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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히토/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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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과 의미2. 여파3. 그 외의 논란
3.1. 황태제 지위3.2. 황태자 일가의 입지3.3. 아이코 공주와의 경쟁

1. 탄생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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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도쿄 아이이쿠(愛育) 병원에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장남이자 고명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황실 최초로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전치태반[1]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주팔자를 맞추기 위함이라는 소문이 있다. 출생일시인 2006년 9월 6일 아침은 장수하고 여자를 많이 거느릴 사주라는 듯.[2] 또한 이 출산은 일본 황실 사상 최고령 출산이기도 한데, 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인 키코 비는 1966년 9월 11일생이므로 무려 만 40세를 며칠 앞두고 출산한 것이다. 때문에 키코 비에게는 여러 모로 힘들었던 출산이었다.

미나토구에 위치한 아이이쿠 병원은 쇼와 덴노의 하사금으로 1938년 개원한 출산 전문 병원[3]으로, 일본 내에서는 출산병원 고산케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궁내청 병원이 아닌 아이이쿠 병원을 선택한 이유에는 (전치태반도 있지만) 노산이라는 점을 고려해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궁내청 병원보다는 출산 관련 전문 병원인 동시에 황실과 인연이 깊은 아이이쿠 병원으로 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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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기 얼마 전,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 히사히토 친왕을 임신 중인 어머니 키코 비,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3학년인 큰누나 마코 공주,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인 작은누나 카코 공주.

히사히토의 탄생은 일본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2001년 마사코 황태자비가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임신에 성공하여 일본 전체가 흥분에 빠졌지만,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 아니라 딸인 아이코 공주였다. 마사코 황태자비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더 이상 임신하는 건 힘들었고, 당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부부에게도 2명만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는 2006년 9월 6일까지 일본 황실은 말 그대로 패닉에 빠져서 대책을 논의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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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방계 미야케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두 딸이었다. 이렇게 남자가 단 1명도 태어나지 않자,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이 된 이후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해진 것이다.[5]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을 제외한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6]은 대부분 나루히토 황태자가 재위할 시기에 사망하거나, 살아남아도 다카히토 친왕처럼 엄청난 노령일 것이 뻔했기 때문에 2006년까지 일본 정부는 미래 황위 세습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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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을 찾는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여계 황족의 천황 계승문제와 구황족의 복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초 키코 비의 셋째 임신이 알려지고, 9월 41년 만의 남자 황손이 탄생한 것이다.[7][8] 때문에 일본에서는 히사히토에게 몹시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했으며, 두 누나 마코 공주 카코 공주가 찬밥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늦둥이 아들을 얻은 후미히토의 지지 세력은 더 늘었고, 히사히토가 요절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천황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 열도에 엄청난 관심이 쏠려 있다. 그만큼 히사히토 탄생의 여파가 크고 영향력이 세질 수밖에 없다는 점. 이 때문에 2006년 일본 올해의 한자는 '명(命)'이 선정되었다.

2. 여파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으로, 당시 심각하게 논의하던 구황족 복귀나 황실전범의 개정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구황족들의 모임인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9]는 당시 논의되던 여계 황위 계승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은근히 황족 복귀의 희망을 바랐는데, 이로 인해 묻혀 버렸다. 특히 가장 활발하던 구 다케다(竹田) 궁가는 노골적으로 "현 천황 가가 끊어지면 구황족들은 사명을 다해야 한다!!"라는 주장까지 했으나, 히사히토의 탄생이 모든 논란을 잠재우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황실 내부의 권력구도도 크게 달라졌는데,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전까지만 해도 차남이라 존재감이 미미하던 후미히토 친왕이 아들을 등에 업고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특히 2008년 이후 아키히토 덴노의 건강 악화로 황실이 혼란스럽자, 히사히토 친왕의 아버지이자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후미히토 친왕의 입장은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 붙이기에 충분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2001년 12월 1일 아이코 공주를 낳은 뒤부터 시부모인 천황 부부에게 노골적으로 박대받기 시작, 다시 임신해서 이번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까닭으로 유폐생활을 겪었고,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9년간 대부분의 공무에서 배제되었다. 이 일로 황태자 부부와 천황 부부의 사이는 멀어졌지만, 차남 부부는 황태자 부부보다 책임이 적어서인지 예전부터 천황 부부와 친했다. 여기에 차남 부부가 아들을 낳아 후계자 문제를 풀었으므로, 당연히 차남 부부에 대한 총애가 더 심해졌다.

이렇게 입김이 세지자 후미히토 친왕은 2011년 말부터 아버지를 위해서라며 ' 천황 정년제' 주장을 한다거나, 형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붙이는 발언을 자주 꺼낸다.[10] 덕분에 현 아키히토 덴노 사망 뒤 일본판 왕자의 난이 일어나나 하는 주장도 조금씩 일어난다. 이대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적장자를 낳지 못하면,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는 후미히토 친왕이 계승 1순위(흔히 말하는 황태제)가 되기 때문이다.

3. 그 외의 논란

3.1. 황태제 지위

하지만 이것 또한 모순이 되는 점이, 현재의 황실전범 황사(皇嗣), 즉 천황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당대 천황의 자녀'만을 지칭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황태제'란 원칙적으로는 황실전범에서 인정하지 않는 직위이고 정의이다.

즉,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할 시 후미히토 친왕은 '천황의 남동생'일 뿐으로, 다른 방계 황족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후미히토는 황실전범에서 말하는 황사의 정의가 바뀌지 않는한 원칙적으로 끝내 나루히토가 즉위한다 해도 황태제라는 특별한 직위를 취할 수 없다. 다만 계승 1순위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기야 하겠지만.

3.2. 황태자 일가의 입지

끝내 2013년 3월, "황실을 위해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는 주장이 나왔다.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지만 일본에서 황실과 관련해 어떤 분위기인지 알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의 53세 생일 기념 공식사진 촬영 때 마사코 황태자비 아이코 공주가 함께 사진을 못 찍는 초유의 사태까지 났다.

그래서 황태자 일가의 입지가 위태로운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지만, 정당한 계승자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당한다는 것은 전제왕조 시대에도 없던 일이고, 단순히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한다는 건 일본 내에서의 국민 감정이나 외국의 시선을 악화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무리다. 애초에 그 정도 일로 이혼해 줄 정도로 나루히토 황태자도 호락호락한 성품이 아니다. 당장 두 사람의 결혼 비화나 여러 일화를 봐도, 나루히토가 설령 폐태자가 된다 할 지라도 아내와 딸을 그런 이유로 버릴 인물도 아니고 말이다.

3.3. 아이코 공주와의 경쟁

그러나 2013년 아이코 공주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이 되었을 무렵,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이 공개된 이후로는 아이코 공주의 자폐설 같은 소문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에 대해 키코 비의 공식적인 입장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 후미히토나 누나들인 마코 공주 카코 공주의 성적이 어땠는지 학창 시절에 유명했기 때문에, 키코 비는 '히사히토가 아이코 공주에게 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거라고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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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반이 산도를 막는 증상 [2]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특권은 적고 의무만 가득한 일본 황실로 시집오고 싶어하는 여성 자체가 현저히 적으며, 그나마 큰아버지 나루히토 덴노까지는 예비 신부 후보들의 가족이 왕당파가 많았던 세대였었다. 오죽하면 천민으로 시작한 가부키 배우들이 귀족적 분위기와 명예로 인해 따르는 여자가 더 많을 정도(…) [3] 1948년부터 2010년까지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가 총재를 맡았으나, 2010년 이후에는 키코 비가 총재를 맡고 있다. [4]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 황태자비|마사코>라는 책에 의하면,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는 손녀 아이코 공주가 태어나자 기뻐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다시 임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5] 현재 일본 황실에서 제위계승권이 있는 사람은 겨우 2명에 불과하다. 자세한 것은 아키히토/가족 관계 참조. [6]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형제들과 숙부. 아키히토 덴노의 숙부 중 마지막 생존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은 100살까지 살았다. 그의 장남 토모히토 친왕, 차남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3남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리고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7] 사실 이 임신 자체가 거의 궁내청 천황 내외의 강요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이를 더 가지지 못한 채 40대를 넘겼고 심신의 병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 등 임신하기 어려웠지만, 키코 비의 경우 아직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이 때문에 천황 부부가 차남 부부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고. 소문으론 히사히토 친왕이 인공수정으로 태어났다는 설이 있는데, 성감별 이야기도 시중에 나도는 것을 보면 자연적 임신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히사히토가 태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8] 후미히토가 태어난 1965년 이후 공주들만 줄줄이 9명 태어났다. 구로다 사야코(1969년 4월 18일생, [age(1969-04-18)]세),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1981년 12월 20일생, [age(1981-12-20)]세),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1983년 10월 25일생, [age(1983-10-25)]세),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1986년 3월 8일생, [age(1986-03-08)]세), 센게 노리코(1988년 7월 22일생, [age(1988-07-22)]세), 모리야 아야코(1990년 9월 15일생, [age(1990-09-15)]세),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1991년 10월 23일생, [age(1991-10-23)]세),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1994년 12월 29일생, [age(1994-12-29)]세), 아이코 공주(2001년 12월 1일생, [age(2001-12-01)]세). [9] 쇼와 덴노가 1947년 황적이탈 이후 구황족들을 위해 만들어준 단체. 직황계와 11궁가의 당주 모임을 결성했고, 매년 각 궁가가 모여 신년이나 연말에 행사나 모임을 가지며, 2000년대 이후 구황실 관련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10] 일본 황족은 가문이나 정치 관련으로 언론에 입조심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니 이 말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후미히토 친왕의 궁내 권력이 얼마나 커졌나를 알 수 있다. 예전부터 후미히토 친왕은 효자라는 평을 받았고, 그의 발언 대부분이 부모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닌 편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극우주의자들과 가깝다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어서, 일본에서는 딱히 나루히토 황태자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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