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작가 한국사 역사소설 | ||||
요하 | 왕건 | 이성계 | 7년전쟁 |
1. 개요
七年戰爭2010년 타계한 김성한 작가의 역사 소설. 1974년부터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해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1990년 단행본 전 7권으로 출간되었다.[1] 이후 임진란( 1592년) 7주갑[2]을 맞이해 2012년 임진년에 총 5권으로 재출간되었다. 자료수집과 집필기간만 총 15년으로 작가의 역사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3] 이성계, 요하, 왕건에 이은 마지막 역사소설.
- 작가의 말 ▼
-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우리나라의 병력은 전국을 통틀어 7천 명이었다고 한다.[4]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렇다 할 병력도 군비도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가령 전쟁 벽두에 함락된 동래(東來)의 경우 수비 병력은 겨우 20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5] 동래를 공격한 일본군 병력은 1만 8천7백 명이었다.
이와 같이 전혀 대비기 없는 나라에 일본은 잘 훈련된 20만 대군에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쳐들어왔다. 그들이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1천 리를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남에서 북으로 두 번 밀고 올라왔다 두 번 밀려갔다. 왕복 네 번이었다. 우군(友軍)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군은 북에서 남으로 두 번 밀고 내려왔다 두 번 올라갔다. 역시 왕복 네 번이었다.
살인, 약탈, 강간, 파괴, 방화 등 행패를 부리기는 적군이고 우군이고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중국군이 한술 더 뜨는 경우도 없지 않아 당시 사람들은 ‘왜군은 얼레빗, 중국군은 참빗’이라고까지 탄식하였다.
이처럼 전후 8회에 걸쳐 양군(兩軍)에 짓밟히고 나니 나라는 글자 그대로 결딴이 나고 말았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촌락은 태반이 잿더미로 화하고, 후기에는 적의 무차별 방화로 많은 고장에서는 산림도 다 타버렸다. 옛날 전쟁에는 으레 대규모 기아 질병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전사자(戰死者)에 아사자와 병사자까지 합치면 인구(人口)의 80% 이상, 필자의 추산으로는 적어도 6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임진왜란의 경위를 조사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무능한 통치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결코 예고 없는 기습공격이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자신이 조선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침략을 공언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쓰시마(對馬島)는 전후 4회, 일부러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침공을 경고하고 그때마다 침공의 시기까지 정확히 알려 주었다. 또한 국내에서도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黃允吉), 황진(黃進)을 비롯하여 오억령(吳億齡) 등은 극력 일본의 흉계를 경고하고 대책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무능한 통치자들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당치도 않은 일로 세월을 허송하다가 이 참변을 당했다. 그들의 무능은 만참(萬斬)으로도 오히려 부족한 범죄행위였다.[6]
이 참담한 비극 속에서도 의병들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의 지휘하에 의병들은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의 육상보급을 촌단(寸斷)하였다. 바다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적의 수군을 철저히 격파하고 그들의 해상 보급을 차단하였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일본군은 해상으로 보급을 받으면서 중국의 북경까지도 점령하였으리라는 것이 오늘날 전략(戰略)을 아는 이들의 일치된 견해다. 특히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명장(名將)의 경지를 넘어 초인(超人)이었다. 인류가 바다에서 싸우는 일을 시작한 이후 이순신 같은 초인간적인 해장(海將)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결국 제 발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고 비극은 드디어 막을 내렸다.
흔히 시(時)는 음악, 소설은 그림에 비유되거니와 이미 완결된 시대상(時代相)을 그리는 역사소설은 그림 중에서도 풍경화에 속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풍경화는 무엇보다도 그 대상에 충실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가능한 한 관계 3국의 사료(史料)들을 광범하게 조사하여 시대적인 배경, 전쟁과 평화의 표면과 이면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 연구논문, 연구서적 외에 실록(實錄)을 비롯하여 이순신, 류성룡, 이원익, 박동량, 윤국형, 조경남, 황신 등등 전쟁 당사자들의 기록, 일본에서는 종군승(從軍僧)들의 기록, 중국에서는 명사(明史), 신종실록(神宗實錄) 등 근본사료들을 기준으로 삼았다.
필자가 이 연재를 시작한 것은 84년 1월이었으나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10년 전인 74년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은바 그중에서도 특히 이종학(李鍾學), 윤양중, 신용순, 유시보, 박혜일, 이장희, 양원식, 신성균, 김환덕 제씨와 일본에 계신 다나카 아키라(田中明) 씨, 강석린 박사의 호의를 잊을 수 없다. 이 장황한 글을 오랫동안 연재하여 주신 동아일보의 여러분, 이상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면서 붓을 놓는다.
* 이 글은 작가 김성한 선생이 5년에 걸친 《동아일보》 연재를 마치면서 쓴 글(1989년 12월 25일자)을 일부 손본 것이다.||
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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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을 그린 최초의 역사소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물중에서 전쟁 전반을 객관적으로 가장 잘 조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은 한중일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양한데[7] 이 작품은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바라보고 있다. 단순한 전쟁묘사뿐 아니라 왜란 직전 조선과 일본의 모습부터 전쟁 소강시기인 1593년부터 정유재란 직전까지의 모습도 상세히 담아내고 있다. 읽다보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임란의 교과서같은 느낌이다. 당연히 1980년대에는 이러한 접근법이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1990년 단행본 발간시 7년전쟁이 아닌 임진왜란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었다. 최근 임진왜란이라는 명칭논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2012년에 본래 작가가 의도한 7년전쟁으로 재출간되었다. 즉 7년간의 전쟁을 거시적 시선으로 담담히 그려낸 최초의 창작물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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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 입체적 인간상, 간결한 문체
철저한 고증도 돋보인다. 국내사료는 물론이고 일본및 중국 사료까지 모두 섭렵하고 전쟁을 다양한 시각에서 풀어냈다. 작가가 직접 일본 및 중국 현지답사를 해서 소설의 무대도 조선으로 한정되지 않고 베이징시와 오사카를 넘나든다. 또 여러 등장인물을 단편적인 시각이 아닌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보통의 임란 관련책은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좀 떨어지는데 이 책은 맛깔나는 구어체는 물론이고 간결하고 힘있는 문체로 전개되어 그리 지루하지 않다.
다만 지금보면 곳곳에 고증오류가 보이는데 예를 들어 조선 조정이 전쟁 대비를 안 했다던가...[8] 옛날 작품임을 감안하고 삼국지 연의보는 기분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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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통치자는 만참으로도 부족한 역사의 범죄자다.
각권 서두마다 있는 작가의 문구이다. 이 말은 놀랍게도 삼국의 지도자인 선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만력제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즉 전쟁 책임을 단순히 왜놈들이 아닌 조선 지배층의 무능에서도 찾고있다. 또 만력제의 찌질함을 잘 묘사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원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인들은 무조건 나쁘고 조선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관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이다.
3. 각권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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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붓을 든 자와 칼을 든 자
칼의 나라 일본과 붓의 나라 조선, 그 사이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쓰시마. 전쟁을 막으려는 세력의 온갖 술수와 안간힘도 들을 귀가 없는 상대에게는 소용없고 전운은 짙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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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전쟁의 설계도
한달음에 서울을 점령하는 일본군. 사령관들은 일찌감치 도망가고 임금도 도성을 버린 채 망명까지 생각한다. 용기와 충성, 배신과 비겁...... 전쟁의 소용돌이는 인간이 타고난 온갖 미추를 분출시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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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조선의 영웅들
육지에서는 의병이, 바다에서는 수군이 일본군을 괴롭힌다. 수도를 점령해도 끝이 나지 않는 이상한 전쟁에 일본군은 '출구전략'을 고민하고, 명의 참전이 임박해지면서 전쟁은 복잡한 양상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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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비밀과 거짓말
진퇴양난의 일본과 복수를 꿈꾸는 조선.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유키나가 사이에 비밀 거래가 오가고 조선은 미온적인 북경의 태도에 초조해진다. 전투와 외교전이 교차하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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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재침 그리고 기이한 화평
히데요시는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재침이라는 승부수를 던지고, 대군이 다시 바다를 건너오자 다급해진 조선 조정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다. 히데요시의 죽음 전후 일본과 명은 기이한 화평을...
4. 등장인물
임란시기답게 상당히 많은 인물이 나오기 때문에 나열할 수가 없다. 다만 이 소설의 주연을 굳이 꼽자면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 정도. 그외 선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도가 될 것이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경우 작가가 굉장히 공을 들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다.의병장들은 3권에 많이 나온다. 임란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조정-의병-조정식으로 교차로 하면 복잡해지기때문에 의병분량은 몰입하기 쉽게 몰아놓았다. 거병 순서대로 곽재우가 먼저 등장하며 정인홍, 권응수, 김면 등도 다루며 조헌과 영규대사를 마지막으로 다시 외교전으로 돌아온다.
신각, 유극량같은 인물들도 따로 챕터를 내어 묘사하고 있다.
당연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나오지만 분량은 소설 전체로 보면 그리 많지 않다. 3권에 등장. 물론 먼치킨으로 나오며 작가 역시 이순신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5. 기타
-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전 〈동아일보〉에 1984년부터 1989년까지 5년 동안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에서는 신문 연재 당시 지면 사정으로 다 싣지 못했던 정유재란 부분이 작가의 원래 구상대로 복구되었다.
- 신문 연재 당초에 이 작품의 제목은 ‘7년전쟁’이었으나 도중에 ‘임진왜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최초의 제목 ‘7년전쟁’이 작가의 의도에 더 가까울 뿐 아니라 임진왜란의 성격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 준다고 판단하여 ‘7년전쟁’을 이 작품의 제목으로 되살렸다.
- 7년전쟁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1587년으로 1598년까지 사실상 12년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2권 중반부에 가서야 전쟁이 시작되며 1권은 사실상 전쟁 이전의 양국의 모습을 그렸다. 이 때문에 정여립의 난이나 건저의 파동도 1권 후반에 나온다. 정여립의 난은 논란이 많지만 전통적 시각을 따라 정여립이 난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했다.
- 제목은 7년전쟁인데 임진왜란은 2권 중반부에 시작하며 전후 사정에 지면 할애를 충분히 하지만, 정유재란은 5권 후반부에야 다루어지며 별다른 입체적 묘사 없이 사실 나열만 하며 비교적 빠르게 끝낸다. 아무래도 정유재란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지 못하게 되니 좀 간략하게 마무리 지어 버린 듯. 어느모로 봐도 분량조절 실패.
- 여담으로 성균관대 김영진의 <임진왜란 - 2년 전쟁 12년 논쟁>이라는 당시 외교정책을 조망한 책이 있는데 여기서 12년은 1589년 6월 대마도주의 조선 방문과 통신사 파견 요구로 부터 시작되어 1600년 9월 말 명군 지휘부의 철수를 뜻하는데 <7년 전쟁>이 다루는 범위와 살짝 다르다. 그리고 '2년 전쟁'의 뜻은 1592년 4월 중순 임진왜란이 시작하여 이듬해 6월 하순 진주성 학살까지 1년 2개월, 그리고 정유재란이 시작된 1597년 5월부터 이듬해 11월 말 일본의 최종철수 까지 10개월 등 실제 전투 기간만 따져서 2년 전쟁이라는 것이다.
-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소설은 막을 내리지만 에필로그 챕터가 따로 있어 소설의 후일담을 정리했다.
- 2015년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일부 에피소드를 여기서 차용했다.
[1]
이때 제목은 7년전쟁이 아닌 《임진왜란》. 지금은 도서관 보존서고에서나 찾을 수 있는 희귀한 책이 되어 버렸다.
[2]
1갑이 60년이다. 7갑은 420년.
[3]
작가의 다른 작품인 이성계, 요하, 왕건보다 다루는 시기는 짧은데(1587년~1598년 12년 정도) 분량은 오히려 훨씬 많다.
[4]
다만 이건
제승방략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오해이며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북방 병력과 수군까지 합하면 7천수준은 아니다.
[5]
실제로는 민간인 포함 3500명정도였다.
[6]
정작 선조시기 조선은 후대에 목릉석세라 불릴정도로 조선사에서 손꼽힐정도로 인재가 넘치던 시절이었으며 규모가 10만이 넘을거라는걸 예측못했을뿐이지 외침자체는 예측하고 열심히 대비를 하였다.
[7]
각각 한국에선 '임진왜란', 일본은 '분로쿠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전쟁'이라고 부른다.
[8]
그 숫자가 십만을 넘는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 조선 조정은 외침 자체는 예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