 케이스케의 실명은 후지와라노아소미 토모노부([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知,ruby=とも)][ruby(信,ruby=のぶ)])고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실명은 미나모토노아소미 마사카타([ruby(源,ruby=みなもと)][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正,ruby=まさ)][ruby(形,ruby=かた)])고 오쿠마 시게노부의 실명은 스가와라노아소미 시게노부([ruby(菅,ruby=すが)][ruby(原,ruby=はら)][ruby(朝臣,ruby=ノあそみ)][ruby(重,ruby=しげ)][ruby(信,ruby=のぶ)])다.[21]. 물론 이게 진짜냐고 묻는다면 선뜻 수긍하기는 그런 게 애초에 양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둘째 치고 나머지도 본인이나 본인의 조상 족보를 위조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22]

현대에는 평상시에 쓰는 경우는 없지만, 몇몇 명문가에서 가문 내 문서에 기재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5. 창작물

동방 프로젝트 히에다노 아큐, 후지와라노 모코우, 모노노베노 후토, 소가노 토지코, 하타노 코코로의 성 뒤에 노가 붙는 것도 성(姓)이 묘지(苗字)가 아닌 우지(氏)기 때문이다.[23] 와타츠키노 요리히메 와타츠키노 토요히메도 마찬가진데 이들의 경우는 실존하는 우지가 아니라 창작한 우지다.

닌자 핫토리군에서 주인공인 핫토리 칸조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 이 우지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예시로 켄이치 우지, 케무마키 우지 등.

[1] 천황이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유력 호족들에게 우지와 함께 하사하던 성으로, 집안의 유래와 씨족의 등급 등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카바네'라는 단어의 어원은 불분명하나, 고대 일본어 카부네(株根, '혈통의 뿌리') 혹은 카바네(, '')와 연관이 있으리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다. 고구려 출신 인물들의 가바네는 '우카라' 혹은 '야카라'로 따로 일컬었다. 덴무 덴노가 684년에 팔색성을 새롭게 제정했는데 높은 순서대로 眞人(まひと), 朝臣(あそん), 宿禰(すくね), 忌寸(いみき), 道師(みちのし), 臣(おみ), 連(むらじ), 稲置(いなぎ) 여덟 개이다. 원래 臣와 連는 최고 등급의 성이었는데 팔색성 제정 이후 6번째와 7번째로 지위가 내려왔다. [2] 다시 말해 종친에게 너는 천황과 다른 겨레로 갈라졌으니 종친도 아니고 제위 계승은 더더욱 안 된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3] 그러니까 귀족 뿐만 아니라 평민도 모두 포함한다. [4] de나 von처럼 귀족의 출신을 나타내는 조사를 귀족성씨조사(Nobiliary Particle/Prefix)라고 부른다. 영문 위키백과 네이버 영어사전 참고 [5]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の가 한자의 발음이 아니고 우지 뒤에 붙는 격조사임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 아예 띄어 쓴다. [6] 우지는 미나모토 [7] 우지는 타이라. 다만 자칭이다. [8] 우지는 후지와라. [9] 우지는 미나모토. 다만 실제로 미나모토의 후손은 아니고 자칭이다. [10] "어머니의 씨성에 붙어서 츠키모토노키미를 사칭했다".(附母氏姓槻本公.) 링크에서 084번 참고 무릅쓸 모()에는 사칭한다는 뜻도 있으며 특히 모성(冒姓)이라고 하면 성을 사칭한다는 뜻이 되니 묘지와 달리 우지는 모계 성 따르기가 안 되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신찬성씨록에 적힌 대로 모계 성 따르기로 성을 사칭한 츠키모토노키미 이와레([ruby(槻,ruby=つき)][ruby(本,ruby=もと)][ruby(公,ruby=ノきみ)][ruby(石村,ruby=いはれ)])의 경우 손자인 나데마로([ruby(奈弖麻呂,ruby=なでまろ)])·토요나리([ruby(豐成,ruby=とよなり)])·토요히토([ruby(豐人,ruby=とよひと)])가 연력 22년( 803년)에 간무 덴노에게 사카타노스쿠네([ruby(坂田,ruby=さかた)][ruby(宿禰,ruby=ノすくね)])라는 우지와 카바네를 받잡고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홍인 4년( 813년)에 사가 덴노가 카바네를 아소미([ruby(朝臣,ruby=あそみ)])로 올려줬다. 그리고 또 나데마로의 아들들은 홍인 14년( 823년)에 성을 바꿀 것을 윤허받아 미나부치노아소미([ruby(南,ruby=みな)][ruby(淵,ruby=ふち)][ruby(朝臣,ruby=ノあそみ)])를 받잡았다. [11] 본명은 원진경(袁晉卿)으로 718년 또는 719년 생으로 추정되며 여남원씨(汝南袁氏)라는 얘기가 있다. 견당사를 따라 일본으로 이민을 가서 음박사(音博士)라 하여 한자음을 가르치는 일을 맡다가 당악을 연주한 공으로 승진하고 사또며 오오츠카사노카미([ruby(大學頭,ruby=おほつかさノかみ)])와 호오시마로오도노카미([ruby(玄蕃頭,ruby=ハウシまらひとノかみ)])를 지내고 간무 덴노에게 키요무라노스쿠네([ruby(淸,ruby=きよ)][ruby(村,ruby=むら)][ruby(宿,ruby=ノすく)][ruby(禰,ruby=ね)], 으로도 쓴다.)를 받잡았다. [12] 아직도 모계를 역성혁명이라며 거부하는 일본 황실이 내려준 성이 모계로 전해지면 일본 황실의 체통이 뭐가 될까? [13] '아손(あそん)'이라고도 한다. [14]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손이며, 전통적으로 카츠라기의 지배 씨족이다. 특이한 점은 카츠라기가 기기신화의 타카마가하라의 배경으로 지목된기도 한다는 점인데, 주로 카츠라기씨가 국혼(國婚)이 많았다는 점을 증거로 든다. [15] 아시카가 미나모토에서 비롯한 가문이다. [16] 왜냐하면 소씨가 타이라노아소미([ruby(平,ruby=たひら)][ruby(朝臣,ruby=ノあそみ)])를 모성(冒姓)해서 그런 것으로 실제로 소씨는 코레무네노아소미([ruby(惟,ruby=これ)][ruby(宗,ruby=むぬ)][ruby(朝臣,ruby=ノあそみ)])에서 비롯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17] 상술했듯이 귀족과 평민에게 모두 내려줬으니 우지는 주민등록증처럼 공민이란 징표고 공민만이 공직을 맡을 수 있는 건 오늘날에도 상식이다. [18] 도요토미는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본인의 출신을 아시가루라고 말하고 다녔다. 아시가루도 무사에 속하기는 했지만 말이 좋아 무사지 일반 병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체면 상하니까 최대한 높은 신분이라고 말해야 해서 구라를 친 게 고작 아시가루이니 도요토미의 출신이 얼마나 비천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도요토미가 아무튼 출신이 영 아니라는 것은 조선에도 알려졌는지 잘못 기록된 것이기는 하나 징비록에서는 도요토미가 중국인으로 일본으로 건너와 주군에 들어 출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 외교란 기본적으로 쌍방 합의가 필수니까 당연히 제 나라의 독특한 성씨제도를 설명도 안 하고 무턱대고 쓴 일본의 과오다. 그리고 여태까지 일본은 조선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가바네는 빼고 적었다. [20] 양자지만 법적으로 무사의 아들이었다. 정확히는 원래 성씨가 미즈이(水井)인 양조부 이토 다케베가 이토 씨의 양자로 입적이 되면서 이토 히로부미 본인도 이토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다. [21] 선지(宣旨)에서도 오쿠마 시게노부라고 안 쓰고 이렇게 쓴다 [22] 아마도 한국의 족보는 90%가 위조라는 주장의 근원은 경제학자로 한국사를 연구한 시카타 히로시(四方博)이고 근거는 바로 일본의 상황이지만 일본과 달리 조선이 우지를 버리고 묘지를 쓰는 상황이 온 것도 아니고 집성촌 문서를 보면 시카타 히로시의 주장의 신빙성은 의문이 든다. [23] 아큐는 고사기의 내용을 암송한 히에다노 아레의 자손, 후토와 토지코는 호족의 일원이란 설정이며, 모코우는 기원이 타케토리모노가타리에서 나오는, 카구야에게 청혼한 권세가의 딸로 언급되는데, 성을 따르면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자손 중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이 기원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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