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mm를 쏘고 있다. 37mm도 쏘고 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5]
브라우닝은 탄이 걸렸다.
나는 A-set에 "조종수, 전진!"을 외쳤지만
내 말이 안 들리는 조종수는 후진 중이다.[6]
포탑 위로 올라갔더니 50 야드[7] 거리에서 전진 중인
적 전차 12대가 보이던 차에...
누군가가 치즈 샌드위치를 건네주더라.
- 켄 자일즈 중위(
Lieutenant Ken Giles),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엘 알라메인 전투의 주역이 바로 이 전차였으며, 특히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그랜트 전차가 매복해 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소속 기갑부대의 측면을 기습해 무려 49량을 격파한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 전역에서는 영연방군이 주로 사용했는데 험지돌파력이 떨어지지만 높은 차체는 오히려 수풀이 우거진 동남아시아에서 다른 전차들보다 나은 시야를 확보해 주었고, 차체에 붙은 75mm 포는 "초목을 제거하는데" 쓸모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군 전차는
하고,
치로,
치하와 같은 경장갑에 빈약한 화력을 가진 전차뿐이라 주포로 초목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포탑에 달린 37mm 부포로 일본군 전차도 제거해주는 일도 많았다.[11] 또한 보병이 공격하기 어려운 진지나 거점공격에도 활용되었다.
결국 44년에 유럽전선에서 퇴출된 리는 일본군 상대로는 종전까지 사용되게 된다. 일본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수단이 별로 없었기에 M3를 상대로 처절한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임팔 작전 당시 영국군 소속 제3소총기갑연대의 M3 그랜트들을 막기 위해 일본군은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M3 스튜어트까지 동원해야 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격파된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 M31B2 구난전차, 1952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으로 M31B2 구난전차 소수가 투입되었으나 이 중 1량이 베트민이 설치한 지뢰로 인해 격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의 M31B2는 직접적으로 전투를 치를 수는 없었지만, 고장난 프랑스군의 전차를 빠르게 회수하는 활약을 했다.
[1]
1943년 1월 27일 촬영된 사진이다.
[2]
당시 영국의 전차포는 3호전차의 50mm포보다도 열세한
2파운더가 주류였는데, 개발 당시 철갑유탄이 존재하였으나 관통력이 낮다는 사유로 반려 당하고 철갑탄으로만 보급되었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2파운더를 고집하던 시기도 있어서
6파운더를 설치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3]
흔히 미 육군의 2차 대전 교리가 아군 전차가 적 전차와 싸우는 것을 피하고 구축전차가 대신 싸우는 식이라는 것이라고 아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나와 있듯이 차체에라도 무리하게 75mm를 장착한 이유가 전차 대 전차로 싸우기 위해서라는 좋은 반증이다. 보병지원용이라면 4호 초기형처럼 포신이 훨씬 짧은 물건으로도 충분하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보병지원임무가 바로 대전차 임무 수행이다.
[4]
아이러니하게도 영국군이 75mm를 받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 나치 독일의 4호 전차 Happy time으로 넘어갔다.
[5]
전차장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과 몸개그가 따로 없었겠지만,
기관총 포탑을 겸하는 큐폴라(차장용 전망탑)와 37mm 부포탑이 따로따로 회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6]
영국군 전차가 사용하던 No.19 무전기에서 A-set은 연대 무전망이다. B-set이 소대망이고 IC가 인터컴 설정. 즉 인터컴이 아닌 연대망에 대고 외치고 있으니 조종수에게 전차장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한 상황이다.
[7]
50미터도 안 되는 코앞이란 얘기다.
[8]
1942년 11월 23일 촬영된 사진이다.
[9]
뱌지마 시를 해방한 직후 촬영된 사진이다.
[10]
1945년 2월 28일 촬영된 사진이다.
[11]
재밌는 일화긴하지만 37mm로도 일본군 전차를 격파가능하긴해도 전차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게 관통만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75mm는 험지개척용이고 일본군 전차를 쏘는게 낭비니 뭐니 하는 말은 그냥 유머로 받아들이는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