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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val Regions/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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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시스템
문제점 역사 정당

1. 개요

RR 타임랩스 영상

라이벌 리전스는 2013년부터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소 8차의 세계대전이 있었으며 이후로도 다양한 세력들이 충돌을 거듭하며 지금의 세력구도가 형성되었다.

24년 5월 기준 세계는 프렌드존(FZ)과 피닉스의 양대산맥이 세계를 주름잡고 있으며 한국 커뮤니티가 속한 WIP와 라이트본이 피닉스와 연대하고 트레이드존(TZ)이 프렌드존의 위성 블록으로 매우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마피아와 카오스 같은 전쟁 위주 유목 세력이 세계 각지에서 테러를 벌이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터키와 중동 세력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2. 세계사

2.1. 2013년~2017년

게임 초반에 RR은 러시아 게임이었고 자연히 러시아는 전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한 세력이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초기 러시아의 강점을 겪었었고 이는 게임이 시작된 2013년부터 약 4년간 이어졌다. 그러다 처음 미국에서 AE국을 중심으로 NOS라는 서방연합 국가연합이 생기고 유럽에는 Epona Council(에포나 공의회)라는 국가연합이 생긴다. 이후 점점 세력이 커지던 터키와 연합을 하며 해당 지역에서 러시아를 몰아내는 세력구도가 형성된다. 이때 세계대전이 7차까지 이어졌고 결국 러시아의 패배로 이어진다. 미국 NOS 산하에는 남미동맹 WA가 존재하였고 러시아 산하에는 스칸디나비아 첩보조직 KGB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직접적 충돌보다는 첩보전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하였다. 지중해 공격에 데미지를 얹어준다거나 캐나다 용병들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유럽을 침공하였지만 브라질(현 GBS) 유저들이 점점 늘어나며 러시아의 힘은 러시아 내부로 국한되게 되었다. 세계 7차대전 이후로는 큰 충돌없이 RR세계는 간만에 평화로워졌다. 이때 유럽지역만은 잦은 내전으로 어지러웠다. 아프리카 지역은 힘의 공백상태가 되어 각지의 세력들과 용병이 날뛰는 땅이 되었고 현재도 이 추세는 유지되고 있다.

중국지역에 RR이 소개된 것은 공식적으로 2017년 6월 18일이다. 그해 11월 17일 대만 최초의 정당 대만제일당이 설립되었다.

2.2. 2018년

케세이는 2018년 초순부터 사람을 모으고 본격적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1월 13일 '달토끼'의 주도하에 중국 남-서부에 태평연방이 건설되었고 18일 화하공화국이 중국 북부에서 세워진다. 2018년 화하공화국과 대영켈트제국간의 몇가지 조약이 이루어졌다. 이는 대영켈트제국의 대만 영유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원주민의 편의를 봐주는 조건이었다. 2018년 6월 29일 중국의 대표적 언론지 화남일보를 창간하였다. 이후 보여지는 모습은 중국을 지배하는 러시아인들과의 오랜 다툼이 보인다. 그들은 일찍이 자신의 영유권을 중국 전역으로 규정하였으며 일찍이 국가를 세워 그들과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러시아의 암묵적 지원이 있었겠으나 케세이인은 그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에는 용제국(Dragon Empire)이 세워져 있었으며 스스로를 중국의 합법적인 정권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많은 케세이인들의 불만을 유발하였다. 대만 지역에는 대영켈트제국(British Grandceltic)이 있었다. 그들은 대만에 있었고 몇번의 항쟁 끝에 대만을 포기하고 인도로 건너갔다고 한다. 2018년 5월달 즈음하여 많은 케세이인이 합류하여 정부가 안정화된 것으로 보인다. 7월 31일 대만을 대영켈트제국으로부터 사들여 비로소 해방시킨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날짜를 상고할 수는 없지만 2018년 9월달 이전 아시아자주연방(ASS, Asian Sovereignty Shphere)이 설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련은 첫번째 베트남 정부가 소리치는 원숭이(the Screaming Monkeys)와의 전쟁으로 무너진 이후 설립되었다. 창설 가맹국은 화하공화국과 필리핀이며 태평연방, 베트남, 인도네시아, 누산-타라, 말라야, 네팔이 가입했으나 몇몇은 곧바로 멸망했다고 한다. 아련의 목표는 동아시아에 자리잡은 괴뢰정부를 몰아내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통하여 민족주의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괴뢰정부는 러시아 계열이었기에 유라시아연방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KGB블록을 통해 영향권을 간접지배 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미, 유럽등에 각종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시아 방면에서는 몽골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며 케세이를 중국 내부에 가두고자 하였다. 이런 정황 상 러시아는 한국의 독립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케세이는 케세이대로 배주현을 통해 한국을 간접지배할 발판을 마련하였고 추후 출범하는 ASS(아시아 자주 연방)의 구성국으로 한국을 자연스럽게 편입하자 한 것인데, 만일 한국이 케세이의 영향 없이 자주적으로 독립한다면 이들의 연방 가입을 강요할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10월 23일 러시아는 본국의 정치체제를 절대군주정으로 변화시키고 알레스카를 침공한다. 28일에는 KGB의 아메리카 제국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멕시코 역시 미국을 침공하고 KGB의 공작원들도 미국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미국은 사분오열된다. 러시아 블록인 EAU는 북미블록인 NOS를 완전히 붕괴시켰고 동시에 동유럽을 침공한다. 이때 남미 블록인 WA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관망하였다. KGB는 캐나다에 거점을 세운 뒤 남은 미국 세력을 압박하였고 러시아는 유럽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당시 러시아의 최대 진출선은 프랑스를 넘어 영국 북부까지 이어졌다.

12월 1일 KGB가 사실상 붕괴하며 세계 8차대전이 종료된다. 러시아는 북미대륙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러시아의 패인은 너무 많은 괴뢰국의 운용이었다. 그리고 넓은 영토로 인해 전선과 자치국들이 지나치게 방대하여 EAU-KGB연합은 제때 병력투입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대전쟁에서 EAU가 대부분의 공격 데미지를 가하였고 KGB는 이름과 크기에 비해 힘이 없었다. KGB는 알래스카-캐나다-미국으로 내려오며 루이지애나까지 내려오며 미국 중부를 석권했으나 정신을 차린 미국의 반격으로 모든 북미 영토를 잃게 된다. 한때 영국 북부까지 넘봤던 EAU는 반격을 당해 폴란드까지 밀려났다. 이후 러시아-에포나 공의회-미국은 평화협정을 맺고 EAU의 해체를 결의한다. 이때 러시아는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몽골지역의 괴뢰국과 내전을 벌여 일방적으로 합병한다. 한편으로 러시아가 몽골을 합병한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를 직접 관리하겠다는 신호탄과 같았다.

2.3. 2019년

2.4. 2020년

2.5. 2021년

2.6. 2022년

2.7. 2023년

2.8. 2024년

3. 국내사

3.1. 2018년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18년 8월 처음으로 RR대한민국의 초식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최대 우국이자 한때 중국 전부를 집어삼키고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한 케세이는 2018년 초 대만유저, 홍콩유저와 소수의 본토유저가 함께하였다.
최초의 한국인은 '원조가카'이다. 그 이전에도 RR에 어쩌다가 접속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활동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한국인이 그인 것이다. 그는 2018년 8월 11일에 RR에 가입하였다. 원조가카는 해외 거주 교포로써 뛰어난 영어실력을 통해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8월 12일 한국인 최초의 기사가 작성되었고 13일 한국어로 된 최초의 기사가 작성되었다. 그 이후로 유입된 이들이 그레고리, 패싱가이, 키릴, 유리, 쌍조, 성주도가 등이다.

2018년 한반도의 역사는 간략하다. 초기 러시아 강점기부터 이어진 러시아 군벌 GKT(탈라시의 대한국, Great Korea of Talash)가 변함없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리더 Talash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며 힘을 모아 인도 남부를 침공하는 등의 소소한 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평균 인원수는 40명 정도로 초기 한국인에게는 이마저도 너무 벅찬 수였다. 러시아 몰락 이후 GKU(대한국연맹, Great Korea Union)으로 이름을 바꾼 그들은 권력의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떨어져나온 러시아인들을 모았다. 이때 소수의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들은 기사를 통해 GKU 리더에게 한국을 독립시켜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렇지만 Talash는 한국인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하였다.

8월달 배주현(Irene)이라는 인물이 한국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며 한국국가당 입당을 종용하였다. 9월 2일 원조가카는 한국국가당에 가입한다. 이는 상호간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써 원조가카는 당시 동아시아의 맹주로 성장하던 케세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배주현의 한국국가당이 필요하였고 배주현은 정당성을 위해서 한국인인 원조가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한국국가당은 케세이의 공식 인증을 받아 한국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이 된다. 이후 아시아자주연방과의 교류를 이어가게 된다. 원조가카의 독립신문이 9일 창간되었다. 9월 말에 들어서 한국국가당의 인원이 종래에 비해 증가하고 한국국가당 대표인 배주현이 자연스레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그레고리, 키릴, 쌍조, 패싱가이, 콜보이)

10월 3일 케세이가 본격적으로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접촉해 온다. 당시 케세이는 Golden Horde와 싸우며 중국을 자력으로 수복해 나가는 상태였다. 이들은 이미 정식으로 정부를 구성한지도 1년이 되어가고 베이징, 대만, 중국 동부, 중국 남부를 차지한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10월 4일 Ray, Komeiji Koish가 파견되었다. GKU는 케세이의 개입을 심각하게 생각하였고 이틀후인 6일 독재정이 선포된다. (러시아 지배 당시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정을 구성하며 입맛에 맞는 인물만을 국가에 들이고 많은 양의 골드를 획득하였다.) 그런데 8일부터 배주현은 잠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2주간 이어졌다.

기존부터 배주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한국인 내에서도 많은 불만이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영국계 한국인이라고 하였으나 그녀는 한국어도 하지 못하여 한국인과의 소통도 잘 못하고 심지어 한국에 큰 관심도 없는 상태였다고 판단된다. 그녀는 당시 케세이의 지시에 따라 한국인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로 판단된다. 그들로써는 가까이에 괴뢰국을 만들고 싶어했다고 판단된다. 이에 쌍조는 최초로 <괴뢰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 논설의 주요 골자는 배주현은 한국인을 관리하는 케세이의 괴뢰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9일 케세이의 파견 외교관들은 여전히 배주현의 한국국가당을 지지하였고 한국인들은 이를 비난하며 'All hail Eurasia'라는 러시아 찬양어구를 내뱉으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는 한국 초기 갈피를 잡지 못하던 독립운동의 단면을 보여준다. 당시 Komeiji Koish는 '우리는 중립이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그렇지만 우리는 한국을 도울 수 있지만 러시아는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 라는 등의 발언을 하며 한국에서 반 케세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10월 10일 한국인들은 단체로 궐기하여 한국국가당을 탈퇴하였다. 이를 쌍십절이라 부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초로 본다.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그레고리가 당선된다. 이후 한국인만의 정당인 독립민주연합(IDU, Independent Democratic Union)가 창당된다. 한국인들은 16일 연해주(Primorsky Krai)로 이동하여 '연해주 임시정부'를 선포한다. 21일에 케세이가 계속하여 배주현과 한국국가당만을 한국인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인정하자 한-케세이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한국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데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다. 키릴은 러시아 외무부와 접촉하여 I.I라는 당시 러시아 여당의 텔레그램 톡방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RR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정치구조, 세계정세등을 공부한 키릴은 이후 친러노선의 거두가 된다. 이후 연해주로 이동한 한국인들은 서울-연해주를 오가며 파밍과 독립운동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때 대한민국 1호 기업인 한국물산이 설립된다. 공장주는 키릴이었고 패싱가이가 수익관리를 하였다. 당시 외무부는 유리와 원조가카가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요동치는 유가를 이용하여 소소하게나마 주식으로 돈을 벌고자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니 당시의 힘든 상황을 알 수 있다. 수도권-연해주는 당시 9분정도의 이동시간을 가졌으며 러시아와도 연이 닿는다는 이점이 있었다. 당시 키릴을 위시한 지도부는 러시아 본국와 빈번히 접촉하며 일개 지방군벌인 GKU를 타도하고자 하였다. 이런 와중 국가당 탈당사태로 한-케세이 갈등이 심화되자 한국은 더욱 러시아에 기대게 되었으며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식의 협력관계를 맺게되었다. 이에 따라 연해주 노동허가서를 발급받은 것이다. 그러나 GKU는 8일에 민주정을 독재정으로 바꾸었고 러시아와의 협력체제는 곧 파토되었다. 임정은 러시아 본국에 GKU에게 경고달라는 의사를 전했으나 그들은 동아시아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유럽의 에포나 공의회와 남미의 WA 경계에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첫 선거는 한국국가당 탈당 이전인 9월 29일으로 소급된다. 이미 한국인들은 그들만의 대표를 선출해 놓았던 것이고 이에따라 임정 선포후 곧바로 리더십 체제를 갖출수 있었다. 이후 10월 13일 독립을 선포한 후 투표가 또 있었고 그레고리가 연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는 임기 계산 원칙의 확립 전이라 그대로 1대로 계산하였다. 수도권-연해주 왕복 당시 한국인들은 돌아와 인게임 민주정 선거를 치르고 다시 연해주에서 노동을 하며 선거 의석을 노렸다. 또한 돈을 벌어 용병을 이용해 투표권을 구매하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10월 23일 키릴은 코도하(KODOHA)라는 국외정당을 설립하여 일본으로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괴뢰국이었던 일본국(日本国)치하의 일본유저를 끌어들여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양국의 동시 해방을 위한 단체였다. 그날 러시아의 알레스카 대공세로 세계 8차대전이 발발한다.

한편 11월 1일 일본인 TDN이 코도하에 가입하여 한일 상호협력을 도모하였다. 이후 12일 코도하는 한국제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11월 28일 국가당과 임시정부는 통합을 위해 여러차례 회담을 가진다. 다음날 29일 극적인 합의로 공동 대선을 개최하여 그레고리가 2대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2대 대선에서는 그레고리, 키릴, 먼치킨, 배주현이 참석하였다. 그레고리와 키릴은 자신의 정치론을 내세워 토론에 임하였고 먼치킨은 오로지 배주현을 까내리기 위해 참석하였다. 배주현은 정상회담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참가하였다. 이때 그레고리 7표, 키릴 6표로 그레고리가 재선에 성공한다. 그레고리는 첫 임기 당시의 노력에서 큰 점수를 얻었으며 친러였던 키릴보다는 케세이와의 관계에서 유연한 협상력을 기대하며 재선에 성공하였다. 당시 회담을 통해서 한국은 케세이의 시선과 국제정세를 어느정도 파악할수 있었다.

세계대전 와중인 11월 18일 GKU가 임시정부에 연락을 취해온다.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자신들이 국가를 한국인에게 넘길 용의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때 내건 조건이 인도지역 GKU영토의 침공을 막아주면 국가를 내어주고 자신들은 중앙아시아로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걸고 GKU를 도와 인도침공을 방어해 낸다. 그러나 이후 GKU는 한국인에게 어떠한 보답도 하지 않았다.

12월 1일 세계 8차대전이 종료되어, 그 결과로 러시아는 북미와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괴뢰로 관리하던 몽골지역을 본국으로 흡수하였다. 이는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관심을 두고 관리하겠다는 의도임이 명확했다. 이를 지켜본 한국 정부의 여론은 다시 친 케세이 측으로 기울게 된다. 러시아는 아직도 너무나 강대한데 우리의 손을 들어줄 세력은 케세이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한-케세이 관계가 돈독해지고 지금으로 이어진다.

당시 케세이는 대만에서 시작하여 중국 전역을 확보한 뒤 베트남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북방의 러시아를 견제해야 했고, 한국인들이 게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파악한 후 이들을 말로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한국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GKU를 물리쳐야 했으나, 뉴비인 한국인 세력은 자력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GKU는 러시아의 간접적 지원을 받는 군벌으로 케세이조차도 러시아 본국을 상대로 한 외교전을 펼친 이후에야 상대할 수 있는 적이었다. 이에 케세이는 한국인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육성하여 그들의 독립 명분을 활용하여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여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몰아내고, 동맹세력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러차례의 대화를 통해 이런 케세이의 의도를 파악한 뒤 마침내 한국정부는 케세이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이 진심으로 한국과 함께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후 괴뢰론은 사그라들었고, 양국 관계는 다시 정립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배주현은 홀로 일년여간 한국국가당을 유지하였다.

12월 3일 GKU는 다시 민주정으로 복귀한다. 이때부터 12월 한달간 선거 승리를 위한 한국인의 피나는 노력이 시작된다. 한국인들은 전부 한계까지 부계를 파서 열심히 투표권을 얻었다. 그러나 두 번의 대선 과반 획득 실패 후에 GKU의 전략이 마침내 파악되었다. 이들은 한국인이 늘어나자 두 번째 대선 이틀 전, 러시아인을 대거 한반도에 입국시켜 투표권을 확보하게 한다. 당시 친러 노선을 통해 GKU 정권의 외무장관 직을 얻어낸 키릴은 당시까지만 해도 GKU를 긍정적인 협상 파트너로 보며 협상을 이어나가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이에 의문을 표하며 2주 안에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일본인까지 끌어모아 대작전을 결행하기로 한다. 케세이의 지원군도 비밀리에 GKU의 레지던시를 최득하였다. 12월 30일의 이 작전을 NYS(New Years Surprise) 작전이라고 칭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이 3개이상의 부계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선거 종료 1시간 전 70대 50의 비율로 한국이 승리하는 듯 하였으나 40분 전 GKU 지배정당 헤즈볼라에 표가 몰리기 시작한다. 차후 상황을 파악할때 즈음에는 이미 한참전에 키릴이 외무장관에서 해임되었고 투표수를 위한 용병까지 동원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최종 결과는 72표 대 105표였다. 이후 GKU는 호남을 일본국(日本国)에 할양하여 한국인의 수를 줄인 뒤 독재 법안을 통과시킨다. 치열하게 이어졌던 한달간의 투표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국정부는 사실상 무너졌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지쳐 나가떨어졌고 대통령 그레고리는 12월 중순부터 이미 국무회의에 자주 불참하는 실정이었다. 당시 유리가 대통령 대행으로 국무회의를 주최하였다.

3.2. 2019년

2019년 1월 17일. 케세이를 위시한 ASS세력과 SOF등의 용병세력은 원조가카를 보내 GKU에게 퇴후통첩을 하고 18일 총공격을 가하였다. 이틀만에 ASS세력은 GKU와 이를 후원하던 러시아 일군 및 일본국(日本国)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분할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인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가 선거전에서 패배한 이후 마음이 꺾여버린 한국인들은 의미없는 노동을 반복하며 계속하여 RR화를 모으고 있었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게임을 접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인의 역량과 역할은 그것이 한계였다. ASS는 1월 17일에 있을 GKU공세를 그레고리 대통령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레고리 대통령은 이를 한국정부에 알리지 않았다. 당시 그레고리 대통령은 2대 대선 이후 학업문제를 호소하며 조금씩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와중에 남은 한국인들이 투표전 준비에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부재는 치명적이었다. 기본적으로 RR외교는 지도자 간의 대화나 유력한 외교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일반인들이 리더에게 메시지를 보내봤자 스팸으로 취급하기 일쑤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지도자이자 유일한 외교관이었던 그레고리의 부재는 외교 자체의 단절로 이어졌다. 선거전의 패배 이후에도 그레고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은 정부에서는 러시아와의 협상론과 ASS를 통한 토벌론이 대립하였고 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ASS와의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키릴을 통한 러시아 노선이 힘을 얻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이미 GKU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월말 한국정부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GKU는 존재하지 않았고 한국은 케세이와 용병단체에게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한국정부는 ASS가 한국을 배신하고 용병을 동원해 한반도를 나눠먹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정부는 Ray에게 정보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답신 결과는 정반대였다. 1월 14일 ASS는 남한 전체를 주겠다고 이미 그레고리에게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레고리는 이에 동의하였으나 한국인에게 알리지 않았고, 그 결과 한국정부는 아무 움직임도 취할수 없었다. 이에 ASS는 한국이 이미 멸망했다 판단하고 한국정부를 배제하고 작전을 거행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2월초가 되어서야 이 모든일을 알게 되었고 이미 일은 늦은 후였다. 북한은 이탈리아 용병단체, 호서는 남아프리카인, 관동과 영남은 체코인, 호남은 SOF, 수도권은 케세이로 이미 분할이 끝난 상태였다. 한국정부는 ASS에게 항의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되지도 않는 민주주의를 하는 한국인들이라는 비아냥, 그리고 명명백백히 드러난 한국의 실책 뿐이었다. 원조가카는 ASS특사 역할을 수행하여 정보가 있었으나 교포라 한국인들과는 시차가 맞지 않았고 한국정부와도 연락이 잘 되지 않아 미처 알리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대통령선거를 폐지하고 외국처럼 리더제를 실시하고자 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레고리는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며 쏱아지는 비난여론에 자신을 탄핵시키려는 헌정 쿠데타라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당시 그레고리를 향한 한국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나 RR을 플레이하는 유저가 한명이라도 아쉬운 상태에서 차일피일 미뤄지며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 15명의 한국인 중 8명이 활동을 접은 후였다. 3대 대선은 원조가카와 키릴 둘이 출마한다. 대선에서 키릴이 승리하였으나 대통령직을 학업을 이유로 포기하여 결국 원조가카가 당선되었다. 이후 Ray에게 연락하여 한반도를 얻어내고자 하였고, Ray에게서 한국인 20명 이상을 모아오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때 디시에 마이너 갤러리를 개설하고 페러독스 갤러리에 홍보글을 작성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전전긍긍하던 찰나 2월 3일 키릴이 영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개발도가 1이 된 찰나를 이용한 것이다. 당시 게임을 접은 상태였던 한국인들마저 이 소식에 복귀하였고, 5시간만에 에버가든은 항복을 선언하며 관동을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임시정부의 첫 무력 승리이자 최초로 한반도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 에버가든의 리더 클레어는 소극적으로 응하였다. 이에 키릴은 ASS를 이용하여 조약을 채결한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ASS는 동맹을 맺으며, 서로 상호간의 협조를 하는 대가로 임시정부는 Naryn을 받고, ASS는 한국인을 자국의 확장전쟁이나 방어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
2. ASS 디스코드 채널에 한국인 방을 개설하고, 이곳에서 ASS와 꾸준히 교류해야했고, ASS의 동의 없이 한반도에서 확장정책을 수행할 수 없도록 암묵적인 불가침 조약을 맺을 것.
한국정부는 이 조약에 동의하여 네팔 전쟁에 참전후 나린(Naryn)을 획득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이때를 대한민국 제 1공화국으로 칭한다.

대한민국 제 1공화국기

2019년 2월 6일 대한민국 제 1공화국이 처음으로 RR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이후 나린과 수도권을 교환하고 추가로 관동을 확보하기로 한다. 그러나 클레어는 말을 바꾸어 관등을 줄수 없다고 나왔다. SOF와 에버가든이 얽힌 복잡한 일이었다. 이후 유리와 SOF 리더는 긴 대화를 나누게 되고 채팅방에서 있었던 SOF의 말실수로 인해 ASS를 끌어들일수 있게 된다. 이후 관동을 받는 대신 나린을 넘기는 조건으로 할양을 마치게 된다. 2019년 2월 13일 오후 8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도권을 획득하고 정식으로 국명을 대한민국으로 칭한다. 동시에 독립선언문을 발표한다. 한국인은 이때를 전후하여 ASS의 요청으로 많은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한편 대한민국 내부의 문제도 발생하였다. 원조가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키릴이 내/외부적으로 더 리더의 면모를 보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자 불만이 쌓여갔다. 2월 9일 원조가카는 '나라에는 좋은 일이지만 이럴거면 왜 대통령을 선출하였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디스코드방을 나가게 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관리자 권한이 있었고 대통령이 디스코드를 나가자 체널이 폭파된다. 그래서 그 이전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4대 대통령으로는 유리가 선출되었다. 키릴은 15일 잠수를 타게 되었고 16일 관동을 수복한다. 그러나 2019년 2월 17일 새벽 3시 57분 러시아가 북한을 침공한다. 북한은 한국과 ASS의 영토가 아니었지만 빼앗길 경우 케세이 소유의 중국 동북부에 양면전선이 생길 우려가 있었고, 한국은 수도권과 관동이 직접 공격대상권에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북한을 영유하던 이탈리아 용병들은 북한에 3명의 상주인원 외에는 두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상황이 파악되었으나 처음에는 ASS에서 러시아와의 불가침 조약을 운운하며 막아섰다. 하지만 심각성을 파악한 뒤 Chun이 방어를 승인하였다. 이후 5시간만에 방어에 성공한다. 이 작전에서 ASS는 그 저력을 드러내었고 한국 내에서도 그 힘을 더욱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타임라인
2월 17일
오전 1시 18분, 키릴과 Ray의 대화. 러시아가 다른 속국에게 연해주를 넘겨주었고 호서에서 쿠데타가 난 것으로 보아 러시아의 침공 징후가 파악됨. GKU 잔여세력 가담 확인됨.
오후 12시 36분 .러시아에서 GKU를 앞세워 북한지역 공격. 국방부 비상령 발령.
오후 1시 유리와 트리 ASS로부터 정보 수집. 유리의 보고: 러시아는 과거부터 GKU를 지원하였고 극동에 많은 관심을 쏱고 있다. 트리의 보고: 러시아 내부 정부는 수집할수 없지만 현재 러시아가 한중일을 목표로 삼고있다고 보고함. 본래 2019년 6월 즈음의 계획을 앞당겼다고 함.
오후 1시 40분경, 북한으로 이동하고자 하였으나 국경이 폐쇄되어 있어 방어가 지체됨
오후 10시 14분 한국 계엄령 선포, Chun의 지시하에 ASS 연합군은 북한방어에 나섬.
2월 18일
3시 57분 대통령 유리는 연합군이 반격에 성공하였으며 GKU를 패퇴시키고 북한을 러시아로부터 구해내었음을 선엄함. 러시아 상대로 거둔 한국의 첫 승리. 유리, 그레고리, 레닌, 트리, 키릴, 먼치킨 등이 참여함.

이후 GKU세력은 군벌세력으로써의 영향력은 사라졌다고 판단된다.

21일 러시아가 관동 쿠데타에 참전. 블리츠를 통해 종료 47분전 확인되었다. 전쟁의 주체는 GKU가 아닌 러시아 지배당 I.I임이 확인되었다. 이에따라 러시아 전체가 적으로 규정되고 정부 내 친 케세이노선이 더욱 공고화되었다. 이후 쿠데타를 막기위해 한국지역 재건에 들어가게 된다. 26일 터키인 튜나가 이끄는 한국공화국군(Korea Republic Army)가 자신을 따르는 터키인을 모아 한국 정권탈취에 나서나 실패함. 27일 한국공화국군이 연이어 SOF 산하의 호남 백제왕국과 일본을 공격한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그들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리더 튜나를 정부 서버에서 추방한다.

한편 이 시기 처음으로 국가를 얻은 기쁨도 잠시, 한국은 극도의 경제난에 시달렸다. 유저들이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어도 국경봉쇄비용을 대지 못할 판이었다. 이는 애초에 뉴비들이 번 돈이 얼마 되지 않았으며, 지속적인 이동과 전쟁 참여, 프리미엄 계정의 미비로 인해 제대로 돈을 모으지 못한 탓이 컸다. 또한 지난 8차대전을 통하여 전세계가 파괴되고 개발열풍이 불어 각종 자원의 가격이 두배가량이나 폭등한데 따른 것이었다. 유리정부는 타개책으로 다시금 사람을 불러모으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디시 페러독스 갤러리에 홍보글을 작성한다. 이때 하언과 리멘이 홍보글을 통해 3월 7일에 RR으로 들어오게 된다. 9일 하언의 대한익문사가 창간되었다.

3월달은 내내 쿠데타에 시달렸다. 이를 막기위해 정부는 항시 국방부를 가동하였으며 ASS역시 한국을 도와 감시하였다. 이후 러시아를 막기위해 12일 인게임 국가 체제를 독재정으로 변경한다. 14일 일당제로 변경하고 관동주를 설치한다. 또한 키릴이 복귀하고 비밀리에 러시아와 접선을 시작하였다. 16일 버마사변이 일어난다. 이는 버마가 ASS를 탈퇴하고 러시아로 전향하려다 들켜 보복으로 멸망당한 일이다. 이에 따라 한국도 만일을 대비하기 위한 다른 동맹을 찾고자 비밀리에 논의를 진행하였다. 17일 키릴이 다시 떠나지만 미국과의 협의로 노동허가서가 발급되기 시작하였다. 18일 베트남이 건국하여 ASS에 재가입하였다. 21일에는 러시아의 관동 공격이 있었다. 저번처럼 종료 1시간 전 기습적으로 행해진 공격이었다. 이때 ASS의 도움으로 관동을 무사히 지켜낼수 있었다. 26일 SOF의 부탁으로 선거전을 치루게 된다. 이에 따라 전 국민이 카라칼팍스탄으로 향하여 선거작전을 치뤄, 그 대가로 많은 돈을 벌어 전액 국가의 개발에 사용되었다.
27일 체코인의 공격으로 백제왕국이 멸망하였다. 쿠데타를 통해 독립구역이 된 이곳으로 모든 한국인과 ASS인이 함께 거주권을 얻어 땅을 획득하였다. 한국인의 역량부족으로 땅을 얻어내지는 못하였으나 코이시가 이끄는 케세이계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외교적 협상을 통해 원래 주인에게로 반환되었다. 이후 코이시는 국체를 대만으로 옮겼다. 이때 SOF의 일원인 엑쉬가 연해주를 공격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고 싶다는 제안을 유리가 받아들였고 대한민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제적으로 심각한 외교적 긴장이 촉발되자 유리는 엑쉬 등의 터키조직과 연을 끊고 ASS와 SOF에 사과하게 된다. 이를 '연해주 사태'라고 한다. 이 일로 유리는 소통 부족으로 국무회의에서 질타를 받게 된다.

4월 1일 터키의 러시아 공격이 격화되며 전선이 뚫리기 시작한다. 3일에는 모스크바가 함락되며 러시아가 동유럽과 시베리아로 양분된다. 이에 따라 6월로 예정된 러시아의 공세에서 한발짝 멀어질수 있었다. 정부는 ASS에 러시아 협공을 제안하였으나 정보 부족의 이유로 거절당한다. 7일 이미 대통령 유리의 임기가 종료되었으나 대선 출마후보 부족으로 인해 국무회의에서 재신임되었다. 10일 영-호남과 협의 끝에 국경을 개방하기로 한다. 12일 ASS가 서북부에서 러시아를 공격하고 한국이 이에 동참한다. 국가 개발계획 역시 성과를 거두어 4월 6일 수도권 개발도 3을 달성하였으나 14일 다시 개발도가 2가 되었다. 당일 개발에 쓰일 자금을 위한 재무부에서 세무조사 계획을 발표한다. 16일 민주정으로 정부형태를 변경하였다. 30일에는 수도권 개발도가 6이 되어 개발도가 안정권에 들어섰다. 17일 일본 본토인들과의 회담이 이루어진다.
19-20일 한국제일당 당명논쟁 발생. 주요 쟁점은 독립민주연합의 맥과 과거 코노하 시절의 한국제일당. 쌍조-키릴 대립함. 24일 국무총리 후보자 선출, 26일 투표, 28일 쌍조 당선. 29일 일본지원관련 국무회의에서 중국 지원에 관한 안건이 채택됨. 한편 4월 7일 관동주를 재설치하여 정부 고액기부자인 크리스티안을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한달의 재임기간 내외로 관동에 정말 많은 기부를 하여 그 누구도 관동 주지사직에 이견을 가지지 않았다.

5월 2일 관동 주지사를 하언으로 교체하였다. 동시에 국영기엽 대한그룹연합이 설립됨. 3일 네팔이 무너지고 7일 일본이 갑작스럽게 멸망한다. ASS소속의 첫 일본인 네이티브 국가였으나 한밤에 쿠데타를 통해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후 남은 일본인들은 케세이 정당에 들어가 활동하다 사라졌다. 일본의 멸망을 통해 한국 역시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10일 ASS가 해체를 선언하였다. 네팔과 일본 등에서 방어를 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이를 수행하지 못한 이상 이미 ASS는 블록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16일 구ASS 소속국은 모두 코카서스 연합에 가입하였다. 코카서스 연합은 오로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연합이었고 소속국 대부분이 러시아 접경지의 국가들이었다. 23일 케세이에 러시아의 파상적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에따라 코카서스 연합은 블록전쟁을 선언하였고 모든 연합원들이 중국으로 향하였다. 당시 러시아-케세이 전선은 무려 10개에 달하였다.
한편 13일 쌍조 총리 주도 하에 골드집중제를 논의하여 키릴과 갈등을 빚었다. 19일 골드집중제 사용방안 확립됨. 국영기업 육성에 뜻을 모았다. 20일 국무총리 선거 시작. 사법부 장관 영우(성주도가) 당선. 22일 제헌의회 설립. 헌법 논의 시작. 27일 유리대통령 사임. 쌍조 권한대행 체제 돌입.

6월 7일 구 ASS소속 친 케세이 국가와 한국 간의 사이를 개선하는 신남방정책. 9일 지속적인 한-케세이 우호를 통해 점진적으로 국체 통일을 논의하는 유화통일론을 발표하였다. 이는 언제든 한국인들이 국체 유지가 불가능해질 시 시행할 수 있는 계획으로 남겨두었다. 동시에 중국 감사기금 설립을 논의하였다. 24일 제일당의 표어를 일부 수정 논의하였고 29일 수정하였다.

7월 8일 포르투갈인 Sousa의 지원으로 당로고를 쇄신하였고 당일 영남 선전포고를 논의하였다. 21일 군주제를 선포하였고 러시아가 북한을 공격해 결국 함락시키며 남진하였다. 22일 '동방의빛'이 북한을 할양받았다. 이에 따른 러시아 대책을 논의하였다. 한국제일당 당원수가 30명 이하로 추락했다. 23일 러시아제국이 국명을 인류제국으로 변경하였다, 동시에 관동 개발도를 5로 증가시켰다. 24일 일본인 정당과의 통합을 논의하다 세력이 최근 미진한 제일당의 흡수통일의 가능성 때문에 결렬됨. 28일 당명 변경 재논의. 키릴이 자유민주당을 창당하며 다당제 개헌을 요구하였다. 쌍조와 하언은 반대하였고 키릴과 패싱가이는 찬성하였다. 30일 다당제 개헌을 논의함. 31일 케세이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고함. 다당제 개헌 토론이 격화되어 국회정지가 선언되었다. 한편 국가추방령이 내려진 튜나가 자유민주당에 입당하는 사태 발생함.

8월 1일 조세 및 플미제도의 시행에 관한 합의 후 이행에 나섰다. 3일 지난 회의로 피로를 느낀 쌍조 대통령이 사임하였다. 하언 권한대행체제에 돌입. 키릴이 러시아 본국 주지사에 등용됨. 10일 청정수(현 나부장)의 지휘에 따라 번역팀이 발족되었다. 이후 분업화와 책임화 과정을 통해 일주일만에 RR이 한국어로 모두 번역되는 쾌거를 거두었다. 정부는 청정수상을 제정하여 이를 기리었다. 20일 중-러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억지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초반 코카서스 연합은 승기를 잡으며 승리하는 듯 보였다. 22일 하언 대통령 취임. 23일 알타이 공화국 쿠데타전에서 케세이의 패배. 26일 러시아는 전 자치주를 해체하고 자치정부 예산을 중앙정부로 몰수하며 전시체제에 돌입하였다. 결국 27일 코카서스 블록이 붕괴되며 코카서스는 결국 반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저번 대전에서 러시아의 패인처럼, 코카서스 블록은 너무 많은 세력이 뭉친 탓에 소통이 어려웠고 블록의 설립 목적인 자신의 땅을 지키는 것에 충실하여 뭉치지 못하고 패배한 것이다. 코카서스의 패전으로 동구지역과 중앙아시아의 패권이 다시 러시아로 넘어갔으며, 한국은 구ASS세력과 함깨 미국의 먼로동맹에 가입하였다.

9월 초 제일당원 15명선이 붕괴되었다. 사실상 새로 들어오는 인원은 전무하였고 원래 있던 인원마져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디스코드방 실활동인원 역시 7명선에서 간신히 유지되었다. 그러던 찰나 9월 9일 러시아 세력에 의해 의회가 장악된다. 그들은 미리 VPN을 사용하여 한국 내부에 다수의 가짜 계정을 확보해 두었으며 한국인이 모두 자고있던 새벽에 작전을 감행하였다. 총선 종료 직전 블리츠를 이용해 원내 1당이 된 그들은 곧바로 수도를 관동으로 천도하는 법안을 다수결에 따라 처리하였고 밍기스타우 주의 실크로드국으로 수도권을 이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아침에 파악되었고 곧바로 국가비상체제에 돌입한다. 적들은 국회에서 과반의 득표를 하면 법안이 곧바로 통과되는 것을 이용하여 각종 법안을 통과시켰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세력을 총동원하며 맞섰다. 먼로동맹과 케세이인들도 한국제일당에 입당하였으며 그들에게 거주권을 주어 투표권을 확보하였다.
이에 긴급히 의회 해산 법안과 독재자 옹립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였으나 러시아인의 반대로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정부는 모든 예산을 국경봉쇄 48시간분만 남겨두고 케세이로 이관한다. 적들이 계속하여 수도권을 이관시키려고 하자 ASS와 LoTE는 수도권과 관동을 동시에 공격하여 영토이전법안을 취소시키고자 하였다. 10일이 되자 먼로동맹은 대한민국을 포기하였고 마지막까지 한국을 돕던 Chun역시 블록내부에서 구박을 듣고있다는 비보만이 들려왔다. 결국 의회해산이라는 마지막 승부수가 실패로 돌아가자 LoTE는 대한민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이에 따라 22019년 대한민국 제 1공화국이 멸망하고 베트남 치하 한국인 자치주 - LoTE 강점기로 넘어가게 된다. 수도권-관동은 곧바로 베트남에 이관된다.

제 1차 망명정부

9월 11일 정부는 Chun과 협상에 나선다. 과거 나린 건국때처럼 해외의 프로빈스를 차지하여 건국하면 수도권-관동을 한국인에게 반환하겠다는 조건으로 협의한다. 이에 따라 인당10부계양성계획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2일 현실적인 문제로 인당5부계 양성계획으로 축소되었다. 당일 베트남 치하 한국인 자치주가 수립되었다. 13일 과거 NYS작전 참가자들을 모아 투표전 승리의 가능성을 논의하였다. 당시 정부에서 모을수 있었던 최대 인원은 15명으로 파악된다. 14일 먼로동맹 소속 그린란드가 러시아에 공격받는다. 일부 한국인이 참전하였다. 16일 키릴이 구체적인 한국재건계획을 논의한다. 9월 국가가 붕괴된 이후 한국 정부는 무력감에 빠져 수렁속으로 들어갔다. 이는 과거 NYS작전 실패후의 무력감과도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두 파벌로 나뉘었다. 본토에서 계속 노동하며 기회를 기다리는 자들과 러시아, 미국 등으로 넘어가 적극적인 파밍에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10월 6일 수도권이 쿠데타로 인해 독립구역으로 변했다. 베트남 정부 디스코드에 한국인이 초대되었고 한국 재건 논의가 시작되었다. 13일 대한민국이 임시 건국되었다.16일 Chun의 한국계획이 발표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쿠데타로 한국을 세운 후 30일이 지나면 독재로 전환한다. 배주현을 리더로, 쌍조를 재무부장으로 임명한다. 케세이는 이번주에는 Raku, 그 다음주에는 Amesr를 리더로 임명한다. 당분간 Chun은 외무부장을 유지한다.> 18일 TerryQQ와 대화를 통해 Chun은 과거처럼 배주현을 통해 한국을 직접 통치하려고 한다는 것과 케세이 내부에서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케세이는 과거 조언을 듣지 않은 한국에게 화나 나 있었고 협상은 아주 어렵게 진행되었다. 21일 Chun과의 대화를 통해, 배주현을 이용해여 한국을 괴뢰통치하려는 것이 아니고 한국을 안정화 시키고 발전시킨 후 한달 뒤에 넘겨줄 의향이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재협상에서 쿠데타 방지를 위해 케세이가 노력한것등을 더하여 17T의 차관을 장기적으로 갚기로 합의하였다. 곧바로 쌍조는 장기휴가에 나섰다. 22일 후임자로 청정수가 임명된다. 29일 관동 쿠데타가 발생되었고 31일 수도권에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이에 케세이가 방어에 나섰다.

11월 초 한국정부는 셧다운 상태에 들어갔다. 11월 15일 쌍조가 출석하지 않는 것을 본 케세이는 한국이 무너졌다고 판단하고 수도권-관동을 모두 LoTE에 고작 40T에 팔아넘긴다. 곧바로 LoTE는 두 지역을 개발하여 한국인이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항의하기에 늦은 때였다. 이후의 첩보에 따르면 LoTE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한반도 전체를 손에 넣고 싶어하였다고 한다. 이에따라 키릴과 쌍조가 모두 복귀하였고 키릴의 무장투쟁 노선과 쌍조의 외교해결 노선이 충돌한다. 키릴은 우리가 모든 땅을 돈주고 살수도 없고 저들이 우리에게 팔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한국인의 역량을 최대한 길러 땅을 무력으로 차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쌍조는 독립한다 하더라도 LoTE와 충돌이 있다면 케세이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웃이 되어야 하는데 무장투쟁은 옳지 않다. 그리고 LoTE는 레벨 100이 넘는 이들이 즐비한 용병단체이니 전쟁은 현실적으로 승산이 없고 실력양성을 위해 독립계획을 계속해서 뒤로 미룬다면 오히려 저들의 지배권이 공고화된다고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대통령 하언과 외무부장 청정수는 현실성의 이유로 쌍조의 안건을 지지한다. 또한 청정수는 타협안으로 우선 수도권 만이라도 회복하는 것을 건의한다. 이날 회의에서 케세이와의 외교 정상화와 국가재건을 결의하였다. 20일 하언 대통령 임기 종료에 따른 대선준비를 논의하였다. 18일 키릴 주도하에 쿠데타를 통한 지역독립을 목표로 거사일을 12월 7,8일로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목표가 생긴 한국 정부는 다시금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19일 키릴 주도하에 한국제일당 당명을 국가재건전선으로 변경하여 독립 의지를 고취하였다. 20일 국가재건전선 당원이 41명으로 늘어났다. 일주일간 이어진 조조-쌍조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고 케세이와 LoTE는 한국 해외건국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케세이 수뇌부 Sherry는 '조조를 자극하지 말라, 애초에 쌍조의 부정적 말이 아니었으면 한국을 LoTE에 팔지도 않았을 것이다.'라 하며 한국인의 공분을 샀다. 이에 따라 여론이 케세이보다는 LoTE와 협상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21일 케세이로부터 비공식적으로 키릴의 실각을 요구받았다. 국민들의 분노가 케세이를 향하였다. 대통령은 요청을 거절하고 중립노선을 걸을 것을 천명하였다. 국외건국 논의가 있었으나 거주권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수도권과 관동에 거주권을 두고 있는데, 만일 국외건국 시도를 하게 된다면 거주권을 잃게 되고, 이는 한반도에 한국인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조차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23일 LoTE에게 지역 심층탐사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25일 유리-Fizzen(LoTE 재무부장) 회담이 있었다. 이때 터키가 LoTE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습득하였다. 이에 따라 해당 정보에 발맞춘 국가수립 계획을 논의하였다. 28일 러시아의 '전국토 선진화 계획'이 완료되었다. 95개의 영토가 전부 선진 등급에 들어가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대통령 임금이 일당4750G이 되었다. 국무회의에서 케세이-LoTE간 협의가 이미 완료되었고 한국인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키릴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힘을 얻게 된다. 29일 케세이 정부와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해 키릴이 공식적인 사과 서한을 보내었다. 이날 대선을 위해 여러번 토론이 있었고 투표결과 8대 4로 키릴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한편 11월 초 좌절된 독립의 꿈에 청정수를 중심으로 미국으로 넘어가 파밍을 시작한다.

12월 2일 동방의 빛이 국명을 로리-로마제국으로 변경하여 뭇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3일 키릴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무력투쟁을 위해 전국민의 실국적을 한국으로 변경한다. 4일 케세이는 대표적 친러파이자 무장투쟁론을 전개하고 있는 키릴의 당선에 크게 실망과 우려를 표하였다. 이에 따라 케세이 일각에서는 키릴의 공약을 비판하며 정 그러고 싶거든 케세이가 아닌 다른 동맹을 찾아보라는 식의 과격한 기사가 올라오게 된다. 한국인 역시 이에 분노하였다. 8일 백무남이 그룹 마스터피스 산하에 4개의 금광을 합병 선언하여 대한민국 최대의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백무남은 자비를 들여 이같은 투자를 행하였고 정부는 이에 따라 훈장을 수여하여 그를 기렸다. 당일 어쨋든 기댈 수 있는 거목인 케세이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네팔 선거전 파병을 결의한다.
10일 터키-구 먼로연합-구ASS-이탈리아가 가입한 최대의 반러 방위조약 Winterfall이 러시아에 의해 멸망한다. 터키가 패망하며 많은 세력이 등을 돌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범람을 막던 모든 방어선이 무너진다. 11일 동아시아 평의회가 개최되어 앞으로의 향방을 논의하였다. 초청으로 일본 클랜의 터키인 오르하가 참여하였다. 14일 케세이를 향한 러시아의 전격전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중국 북부, 북서부, 북동부가 함락되며 15일 케세이의 모든 지역이 무너졌다. 이후 동남아시아로 전선이 확대된다. 동시에 LoTE는 일본의 Imperial Clan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훗카이도만을 러시아에 내어주며 일본 본토와 한반도를 확보하게 된다. 16일 정부는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모든 군사작전을 중단한다.
17일 ASS의 마지막 보루 싱가포르가 함락된다. 이에 따라 아시아가 해방된지 1년 6개월만에 다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한국정부에서 케세이 파병에 문제로 많은 설전이 오갔다. 전 외무장관 트리와 전 대통령 유리, 원조가카, 쌍조의 격한 논쟁 끝에 트리가 한국정부를 떠났다. 결국 케세이 파병을 승인하고 베이징, 중국 남부, 대만, 북베트남을 거치며 ASS 국가의 항쟁을 도왔다. 이를 통해 다시 한중관계가 정상화되었고 쌍조가 케세이 수뇌회담에 초청되는 쾌거를 거둔다. 이후 중국에는 러시아의 몽골총독부가 설치되어 몽골, 중국, 일부 중앙아시아 지역을 관할하게 된다. 동남아시아에는 인도차이나 자유국이 설치되었다. 21일 LoTE 한국인 자치주가 재설치되었다. 23일 용병단체 설립논의가 있었다. 29일 미국에서 브라질 블록인 갱뱅스쿼드와의 전쟁이 있었다. 뉴햄프셔 선거전에서도 용병단체에 밀려 패배하였다. 이를 보면서 한국 용병단체 설립 논의가 가속화된다. 주요 이유는 우리의 힘이 적고 사람도 없기 때문에 독립이 요원한 상태에서 뭐라도 하기 위해서는 용병단체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케세이가 무너진 이후 독립은 더욱 멀어졌다. 12월 16일 미국정부와 접촉하여 파밍할 장소를 물색하였다. 18일 노스 다코타 주지사를 한국인이 받게 되었다. 이에 한국인들은 미국의 노스 다코타 주로 넘어가 한인타운을 건설하여 지루한 파밍과 인고의 시간을 보내었다.

3.3. 2020년

3.4. 2021년

11월 말경 김일성 조선로동당 창당
12월 중순 으앙의 대한민국당 창당
12월 24일 성탄대타협으로 제일당의 대한당 승인 및 참정 허용

3.5. 2022년

2월 21일 제일당 강령발표, 그 영향으로 대한당 당직자 총사퇴 후 새로운 대표 한방 선출
3월 5일 대한당원 자브의 면박
3월 13일 대한당 당대표 한방 아타튀르크 모욕사건
3월 14일 대한당 당대표 교체
3월 14~15일 한방계파의 대한당 탈당
3월 16일 1차 자민련 결성, 곧 노선갈등으로 자민련 와해됨.
3월 19일 자브 대한당 탈당 및 2차 자민련 결성
3월 21일 제일당-대한당 합당

3.6. 2023년

3.7.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